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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미국의 이란 침공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각지를 공습하였다. 이 공습으로 이란의 최고지도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공습으로 최고지도자 뿐만 아니라 이란의 핵심 지도부가 제거되었다. 이란은 주변국에 배치된 미군 기지 뿐만 아니라 주요 민간 시설에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하였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것으로 보복하고 있다.
    미국이 왜 이란을 공격하였는지, 어떤 출구 전략을 갖고 있는지 모호하다. 트럼프 행정부 내 주요 인사들의 발언에 일관성이 부족하다. 충분한 고민 없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인상이 짙다. 아마도 11월에 있을 중간 선거에서 역전의 기회를 노리려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지만, 현재 미국 내 여론으로 봐서는 크게 잘못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란은 최고 지도자를 잃은 후 적극 저항하고 있으며 항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사상자 수나 피해 규모로 보았을 때 매우 비대칭적인 전쟁이지만, 이란의 지도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산유국들을 괴롭혀 전세계 에너지 공급을 방해하고 전선을 확대하며 전쟁을 장기화함으로써 미국의 전쟁 비용을 늘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아프가니스탄이나 베트남은 생각하기 싫을 것이다. 국방장관의 인터뷰에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이나, 베트남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부분이 역설적으로 미국이 얼마나 전쟁의 장기화를 꺼려하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겉으로는 이란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장기전을 각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란은 (적어도 지도부는) 겉으로는 저항을 외치고 있지만, 매일 쌓여가는 피해가 심각하다.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 지 알 수 없다. 그러한 와중에 유가(CL1 Index)는 100불을 돌파하고 3월 9일 아시아 시간에서 120불까지 터치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특히 미국은, 그렇지 않아도 인플레이션이 위험요소로 부각 되고 있는 와중에 유가 급등은 부담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과 이란 정치 세력의 불투명성으로 인하여 어떻게 전쟁을 마무리 지을지 예측이 어렵다.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이란이란 어떤 나라인가

    어설픈 지식으로 남의 나라 대해서 아는 척하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럽다.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방 국가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란은 제정일치 사회이다. 국제적으로는 이슬람 시아파의 우두머리 국가이며, 국내 정치적으로는 종교 지도자가 최고 지도자의 역할을 한다. 대통령이 존재하고 대통령 선거도 하지만, 종교 지도자의 권한을 넘지 못한다. 실질적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대통령이다.
    AI가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에 제정일치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슬람 ‘혁명’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을 성공한 이후에야 종교 지도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혁명’ 이전까지는 정교 분리의 사회라는 말이다. 도대체 어떤 혁명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몇 백년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혁명 이전의 사회는 어떤 사회였던 것인가?
    혁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란은 ‘샤’가 지배하는 왕정이었다. 이슬람 혁명이라는 것은 이 왕조를 뒤엎고 제사장이 권력을 잡음과 동시 형식적으로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주의로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샤가 지배하던 왕조는 사실은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 자신들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부패한 정권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이 과도한 단순화라는 지적에 가장 취약한 지점이다.) 민심을 잃은 왕조를 종교의 힘으로 뒤엎은 것이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고, 호메이니 사후에 하메네이가 최고 지도자 자리를 넘겨 받으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이란 정권은 이스라엘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세계에서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년 동안 서구권과는 제대로 된 경제 교류를 할 수 없었고, 각종 경제 제재로 경제 활동은 위축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석유가 많이 나는 이란이라고 하지만,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현재 이란 정권의 지지율을 바닥에 가깝다. 미국 등 서방 세력의 경제 제재로 인하여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측면도 있으나 인터넷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지지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금년 초에는 저항하는 세력에 대하여 폭력적으로 탄압하여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바가 있으니, 이란 국민들 입장에서는 혹시나 미국이 해방군으로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일부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정리하면, 이란 정권은 반미 국가이면서 전근대적인 제정 일치의 정치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나라인데, 최근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는 상황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 받아 안팎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란 민중들의 운명

    이란에 살고 있는 민중들은 어떤 생각일까. 역시 외부인의 시선으로 함부로 추측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폭압적인 독재 권력에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외세가 들어와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을 마냥 환영할 수 있을까. 만약에 80년 광주 이후에 미군이 청와대를 공습했다면 미군을 환영할 것인가? 미군은 너무 전통적인 우방이라 감정 이입할 수 없으니, 일본이나 소련이 서울을 공습해서 전두환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감정적인 이유에서 ‘왠지’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감정적인 이유에서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발적으로 뒤엎지 않고 외세에 의해 정권이 바뀐다고 한들 그 정권이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고 민주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정권일 가능성은 낮다. 지금 상황에서도 미국은 어떤 정권이든지, 심지어 하메네이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미국의 영향력에 순응할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이란의 정권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나 저러나 이란 민중들은 폭압적인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당분간은 그러하다. 아무리 트럼프가 Regime change를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희망도 없으면서 나라만 파탄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전쟁을 시작할 줄은 알지만 끝낼 줄은 모른다고 한다. (볼만한 기사) 어리석은 지도자를 뽑은 초강대국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암울한 이란 민중들의 운명은 더욱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

