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문화

무정

무정, 이광수, 1917.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설이다. 문학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하고 하는 소설이지만 별로 읽어 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친일파 이광수라는 사람에 대한 반감으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아가 추한 자가 글재주만 가졌다라고 생각했다. 인격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글재주는 잔재주이며 위험한 재주이고 피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경계해 오던 바이니 읽어 보도록 하자. 오히려 나의 이런 친일파에 대한 경계감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됐을 수도 있겠다.

소설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형식이라는 경성학교 교사가 어린 시절의 은인인 박진사의 딸 영채와 수 년 만에 조우하게 된다. 영채와 형식은 박진사가 어린 시절부터 베필로 정해 두었던 사이였으나, 박진사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거기서 세상을 등지고 형식은 동경유학을 떠나면서 헤어지게 된 사이이다. 그 사이에 영채는 갖은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의 몸이 되었고 그럼에 형식을 생각하며 정절을 지켜오고 있었다. 한편 그 둘이 조우하는 날 형식은 김장로의 딸 선형의 영어 개인 교사가 되어 처음 만나게 되었고, 젊은 남녀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흐르게 된다. 이 때 영채는 배학감이라는 경성학교의 학감의 구애를 거부하다가 결국 강간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형식과 형식의 친구 우선이 목격하고 만다. 영채는 좌절하여 자결을 결심하고 편지 한 장을 남겨 두고 떠나게 되는데, 형식은 그런 영채를 찾으러 평양까지 뒤따라 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오고 만다. 바로 그 날 형식은 김장로로부터 선형과의 약혼과 동반 미국 유학을 제안 받고 승락하기에 이른다. 묵숨을 끊으러 가던 영채는 기차에서 신여성 병욱을 만나는데, 병욱의 설득에 자결을 포기하고 삼종지도라는 가치관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나아가 영채와 병욱은 함게 동경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부산행 기차에 오르는데, 이 때 미국 유학을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탔던 형식, 선형과 우연히 마주친다. 어색한 상황에서 부산으로 가다 큰 홍수를 만나 삼랑진에서 기차가 멈추게 되는데, 그들은 삼랑진의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성금을 모아 수재민을 돕고 서로 유학길에서의 포부를 밝히고 길을 떠난다.
사건 중심의 줄거리는 이러하지만, 작가는 지면의 상당 부분을 각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할애하고 있다. 특히 이형식이라는 자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속물적이지만 때로는 작가가 직접 지적한 대로 마음이 약한 모습도 보인다. 영채의 정절을 의심했다가, 그런 의심을 하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 막상 선형과의 결혼이라는 기회에 기뻐하다가도 그 결혼 기회가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런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의 묘사적인 측면에서 이 소설을 근대 소설의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플롯의 측면에서 보면 현대의 소설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음악회를 여는 부분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생뚱맞다’라고 밖여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민족 계몽을 위해 힘쓰는 감동적으로 결말을 내리는 부분은 앞서 전개 되었던 갈등들을 카펫 밑으로 쓸어 넣어 버리는 것과 같다.
‘최초’의 근대 소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동시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주제와 구성이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아마도 최초로 한글 구어체 소설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전이라고 하는 수준에 들어서려면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울림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친일파의 글이라는 선입견이 없다고 하더라도 고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이다.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가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실제로 부쳐지지는 않았고, 카프카의 아버지는 이 편지를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글은 카프카 사후에 발견 되어 출판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 100주기라고 하기에 카프카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읽게 되었다. 부자간의 각별한 정을 담은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글이 출판할 만큼 이목을 끌지는 못했을 것 같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혈기 왕성하고 호전적이며 의욕적인 사람이었는데, 카프카는 그렇지 못하였고 오히려 반대였다고 한다. 그는 그런 아버지에게 주눅 들어 점점 아버지를 두려워하게 됐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지는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전에 언젠가 제게 물어보셨지요. 어째서 제가 아버지한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느냐구요.

