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와 얘기하면서 만든 두산에너빌리티 예상 실적.
2026/03/09 기준.
| 연도 | 대형원전 | SMR | 가스터빈 | 기타 | 합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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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매출액 | 영업이익 | 영업이익률 | 수주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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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SMR 매출 | 대형원전 | 가스터빈 | 기타 | SMR 비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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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와 얘기하면서 만든 두산에너빌리티 예상 실적.
2026/03/09 기준.
| 연도 | 대형원전 | SMR | 가스터빈 | 기타 | 합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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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매출액 | 영업이익 | 영업이익률 | 수주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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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발발할 즈음에 발간된 토마스 만의 소설이다. 토마스 만의 대표작이며 독일 문학의 정수이다. (라고 한다.) 20세기 초반 유럽을 배경으로 한 번역 소설이다. 배경이 낯설고,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읽히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소설의 초반에는 시간이 매우 더디게 흘러가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다 읽고 나면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함부르크 출신의 엔지니어로서 이제 막 조선 회사에 취업을 앞두고 있는 새파란 젊은이다. 그는 사촌 요하임의 병문안을 목적으로 3주 계획으로 하여 스위스의 외딴 요양원을 방문한다. 요양원은 해발 3,000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위치한 고립된 세계이다. 접근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주변의 시내로 쇼핑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묘사 되지만, 심리적으로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묘사 된다. ‘평지’와는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인 것이다.
병문안을 목적으로 왔지만, 한스 자신도 폐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것을 핑계로 정식으로 산의 사람이 되어 요양원에 머물게 되며 산속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산 위의 일상 생활은 하루 5 번의 화려한 식사와 그 사이 사이 침낭 안에서 누워 지내는 안정 요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 방탕한 환자들은 규율을 어기고 시내로 외출을 하거나 소풍을 하기도 하고, 도박을 하거나 밤 늦게 까지 연회를 즐기기도 한다. 또한 환자들 사이에 남녀 관계가 미묘해지면서 불륜과 같은 연애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 산 위에서의 요양 생활은 사람의 정신을 흐릿하게 하여 평지의 삶을 잊고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배회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의 흐름은 점점 빨라진다. 3주를 계획하고 산 위에 올라왔지만, 어느덧 계절이 휙휙 지나가고 우리 주인공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무감각해지고 만다.
사실 병을 핑계로 한스가 요양생활에 들어가게 됐지만, 그는 쇼샤 부인이라는 러시아 출신의 여인에게 연정을 느껴 그곳에 머물고자 한 것이었다. 쇼샤 부인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부인이다. 병을 핑계로 남편에게서 벗어나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중이며, 행동거지가 정숙하지 못하다. 한스는 그녀의 행동거지에 언짢은 첫인상을 가졌었으나 어느 순간에 그것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였고, 사육제의 밤에 그녀와 특별한 밤을 맞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날 쇼샤 부인은 요양원을 퇴원하여 평지로 떠나 버리고 만다. 쇼샤 부인은 그렇게 하룻밤만 남기고 떠나 버렸지만, 돌아오리라는 암시를 남기고 떠났으므로 한스는 불확실한 희망을 품고 요양 생활을 지속한다.
한스가 요양원의 마성에 물들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그의 사촌 요하임, 애초에 한스의 방문 목적이어던 요하임은 산속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지로 향한다. 요하임은 원래 장교 지망생이었으나 병에 걸려 꿈을 잠시 유보한 상태였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평지로 내려가 소위로 임관한 그는 결국 의사의 예언대로 얼마 가지 못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세가 악화되어 이른 나이에 그러나 근엄한 모습으로 죽고 만다. 사촌의 요양을 방문하러 산에 올라왔던 한스는 산에서 만난 연인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중, 사촌을 불의에 떠나보낸 후 더욱 우울감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로 산에 머물게 된다.
요양 생활 동지들 중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세템브리니라는 인문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자칭 교육자이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그는 한스에게 이 산중에서 어서 벗어나 평지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촉구하지만 한스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로 나프티라는 예수회 출신 사제가 등장한다. 그와 세템브리니는 사사건건 관념적인 논쟁을 벌인다. 진보적인 인문주의자와 보수적인 종교인이므로 당연히 의견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논쟁의 목적은 상대방을 논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스의 머릿속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스의 머리는 요양원의 마성에 질식 되어 가고 있는 한편 두 논쟁적인 교육자의 정복 대상이었던 것이다. 두 교육자의 논쟁은 너무나도 첨예하여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치닫게 되고,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느낀 나프티는 세템브리니에게 권총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결투 당일, 세템브리니는 결투를 포기하는 뜻으로 하늘로 권총을 쏘고, 이에 분노한 나프티는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결국 한스가 기다리던 쇼샤 부인은 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쇼샤 부인은 병을 핑계로 남편에게서 벗어나 여기저기를 여행하던 중 페퍼코튼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은퇴한 사업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었고, 그와 함께 요양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한스의 두 교육자와는 달리 페퍼코튼은 제대로 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말을 제대로 끝맺는 법이 없었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말들만 내뱉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리스마적인 위압감이 있었다. 마치 왕과 같은 위엄을 갖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비록 연적이기는 하지만 한스도 그에게 깊이 빠져들고 만다. 사실 작품 전반에 걸쳐 한스는 동성애적인 성향을 보인다. 어린 시절 히페라는 친구와의 회상 장면에서는 직접적으로 동성애적인 감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쇼사 부인에게 끌리는 것도 사실은 그녀의 행동거지, 사고방식이 남성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스가 호감을 느끼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은 남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한스가 페퍼코른에게 빠져버림으로써 쇼샤가 산으로 돌아왔지만, 한스와 쇼샤와 페퍼코튼은 실로 이상스러운 삼각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요양 생활 중, 페퍼코튼은 병세가 악화되어 가자 병에게 굴복하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한다. 그의 자살은 한스와 쇼샤 모두를 실의에 빠지게 만들고, 쇼샤는 다시 평지로 내려가 버린다.
그 후로도 마성의 산에 갇혀 한스는 7년의 시간을 보낸다. 3주의 계획이 7년으로 늘어나 버렸지만 한스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산속의 마법이 풀리게 된 것은 평지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점으로 유럽은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요양원의 사람들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각자의 고향으로 서둘러 돌아가고, 한스 또한 고향인 독일로 돌아간다. 소설은 고향으로 돌아간 한스가 군에 입대하여 처참한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암시하면서 끝난다.
소설에서 깊은 산중의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악마적인 공간이다. 총명한 젊은이의 영혼을 타락 시켜 7년을 방황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용기를 내어 도망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결국에 다시 돌아오는 자도 많고 도망칠 생각을 못하는 자들도 많다. 누구도 구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우리에게 악마의 산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소리 없이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환경은 무엇인가. 루틴이 있다는 것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요양원의 하루 5끼의 화려한 식사와 사이사이의 안정요양은 사람을 안정시킨다. 당장 할 일이 있다는 것에서 자존을 느끼는 것이다. 직장 생활도 ‘마의 산’이 될 수 있다. 가방 들고 왔다 갔다 하는 학교 생활도 ‘마의 산’이 될 수 있다. 용기 내어 도망치는 것은 말 그대로 용기가 필요하다. 섣불리 도망쳤다가는 불쌍한 요하임과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에 언젠가는 그런 운명에, 즉 죽을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인생 자체가 ‘마의 산’이 될 수도 있다. 소설의 초반의 느린 시간의 흐름처럼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은 시간이 더디게만 가다가 언젠가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라며 허탈해 하는 것이다. 인생 자체가 ‘마의 산’이다. 깨어 있지 않고 요양원의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만족하며 생각 없이 산다면 그렇게 된다. 깨어 있기 쉽지 않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구보씨는 부서원들과 점심 회식을 하였다. 이틀 전에 입사한 새파란 신입사원의 환영회를 겸한 회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보통의 신입사원이라면 술자리를 겸해서 저녁식사를 하였을 것이지만, 이번 신입사원은 특별하였다. 구보씨 부서에서 없던 고졸 신입사원이었던 것이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술자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고등학생쯤 되면 저희들끼리 몰래 술 한 잔씩 했겠지만, 직장에서는 오히려 더 조심해야만 하는 사정인 것이다. 점심 시간이 되어 구보씨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눈치 보고 있던 부서원들도 스르륵 일어났다. 이미 예약된 장소는 다들 알고 있었고 점심시간이야 뻔하므로 한 마디 말 필요 없었다. 눈빛도 필요 없고, 기척으로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한 셈이다.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는 다른 부서에 굳이 회식한다는 티를 낼 필요도 없으므로 기척 의사소통은 더욱 적절한 수단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스페인 식당에는 모두 여덟명이 자리했다.마침 4인분의 세트메뉴가 추천메뉴로 돼 있어 2세트를 시켰다. 그런데 착석하고 보니 소식가 4명이 한 테이블이고 대식가 4명이 다른 한 테이블에 모여 있는 것이다. 구보씨는 그 중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특히 적게 먹는 직원 1명과 특히 많이 먹는 직원 1명 자리 바꾸는 것을 제안하였다. 특히 적게 먹는 직원은 김다율이었고, 특히 많이 먹는 직원은 강현우였다. 구보씨가 생각 못했던 부분은 음식의 양이 점심식사 자리의 행복의 유일한 결정 요소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식사자리에서 음식만큼 중요한 것은 자리배치였다. 연장자이자 부서장이 제안하니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다율은 그러마하는 대답도 안 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는 것이었다. 구보씨는 깨달았다. ‘아 이 친구가 나와 겸상하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직장 생활 20년 넘게 해 온 구보씨는 타고난 성정과 상관 없이 눈치는 빨라졌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 다율과는 업무적으로 불편한 말을 주고 받은 기억이 있었다. 눈치만 채고 잠자코 있었다면 좋은 꼰대가 될 수도 있었는데, 속 좁은 구보씨는 입 밖으로 말을 꼭 내고야 만다.
“다율씨가 나랑 같이 먹기 싫구나. 그냥 이대로 먹지 뭐.”
구보씨는 안 해도 될 말을 또 했다고 생각하며 남 몰래 얼굴을 붉혔다.
그저께는 야단을 쳐 놓고 지금은 동석을 피한다고 토라지는 거냐? 자존감 한 단계 내려감. 역시 그릇 작은 놈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약한 사람은 쉽게 대하면서 미움은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냐.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거고, 그렇다고 가운데라는 것도 애매모호하단 말이다. 자존감 두 단계 내려감.
그래도 음식이 나오고 먹을 것 뱃속에 들어가고 나니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시덥잖은 취미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 여행 다녀온 잡설들을 나누면서 시끌시끌 점심을 먹었다. 서로 간에 적절한 거리 유지하면서, 우리 친한 사이라고 확인하는 정도의 시끌시끌함이다. 이것이 사회생활. 오늘도 직장생활이라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오후에는 스터디 모임 시간이 있었다. 구보씨는 평소 부서 직원들의 전문성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특히 강현우는 연차에 비하여 아는 것이 부족하여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늘상 생각해 왔고, 이번에 책 한권을 정해 주고서 발표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구보씨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첫인상으로 선입견을 갖는 경우는 별로 없으나, 한 번 정한 평가를 쉽게 바꾸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머리가 둔하다고 일단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었다. 현우는 이미 그 단계에 접어 들어 있는 상태였다. 비록 그 둔한 머리를 개발해 주고자 좋은 의도에서 공부를 시킨 것이지만, 시킬 때마다 실망하고는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의 텍스트만 읽었을 뿐 행간을 읽지 못하고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번역을 잘못한 것까지 있었다. (정해준 책은 영어로 된 책이었다.)