    그러고 보면 전세계적 곳곳에 독재자가 존재한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 정권은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 미국도 민주 정권의 목록에서 빠져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정립하는 것도 어렵고 지키기도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이렇게 민주적인 국가가 된 것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더불어 몇 명의 압제자를 시민의 힘으로 몰아낸 경험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압제자를 몰아낸 자리에는 압제자가 다시 들어선다는 것이 법칙처럼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해낸 나라인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역사를 이야기하면 젊은 세대들에게는 꼰대가 될지도 모르지만, 붙들고 싶은 자부심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오래 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란 영화이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지만 지금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너무 오래된 영화라 어렴풋이 몇 가지 장면과 이미지만 기억이 난다.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짝궁의 노트를 잘못 가져오는 바람에 친구가 숙제를 못해 선생님께 혼나게 될까 걱정하여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친구 집을 찾아 가는 과정에 우여곡절을 겪는 어린 아이의 순진한 마음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목숨 바쳐야 할 신도 없고, 지켜야 할 석유도 없는 영화 속. 지켜주고 싶은 어린아이의 착한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란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겠고, 우리 사는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Yuval Noah Harari, 2018.

    ‘Sapiens’, ‘Homo Deus’등의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이다. 그렇지만 이미 작년.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Sapiens’에서는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영장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됐는지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았고, ‘Homo Deus’에서는 신이 되어 버린 인류의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저자는 ’21 Lessons..’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고 밝히고 있다. 복잡해지고 현혹되기 쉬운 세상에서, 일상 생활에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조차 사치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명료함(clarity)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현재 몇 가지 측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트럼프류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liberalism, 그냥 자유주의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는 19세기 이래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과 경쟁하면서 보완해 나가면서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한 자들도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트럼프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구 온난화는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해 가고 있으며, 이 두 기술을 융합되어 갈 것이다. 이 두 기술의 융합은 인류의 대부분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앞으로 착취(exploitation)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irrelevance)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Homo Deus’의 주된 주제이다.) 먹고는 살겠으나, 의미 있는 일자리는 더욱 없어질 것이고, 일부 데이터를 독점하는 자와 그 외 대다수로 명확히 계급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인 수준에서만 대응이 가능한 것들인데, 오히려 벽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현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트럼프의 MAGA는 먹혀 들고, 영국인은 Brexit가 실업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시진핑은 모택동이 되고 싶어하고, 푸틴은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서는 크림반도를 때림으로서 국수주의를 선동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IS라는 단체가 득세하고 있는데, 테러리즘은 이런 상황에서 더 효과적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암울하다. 사실 암울하다. 해결책이라고 떠오르는 것들은 별로 없다. 이 쯤에서는 애국주의(Nationalism)를 선동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에 가깝다. 종교는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저자는 현대의 종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애국주의의 시녀(Handmaid of Nationalism)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자의 해법은 명확하지 않다. 도입에서 말했듯이 저자의 목적은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위한 논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당황하지 말고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겸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21세기에는 너무 상투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뇌과학이 발달하고 관련하여 경제학 분야에서도 행동경제학이 부각되듯이, 사람들은 편견에 쉽게 노출 된다. 일단 믿는 것은 계속 믿는다. 믿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은 큰 고통이니까… 우리 나라에도 아직 20% 이상의 자유당 지지자들이 심각한 바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때려 놓고 맞은 놈이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견을 주입한는 언행, 혐오를 선동하는 언행은 매우 사악한 것이고 생각보다 폐해가 크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더 절망적이구나. 그렇지만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난다면 편견에서 빠져 나오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가치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해야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Justice)의 정의가 달라져야 될 수도 있다.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Sapiens’에서부터 주장하던 내용인데, 인류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의 상당 수는 단지 믿음일 뿐이다)
    결국에 눈에 보이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겁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Keep calm and carry on… 하는데, carry on 할 것은 일상 생활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되새김인 것 같다.

    두 번 읽을만한 가치 있고 그 정도의 재미도 있다.

