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의 노래, 정태춘

나는 뭇 사람들이 정태춘이라는 가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정태춘은 훌륭한 예술가이다. 포크 가수로 분류 되지만 그렇게 함부로 분류할 수 없는 정태춘만의 장르가 있는 예술가이다. 내가 정태춘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70년대 말 잠깐 인기를 끌었던 포크 가수를 생각하며, 아저씨스럽다고 한다면 정태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히 그의 시적인 가사를 좋아한다. 그의 가사는 새겨 듣고 음미할수록 빠져든다. ‘저 들에 불을 놓아’의 가사는 농촌 풍경을 느린 호흡으로 묘사하고 있다. 찬찬히 듣고 있으면 한 편의 풍경화를 감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양단 몇 마름’과 같은 노래는 우리 어머니 혹은 할머니 세대의 정서를 감히 공감은 못하더라도 살짝 엿볼 수 있게 한다. 그가 이 노래를 고등학교 시절에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다.

내가 정태춘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고 나는 그를 민중가요 가수로 생각했다. 집회 때마다 단골 손님으로 나오셨고, 과방에 굴러다니던 노래책 뒤적이다 보면 자주 접하는 가수였다. 간혹 그가 집회 때, ‘이전에 촛불이나 북한강에서와 같은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라는 멘트를 할 때, ‘아 민중가요 부르기 전에는 말랑한 가수였구나.’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를 평범한 민중가요 가수로 묶는 것 또한 맞지 않다. 80년대 말 이후 그의 노래가 직설적이고 과격해졌다고는 하나 그의 노래는 ‘조국과 청춘’, ‘꽃다지’처럼 선동적인 요소는 없다.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대작이고 명작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선 위치에서 자신의 수단으로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지금 시대에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그 누구도 정태춘에게 빚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권리들이 많은 선배들의 싸움의 결과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만큼은 온 시대가 정태춘 한 사람에게 빚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갖지 못한 것이다.

정태춘은 옛날 가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해다.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창작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2012년 발매한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와 2019년 12집 ‘사람들 19’는 현대적 감각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태춘이라는 가수의 목소리는 노년에 접어 들면서 더욱 매력적인 음색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이 그의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2022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흥행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런 영화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영화와 함께 미니 콘서트를 연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접하게 되었다. 짧은 콘서트라 아쉬움이 남았으나, 그의 더욱 완성 되어 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쁘다. 내년에 앨범을 또 낸다고 하니 기대해 본다.

The First Slam Dunk

명작이라 할 만 하다.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하여 원작의 일부 스토리를 보강한 정도로 플롯은 단순하다. 조금은 과하게 신파조로 흐르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플롯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장면마다 완성도가 높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과 감동을 오가게 만드는 구성 또한 치밀하게 계산된 듯 하다.
도입부부터 완벽했다. 등장 인물들이 차례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 나 자신이 2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후반 부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과 몇 분 간의 정적 또한 완벽하게 압도적이다.

다만, 원작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감동이 덜할 수도 있겠다만 내 또래의 아저씨들은 다들 훌쩍 거리며 극장을 나서게 된다.

소년 시절로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Don’t look up

 

