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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마무리

휴가 가기 전에 걱정부터 했다. 이번 휴가가 회사 생활하면서 가장 긴 휴가였다. 그래 봤자 영업일 8일 밖에 되지 않는다. 누가 알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킨 사람도 없는데 쉬는 일에 겁을 내고는 했다. 막상 내가 없어도 회사는 당연히 잘 돌아간다. 그럼에도 휴가를 내는 것에 겁을 내는 것은, 오히려 내가 없는 회사가 너무 잘 돌아갈까 싶은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은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고 하셨나 보다.
올해 우리 부부 결혼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하여 이제 와서 용기 내어 긴 휴가를 내게 되었다. 부부끼리 오붓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묶어 놓고 나갈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결혼 20년만에 네 식구가 된 것 또한 같이 기념할만한 일이므로 가족 여행이 되었다. 또 하나는 회사의 안식 휴가라는 제도 덕이 크다. 5년 주기로 일반적인 휴가와 별도로 휴가를 주고 경비도 보태 주는 제도이다. 사실 솔직한 마음은, 다음 5년 후 안식 휴가가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어 멀리 가보자고 한 부분도 작지 않다.

마지막으로 길게 여행을 간 것은 19년 전, 20여일 동안 아내와 유럽을 한 바퀴 돈 것이다. 회사 생활을 하지 않을 때였으므로 길게 여행을 갈 수 있었다. 그 때는 젊었고,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므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저렴한 숙소와 교통 수단을 이용했고, 서로만 챙기면 됐다. 걷고 싶은만큼 원 없이 걸어 유럽을 겉핥기 하고 왔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도 나는 걱정이 많았다. 대학원을 진학하고 회사를 쉬고 있을 때였으므로 경제적으로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여행을 떠나기 전에 걱정부터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행을 기획하는 것은 항상 아내 쪽이고 나는 맞춰 주는 쪽이다. 다만 이번에는 나의 안식 휴가라고 내가 좀 부추긴 면은 있다. 그렇지만 역시 여행 준비에 적극적인 것은 아내 쪽이었다.
막상 여행을 다녀 오면 후회하지는 않는다. 19년 전에도 아내에게 끌려 가듯 따라 나선 여행이었지만 그 때 따라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 부부 옛말 할 거리 하나 줄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이제 식구가 넷이 되어, 아이들 챙기느라 우리 부부가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 네 식구가 20년 후에 옛말 할 거리 하나 만들었으니 뿌듯하다. 많이 보든 적게 보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행도 많이 해 봐야 어떤 여행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것과 맞지 않으면 좋은 게 아닌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남들 좋다는 것 따라 다니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겪는 대부분 일들이 그런 것 같다.
남들 다 좋다고 하는 남부 스페인의 유적지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첫째는 미적으로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들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다수의 의견을 신경 써서 말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나도 둘째 아이가 ‘정신 없다.’라고 말하기 전까지 속내를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잘 알지 못해서 아름다움을 모르는 것일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관심이 없던 것 같다. 그러니까, 먼 나라의 먼 옛날의 유적이 내게 어떤 의미로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직관적으로 봤을 때 아름답지 못한 것에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 아닐까.
내게는 여행에서 가장 흥미 있던 하루가 마드리드의 레티로 공원을 거닐 때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람 사는 모습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길거리에 내걸려 있는 깃발들을 보고 마드리드 사람들 생각을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스페인 공화정 깃발, 무지개 깃발, 팔레스타인 깃발 등.
그렇게 생각해 보면 패키지 여행은 최악의 선택이 될 뻔 했다. 여행 와서도 여행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들지 못하고 관광객으로서 관광객들 틈에서 지내다 왔을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내 다음 여행은 낯선 도시에서 여유 있게 다른 일정 없이 며칠 묵는 것이 될 것 같다.
그림을 많이 못 본 것은 아쉽다. 유적에는 관심이 없지만 미술품에는 관심이 있나 보다. 약간은 모순된 태도인 것 같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도판으로만 본 예술품들을 직접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정도로 해 두자.

이제 여행을 다녀온 지도 2주 넘게 지나갔다. 일상에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충실하게 회사원으로 살아 가고 먹고 살 궁리를 하고 있다. 천성이 어디 안 가겠지. 앞으로도 걱정 많이 하면서 살 것이다. 그렇더라도 조금은 더 용감해져서 낯선 세상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둘러 보며 돌아 보며 살자.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1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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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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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 여행 와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리는 것은 너무 정 없어 보이지 않는가? 정 없어 보일까봐 안 뛴 건 아니다만… 대신 아내님과 아침 식사 조달을 위해 같이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결론은 카르푸에서 판매하는 스페인 대기업의 맛들로 아침을 해결했다.