“이거 번역이 맞나? hard enough that ~~ 이라고 하면 ~~하도록 충분히 어렵다는 뜻 아냐? ~하기 어렵다는 뜻이야?”
현우도 안 좋은 버릇이 있었는데, 바로 머리는 둔한데 지는 것을 싫어해서 우기기를 잘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같은 뜻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그게 같은 뜻이야? that 이하가 어려운 거야? 지금이 영문법 시간도 아니고, 내가 번역까지 바로 잡아줘야 돼?”
당신 평소에 유학파라고 영어 잘한다고 티내고 다니지 않았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점심시간의 섣부른 혓바닥의 실수가 약이 됐던 모양이다.
“제 뜻은 같은 뜻으로 말한 거였는데… 그럼 제가 잘못 쓴 거 같습니다.”
“번역 잘못했다고 하면 되지 왜 우기길 우기나?”
역시 작은 그릇은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비아냥거리면서 얘기할 거리는 아니었는데 또 이런다. 이러면서 또 미움은 받고 싶지 않겠지. 구보씨는 그 뒤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화제가 전환되면서 영어 번역 문제는 금세 잊혀졌지만 구보씨 자존감은 또 한 단계 하락.
퇴근이나 해야겠다. 아내에게 말을 거니 아내가 선수를 쳤다. 중년의 우울감을 먼저 토로하는 것이다. 여자의 갱년기가 무섭다고들 하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게다가 구보씨도 아내의 갱년기에 대하여 짐작은 하고 있었던 터라, 신중하게 대꾸했다. 나도 오늘 별로 유쾌하지 않단다. 네 우울감 들어줄 여유가 없단다.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구보씨는 사려 깊고 진지한 말투로 아내를 위로하였다. 구보씨 자존감 한 단계 상승. 이렇게 속 넓은 사람이었다니. 스스로 대견해했다.
쓸 데 없고 답 없는 논쟁 중에 ‘김연아랑 사귈래? 아이유랑 사귈래?’, ‘더운 게 나은가? 추운 게 나은가?’ 논쟁이 있다. ‘더울 때 벗을 수 있는 옷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주장과 ‘추운 건 고통이다.’라는 주장들을 하고는 한다. 결론적으로는 개인 취향이다. 그렇지만 나한테 물어보면 ‘여름에는 추운 게 나은 거 같고, 겨울에는 더운 게 나은 거 같다.’라고 말한다. 당장 눈 앞에 고통은 고통이고, 멀리 있는 고통은 아련하게 흐릿한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조차 있다. 말하자면,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은 이 쓸 데 없는 논쟁에서도 적용된다. 미리 말했듯이 참으로 쓸 데 없는 논쟁이다.
그렇지만, 이 쓸 데 없어 보이는 논쟁에서도 진지하게 공감하며 고개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글을 만난 적이 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려 있는 글로 기억한다.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흔히들 말하기를,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추운 것보다는 더운 것이 낫다다고들 하는데 감옥에서는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선생은 원래는 추운 것보다는 더운 게 낫다는 쪽이셨던 모양이다.) 감옥은 3평 남짓 좁은 공간에 여러 명의 수감자가 생활하는 공간이다. 필연적으로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잘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추운 겨울에는 옆자리 동료의 온기가 고맙게 느껴질 것 같다. 반면 더운 여름이면 그 온기가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선생의 말씀은 이 상황에서 정말로 괴로운 것은 같이 생활하는 옆자리 사람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직장인들 또는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아마 공감할 것이다. 일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 사람이 괴로운 것이다. 사실은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니고 회사의 동료, 상사, 부하직원, 거래처, 손님 등등의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는 것인데, 그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면 그곳은 지옥이다. 집에서도 아내가 남편이 부모 자식이 꼴 보기 싫으면 집이 지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옆 사람이 꼴 보기 싫은 것이 그 사람 잘못인지 내 마음 먹기의 문제인지는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원인이든지 막론하고 옆 사람이 싫어지면 그 공간이 지옥인 것은 보편적이다. 그래서 더운 여름, 필연적으로 옆사람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감옥은 겨울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글에 고개 끄덕여진다.