왜 자신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이 되었고, 그 와중에 부자지간이 소원해졌는지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결과의 책임이 아버지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린 시절의 사건들까지 들춰 내면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이 자신을 어떻게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항의하고 있으며, 급기야 입을 닫아 버리게 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리고 이런 가족 관계가 자신의 글에 투영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과 같은 소설에서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힐 듯 다가갈 수 없는 성이라는 존재가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유래하게 된 것이지 싶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예상되는 반박을 정리하고 그것에 대해 재반박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했다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더욱 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고자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상기 시키면서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삶과 죽음이 보다 가벼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결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약간은 당혹스럽게 한다.
100년 전 일이지만, 지금 한국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 주기 쉬운 존재이다. 아들은 조금씩이라도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100여년 전, 체코에 사는 유대인 카프카는 그것을 30 넘어서까지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나의 관점으로 봐서도, 평생을 걸쳐 아버지로부터 해방 되고 싶어했다고 하지만 30세가 넘어서까지 해방 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투정 부리는 것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역설적으로 그런 상처 덕분에 그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런 소설가로서의 감수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볼 수도 있다.
카프카의 주장을 옹호해 주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그의 ‘찌질함’에 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운이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의 특수성에 대해서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소설가가 쓴 에세이로서 소설가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 놓는 글이기 때문에 진솔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Being Mortal

나는 달팽이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딸아이가 10살 남짓 됐을 때, 학교에서 작은 화분을 들고 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주먹만한 화분이었다. 무슨 식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딸아이는 그 화분을 제대로 키워 보고 싶었는지 조금 더 큰 화분으로 옮겨 담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흙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달팽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화분보다 그 달팽이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 달팽이를 제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고 ‘베베’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달팽이와의 만남은 짧게 스쳐 가고 말았다. 달팽이 집이 될만한 상자를 찾고 달팽이를 옮기고 부산스러운 와중에 흙을 쏟고 말았고, 베베는 순식간에 시야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베베가 보이지 않자, 딸아이는 베베가 수채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베베가 죽게 됐다며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아이를 달래려, 말하자면 베베의 가묘를 만들어서 위로해 주었다.

신해철이 병아리 얄리를 통해 죽음을 느꼈던 것처럼, 아이는 베베를 통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그날 밤 아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이를 속일 수가 없어, 죽은 후의 하늘나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 주었을 때, 그러니까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말했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아이에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 말을 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그 때 상처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이른 나이였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른 나이여서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싶다. 지금은 사춘기가 된 아이에게, 베베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피식 웃고 만다.


Being Mortal, Atul Gawandi, 2014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한다.
아툴 가완디의 이 베스트셀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주제로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떤 형태로 죽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역설적으로,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의 과정은 비인간적이 되어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일은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 서서히 약해지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료 기술의 도움으로 회복하기도 하지만, 추세적으로는 약해져 가는 과정을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과정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현대 의료 체계는 우선은 ‘살려’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고통의 과정이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된다. 분명히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말기암이나 때로 어떤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임종을 맞은 가족이 있는 사람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보내 드려야 한다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저 살려 두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신성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죽는 과정을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신성함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가장 급진적인 나라에서는 안락사가 합법이 된 지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마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된다는 쪽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 스스로 죽는 과정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은 아니고 현실적인 내용의 책이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생각하는 바가 많게 만든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그 명백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죽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것 같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한하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책의 번역서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뜻으로 이해 된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

나는 뭇 사람들이 정태춘이라는 가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

정태춘은 훌륭한 예술가이다. 포크 가수로 분류 되지만 그렇게 함부로 분류할 수 없는 정태춘만의 장르가 있는 예술가이다. 내가 정태춘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70년대 말 잠깐 인기를 끌었던 포크 가수를 생각하며, 아저씨스럽다고 한다면 정태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히 그의 시적인 가사를 좋아한다. 그의 가사는 새겨 듣고 음미할수록 빠져든다. ‘저 들에 불을 놓아’의 가사는 농촌 풍경을 느린 호흡으로 묘사하고 있다. 찬찬히 듣고 있으면 한 편의 풍경화를 감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양단 몇 마름’과 같은 노래는 우리 어머니 혹은 할머니 세대의 정서를 감히 공감은 못하더라도 살짝 엿볼 수 있게 한다. 그가 이 노래를 고등학교 시절에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다.

