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을 만나다.

나의 친구 C모 양의 소개로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체구는 크지 않으셨으나 강인한 기(?) 같은 것인 느껴졌다. 눈빛은 청년처럼 맑았고 표정은 부드럽고 인자함이 느껴졌다. ‘외유내강’이 선생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다.

달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재치 있고 간간히 유머도 섞여 가면서 말씀하시는 스타일이셨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인생 경험 자체가 아주 극단적있고 드라마와 같았기 때문에 그 인생의 단 한 토막을 듣는 것도 사람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어제 강의부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발췌하여 읽기로 하셨나보다. 그 전에 ‘청구회추억’이라는 선생의 글을 동영상으로 편집한 영상부터 같이 보았다.

청구회 추억 동영상 보기

동영상을 보면, 한 청년과 어린이들 간의 따뜻한 우정에 웃음 짓게 되고, 그들을 갈라 놓는 한편으로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폭력적 국가 권력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의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애초에 선생께서는 왜 그 아이들과 친해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 중 누가 지나가는 어린이들을 보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걸까, 열정과 애정이 없는 걸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목이 말해주는대로, 선생님의 20여년의 수감 생활 동안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 시절 감옥에서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필기도구를 소지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오직 한 달에 한번 편지를 교도관의 입회 하에서 쓸 수 있었는데, 이 편지를 이용해서 당신의 생각들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색을 공중에 날려 버리기 싫어서, 한 달 동안 생각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다듬고 문장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편지 쓰는 날이 되면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옮기기만 하면 됐다고 한다. 마치 쏟아내듯이… 그래서 선생님의 편지에는 수정한 흔적이 전혀 없다고 자랑까지 하셨다.
나는 지금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적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어제 했던 생각들은 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처음에 무슨 마음 가짐이었는지 마지막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잡념일 뿐이지만, 그것들 날아가 버리기 전에 붙잡아 두는 것에서부터 내공은 시작되는 것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고 한 줄이라도 남기자는 각오는 계속 정당성을 갖는다.

이번 강의의 주된 텍스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일부인 ‘한발 걸음’이었다. 간단한 줄거리를 먼저 말하자면, 아주 체력이 좋은 젊은이가 한 발로 뛰고, 늙고 병든 노인이 두 발로 뛰는 시합을 했을 때 다들 젊은이가 이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노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이 실화를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한 발은 실천, 경험, 현실을 의미하고 다른 한 발은 이론, 사색, 독서 등을 의미한다. 아무리 잘 나고 많이 배우고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반쪽 짜리 절름발이라는 것이다. 실천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는 목발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때 목발이 나의 생발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며 이는 목발 없는 한쪽 발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완전 독립적일 수 없는 존재라고 선생은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천지)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증법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 공부라고 한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말씀은 싸움에서 이길 때 6:4로 이겨야지 8:2로 이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싸움이 끝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야 된다는 말씀이고, 인간 세상에 갈등은 불가피하나 그를 다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걸 가져야 된다는 뜻이겠다.

넥타이 맨 아저씨 주제에 학교 같이 신선한 곳에 간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고, 온 보람을 느꼈다. 게다가 열정, 희망 등의 단어와 거리가 먼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굴레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며 합리화하는 일상이다.

이상 좋은 말씀 잊지 않기 위해 두서 없이 적음.

좋은 경험으로 인도해 준 C양에게 감사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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