레티로 공원. 25년 1월 19일 오전.

오늘은 장거리 비행이 저녁에 예정 돼 있으므로 가볍게 마실 다니듯이 돌아 볼 계획이다. 먼저 레티로 공원을 가 볼 생각이다. 어제부터 자주 들락거렸던 예술역(estacio de arte)에서 멀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려 레티로 공원으로 방향으로 걷다 보니 헌책방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대부분 스페인어 책이라 까막눈이다. 그 가운데 영어를 만나면 모국어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누가 보면 영어 잘 하는 줄 알겠다. 청소년들은 어릴 적 보던 동화책의 스페인어 버전을 만나고 재밌어 한다.
헌 책을 잔뜩 들고 와서 팔려는 사람, 책의 상태를 무심한 듯 살펴 보는 주인장의 모습도 정겹다. 느낌 있는 사진, 그림들을 파는 가게들도 보인다. 사진 한 장 사서 가려던 길을 나선다.

레티로 공원은 마드리드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규모가 꽤 큰 공원이다. 느낌 상으로는 여의도 공원의 대여섯배는 되는 것 같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꽤 많다. 여기 저기서 거리 공연하는 무리들도 많이 보인다.
수십명이 모여 요가로 보이는 동작을 하고 있는 한 켠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는 팻말이 귀엽게 세워져 있다. 이방인도 ‘누구나’에 포함 되겠지만, 참여할 용기는 없다.
그들을 지나쳐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을 오르는 중에 간간히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더 위로 올라가 공원 한 가운데 온 거 같은데,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다. 무슨 댄스인지는 모르겠으나 각자 헤드폰을 끼고 신나는 노래를 듣는 모양이다. 간간히 리더로 보이는 아저씨의 신호에 맞춰 환호성을 지르며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이 재밌다. 우노, 도스, 트레, 꽈트로, 아브레~~

이 흥겨운 일행들을 한참 구경한 후 몇 발작 걸으니 이번에는 트럼펫, 바순, 기타의 삼중주를 하는 음악가들을 만났다. 예전부터 트럼펫을 한 번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음악가들에게 남아 있는 잔돈 털어 주고 공원을 더 둘러 본다.

몇십미터 가지 않아 카포에이라하는 팀을 만난다. 만화책을 섭렵해 박학다식하신 우리 막내께서 ‘저거 카포에이라야.’라고 소리쳤더니, 옆에서 구경하던 스페인 처자가 맞다고 엄지 척 보내 준다. 원래 무술이라고 하는데, 춤에 가깝다. 타악기와 단순한 현악기의 반복적 멜로디가 흥겹다.

원래 레티로 공원 안에는 레이나소피아 미술관의 별관이 있다고 했는데, 공사로 임시 휴관 중이다.

슈퍼 소닉 인형 탈을 쓴 사람이 다가 와서 우리 청소년들과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아내님께서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거를 잘 못 듣고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찍었더니 돈을 내 놓으라고 한다. 돈 없다고 (10유로짜리 두장 외에는 잔돈이 진짜 없었다. 아까 트럼펫에게 다 줘 버렸다.)하니까 입을 가리키며 굽신한다. 먹고 살아야겠지 않냐… 라는 뜻이라고 금방 이해했다.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여 주고 나니, 그제서야 알았다고 가라고 한다. 아내님 말씀 귀 담아 들어야겠다.

쉬엄 쉬엄 돌아 보려고 들어간 공원인데 유쾌하게 시간 보냈다. 뭔가 억지로 보려고 하는 것보다 어슬렁 거리며 내키는 대로 구경하는 쪽이 내게는 맞는 것 같다.
레티로 역에서 지하철을 한 번 더 타고 쇼핑을 하러 백화점이라는 데를 간다.

그랑 비아. 엘 코르테 백화점. 25년 1월 19일 오후

한국에서도 백화점이라면 질색이지만, 여행 왔으니 군말 안 하고 따라 간다.

