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하게 살기

주기적으로 사단법인 더불어숲으로부터 메일을 받아 보고 있다.
신영복 선생을 기리는 재단인데, 메일 읽을 때마다 ‘샘터 찬물’에 세수하는 듯 정신이 들고는 한다.

巧詐不如拙誠이라는 메세지를 받았다. 그대로 옮기자면, 교묘한 속임수가 졸한 진실만 못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잔머리를 쓰고 똑똑한 척 해 봐야 요새 유행하는 말로 ‘진정성’을 당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하물며 머리도 안 좋은 사람이니 담백하게 살자고 다짐을 매번 하지만, 이리 저리 머리 쓰다가 혼자 괴로워하고는 한다.
다시 찬물에 세수 한 번 하고, 담백하게 살아 보자.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1996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역사에서 배워야합니다.

무감어수(無鑑於水) 감어인(鑑於人)

평등은 단지 ‘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 ‘자유의 최고치(最高値)’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여행기를 1996년에 책으로 묶은 것이다.
선생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말투로 여행지에 얽혀 있는 사연과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그간의 선생의 저작에서 효율보다는 관계 발전보다는 인간을 강조하는 선생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한가해 보인다.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보면 (비록 온화한 말투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급진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회주의/자본주의 패러다임 자체를 보고 구시대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 보수의 패러다임을 떠난 성찰의 말씀들이다. 쉴새 없이 돌아가며 풍족한 가운데 불안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되돌아 보는 시간이다.
이미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경계해야하는지…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몽롱한 가운데 찬물로 낯을 씻는 기분이다.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그간 전혀 안 읽은 건 아니지만 쓰지 않으니 남는 것이 없어, 한 글자라도 적어 보려고 한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lecture

‘강의’는 얼마 전에 타계하신 신영복 선생께서 성공회대에서 강의한 동양 고전 수업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빠듯한 사람들에게 동양 고전을 얘기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터미네이터의 무대가 먼 미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점에, 수천년 전 세상을 들여다 보자니 한가해 보일 것이다. 방대한 내용을 책 한 권으로 다루려다 보니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 다룰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고전 좀 아는 지성인이라고 뽐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왜 동양 고전을 읽고 가르치고자 했는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관계’ 또는 ‘관계론’이 될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존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사고 방식의 근본은 존재론적 세계 인식이라고 보고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스스로에게 실체성을 부여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야 하고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증식을 위한 경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서양식 사고 방식의 기저라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자본주의는 승리하였고, 그 승리의 엔진은 자본의 자기 증식 욕구였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는 세계화를 통해 20세기의 패러다임 유지해 가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가 말했다. 나 잡아가지 말아 주세요.)
동양의 사고 방식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를 강화하여 지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모순과 갈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가 동양의 ‘관계론’이며, 이 지점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장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군자는 화(和)하고자 하지만 同하려고 하지 않고, 소인은 同하려고 하고 和하지 못한다.)

和한다고 하는 것이 조화롭고자 한다는 뜻이고 同한다는 것은 같고자 한다는 뜻인데, 같고자 한다는 것이 곧 지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많이 이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판단 없는 양비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도 역시 논어의 구절인데, 한번 새겨볼만 하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不如鄉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착한 마을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마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만 못하다.)

조화라는 것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의견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애매하게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보신주의가 팽배한 세상에 다시 되새겨야할 말이다. 중립은 기회주의의 다른 말이다. 당파성 없이 모순을 피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되겠다. 그런데 사는 게 피곤해.
앞서도 말했듯이 바쁜 세상에 동양 고전을 읽는 것이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흔한 상투적인 구절이지만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을 반드시 진보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옛 것을 읽히자는 것이 옛 것을 유지하자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옛 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이고 옛 것의 위에 비판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야 말로 스승의 할 바라고 한다.
최근에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를 읽고 있는데, 놀랍게도 신영복 선생과 통하는 면이 많다. 근대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을테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책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옛 것에서 일종의 힌트를 얻고자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알파고가 관심을 끌면서 앞으로 살아 남게 될 직업군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었다. 기계가 생산성을 극단으로 끌어 올리고 대부분의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게 될 시점에서, 인간의 경쟁력은 인간다움이 될 것이다. 그 중 가장 인간다움의 영역은 윤리와 철학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가치의 판단은 먼 미래까지도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뭐 먹고 사느냐에 관심 갖고 자기 개발서 읽는 것보다 인간다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에서도 나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또 먹고 사는 문제로 연결 시키는 것도 우습긴 하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을 핑계로 앞만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앞이 바로 한 치도 안 되는 코앞이라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잠시 숨 돌려 옛 것을 익히고 먼 곳을 바라 보고, 인간 다움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신영복 선생을 만나다.

나의 친구 C모 양의 소개로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체구는 크지 않으셨으나 강인한 기(?) 같은 것인 느껴졌다. 눈빛은 청년처럼 맑았고 표정은 부드럽고 인자함이 느껴졌다. ‘외유내강’이 선생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다.

달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재치 있고 간간히 유머도 섞여 가면서 말씀하시는 스타일이셨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인생 경험 자체가 아주 극단적있고 드라마와 같았기 때문에 그 인생의 단 한 토막을 듣는 것도 사람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어제 강의부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발췌하여 읽기로 하셨나보다. 그 전에 ‘청구회추억’이라는 선생의 글을 동영상으로 편집한 영상부터 같이 보았다.

청구회 추억 동영상 보기

동영상을 보면, 한 청년과 어린이들 간의 따뜻한 우정에 웃음 짓게 되고, 그들을 갈라 놓는 한편으로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폭력적 국가 권력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의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애초에 선생께서는 왜 그 아이들과 친해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 중 누가 지나가는 어린이들을 보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걸까, 열정과 애정이 없는 걸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목이 말해주는대로, 선생님의 20여년의 수감 생활 동안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 시절 감옥에서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필기도구를 소지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오직 한 달에 한번 편지를 교도관의 입회 하에서 쓸 수 있었는데, 이 편지를 이용해서 당신의 생각들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색을 공중에 날려 버리기 싫어서, 한 달 동안 생각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다듬고 문장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편지 쓰는 날이 되면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옮기기만 하면 됐다고 한다. 마치 쏟아내듯이… 그래서 선생님의 편지에는 수정한 흔적이 전혀 없다고 자랑까지 하셨다.
나는 지금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적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어제 했던 생각들은 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처음에 무슨 마음 가짐이었는지 마지막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잡념일 뿐이지만, 그것들 날아가 버리기 전에 붙잡아 두는 것에서부터 내공은 시작되는 것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고 한 줄이라도 남기자는 각오는 계속 정당성을 갖는다.

이번 강의의 주된 텍스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일부인 ‘한발 걸음’이었다. 간단한 줄거리를 먼저 말하자면, 아주 체력이 좋은 젊은이가 한 발로 뛰고, 늙고 병든 노인이 두 발로 뛰는 시합을 했을 때 다들 젊은이가 이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노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이 실화를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한 발은 실천, 경험, 현실을 의미하고 다른 한 발은 이론, 사색, 독서 등을 의미한다. 아무리 잘 나고 많이 배우고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반쪽 짜리 절름발이라는 것이다. 실천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는 목발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때 목발이 나의 생발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며 이는 목발 없는 한쪽 발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완전 독립적일 수 없는 존재라고 선생은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천지)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증법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 공부라고 한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말씀은 싸움에서 이길 때 6:4로 이겨야지 8:2로 이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싸움이 끝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야 된다는 말씀이고, 인간 세상에 갈등은 불가피하나 그를 다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걸 가져야 된다는 뜻이겠다.

넥타이 맨 아저씨 주제에 학교 같이 신선한 곳에 간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고, 온 보람을 느꼈다. 게다가 열정, 희망 등의 단어와 거리가 먼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굴레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며 합리화하는 일상이다.

이상 좋은 말씀 잊지 않기 위해 두서 없이 적음.

좋은 경험으로 인도해 준 C양에게 감사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