  •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폭격-김태우

    아마도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게 한국인은 공산당에 대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보여졌던 것 같다. 현대의 인권 개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들에게 아시아인은 열등한 인간, 목숨 값이 덜 나가는 인간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현대의 이라크 전쟁에서 아파치 헬기 (물론 미군의) 조종사들이 농담 따먹기 하면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물며 60여년 전에는 이보다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전쟁은 1951년 6월까지 약 1년 가까운 공방 기간과, 그 이후 2년 간의 휴전 협상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2년 간의 휴전 협상 기간 동안 남한의 후방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였으나, 북한 지역은 전후방 할 것 없이 수시로 폭격을 견뎌 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2년 동안 토굴에서 지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 봤다면 왜 그렇게 북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미국을 증오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한국전쟁은 그들의 전쟁이었다라고 주장한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고, 김일성이 도발한 전쟁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3년 동안이나 전쟁이 이어진 것은 강대국의 이해 관계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휴전 협상이 시작될 당시, 그러니까 전쟁 발발 후 1년이 되는 시점부터 휴전을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에 의한 피해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했고, 많은 것을 양보하더라도 휴전을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의 반대로 휴전 협상은 2년동안이나 지속 되었고, 미 공군은 휴전이 타결 되는 날까지 북한 지역에 폭격을 계속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는 그들의 전쟁터가 되어, 3년 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연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습하여 수백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있는 현재, 60년 전 한국인에 대해 공감하는 만큼 현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정 이입이 된다. 폭탄 투하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조작과 지상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대비가 인간의 존엄성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이스라엘인들은 공습받는 가자 지구를 지켜 보며 말 그대로 ‘박수’를 보내고 있다. 모군의 말대로 악의 평범함인가? 잊지 않고 계속 되뇌이지 않으면 우리 안의 악마에게 지배 받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족…
    ‘Israel air strike’로 구글 검색해 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마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인 듯 보여진다. 듣던대로 미국 언론은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듯 하다.

    Please, be more human…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 E.H.카

    whatishistory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에 쓰여져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이미 이책이 자유롭게 번역 되어 읽히던 시절이었지만 아쉽게도 20년이 지난 2014년에 처음 읽게 되었다. 쓰여진 지 50년이 지난 책이니만큼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도 당시로서는 논쟁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객관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연과학에서조차 절대 진리라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에는 역사적 사실의 바탕에는 절대 진리가 있다는 생각도 유행했었던 것 같다. 상대성(?) 상대주의(?)가 일반화된 것도 이 책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일부분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책의 키워드는 ‘변증법’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미래에 비추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문제인데, 나로서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역사의 진보의 방향을 탐색하는 변증법적 과정이 역사다.’ 정도로 요약하는 것이 최선이다.

    저자는 역사는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 즉,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라며 역사의 방향을 초이성적인 힘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문학도 아니라고 한다. 아무 가치 판단도 없는 옛날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느냐를 통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찾는 행위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역사에는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갈 길에 대한 모색이 목적일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 사회에 있어서,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진리에 가깝다.

  • 근대를 말하다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2014-03-31

    mordern

    나는 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매우 못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재미 없었다는 점은 다들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특히 못했던 이유는 반골 기질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노예 근성 흘러 넘치는 지금의 내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나는 국사와 국민윤리에서 양을 받음으로써 국정 교과서에 대해 저항한 셈이다.

    저자는 우리 국사 교육에서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망국의 과정과 식민지배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 비교적 쉽고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되는 수준에 도달한 것 같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얼마나 대책이 없었으며 독립 운동 세력들은 그 얼마 되지 않는 힘들을 통합하지 못해서 기력을 낭비했던지 하는 안타까움들이다.
    잡생각 중 한 가지. 우리 선배 세대의 학생 운동의 노선 투쟁과 근대의 독립운동이 사뭇 비슷하다는 점이다. 막강한 적을 앞에 두고 실체도 불확실한 내부 권력 다툼, 노선 다툼 때문에 자멸하는 모습 말이다. 이거 혹시 우리 국민성 아닌가 문득 기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설명이 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대의를 중요시하는 부류와 내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류로 사람을 나눌 수 있다면, 대의를 중요시하는 부류는 독립 운동에 힘썼을 것이고 그 안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리라. 반면 반대 부류의 인간들은 친일을 했을 것이고 오직 한 가지 목적, 같은 세력의 영달을 위해 단결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선배 세대의 모습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부족했던 것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진짜로 국민성이 그래 먹은 것일까.
    우리가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재를 용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친일 줄기 집단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에게 지배 받고 있는 답답한 현대를 살고 있는 것은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덤으로 얻은 독립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 운동 세력의 답답한 내부 분열을 보면서 착잡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디테일에 대해서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왈가 왈부 말이 많고, 같은 뉴스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180도 달라지기도 하고,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니, 역사적 사실이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왜곡도 밥 먹듯 일어나니, 역사 왜곡은 얼마나 또 쉬운 일이겠는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들의 사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인데, 인문학은 천대 받고 있고 우리 고등학생들에게 국사가 필수 과목이 아니라 하니, 착잡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