먹을 데가 많고 전망이 좋다는 El Corte라는 백화점을 찾아가는 길인데, Gran via에만 El Corte가 최소한 세 개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즉, 세 군데의 El Corte를 들러서야 먹을 데 많고 전망 좋다는 곳을 찾아갔다. 백화점 꼭대기에 올라가니 과연 전망 좋은 곳에 푸드코트 비슷한 곳이 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게 마드리드의 구급대원을 만나게 되는데…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반대편의 20대 정도로 보이는 청년들이 신경에 거슬리게 시끄럽게 떠든다. 보아 하니 벌써 맥주들을 한참 마신 것 같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20대는 20대처럼 행동하는 모양이다. 이제는 시끄럽다 못해 지들끼리 UFC에서 볼 수 있는 초크 기술들을 해 보이면 키득키득 거리는 것이다. 귀엽기도 하고 볼썽 사납기도 하고… 신경 안 쓰려고 우리 청소년들과 먹을 것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으로 보니 한 청년은 바닥에 누워 눈이 돌아가 있고, 다른 청년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아마도 장난 치다가 사고가 난 모양이다. 둘 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주변에서 뛰어와 부상자를 바로 눕히고 허리띠를 풀러 주고 다리를 높이는 등 조치를 취했고, 그 사이에 시큐리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십분 정도 지나자 구급대원들 등장. 다행히 얼마지 않아 부상자는 의식을 회복하고 주변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이 쯤 되니 지들도 우스운지 다시 키득댄다.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컷들이 단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예상치 못하게 역동적인 마드리드 쇼핑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공항 가는 택시를 탔다.
역시 택시 기사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으나, 의사 소통은 충분했다.
“테르미날?”
“우노.”
공항에 내려 짐을 내리니 왠일인지 악수를 청한다. 스페인에서는 택시 내릴 때 악수를 해야 되는 건가?

이제 긴 비행만 참으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마드리드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목격했던 게이 커플의 키스씬이 바로 어제 일 같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여행 일정이 아쉽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이 제일 좋다.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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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한 바퀴. 25년 1월 18일 새벽.


짧은 시간이지만 여행 첫 날 뛰어본 도시라 지리가 익숙해진 것 같다. 솔광장을 지나 독립기념광장으로 거쳐 레티로 공원 옆으로 코스를 잡는다. 현지인들은 레티로 공원 안 쪽으로 많이들 뛰는 것 같은데, 너무 어두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미술관 많은 거리를 지나 아토차역에서부터 되짚어 올라온다. 오늘도 밤새 노는 청년들로 북적거린다. 숙소 반대 방향까지 조금 지나쳐 라티나 역까지 가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를 만난다. 알고 보니 여기가 어제 못 들어간 식당 근처다. 현지인들이 외식을 즐기는 동네인 모양이다. 빵 가게에 들러 식구들 아침 거리 챙겨서 돌아왔다.

왕궁. 25년 1월 18일 오전.

마드리드 왕궁까지 슬렁슬렁 걸어 갔다. 예매 없이 오는 바람에 약 30분 정도 줄을 서서 표를 사야만 했다. 날씨가 꽤 쌀쌀했다.
지금 국왕인 이 곳에 살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 곳은 관광객들을 위한 왕실의 박물관 또는 홍보관 정도로 느껴졌다.
 
매우 사치스러운 공간들이었다. 방마다 금빛 은빛으로 가득하고 천장화가 없는 방이 없었다. 남부지방의 알카사바들은 사치스럽다라는 표현 보다는 화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사치스럽다는 표현은 마드리드 왕궁에게 적당한 표현인 듯 하다.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으로 부가 넘쳐 나던 시절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고 있었다.  별로 고운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봐도 이런 사치스러움을 아름답다고 표현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아름답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끝자락에서 온 자가 수백년 전의 예술을 보고 공감하는 것이 애초에 무리일 수도 있다. 여튼 마드리드 왕궁은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될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둘러 보고 나서, 왕실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앞서 말했듯이 왕궁에는 현재 왕실의 업적을 홍보하는 영상, 포스터 등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스페인 왕실은 20세기 초반에 스페인 내전 시점에 이미 의미를 상실했을 것이다. 이미 19세기 이전에 Cortes라는 의회가 스페인의 실권을 잡았다가 여러 가지 복잡 다단한 사건들의 흐름 속에 왕실은 허수아비였을 뿐이다. (Why Nations Fail,에서 읽음) 그런 과정을 겪고 살아 남았음에도 왕실의 존재 의의를 강변하고 있는 모습이 억지스럽다. 따지고 보면 지구 상의 모든 입헌군주국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긴 하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외교부에서 간략히 정리해 주신 부분이 있다.(여기) 우리 나라 아니지만 왠지 안타깝다.
이후에 마드리드를 돌아다니다 보니 스페인 공화파 깃발이 종종 보인다. 아파트 발코니에 공화파 깃발을 걸어 둔 집들도 종종 보이고, 관련한 뱃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도 보인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아픈 역사를 생각하니 우리 나라와 다르지 않게 보인다.

프라도 미술관. 25년 1월 18일 오후.