새로이 발견된 혜성이 지구를 향해 곧장 돌진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각계 각층의 인간 군상들의 행태를 풍자하는 아주 가벼운 블랙코메디이다.
배경은 흔하디 흔한 ‘미국 만세’를 주제로한 헐리우드 영화와 판박이이지만 이야기의 진행, 영화의 분위기는 정반대이다. 영웅은 등장하지 않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각자의 뻘짓거리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런 면에서 인디펜던스 데이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이라는 측면에서 씁쓸하다.
영화는 나라를 운영한다는 의미의 ‘정치’보다는 ‘정치적이다’라는 표현에서 풍기는 ‘정치’를 비웃는다. 백악관의 대통령은 단 한 가지의 잣대만을 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그것이 인류가 멸명할만한 일이더라도 다음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긍정저인 것이다. 반대로 전 인류가 행복해진다고 하더라도 다음 선거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나쁜 일이다.
대의나 공공선, 어떤 가치보다 선거가 지상의 목표가 되는 현상은 대의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래로 보편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다. 모든 나라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과 미국에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세대를 막론하고 관찰된다. 대학의 학생회 선거에서부터 대통령 선거에서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물론 신념을 갖고 일하는 정치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신념만 가지고 선거에 이기는 것은 어림 없는 일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신념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친한 척 해야한다. 오히려 선거를 거치면서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오리무중이 돼 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영화는 정치인 뿐만 아니라 정치인을 추종하는 대중들을 비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인정하지 않을테지만, 정치적 성향은 종교적 신념과 유사하다. 아무리 이성적인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믿지 않고 용서해주고 싶은 사람은 용서가 되고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쁜 놈인 것이다. 영화에서는 트럼프 추종자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을 등장 시키는데, 그들은 무식한 집단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화에는 BASH라는 기업과 그 기업의 CEO가 등장한다. BASH는 아마도 개인정보를 가지고 머신러닝으로 무장하여 ‘나는 너희가 모르는 너희를 알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행태에서 페이스북이나 애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CEO는 대중들에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종교적인 추앙을 받는다는 점에서 스티브 잡스를 그린 듯 하고 오만한 성격은 머스크를 연상시키려는 것 같다.
BASH는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의사 결정에 결정적이고 노골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최대 자금줄이기 때문에 서열 상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BASH의 논리는 경제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BASH의 CEO는 스스로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신 기술을 통해 너희에게 미래를 열어줄 메시아적인 존재로 자신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 그의 논리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일 뿐이다.
미디어에 대한 풍자도 빼놓지 않는다. 신문은 그나마 시작점에서는 사안을 가치관에 따라 판단을 하려는 듯 하나 결국에는 책임질 일은 하지 않고 발을 뺀다. TV는 아주 가볍기 그지 없고, 모든 것을 오락거리로 삼는다. 그것이 지구 멸망에 관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돌 커플의 결별 소식보다 중요한 사안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정치인들은 평소 하던대로 다음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 인기 관리를 하고, 거대 기업은 평소 하던대로 최대한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TV는 평소 하던대로 히히덕 거리며, 대중들은 평소 하던대로 휩쓸려 다닌다.
결국에 멸망의 날이 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굳이 멸망의 날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누가나 개인적으로는 소멸의 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제인지 멀게만 느껴질 뿐이고,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에 잊고 평소 하던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매일 매일 내가 결국에 소멸하게 될 존재라는 것만 상기하더라도 삶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적고 나니 아주 가볍게만 볼 영화는 아니었다. Rotten tomato의 평론가 평점이 매우 좋지 않은데, 아마도 깊이가 없다는 점이 이유일 것 같다. 많이 배운 평론가가 아닌 입장에서 그리고 평소 휩쓸려 다니고 있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다.

페스트

20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2020년은 아주 먼 미래의 대명사격이었다. 그러니까 2020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전부 하늘로 다니고 로봇이 서빙을 하고 저마다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등…(응?)
그러나 시간은 단절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문명 세계에서 21세기를 살아 왔기 때문에 저마다 손에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전염병이다. 혁신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깜짝 놀랄 준비를 하고 있던 자들이 가장 원초적인 미생물들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코로나19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크게 뒤흔들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소설은 오랑이라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화롭지만 삭막한 이미지인 이 도시에 페스트가 발병하게 된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페스트의 발병으로 도시 전체는 폐쇄되게 되고, 시민들은 사실상 유배당한 삶을 살게 된다. 전염병은 도시 전체의 삶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꿔 버린다. 특수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대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엿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페스트라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같다.
주인공 격인 의사 리외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행위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또 다른 주인공인 타루는 성자가 되는 것보다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것이 더 어렵다고 답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보다는 질문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결국 내 관심사는 어떻게 성자가 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타루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
“어쩌면요. 그런데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내 생각에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 그래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야심이 덜하죠.”
-본문 인용-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어려운 대답이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알기 쉽다. 인간답지 않은 것, 참혹한 것, 바로 페스트 같은 것들이 인간답지 않은 것 아닐까?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와중에 굳이 작중에 인간의 무지를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2차 대전 즈음하여 나치즘이 등장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결국에 집권을 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윤리의 문제라는 게 복잡한 것이지만 무지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윤리의 많은 문제의 해결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 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

하지만 서술자는 오히려 이런 훌륭한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악에 대해 간접적이고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일 뿐이고, 또 인간의 행동에서 악의와 무관심이 더 흔한 원동력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악하기보다는 선하다. 사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는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며, 바로 이것이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분명 가능한 통찰력 없이는 참된 호의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을 것이다.-본문 인용-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 이후의 나치즘의 광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당시의 페스트였다고 하면 지금의 페스트는 무엇일까?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나치즘의 간균이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갖가지 혐오가 나치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본문 인용-

여혐, 남혐, 지역 혐오, 외국인 혐오 등등 셀 수 없다. 페스트 간균은 끈질기게 인간들 사이에 숨어 인간성을 말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페스트 간균을 살포할 준비가 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이 쯤 되면, 페스트 간균과 인간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 혐오라고 하는 것이 인간성의 한 부분이고, 인간이 인간성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부분만을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인간으로 살기 어렵다. -네루다. 사람되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등등 인간으로 산다는 문제는 쉽지 않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라이더

바람이 불어 라이더

이X섭

살짝 서늘한 날씨
따사로운 햇빛
상쾌한 공기
대중교통엔 바이러스

너님은 지금 자전거 도로로 뛰쳐나가고 싶다.