이 기사(재구속 윤석열)에 의하면 각하께서는 독방을 쓰시는 모양이다. 사실, 신영복 선생께서 옥고를 치르실 때와 시절이 많이 바뀌어서 감옥에 에어컨이 있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에어컨은 없는 모양이다. 더운 여름 에어컨이 없어 각하께서 몸이 고단하신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를 못 갖게 되신 것이다.
하긴… 구치소니까 그러려니 하자. 교도소라면 목적이 ‘교도’이어야 할 테니까, 그 때가 되면 거기서 배우시도록 하면 되겠다.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아’. 남 자랑하는 거 하나도 부러워할 것 없다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이다. 후렴구는 이렇게 반복이 된다.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하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하고
사실 이 간단한 가사는 두 가지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첫 번째 메세지는 자명하다. 남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픈 것은 한민족을 넘어서 전체 인류가 공유하는, 말하자면 유전자에 적혀 있는 특성이다. 사촌이 땅을 샀다는 사건에 대한 무조건 반사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조건 반사를 (표정은 감추지 못하더라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못난 놈이 된다는 것 또한 중등 교육 이상을 받은 자라면 체득하고 있는 지혜이다. 여기에서 한 발 나아가서 장기하는 스스로 배 아픔의 부질 없음을 깨닫고 아픈 상황과 아프지 않은 상황을 분별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주장하는 가사라고 해석해 본다.
둘째 메세지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면이 있다. 분명히 후렴구는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로 시작을 한다. 자랑이 부러움의 원인이 아니라 부러움이 자랑의 원인이다. 즉, 무언가 부러운 것이 있으니까 자랑을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조금 더 살을 더 붙여서 해석을 해 보면, 자랑을 하는 자는 무언가 결핍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심리적으로 보상 받고자 자랑할 거리가 생기면 달려가서 나불댄다는 뜻이 된다. ‘자랑하는 자’들을 그렇게 매도할 합리적인 근거는 갖고 있지 않지만 서사적으로 말은 된다고 생각한다. (자랑하는 자들 중 이 글을 보시는 분께는, 몇 분이나 되실지 모르겠지만, 사죄한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대놓고 자랑하는 자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은근히 자랑하는 자와 내 자랑거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 정도는 흔하다. 그렇지만, 그들도 막상 추켜세워 주면 부끄러워 손사레를 쳐야만 사회생활의 지혜를 아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대놓고 자랑하는 자는 그 의도와는 달리 부러움을 사는 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왜 인간은 부러워서 자랑하고, 자랑해서 부러워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의아하지만, ‘배 아픔’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입장에서는 발전의 원동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촉매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유행하던 진화심리학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의 번영과 개체의 행복과는 그리 상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다. (더 작은 단위, 그러니까 국가, 민족의 번영과 개체의 행복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부정은 터부처럼 생각된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유전자가 지시하는 대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전자의 압박이 모든 면에서 극복의 대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유대감, 소속감, 측은지심 등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유전자의 압박이다. 이런 감정들은 오히려 유전자가 아닌 두뇌로도 납득을 할 수가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감사하게 써먹으면 될 일이다. 시기심도 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승화 시키는 방법도 잇을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그 감정이 너무나 격렬하고 반응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 어쨌든지 사촌이 땅을 사서 복통에 눈물이 날 때, 마음 한 구석 허전하여 누군가 명치에 자랑을 꽂아 넣고 싶어질 때, 말초신경에게 맡기지 말고 한숨 먼저 크게 한 번 쉬고 나서 생각해 볼 일이다.
내 경우는 그렇게 높은 경지에 오르지는 못해서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꼭 자랑하고 싶어 못참겠으면 해도 돼. 내가 잘 들어 줄게. 그렇지만 안 하는 게 너한테도 좋은 거야.
이 정도가 결론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