언제나 식사 시간이 애매하다. 우리는 배고픈데, 묘하게 식당들 문 여는 타이밍과 안 맞는다.
숙소가 멀지 않으니 근처에 와서 먹고 잠시 다리를 쉬었다 가고자 했다. 캐쥬얼하게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문제는 종업원들이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셀프서비스(auto servicio)를 하는 곳이었다. 내 이름을 알려 주면 음식 나오면 이름을 불러주는 시스템이었다. (스페인어 몇 마디 해 갔다고, nombre라는 말을 알아 들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번호가 있으면 주문하기 쉽지! 세트로 시켜야겠다!

우리가 받은 메뉴는 이랬다.

아마도 번호를 잘못 말한 것 같다. 게다가 저 녹색 병도 음료수가 아니라 술이다. 4인 가족이 점심에 와서 자녀들은 음료 하나 안 주고, 맥주 2,000cc와 과실주 한 병을 시킨 것이다. 어쩐지 주문할 때 종업원들이 깔깔 웃으면서 엄지를 쳐들더라니…

대충 떼웠으니 프라도를 가 보자. 우리 청소년들은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번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곳은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미술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학교 다닐 때 미술 엄청 싫어하긴 했지만) 인생을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예술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끔은 지적 호기심 또는 허영심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되짚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동기야 어떻든 자주 볼수록 보이는 것은 늘어가는 것 같다.


이 분은 벨라스케스 되시겠다.
시녀들‘이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고, 프라도 전시작 중에서도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벨라스케스는 별도의 구역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전시 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차분하게 돌아 볼 여건은 되지 않았다. 친절하게도 미술관에서 주는 안내 자료에는 원하는 소요 시간에 따라 봐야 될 주요 작품들을 표시해 주고 있었다. 가장 짧은 코스만 훑어 보자고 했다. 한 시간 정도 구경하다 보니 그마저도 무리인 것처럼 보였고, 결국에 그 중에서도 간추려서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썩어 가는 청소년들의 표정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고 나와야만 했다.

이것은 미술관을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닌 것 같다.

마드리드 밤거리. 1월 18일 저녁.

오늘 하루도 무리한 모양이다. 시벨레스 분수를 지나 Gran via 거리까지 걷기로 작정하고 나섰으나, Gran via 입구에서 항복. 지하철로 숙소로 복귀하고 어제 가보고자 했으나 대기로 못 가본 그 식당을 다시 가보자고 했다. 어제보다 줄이 더 길다. 오늘도 맛집 옆집을 갔다. 빠에야를 전문적으로 하는 집 같다. 여행 기간 중에 먹어본 가장 성공적인 빠에야를 먹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식사를 마치니 10시가 넘었다. 오늘도 와인 쇼핑에는 실패하고 귀가. 체력 충전하기로 한다. 내일이 스페인에서 마지막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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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빵 셔틀 달리기. 25년 1월 17일 새벽.


오늘 조깅은 바르셀로나 러너들이 모여 드는 개선문 광장을 거쳐 가는 코스로 계획을 세웠다. 가는 길에 까사밀라를 힐끗 구경한다. 까사바뜨요와 함께 가우디 건축물로 유명한 곳인데 우리는 굳이 찾아가 보지는 않았다. 달리면서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맛있어 보이는 빵집이 보이길래 빵을 포장해 와서 가족들의 한 끼를 또 해결했다.

다시 람블라스 거리와 구시가지. 25년 1월 17일 오전.

오늘은 지하철로 항구까지 간다. 20년 전에 이 즈음에서 멋 모르고 둘이서 샹그리아 한 사발 다 들이키고 만취했던 기억이 난다.
날씨가 많이 차갑지는 않고 화창하다. 구시가지와 항구 주변 어슬렁 거리기 딱 좋다. 여기까지 왔으니 콜럼부스 동상은 한 번 봐 줘야지. 박물관 주변에는 외출 나온 듯한 유치원생들도 보이고 체험학습 나온 듯한 청소년들도 보인다. 어디나 아이들은 귀엽고 청소년들은…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골목 골목이 고풍스럽다. 바둑판 시가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골목 구석 구석에 규모가 작은 미술관들이 여러 개 보인다. 피카소 미술관이라고 해서 궁금했으나 진짜로 피카소 미술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마드리드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짐 챙겨 들고 역으로 출발한다.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는 여행객이라면 몬주익 언덕도 다니고 가우디의 다른 흔적들도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지만, 여유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부지런히 다니더라도 어차피 며칠 머무는 것으로 그 도시를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마드리드로. 25년 1월 17일 오후.