내가 정태춘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고 나는 그를 민중가요 가수로 생각했다. 집회 때마다 단골 손님으로 나오셨고, 과방에 굴러다니던 노래책 뒤적이다 보면 자주 접하는 가수였다. 간혹 그가 집회 때, ‘이전에 촛불이나 북한강에서와 같은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라는 멘트를 할 때, ‘아 민중가요 부르기 전에는 말랑한 가수였구나.’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를 평범한 민중가요 가수로 묶는 것 또한 맞지 않다. 80년대 말 이후 그의 노래가 직설적이고 과격해졌다고는 하나 그의 노래는 ‘조국과 청춘’, ‘꽃다지’처럼 선동적인 요소는 없다.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대작이고 명작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선 위치에서 자신의 수단으로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지금 시대에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그 누구도 정태춘에게 빚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권리들이 많은 선배들의 싸움의 결과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만큼은 온 시대가 정태춘 한 사람에게 빚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갖지 못한 것이다.

정태춘은 옛날 가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해다.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창작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2012년 발매한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와 2019년 12집 ‘사람들 19’는 현대적 감각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태춘이라는 가수의 목소리는 노년에 접어 들면서 더욱 매력적인 음색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이 그의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2022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흥행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런 영화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영화와 함께 미니 콘서트를 연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접하게 되었다. 짧은 콘서트라 아쉬움이 남았으나, 그의 더욱 완성 되어 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쁘다. 내년에 앨범을 또 낸다고 하니 기대해 본다.

The First Slam Dunk

명작이라 할 만 하다.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하여 원작의 일부 스토리를 보강한 정도로 플롯은 단순하다. 조금은 과하게 신파조로 흐르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플롯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장면마다 완성도가 높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과 감동을 오가게 만드는 구성 또한 치밀하게 계산된 듯 하다.
도입부부터 완벽했다. 등장 인물들이 차례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 나 자신이 2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후반 부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과 몇 분 간의 정적 또한 완벽하게 압도적이다.

다만, 원작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감동이 덜할 수도 있겠다만 내 또래의 아저씨들은 다들 훌쩍 거리며 극장을 나서게 된다.

소년 시절로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Don’t look up

 

새로이 발견된 혜성이 지구를 향해 곧장 돌진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각계 각층의 인간 군상들의 행태를 풍자하는 아주 가벼운 블랙코메디이다.
배경은 흔하디 흔한 ‘미국 만세’를 주제로한 헐리우드 영화와 판박이이지만 이야기의 진행, 영화의 분위기는 정반대이다. 영웅은 등장하지 않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각자의 뻘짓거리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런 면에서 인디펜던스 데이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이라는 측면에서 씁쓸하다.
영화는 나라를 운영한다는 의미의 ‘정치’보다는 ‘정치적이다’라는 표현에서 풍기는 ‘정치’를 비웃는다. 백악관의 대통령은 단 한 가지의 잣대만을 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그것이 인류가 멸명할만한 일이더라도 다음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긍정저인 것이다. 반대로 전 인류가 행복해진다고 하더라도 다음 선거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나쁜 일이다.
대의나 공공선, 어떤 가치보다 선거가 지상의 목표가 되는 현상은 대의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래로 보편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다. 모든 나라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과 미국에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세대를 막론하고 관찰된다. 대학의 학생회 선거에서부터 대통령 선거에서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물론 신념을 갖고 일하는 정치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신념만 가지고 선거에 이기는 것은 어림 없는 일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신념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친한 척 해야한다. 오히려 선거를 거치면서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오리무중이 돼 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영화는 정치인 뿐만 아니라 정치인을 추종하는 대중들을 비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인정하지 않을테지만, 정치적 성향은 종교적 신념과 유사하다. 아무리 이성적인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믿지 않고 용서해주고 싶은 사람은 용서가 되고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쁜 놈인 것이다. 영화에서는 트럼프 추종자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을 등장 시키는데, 그들은 무식한 집단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화에는 BASH라는 기업과 그 기업의 CEO가 등장한다. BASH는 아마도 개인정보를 가지고 머신러닝으로 무장하여 ‘나는 너희가 모르는 너희를 알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행태에서 페이스북이나 애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CEO는 대중들에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종교적인 추앙을 받는다는 점에서 스티브 잡스를 그린 듯 하고 오만한 성격은 머스크를 연상시키려는 것 같다.
BASH는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의사 결정에 결정적이고 노골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최대 자금줄이기 때문에 서열 상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BASH의 논리는 경제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BASH의 CEO는 스스로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신 기술을 통해 너희에게 미래를 열어줄 메시아적인 존재로 자신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 그의 논리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일 뿐이다.
미디어에 대한 풍자도 빼놓지 않는다. 신문은 그나마 시작점에서는 사안을 가치관에 따라 판단을 하려는 듯 하나 결국에는 책임질 일은 하지 않고 발을 뺀다. TV는 아주 가볍기 그지 없고, 모든 것을 오락거리로 삼는다. 그것이 지구 멸망에 관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돌 커플의 결별 소식보다 중요한 사안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정치인들은 평소 하던대로 다음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 인기 관리를 하고, 거대 기업은 평소 하던대로 최대한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TV는 평소 하던대로 히히덕 거리며, 대중들은 평소 하던대로 휩쓸려 다닌다.
결국에 멸망의 날이 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굳이 멸망의 날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누가나 개인적으로는 소멸의 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제인지 멀게만 느껴질 뿐이고,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에 잊고 평소 하던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매일 매일 내가 결국에 소멸하게 될 존재라는 것만 상기하더라도 삶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적고 나니 아주 가볍게만 볼 영화는 아니었다. Rotten tomato의 평론가 평점이 매우 좋지 않은데, 아마도 깊이가 없다는 점이 이유일 것 같다. 많이 배운 평론가가 아닌 입장에서 그리고 평소 휩쓸려 다니고 있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다.