너님의 이름은 내츄럴본 라이더.

팩트풀니스 Factfulness

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

얼마 전에 타계한 공중보건학자 한스 로슬링의 베스트셀러이다. 인간이 세상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중보건학자로서 그의 이러한 분석의 목적은 인류의 보편적인 후생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점에서 숭고하다고도 여겨진다.
사실 인간이 세상을 오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여기 저기서 많이 들어본 바이고 약간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행동경제학에서도 인간의 편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런 거)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는 구석기 시대에 진화를 멈춘 인간의 뇌에 대해서 설명하고는 한다. 이런 저작들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즐거운 것들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래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한스 로슬링의 목적은 분명하다. 세상을 사실(Fact)에 기반하여 오해 없이 바라봄으로서 인류가 얼마나 어떤 속도를 통해서 나아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이라는 것은 정확히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다루는 데이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성도 차별 받지 않고 교육을 받고, 적절한 가족 계획을 하고,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음으로써 어린 나이에 죽지 않는 등 그가 분류한 ‘4단계’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우리는 이미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 공중보건의 사례는 우리와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본적인 그의 10가지 법칙은 ‘4단계’ 생활 수준의 우리도 더 나은 삶을 누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메모하는 차원에서 10가지 법칙을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간극 본능 The Gap instinct
인간은 극단의 이야기에 끌리게 돼 있다. 양 극단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 세상을 두 가지로 양분해 버리고서는 그 사이에 수 많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2. 부정 본능 The Negativity instinct
나쁜 소식만 기억에 남는다. 점진적 개선은 인지하지 못하고 아주 먼 옛날을 아련히 그리워하고는 한다.
3. 직선 본능 The Straight Line instinct
섣불리 선형 회귀를 하고는 한다. 내가 보고 있는 추세는 다양한 곡선의 일부일 수도 있다.
4. 공포 본능 The Fear instinct
내 공포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계산해 봐야 한다.
5. 크기 본능 The Size instinct
인상적으로 보이는 숫자 하나, 또는 개별 사례에 집착할 수도 있다. 가능하면 비교 가능한 숫자를 찾아라.
6. 일반화 본능 The Generalization instinct
집단을 범주화하는 오류이다. 집단 내에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집단 간에도 유사점이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대다수라는 말은 과연 51%인가 99%인가?
7. 운명 본능 The Destiny instinct
흔히 문화라는 말로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다라고 낙인 찍는다. 느린 변화라도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 내가 몇 년 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 그 집단은 지금은 전혀 다른 집단일 수 있다.
8. 단일 관점 본능 The Single Perspective instinct
망치를 쥐어 주면 온통 다 못으로 보인다. 내 전문성은 하나의 망치일 뿐이니 겸손해라. 다른 연장들을 갖추려고 노력해라.
9. 비난 본능 The Blame instinct
일이 잘못 되면 범인을 지목하려고 한다. 그러면 마음은 편해지지만 일이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악당을 찾지 말고 원인을 찾아라.
10. 다급함 본능 The Urgency instinct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요구 받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생각을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그렇게 급하게 행동해야 될 일은 드물다.

간략하게 말하면 겸손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안다는 생각하지 말고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나의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짜 뉴스와 언론의 호들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한스 로슬링의 버블 챠트는 오래 전에 TED를 통해 이미 접해본 적이 있었다. (여기)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에 이 정도의 경지가 있을 수 있다니 놀라워 했던 기억이 있다. 갑자기 이케아가 떠오르면서 이런 게 스웨덴스러움인가 감탄하게 된다.
아래 링크 추천.
Gap Minder.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의 신기원
Dollar Street. 발로 뛰는 통계에 감수성까지..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Yuval Noah Harari, 2018.