Passeig de Gracia에서 Sants역까지 renfe를 타고 이동한다. renfe는 국철 개념이라서 행선지를 잘 확인하고 타야 되는 것 같다. 별 생각 없이 renfe 표지판을 보고 플랫폼에 내려오고 나니, 방향을 확인 안 했다는 게 생각 났다. 두리번 거리며 얻은 힌트로 보면 맞게 내려온 것 같은데 확신이 없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옆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착해 보이는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고맙게도 이 청년은 내 최종 목적지, 그러니까 마드리드 가는 기차를 타려는 것까지 확인하고서는 자기 휴대폰으로 이것 저것 검색해 보더니 맞다고 한다. 심지어 몇 분 후에 들어오는 거 타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아마도 현지인들이 쓰는 대중교통 앱이 있는 것 같다. 소매치기로 악명 높다는 바르셀로나에서 소매치기는 피해 가고 친절한 청년을 만났다. 청년에게 엄지 척 한 번 해 주고 산츠 역 가는 기차를 탔다.
산츠역에 들어서니 여행객들로 매우 북적인다. 플랫폼을 확인하고 점심이나 먹을까 했는데, 플랫폼 들어가는 입구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아직 시간은 남아 플랫폼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거의 백여명이 줄 서 있는 것 같다. 역무원에게 표를 보여주니 줄을 서라고 한다. 여유 있게 들어왔다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청소년들 허기는 달랠 시간도 없이 기차에 올랐다.
세비야 가는 기차와는 상황이 다르다. 거의 만석인 것 같다. Ouigo가 운행하는 2층 열차에 특실인데도 빈좌석이 안 보인다. 청소년들에게는 식당칸에서 판매하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등을 제공하고 아내에게는 알람브라 맥주를 제공하여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마드리드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2층 열차라서 짐 넣고 빼는 게 힘든 것이 단점이지만, 여행은 안락했다.
마드리드 아토차역에 도착하자 작은 청소년이 급한 용무가 있다고 한다. 역 화장실을 찾긴 찾았는데, 이용하는데 1유로를 내야 한다. 작은 청소년의 증언에 따르면 우아한 화장실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30여년 전 안양 지하상가 화장실이 생각이 났다. 50원을 내야 하는 유료 화장실이었지만, 처절한 화장실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처럼 다회권 지하철표를 끊어서 이용하기로 했다. 숙소는 Tirso de Monila역 앞이다. 마요르 광장 인근에 있어서 왠만한 볼거리는 다 걸어서 갈 수 있다. 24시간 까르푸가 바로 앞에 있어서 먹거리 사오기도 편하다. 아내님의 정보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솔광장. 25년 1월 17일 저녁.

레이나 소피아(Reina Sofia, 소피아 여왕) 미술관을 먼저 들러 본다. estacion del arte(station of the art)역 근처에는 3개의 큰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 티센 보르네미사, 레이나 소피아가 그 미술관들이고, 이 순서대로 전시물의 연대가 높다. 즉, 프라도가 고전쪽에 가깝고 레이나 소피아가 근현대 미술에 가깝다.
사전에 전시물에 대한 정보는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 프라도 미술관이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므로 꼭 들러 보고자 했고, 레이나 소피아에는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인 ‘게르니카’가 전시 돼 있으니 꼭 들러야 한다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다. 프라도는 내일 정식으로 둘러 보고, 오늘은 먼저 게르니카를 보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규모가 컸다. 원래 다른 용도(아마도 병원으로 기억함)로 사용되던 건물이라 동선이 편하지는 않았다. 피카소와 달리의 작품들 몇 개를 보고 나니 청소년들이 벌써 지쳐 버린 것 같다. 로버트 카파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는 방을 우연히 발견하고 좀 자세히 보고자 했으나 복도 벤치에 앉아서 쉬는 가족들 눈치가 보였다. 미술관은 1시간 정도 머무르다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남는다.

미술관을 나와서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 정도 이동하여, 마요르 광장, 솔광장, 미겔 시장 등 유명한 장소들을 돌아 보았다. 흥청거리는 거리를 돌아 다니니 기분이 들뜬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거리마다 사람들 가득하다. 특히 솔광장 근처는 명동 거리 방불케 하는 곳이다. 미겔 시장은 타파로 유명한데,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 작은 청소년은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급격히 지쳐 가기 때문에 한 바퀴 둘러 보고 나왔다. 맛있어 보이는 것들 하나씩 먹어 보면 저녁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작은 청소년 때문에 포기하고 우아하게 레스토랑을 가기로 했다. 현지인 추천을 받아서 레스토랑을 알아 둔 곳이 있었다. 현지 맛집인 것 같다. 아직 문 열 시간이 안 됐는데 벌써 몇 팀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줄 서는 것을 매우 싫어하므로, 맛집 옆의 다른 집을 가기로 했다. 오픈 시간도 좀 더 빠르고 줄도 없다. 역시 맛집 옆 식당도 나쁘지 않다. 맛집은 내일 가 봐야지.
 
