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의미

크루그먼(Paul Krugman)이 뉴욕타임즈에, 2019년 5월 11일에 기고한 칼럼 내용 요약이다.
현 시점 상황은, 트럼프가 중국과 무역 협상 판을 엎으려는 제스쳐를 해서 (물론 트럼프는 중국이 뒤로 호박씨 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시장을 위험회피 모드로 만들어 버린 다음 다소 소강 상태가 된 상황이다.
원문은 아래 링크.
Killing the Pax Americana


사람들이 무역 전쟁에 대해서 두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서 바로 잡아 주고 싶다. 트럼프는 원래 아무 것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없으니 트럼프가 착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비판자들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한 편으로 사람들은 무역 전쟁의 단기적인 측면의 비용에 대해서 과대 평가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무역 전쟁의 장기적인 영향은 과소 평가하고 있다.
단기적 관점에서, 관세는 세금이다. 그게 끝이다. 역진세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어쨌든 세금이고 그 규모도 아직까지는 GDP의 1%에 불과하다. 아직까지는 무역 전쟁이 전 세계적 경기 침체(global recession)을 야기할 것 같지는 않다. 트럼프가 무역 전쟁을 다른 지역까지 확대 시킨다면 GDP의 2%에 달하는 수축적인 재정정책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가 그렇게 할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그 상태까지 오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보복이 있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보통의 관세 인상보다는 덜 나쁘게 된다. 관세를 부과했는데 상대방이 보복을 안 하면, 미국 수출품 가격 인상을 가져오고, ‘terms of trade’(terms of trade effect)효과로 관세에 의한 경제 왜곡 효과를 역전 시킨다. 만약에 보복한다면 관세는 그저 국내 소비자들에게 세금 부과하는 효과만 남게 된다. (잘 이해 안 되고 혹시 오타가 아닐까 싶지만, 뒤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하니 넘어감.)
그것보다 중요한 점은, 무역이 전세계적이고 경쟁우위라는 개념을 건드린다는 이유로, 그 실제 효과보다 관심을 더 많이 끌게 된다는 것이다. 무역 정책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다른 정책 (재정 정책, 보건 정책)들이 중요한만큼만 중요하다.
무역 정책이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중요성 보다는, 무역 정책이 민주주의와 평화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유럽에서는 자명하다. EU의 유래는 1950년대에 ‘Coal and Steel Community’인데, 이것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협정이었지만 프랑스와 독일 간의 미래 전쟁 예방이라는 진짜 목적을 수반하는 협정이었다.
미국에서 이 효과는 다소 암묵적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자명하다. 전후 무역 체제는 국가 간의 상업적인 연계를 평화 증진의 방안으로 보았던 Cordell Hull(루즈벨트 시절의 국무장관)의 비전으로부터 발전해 왔다. 다자간의 협정을 맺고, 일방적인 행동을 제한하는 이 체제는 애초부터 Pax Americana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은 그러니까 그가 외국 독재자들을 옹호하고, 동맹에 대해 존중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행위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은 동맹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중국의 무역 관행이 여러 측면에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맞다. 만약에 트럼프가 동맹국들을 모아서 중국의 못마땅한 정책에 대항하려 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트럼프는 사실상 거의 모두를 상대로 낮은 수준의 무역 전쟁을 하고 있다. 캐나다 철강에 관세를 물리면서 그들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웃기는 핑계를 대고, 독일 자동차에도 똑같이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중국의 부정에 대항하기 위해 전략적인 동맹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니다. Pax Americana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 지배가 잠식 돼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가난해진 것이 아니고 세계가 부유해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세력들이 연합함으로써 평화적인 국제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를 희망할 만한 이유가 있었었다. 몇 년 전까지 내게는 세계 무역 체제가 그렇게 전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크고 자애로운(? largely benign) 미국 헤게모니에서 비교적 자애로운(comparably benign) 미국과 EU의 공동 정권으로 전환 말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상황이 좋지 않다. 트럼프 문제만이 아니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문제만도 아니다. 유럽인들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Victor Orban 같은 자에 대해서 적절히 다룰 수 없다면, 유럽인들은 세계가 필요로하는 리더십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약한 반면, 트럼프는 유해하다. 그는 세계가 더 위험하고 덜 민주적인 곳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다. 무역 전쟁은 그러한 드라이브의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미국과 전세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관세의 영향에 대한 경제학적 모델링이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재주가 없어 간단히 요약을 못하고 거의 전문 번역하다시피 했다.
마지막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이 중요한 게 아니고, 트럼프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과 그에 동조하는 세계가 위험한 것이다. 혐오할 대상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무리는 경계해야 한다.

Why nations fail?

‘Why nations fail?’은 왜 어떤 나라는 풍요롭고 어떤 나라는 가난에 허덕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는 인종, 종교, 지리 등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의 노갈레스라는 지역은 국경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오랜 역사를 공유하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어떤 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장기간에 걸친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져만 갈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아주 간단한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착취적(Extractive)이냐 포괄적(Inclusive)가 빈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포괄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권력이 넓게 분산돼 있지만 동시에 법치(rule of law)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 개인에게 집중 되어 있어 사회 대다수의 계층은 접근하기 힘든 경우이다.
포괄적인 경제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 사유 재산을 보장하며 둘째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는 이와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고 사유 재산에 대하여 약탈, 착취가 빈번하고 이로 인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모험 정신의 등장을 방해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의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단 어떤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낳고, 다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해 더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착취하고자 한다. 또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지배층은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고, 반대로 기득권을 놓았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 개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정치경제 제도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결론이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한은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결코 ‘포괄적이다’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 압축 성장의 경험해 왔었다. 흔히들 적폐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냉전 시대의 기형적인 정체 경제 제도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하는 국가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주제는 중국에 관한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성장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과연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인가?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정치와 도덕

두 개의 기사와 그 기사를 접하는 주변 반응에 놀라움과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첫 번째로, 우병우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 됐다.

우병우 구속영장 기각

그에 대한 놀라운 반응 중 하나가,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구속을 피해갔다. 우병우 참 잘한다.’라는 말이었다. 그에 맞장구 쳐서 ‘정치인들 다 해 먹는데, 박근혜는 꼼꼼하지 못했다.’ 라는 말도 한다.

두 번째 기사는 어떤 대기업의 상사 부하 간의 폭행 사건이다.

대기업 술자리 폭행사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상사의 뺨을 때릴 수가 있나? 어린 부하 직원에게 뺨을 맞으면 돌아버릴 것이다. 부하직원을 때린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런 정도의 표현이 가스통 할배나 박사모 수준의 막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내 바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심한 꼴통이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보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사고 체계에는 ‘질서’가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보수의 가치’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을 매우 왜곡하고 미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강자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일 뿐이다. 가졌고 누리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흔들리려는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마땅히 약자에게 감정 이입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나는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납득할 수가 없다. 내 입장에서는 보수라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두 번째로는 조금 깊이 있게 사유하는 사람은 보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본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기 때문에 보수가 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인간적인 면모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몇 단계의 사유를 통해서 본인의 입장이 강자에게 공감하고 있는 것이며 이기심의 발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자 왈,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나태하다고 했는데 (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우리는 생각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바빠 죽겠는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냐는 듯이 달리기만 하고 있으니, 여유롭게 사색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도 왜 태어났고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서는 몇십년 동안 에너지만 소비하고 엔트로피만 증가시키는 기계와 다른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