‘Sapiens’, ‘Homo Deus’등의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이다. 그렇지만 이미 작년.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Sapiens’에서는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영장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됐는지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았고, ‘Homo Deus’에서는 신이 되어 버린 인류의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저자는 ’21 Lessons..’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고 밝히고 있다. 복잡해지고 현혹되기 쉬운 세상에서, 일상 생활에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조차 사치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명료함(clarity)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현재 몇 가지 측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트럼프류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liberalism, 그냥 자유주의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는 19세기 이래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과 경쟁하면서 보완해 나가면서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한 자들도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트럼프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구 온난화는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해 가고 있으며, 이 두 기술을 융합되어 갈 것이다. 이 두 기술의 융합은 인류의 대부분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앞으로 착취(exploitation)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irrelevance)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Homo Deus’의 주된 주제이다.) 먹고는 살겠으나, 의미 있는 일자리는 더욱 없어질 것이고, 일부 데이터를 독점하는 자와 그 외 대다수로 명확히 계급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인 수준에서만 대응이 가능한 것들인데, 오히려 벽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현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트럼프의 MAGA는 먹혀 들고, 영국인은 Brexit가 실업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시진핑은 모택동이 되고 싶어하고, 푸틴은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서는 크림반도를 때림으로서 국수주의를 선동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IS라는 단체가 득세하고 있는데, 테러리즘은 이런 상황에서 더 효과적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암울하다. 사실 암울하다. 해결책이라고 떠오르는 것들은 별로 없다. 이 쯤에서는 애국주의(Nationalism)를 선동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에 가깝다. 종교는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저자는 현대의 종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애국주의의 시녀(Handmaid of Nationalism)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자의 해법은 명확하지 않다. 도입에서 말했듯이 저자의 목적은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위한 논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당황하지 말고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겸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21세기에는 너무 상투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뇌과학이 발달하고 관련하여 경제학 분야에서도 행동경제학이 부각되듯이, 사람들은 편견에 쉽게 노출 된다. 일단 믿는 것은 계속 믿는다. 믿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은 큰 고통이니까… 우리 나라에도 아직 20% 이상의 자유당 지지자들이 심각한 바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때려 놓고 맞은 놈이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견을 주입한는 언행, 혐오를 선동하는 언행은 매우 사악한 것이고 생각보다 폐해가 크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더 절망적이구나. 그렇지만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난다면 편견에서 빠져 나오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가치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해야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Justice)의 정의가 달라져야 될 수도 있다.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Sapiens’에서부터 주장하던 내용인데, 인류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의 상당 수는 단지 믿음일 뿐이다)
결국에 눈에 보이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겁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Keep calm and carry on… 하는데, carry on 할 것은 일상 생활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되새김인 것 같다.

두 번 읽을만한 가치 있고 그 정도의 재미도 있다.

정태춘의 사람들

올해(2019년) 4월 정태춘, 박은옥 데뷔 40주년 앨범이 나왔다.
내가 정태춘선생님(? 뭐라고 지칭해야할지 모르겠다. )을 처음 접한 건 대학에 와서였다. 그 전까지는 그가 어떤 가수인지 전혀 몰랐고 그의 노래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우리편에 서 있는 가수, 즉 민중가요를 부르는 가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편이라는 표현은 나의 당시 단순했던 의식 구조를 정확히 묘사한다.
당시 나는 학교 행사나 집회 현장에서 정태춘님을 직접 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운이 좋은 일이었다.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길 사전 검열 거부 투쟁을 통해 깨어났다고 하셨다. 그 전까지 말랑말랑한 포크송을 부르던 가수였으나, 사전 검열 문제를 생각하면서 깨어났다는 말씀이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전 검열 제도가 없었더라면 나는 정태춘을 아직도 알지 못했을 것 같다.

93년에 나온,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에 수록된 ‘사람들’이란 노래가 있다.

노래는 ‘문승현이는 쏘련으로 가고…’로 시작한다. 문승현은 노찾사에서 노래를 만들던 사람인데 당시 모스크바로 음악 공부를 하러 떠났다고 한다. 같이 노래운동하던 동지가 떠나간 아쉬움인지 ‘문승현이는 쏘련에 도착하고’로 노래 말미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인사동 찻집 귀천에는 주인 천상병씨가 나와 있고..’라는데, 천상병 시인은 이 노래가 나온 93년에 타계하였다. 천상병 시인은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호되게 당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민방위 훈련의 초빙 강사는 ‘아주 유익한 말씀도 해주시고 민방위 대원 아저씨들 낄낄’댄다. ‘백태웅이도 잡혀가고…’ 그 밖에 ‘철창 속의’ 사람들이 많은 반면, ‘잠실 야구장은 쾌청’하다. 가수는 ‘아 대한민국’에서와 같은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라는 자조적인 읊조림이다.


40주년 앨범에는 93년의 ‘사람들’과 같은 가락에 가사만 바뀐 ‘사람들2019’가 수록 되어 있다.
93년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주변의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손녀딸 유치원 오가는 모습은 귀엽고, 폐지 줍는 노인들 이야기는 서글프다. 칼가는 아저씨와 굴비 파는 아주머니, 편의점 알바 언니 모두들 피곤하고 블랙리스트는 잊혀지고 있다.

‘사람들’은 93년에도 그렇지만, 2019년에도 마찬가지, 거대 담론에 묻혀 버리기 쉬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대를 느낄 수 있어 뭉클한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