배불리 먹고 집 앞 까르푸 구경을 갔다. 미겔 시장보다 더 마드리드 같은 곳이다. 2층까지 까르푸가 쓰고 있었고, 2층은 대부분이 와인 전시에 사용 되고 있었다. 열심히 고르고 골라 와인 한 병과 안주 거리를 사고 계산하려는데, 와인은 못 산다고 한다. 10시 이후에는 주류 판매 금지라니… 시계를 보니 10시 3분. 아쉬운 마음. 와인 먼저 사 둘 걸. 오늘은 이쯤 하고 내일 열심히 마시는 것으로 하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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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1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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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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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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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마무리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팁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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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서 코르도바로. 25년 1월 12일 일요일 오전.

여행의 전반부는 스페인 남부 지방을 렌트카로 도는 것으로 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이 지칠 것을 감안하여 바쁘게 이동하는 일정을 전반에 배치하고자 했던 의도였다. 우선 마드리드에서 코르도바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고 코르도바에서 차를 빌리고, 코르도바는 잠깐 훑어 본 후 그라나다로 이동하여 1박을 하는 계획이었다.
아침에 조깅을 하면서 아토차역 구조를 대충 훑어 봤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기차는 한산했다. 짐이 많기 때문에 1등석을 예약했으나 굳이 필요는 없었다. 우리 객차 내에는 우리 가족 외에는 4명 정도의 승객 밖에 타지 않았다. 덕분에 조용히 쉬면서 사치스럽게 코르도바로 이동했다.

곁가지로 잠깐 스페인의 기차에 대해서 얘기하면, 몇 가지의 철도 회사가 운행하는 것 같다. Renfe, Ouigo, Iryo 정도가 운행 중이다. 세 회사 모두 우리로 치면 KTX급의 고속 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예약은 Train Line이라는 사이트를 통해서 했다. 이 사이트의 장점은 철도 회사와 상관 없이 일정, 가격 조건 등을 검색할 수 있다는 점과 UI가 비교적 직관적으로 사용하기 쉽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할인 조건 등이 복잡한 경우 아예 예약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다시 여행 이야기로 돌아오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우리 산하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올리브, 포도나무, 또는 알 수 없는 작물들이 많았다. 구릉 지형이 많은 것은 우리와 비슷했으나 대체로 들판은 넓고 산은 드물었다. 우리의 1월과 다르게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초록빛이 완연하다. 우리 봄 풍경과 비슷한 것 같았다. 무엇이든 풍족하게 자랄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피곤한 몸 쉬면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코르도바에 도착했다.

사실 코르도바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차를 빌리는 일이었다. 미리 예약을 하긴 했지만, 스페인의 렌트카는 악명 높다. 스페인 뿐만 아니라 유럽의 렌트카가 대부분 그런 모양인데, 예약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번에는 심지어 렌트 회사로부터 ‘일요일에 사무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하루 먼저 오면 안 되겠냐?’라는 메일을 받았다. 기차로 여행할 예정이기 때문에 일정 조정 어렵다고 답장을 보내니, ‘알았다. 사무실 문은 닫지만 외주 직원을 사무실 앞에 대기 시키겠다.’ 라는 답을 받은 상태였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참으로 여유로운 비즈니스 문화이다. 아마도 비수기이고, 소도시인 코르도바에서 차를 빌리는 손님이 많지 않아, 이 날 우리가 유일한 렌트카 손님이었던 것 같다.
렌트카 직원과 약속한 시간, 장소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그 ‘외주직원’은 정확한 시간에 나타났다.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 ‘외주직원’은 영어를 한 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다. 손짓에 발짓에 구글 번역을 이용해서 겨우 의사 소통해서 차를 빌릴 수 있었다. 보험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운전자를 추가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었다. 어렵다고 생각했던 첫 번째 고개를 넘으니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낯선 곳에서 운전할 생각에 약간의 긴장 상태는 계속 됐다.

