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가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실제로 부쳐지지는 않았고, 카프카의 아버지는 이 편지를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글은 카프카 사후에 발견 되어 출판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 100주기라고 하기에 카프카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읽게 되었다. 부자간의 각별한 정을 담은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글이 출판할 만큼 이목을 끌지는 못했을 것 같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혈기 왕성하고 호전적이며 의욕적인 사람이었는데, 카프카는 그렇지 못하였고 오히려 반대였다고 한다. 그는 그런 아버지에게 주눅 들어 점점 아버지를 두려워하게 됐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지는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전에 언젠가 제게 물어보셨지요. 어째서 제가 아버지한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느냐구요.
왜 자신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이 되었고, 그 와중에 부자지간이 소원해졌는지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결과의 책임이 아버지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린 시절의 사건들까지 들춰 내면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이 자신을 어떻게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항의하고 있으며, 급기야 입을 닫아 버리게 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리고 이런 가족 관계가 자신의 글에 투영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과 같은 소설에서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힐 듯 다가갈 수 없는 성이라는 존재가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유래하게 된 것이지 싶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예상되는 반박을 정리하고 그것에 대해 재반박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했다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더욱 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고자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상기 시키면서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삶과 죽음이 보다 가벼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결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약간은 당혹스럽게 한다.
100년 전 일이지만, 지금 한국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 주기 쉬운 존재이다. 아들은 조금씩이라도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100여년 전, 체코에 사는 유대인 카프카는 그것을 30 넘어서까지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나의 관점으로 봐서도, 평생을 걸쳐 아버지로부터 해방 되고 싶어했다고 하지만 30세가 넘어서까지 해방 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투정 부리는 것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역설적으로 그런 상처 덕분에 그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런 소설가로서의 감수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볼 수도 있다.
카프카의 주장을 옹호해 주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그의 ‘찌질함’에 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운이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의 특수성에 대해서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소설가가 쓴 에세이로서 소설가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 놓는 글이기 때문에 진솔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달팽이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딸아이가 10살 남짓 됐을 때, 학교에서 작은 화분을 들고 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주먹만한 화분이었다. 무슨 식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딸아이는 그 화분을 제대로 키워 보고 싶었는지 조금 더 큰 화분으로 옮겨 담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흙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달팽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화분보다 그 달팽이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 달팽이를 제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고 ‘베베’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달팽이와의 만남은 짧게 스쳐 가고 말았다. 달팽이 집이 될만한 상자를 찾고 달팽이를 옮기고 부산스러운 와중에 흙을 쏟고 말았고, 베베는 순식간에 시야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베베가 보이지 않자, 딸아이는 베베가 수채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베베가 죽게 됐다며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아이를 달래려, 말하자면 베베의 가묘를 만들어서 위로해 주었다.
신해철이 병아리 얄리를 통해 죽음을 느꼈던 것처럼, 아이는 베베를 통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그날 밤 아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이를 속일 수가 없어, 죽은 후의 하늘나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 주었을 때, 그러니까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말했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아이에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 말을 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그 때 상처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이른 나이였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른 나이여서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싶다. 지금은 사춘기가 된 아이에게, 베베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피식 웃고 만다.
Being Mortal, Atul Gawandi, 2014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한다.
아툴 가완디의 이 베스트셀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주제로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떤 형태로 죽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역설적으로,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의 과정은 비인간적이 되어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일은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 서서히 약해지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료 기술의 도움으로 회복하기도 하지만, 추세적으로는 약해져 가는 과정을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과정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현대 의료 체계는 우선은 ‘살려’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고통의 과정이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된다. 분명히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말기암이나 때로 어떤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임종을 맞은 가족이 있는 사람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보내 드려야 한다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저 살려 두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신성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죽는 과정을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신성함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가장 급진적인 나라에서는 안락사가 합법이 된 지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마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된다는 쪽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 스스로 죽는 과정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은 아니고 현실적인 내용의 책이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생각하는 바가 많게 만든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그 명백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죽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것 같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한하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책의 번역서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뜻으로 이해 된다.
정태춘은 훌륭한 예술가이다. 포크 가수로 분류 되지만 그렇게 함부로 분류할 수 없는 정태춘만의 장르가 있는 예술가이다. 내가 정태춘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70년대 말 잠깐 인기를 끌었던 포크 가수를 생각하며, 아저씨스럽다고 한다면 정태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히 그의 시적인 가사를 좋아한다. 그의 가사는 새겨 듣고 음미할수록 빠져든다. ‘저 들에 불을 놓아’의 가사는 농촌 풍경을 느린 호흡으로 묘사하고 있다. 찬찬히 듣고 있으면 한 편의 풍경화를 감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양단 몇 마름’과 같은 노래는 우리 어머니 혹은 할머니 세대의 정서를 감히 공감은 못하더라도 살짝 엿볼 수 있게 한다. 그가 이 노래를 고등학교 시절에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다.
내가 정태춘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고 나는 그를 민중가요 가수로 생각했다. 집회 때마다 단골 손님으로 나오셨고, 과방에 굴러다니던 노래책 뒤적이다 보면 자주 접하는 가수였다. 간혹 그가 집회 때, ