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서평

  • 마의 산 – 토마스 만

    1차 대전이 발발할 즈음에 발간된 토마스 만의 소설이다. 토마스 만의 대표작이며 독일 문학의 정수이다. (라고 한다.) 20세기 초반 유럽을 배경으로 한 번역 소설이다. 배경이 낯설고,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읽히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소설의 초반에는 시간이 매우 더디게 흘러가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다 읽고 나면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함부르크 출신의 엔지니어로서 이제 막 조선 회사에 취업을 앞두고 있는 새파란 젊은이다. 그는 사촌 요하임의 병문안을 목적으로 3주 계획으로 하여 스위스의 외딴 요양원을 방문한다. 요양원은 해발 3,000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위치한 고립된 세계이다. 접근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주변의 시내로 쇼핑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묘사 되지만, 심리적으로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묘사 된다. ‘평지’와는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인 것이다.
    병문안을 목적으로 왔지만, 한스 자신도 폐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것을 핑계로 정식으로 산의 사람이 되어 요양원에 머물게 되며 산속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산 위의 일상 생활은 하루 5 번의 화려한 식사와 그 사이 사이 침낭 안에서 누워 지내는 안정 요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 방탕한 환자들은 규율을 어기고 시내로 외출을 하거나 소풍을 하기도 하고, 도박을 하거나 밤 늦게 까지 연회를 즐기기도 한다. 또한 환자들 사이에 남녀 관계가 미묘해지면서 불륜과 같은 연애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 산 위에서의 요양 생활은 사람의 정신을 흐릿하게 하여 평지의 삶을 잊고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배회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의 흐름은 점점 빨라진다. 3주를 계획하고 산 위에 올라왔지만, 어느덧 계절이 휙휙 지나가고 우리 주인공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무감각해지고 만다.
    사실 병을 핑계로 한스가 요양생활에 들어가게 됐지만, 그는 쇼샤 부인이라는 러시아 출신의 여인에게 연정을 느껴 그곳에 머물고자 한 것이었다. 쇼샤 부인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부인이다. 병을 핑계로 남편에게서 벗어나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중이며, 행동거지가 정숙하지 못하다. 한스는 그녀의 행동거지에 언짢은 첫인상을 가졌었으나 어느 순간에 그것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였고, 사육제의 밤에 그녀와 특별한 밤을 맞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날 쇼샤 부인은 요양원을 퇴원하여 평지로 떠나 버리고 만다. 쇼샤 부인은 그렇게 하룻밤만 남기고 떠나 버렸지만, 돌아오리라는 암시를 남기고 떠났으므로 한스는 불확실한 희망을 품고 요양 생활을 지속한다.
    한스가 요양원의 마성에 물들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그의 사촌 요하임, 애초에 한스의 방문 목적이어던 요하임은 산속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지로 향한다. 요하임은 원래 장교 지망생이었으나 병에 걸려 꿈을 잠시 유보한 상태였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평지로 내려가 소위로 임관한 그는 결국 의사의 예언대로 얼마 가지 못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세가 악화되어 이른 나이에 그러나 근엄한 모습으로 죽고 만다. 사촌의 요양을 방문하러 산에 올라왔던 한스는 산에서 만난 연인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중, 사촌을 불의에 떠나보낸 후 더욱 우울감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로 산에 머물게 된다.
    요양 생활 동지들 중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세템브리니라는 인문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자칭 교육자이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그는 한스에게 이 산중에서 어서 벗어나 평지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촉구하지만 한스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로 나프티라는 예수회 출신 사제가 등장한다. 그와 세템브리니는 사사건건 관념적인 논쟁을 벌인다. 진보적인 인문주의자와 보수적인 종교인이므로 당연히 의견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논쟁의 목적은 상대방을 논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스의 머릿속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스의 머리는 요양원의 마성에 질식 되어 가고 있는 한편 두 논쟁적인 교육자의 정복 대상이었던 것이다. 두 교육자의 논쟁은 너무나도 첨예하여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치닫게 되고,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느낀 나프티는 세템브리니에게 권총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결투 당일, 세템브리니는 결투를 포기하는 뜻으로 하늘로 권총을 쏘고, 이에 분노한 나프티는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결국 한스가 기다리던 쇼샤 부인은 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쇼샤 부인은 병을 핑계로 남편에게서 벗어나 여기저기를 여행하던 중 페퍼코튼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은퇴한 사업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었고, 그와 함께 요양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한스의 두 교육자와는 달리 페퍼코튼은 제대로 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말을 제대로 끝맺는 법이 없었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말들만 내뱉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리스마적인 위압감이 있었다. 마치 왕과 같은 위엄을 갖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비록 연적이기는 하지만 한스도 그에게 깊이 빠져들고 만다. 사실 작품 전반에 걸쳐 한스는 동성애적인 성향을 보인다. 어린 시절 히페라는 친구와의 회상 장면에서는 직접적으로 동성애적인 감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쇼사 부인에게 끌리는 것도 사실은 그녀의 행동거지, 사고방식이 남성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스가 호감을 느끼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은 남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한스가 페퍼코른에게 빠져버림으로써 쇼샤가 산으로 돌아왔지만, 한스와 쇼샤와 페퍼코튼은 실로 이상스러운 삼각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요양 생활 중, 페퍼코튼은 병세가 악화되어 가자 병에게 굴복하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한다. 그의 자살은 한스와 쇼샤 모두를 실의에 빠지게 만들고, 쇼샤는 다시 평지로 내려가 버린다.
    그 후로도 마성의 산에 갇혀 한스는 7년의 시간을 보낸다. 3주의 계획이 7년으로 늘어나 버렸지만 한스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산속의 마법이 풀리게 된 것은 평지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점으로 유럽은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요양원의 사람들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각자의 고향으로 서둘러 돌아가고, 한스 또한 고향인 독일로 돌아간다. 소설은 고향으로 돌아간 한스가 군에 입대하여 처참한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암시하면서 끝난다.
    소설에서 깊은 산중의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악마적인 공간이다. 총명한 젊은이의 영혼을 타락 시켜 7년을 방황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용기를 내어 도망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결국에 다시 돌아오는 자도 많고 도망칠 생각을 못하는 자들도 많다. 누구도 구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우리에게 악마의 산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소리 없이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환경은 무엇인가. 루틴이 있다는 것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요양원의 하루 5끼의 화려한 식사와 사이사이의 안정요양은 사람을 안정시킨다. 당장 할 일이 있다는 것에서 자존을 느끼는 것이다. 직장 생활도 ‘마의 산’이 될 수 있다. 가방 들고 왔다 갔다 하는 학교 생활도 ‘마의 산’이 될 수 있다. 용기 내어 도망치는 것은 말 그대로 용기가 필요하다. 섣불리 도망쳤다가는 불쌍한 요하임과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에 언젠가는 그런 운명에, 즉 죽을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인생 자체가 ‘마의 산’이 될 수도 있다. 소설의 초반의 느린 시간의 흐름처럼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은 시간이 더디게만 가다가 언젠가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라며 허탈해 하는 것이다. 인생 자체가 ‘마의 산’이다. 깨어 있지 않고 요양원의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만족하며 생각 없이 산다면 그렇게 된다. 깨어 있기 쉽지 않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 무정

    무정, 이광수, 1917.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설이다. 문학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하고 하는 소설이지만 별로 읽어 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아마도 친일파 이광수라는 사람에 대한 반감으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아가 추한 자가 글재주만 가졌다라고 생각했다. 인격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글재주는 잔재주이며 위험한 재주이고 피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경계해 오던 바이니 읽어 보도록 하자. 오히려 나의 이런 친일파에 대한 경계감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됐을 수도 있겠다.

    소설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형식이라는 경성학교 교사가 어린 시절의 은인인 박진사의 딸 영채와 수 년 만에 조우하게 된다. 영채와 형식은 박진사가 어린 시절부터 베필로 정해 두었던 사이였으나, 박진사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거기서 세상을 등지고 형식은 동경유학을 떠나면서 헤어지게 된 사이이다. 그 사이에 영채는 갖은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의 몸이 되었고 그럼에 형식을 생각하며 정절을 지켜오고 있었다. 한편 그 둘이 조우하는 날 형식은 김장로의 딸 선형의 영어 개인 교사가 되어 처음 만나게 되었고, 젊은 남녀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흐르게 된다. 이 때 영채는 배학감이라는 경성학교의 학감의 구애를 거부하다가 결국 강간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형식과 형식의 친구 우선이 목격하고 만다. 영채는 좌절하여 자결을 결심하고 편지 한 장을 남겨 두고 떠나게 되는데, 형식은 그런 영채를 찾으러 평양까지 뒤따라 갔다가 하루 만에 돌아오고 만다. 바로 그 날 형식은 김장로로부터 선형과의 약혼과 동반 미국 유학을 제안 받고 승락하기에 이른다. 묵숨을 끊으러 가던 영채는 기차에서 신여성 병욱을 만나는데, 병욱의 설득에 자결을 포기하고 삼종지도라는 가치관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나아가 영채와 병욱은 함게 동경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부산행 기차에 오르는데, 이 때 미국 유학을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탔던 형식, 선형과 우연히 마주친다. 어색한 상황에서 부산으로 가다 큰 홍수를 만나 삼랑진에서 기차가 멈추게 되는데, 그들은 삼랑진의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성금을 모아 수재민을 돕고 서로 유학길에서의 포부를 밝히고 길을 떠난다.
    사건 중심의 줄거리는 이러하지만, 작가는 지면의 상당 부분을 각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할애하고 있다. 특히 이형식이라는 자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속물적이지만 때로는 작가가 직접 지적한 대로 마음이 약한 모습도 보인다. 영채의 정절을 의심했다가, 그런 의심을 하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 막상 선형과의 결혼이라는 기회에 기뻐하다가도 그 결혼 기회가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런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의 묘사적인 측면에서 이 소설을 근대 소설의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플롯의 측면에서 보면 현대의 소설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음악회를 여는 부분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생뚱맞다’라고 밖여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민족 계몽을 위해 힘쓰는 감동적으로 결말을 내리는 부분은 앞서 전개 되었던 갈등들을 카펫 밑으로 쓸어 넣어 버리는 것과 같다.
    ‘최초’의 근대 소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동시대인들에게는 파격적인 주제와 구성이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아마도 최초로 한글 구어체 소설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전이라고 하는 수준에 들어서려면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울림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친일파의 글이라는 선입견이 없다고 하더라도 고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이다.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가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실제로 부쳐지지는 않았고, 카프카의 아버지는 이 편지를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글은 카프카 사후에 발견 되어 출판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 100주기라고 하기에 카프카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읽게 되었다. 부자간의 각별한 정을 담은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글이 출판할 만큼 이목을 끌지는 못했을 것 같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혈기 왕성하고 호전적이며 의욕적인 사람이었는데, 카프카는 그렇지 못하였고 오히려 반대였다고 한다. 그는 그런 아버지에게 주눅 들어 점점 아버지를 두려워하게 됐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지는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전에 언젠가 제게 물어보셨지요. 어째서 제가 아버지한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느냐구요.

    왜 자신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이 되었고, 그 와중에 부자지간이 소원해졌는지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결과의 책임이 아버지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린 시절의 사건들까지 들춰 내면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이 자신을 어떻게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항의하고 있으며, 급기야 입을 닫아 버리게 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리고 이런 가족 관계가 자신의 글에 투영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과 같은 소설에서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힐 듯 다가갈 수 없는 성이라는 존재가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유래하게 된 것이지 싶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예상되는 반박을 정리하고 그것에 대해 재반박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했다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더욱 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고자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상기 시키면서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삶과 죽음이 보다 가벼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결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약간은 당혹스럽게 한다.
    100년 전 일이지만, 지금 한국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 주기 쉬운 존재이다. 아들은 조금씩이라도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100여년 전, 체코에 사는 유대인 카프카는 그것을 30 넘어서까지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나의 관점으로 봐서도, 평생을 걸쳐 아버지로부터 해방 되고 싶어했다고 하지만 30세가 넘어서까지 해방 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투정 부리는 것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역설적으로 그런 상처 덕분에 그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런 소설가로서의 감수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볼 수도 있다.
    카프카의 주장을 옹호해 주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그의 ‘찌질함’에 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운이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의 특수성에 대해서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소설가가 쓴 에세이로서 소설가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 놓는 글이기 때문에 진솔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 Being Mortal

    나는 달팽이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딸아이가 10살 남짓 됐을 때, 학교에서 작은 화분을 들고 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주먹만한 화분이었다. 무슨 식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딸아이는 그 화분을 제대로 키워 보고 싶었는지 조금 더 큰 화분으로 옮겨 담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흙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달팽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화분보다 그 달팽이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 달팽이를 제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고 ‘베베’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달팽이와의 만남은 짧게 스쳐 가고 말았다. 달팽이 집이 될만한 상자를 찾고 달팽이를 옮기고 부산스러운 와중에 흙을 쏟고 말았고, 베베는 순식간에 시야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베베가 보이지 않자, 딸아이는 베베가 수채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베베가 죽게 됐다며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아이를 달래려, 말하자면 베베의 가묘를 만들어서 위로해 주었다.

    신해철이 병아리 얄리를 통해 죽음을 느꼈던 것처럼, 아이는 베베를 통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그날 밤 아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이를 속일 수가 없어, 죽은 후의 하늘나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 주었을 때, 그러니까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말했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아이에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 말을 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그 때 상처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이른 나이였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른 나이여서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싶다. 지금은 사춘기가 된 아이에게, 베베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피식 웃고 만다.


    Being Mortal, Atul Gawandi, 2014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한다.
    아툴 가완디의 이 베스트셀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주제로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떤 형태로 죽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역설적으로,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의 과정은 비인간적이 되어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일은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 서서히 약해지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료 기술의 도움으로 회복하기도 하지만, 추세적으로는 약해져 가는 과정을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과정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현대 의료 체계는 우선은 ‘살려’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고통의 과정이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된다. 분명히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말기암이나 때로 어떤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임종을 맞은 가족이 있는 사람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보내 드려야 한다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저 살려 두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신성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죽는 과정을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신성함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가장 급진적인 나라에서는 안락사가 합법이 된 지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마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된다는 쪽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 스스로 죽는 과정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은 아니고 현실적인 내용의 책이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생각하는 바가 많게 만든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그 명백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죽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것 같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한하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책의 번역서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뜻으로 이해 된다.

  • 페스트

    20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2020년은 아주 먼 미래의 대명사격이었다. 그러니까 2020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전부 하늘로 다니고 로봇이 서빙을 하고 저마다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등…(응?)
    그러나 시간은 단절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문명 세계에서 21세기를 살아 왔기 때문에 저마다 손에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전염병이다. 혁신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깜짝 놀랄 준비를 하고 있던 자들이 가장 원초적인 미생물들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코로나19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크게 뒤흔들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소설은 오랑이라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화롭지만 삭막한 이미지인 이 도시에 페스트가 발병하게 된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페스트의 발병으로 도시 전체는 폐쇄되게 되고, 시민들은 사실상 유배당한 삶을 살게 된다. 전염병은 도시 전체의 삶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꿔 버린다. 특수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대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엿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페스트라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같다.
    주인공 격인 의사 리외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행위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또 다른 주인공인 타루는 성자가 되는 것보다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것이 더 어렵다고 답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보다는 질문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결국 내 관심사는 어떻게 성자가 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타루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
    “어쩌면요. 그런데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내 생각에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 그래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야심이 덜하죠.”
    -본문 인용-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어려운 대답이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알기 쉽다. 인간답지 않은 것, 참혹한 것, 바로 페스트 같은 것들이 인간답지 않은 것 아닐까?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와중에 굳이 작중에 인간의 무지를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2차 대전 즈음하여 나치즘이 등장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결국에 집권을 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윤리의 문제라는 게 복잡한 것이지만 무지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윤리의 많은 문제의 해결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 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

    하지만 서술자는 오히려 이런 훌륭한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악에 대해 간접적이고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일 뿐이고, 또 인간의 행동에서 악의와 무관심이 더 흔한 원동력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악하기보다는 선하다. 사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는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며, 바로 이것이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분명 가능한 통찰력 없이는 참된 호의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을 것이다.-본문 인용-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 이후의 나치즘의 광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당시의 페스트였다고 하면 지금의 페스트는 무엇일까?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나치즘의 간균이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갖가지 혐오가 나치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본문 인용-

    여혐, 남혐, 지역 혐오, 외국인 혐오 등등 셀 수 없다. 페스트 간균은 끈질기게 인간들 사이에 숨어 인간성을 말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페스트 간균을 살포할 준비가 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이 쯤 되면, 페스트 간균과 인간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 혐오라고 하는 것이 인간성의 한 부분이고, 인간이 인간성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부분만을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인간으로 살기 어렵다. -네루다. 사람되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등등 인간으로 산다는 문제는 쉽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