페스트

20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2020년은 아주 먼 미래의 대명사격이었다. 그러니까 2020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전부 하늘로 다니고 로봇이 서빙을 하고 저마다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등…(응?)
그러나 시간은 단절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문명 세계에서 21세기를 살아 왔기 때문에 저마다 손에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전염병이다. 혁신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깜짝 놀랄 준비를 하고 있던 자들이 가장 원초적인 미생물들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코로나19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크게 뒤흔들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소설은 오랑이라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화롭지만 삭막한 이미지인 이 도시에 페스트가 발병하게 된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페스트의 발병으로 도시 전체는 폐쇄되게 되고, 시민들은 사실상 유배당한 삶을 살게 된다. 전염병은 도시 전체의 삶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꿔 버린다. 특수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대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엿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페스트라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같다.
주인공 격인 의사 리외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행위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또 다른 주인공인 타루는 성자가 되는 것보다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것이 더 어렵다고 답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보다는 질문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결국 내 관심사는 어떻게 성자가 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타루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
“어쩌면요. 그런데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내 생각에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 그래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야심이 덜하죠.”
-본문 인용-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어려운 대답이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알기 쉽다. 인간답지 않은 것, 참혹한 것, 바로 페스트 같은 것들이 인간답지 않은 것 아닐까?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와중에 굳이 작중에 인간의 무지를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2차 대전 즈음하여 나치즘이 등장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결국에 집권을 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윤리의 문제라는 게 복잡한 것이지만 무지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윤리의 많은 문제의 해결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 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

하지만 서술자는 오히려 이런 훌륭한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악에 대해 간접적이고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일 뿐이고, 또 인간의 행동에서 악의와 무관심이 더 흔한 원동력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악하기보다는 선하다. 사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는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며, 바로 이것이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분명 가능한 통찰력 없이는 참된 호의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을 것이다.-본문 인용-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 이후의 나치즘의 광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당시의 페스트였다고 하면 지금의 페스트는 무엇일까?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나치즘의 간균이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갖가지 혐오가 나치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본문 인용-

여혐, 남혐, 지역 혐오, 외국인 혐오 등등 셀 수 없다. 페스트 간균은 끈질기게 인간들 사이에 숨어 인간성을 말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페스트 간균을 살포할 준비가 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이 쯤 되면, 페스트 간균과 인간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 혐오라고 하는 것이 인간성의 한 부분이고, 인간이 인간성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부분만을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인간으로 살기 어렵다. -네루다. 사람되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등등 인간으로 산다는 문제는 쉽지 않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라이더

바람이 불어 라이더

이X섭

살짝 서늘한 날씨
따사로운 햇빛
상쾌한 공기
대중교통엔 바이러스

너님은 지금 자전거 도로로 뛰쳐나가고 싶다.

너님의 이름은 내츄럴본 라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