빌린 차는 미리 알아 둔 주차장에 넣어 두고, 코르도바를 잠시 둘러 보기로 한다.
원래 계획은 메스키타(Mezquita)에 입장하고 싶었었다. 아마도 메스키타가 코르도바의 대표적인 볼거리일 것이다. 메스키타는 원래 이슬람 모스크였던 것으로 카톨릭 세력이 이 도시를 재점령한 후에 카톨릭식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시설이다. 이슬람식의 양식을 없애지 않고 필요에 따라 증축을 해 왔기 때문에, 이슬람과 카톨릭 향취가 공존하는 유적이라고 한다.
마침 메스키타에서 종교 행사가 예정 돼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내부 입장은 할 수 없었다. 조금 기다리면 들여다 볼 수 있었으나 초반 이동 일정이 복잡해지므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아쉽지만 메스키타는 밖에서 구경하고 코르도바 경관을 감상하고 떠나기로 했다.
 
주차장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길거리 츄러스 가게에 들어가 봤다. 스페인에 츄로스가 유명하다는데, 알고 보니 핫초코와 같이 먹는 게 유명하다고 한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츄로스 콘 쪼꼴라떼’를 생각해 냈다. 츄로스 씬 쪼꼴라떼(Churros without chocolate) 한 입씩 물고 길거리를 여유롭게 구경했다.
코르도바에서는 메스키타 다음으로 알카사르가 유명한 유적지이다. 따로 예약할 생각을 안 하고 알카사르 정문에 다다르니 입장 티켓을 사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가볍게 지나치기로 한다. 여기까지 와서 줄을 서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굳이 유적 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날씨였다. 초봄 정도의 기온에 화창한 날씨, 낯선 풍경들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로마교를 슬렁슬렁 건너 갔다 오는 중에 거리 악사들을 조금 구경하고, 옛 도시의 골목길 기웃기웃하니 여행 좀 많이 해 본 여행자가 된 듯 하다. 오렌지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려 있는 오렌지를 보니 마음도 상큼하다.
식사 시간이 돼서 스페인에서 첫 스페인다운 식사를 했다. 구글맵에서 미리 찍어 둔 곳으로 갔는데 가격은 좀 비쌌지만 괜찮은 식사였다. 어느 정도의 양을 시켜야 할지, 어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지 아직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4명이 와서 코스대로 시키지 않더라도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소신 있게 먹고 싶은 메뉴 시키면 된다.
아쉽지만 코르도바와는 서너 시간 둘러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길을 떠나야 한다. 낯선 나라에서 밤길 운전하는 것이 두려워 다음 숙소인 그라나다까지는 해 지기 전에 들어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코르도바에서 그라나다로. 25년 1월 12일 일요일 오후.

고속도로 운전은 어렵지 않았다. 구글 맵의 훌륭한 안내가 있었고 사전에 충분히 시뮬레이션을 해 봤기 때문에 그라나다 시내까지는 쉽게 도착했다. 물론 두 번 정도 경로 이탈했지만, 구글맵이 성공적으로 수습해 주었다.거의 숙소에 다 와서 문제가 생겼는데, 사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 숙소 위치가 너무 좋은 곳이었다는 점이다. 그라나다 구도심의 한 가운데, 누에바 광장(plaza de nueva)의 코앞에 있는 숙소였다. 이 숙소에서 보내 온 안내 메일을 받았을 때부터, 이거 길 찾기 쉽지 않겠다라는 암시를 받았었다. 구도심의 역사적 구역(historic area)이기 때문에 보통의 차량은 진입 못하지만, 숙소 투숙객은 예외적으로 허용 된다는 얘기였다. 매우 긴장하고 걱정했으므로, 나는 사전에 시뮬레이션한 대로, 차근차근 안내 메일에서 시킨 모든 절차들을 마치 코딩하듯이 짚어서 가고 있는데… 원래 현실은 시뮬레이션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바리케이트가 떡 놓여 있는 것이다. 길을 막고 있을 수 없어 한참 돌아서 다시 그 자리로 가서 차를 정차 시키고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당황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나의 용감한 아내께서는 조수석에서 내리셔서 그 바리케이트를 치우려고 시도하셨다. 이래도 되는 걸까. 잡혀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다른 방도도 없는 것 같았다. 이 때, 아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 보던 현지 젊은이가 다가와, 오늘은 행사(?)가 있어서 못 들어간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이 친절한 그라나다 처자는 다른 길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다행인 것은 사전에 이 근처를 시뮬레이션을 많이 해 두었기 때문에 대충 그림이 그려지더라는 것이다. 과연 찾아갈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결론적으로… 성공했다. 불법 좌회전 1회, 택시 버스 전용 도로 주행 등의 범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결국에 해냈다. 호텔 직원은, ‘미안하다. 여기 경찰들이 참 협조가 안 된다.’라는 말로 우리를 위로한 것일까 놀린 것일까?
1시간 여 동안 내 짜증난 목소리를 들으며 시내 구경을 해야만 했던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어쨌든 차는 곱게 주차했고, 예상보다 늦었지만 그라나다 밤 거리를 구경하고자 했다.
사실 그라나다가 유명한 것은 알람브라 궁정 때문이다. 내일은 알람브라 궁전을 관광하기로 예약이 돼 있고, 오늘 밤은 알람브라 궁전의 반대편에 있는 니콜라스 전망대를 올라가 보고자 한다. 아내의 정보력으로 쉽게 전망대 올라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전망대 올라가는 길은 매우 좁은 골목길인데, 이 길을 소형이긴 하지만 버스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전망대에서 반대편의 알람브라의 장관을 바라 보며 내일 있을 일정을 기대하게 되었다. 날씨는 조금 차가워졌지만 다니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전망대를 내려와 역시 구글맵에서 찍어 둔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가 알람브라 쎄르베싸를 한 잔 하고 요기를 하고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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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1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2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3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4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5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6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7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8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9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마무리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팁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1

7년 만에 긴 휴가를 계획하고, 우여곡절 끝에 여행지는 스페인으로 정했다.
여행은 준비할 때 가장 기쁜 것이므로, 여행 준비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내가 얼마나 아내를 위하고 있는가를 입증하는 일이다. 특히 짐 챙기는 일은 대부분 아내에게 맡겼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짐은 이렇게 메모를 통해 잊지 않고 챙기고자 했다.

인천에서 마드리드로. 25년 1월 11일 토요일 오전 11시 경.

우리는 시골 사람들이므로 공항에 일찌감치 도착해서 공항 구경을 했다. 북적대는 면세구역 식당에서 부대끼며 밥을 먹고, 차도 마시고, 사람 구경하고 두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행기에 올랐다. 체력이 중요한데, 너무 일찍부터 힘을 빼는 것 아닌가 싶지만, 떠나는 길이니 기분 좋다.
무려 14시간의 비행이다. 경유 없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이다. 시차 적응을 위해서는 가능한 초반에 자고 비행 후반에는 깨어 있어야 된다고 나름 치밀하게 계산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자버렸다. 사람이 그렇게 기계처럼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드리드 바라하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초저녁이다. 공항은 ‘생각보다’ 깨끗한 것 같다. 숙소인 아토차역까지는 버스를 타기로 한다. 아마도 공항버스 개념인 것 같다. 터미널 출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생긴 버스 정류장에서 탑승할 수 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에 진한 키스씬을 목격하고 애써 모른척 바쁘게 갈 길을 갔다. 게다가 키스씬의 주인공 둘이 모두 턱수염이 덥수룩하다는 사실을 알아 챘다. 마드리드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잠깐 눈만 붙이고 이튿날 일찍 기차를 탈 예정이다. 조금이라도 시차 적응을 하기 위해 조금 더 안 자고 버텨 보기로 했으나, 두 청소년들은 피곤한지 초저녁부터 잠들었다. 초저녁에 깨지 않을까 걱정이다.
걱정은 잠시 접어 두고, 어른들은 여행의 시작을 기념하러 간단히 스페인식 오믈렛에 Cerbeza(맥주)를 한 잔 한다. 스페인식 오믈렛은 계란에 으깬 감자를 반죽해서 익힌 듯하다. 딱히 맛있는지는 모르겠다.

마드리드의 아침. 25년 1월 12일.

시차 적응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이튿날 새벽 3시부터 깨고 말았다. 역시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놀면 뭐하나 싶어 조깅을 하면서 동네 파악을 해보고자 했다. 지도를 보니 유튜브에서 많이 보던 마요르 광장까지 멀지 않아 보였다. 마요르 광장을 거쳐 프라도 미술관 앞을 지나 오리라 코스를 정했다. 오래된 도시라 그런지 길이 울퉁불퉁해서 달리기 적절치 않았지만 날씨는 상쾌하고 분위기는 신비롭다. 역시나 길 찾기는 소질이 없어 구글 맵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 바퀴 돌았다.
마요르광장이다. 여행 막바지에 돌아올 예정이므로 이 정도로만 맛을 본다.

일요일 새벽 6시 경이지만, 마드리드 청년들의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조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 한국의 청소년들은 시차 따위는 무시하고 계속 잠들어 있었다. 다음 일정인 코르도바까지는 기차로 이동한다. 낯선 곳에서 기차 여행이 기대도 되지만, 식구들과 함께 가는 길은 야릇한 책임감에 긴장이 된다. 시간에 촉박하지 않도록 서둘러 길을 나섰다. 덕분에 식구들과 함께 마드리드의 새벽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마드리드의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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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1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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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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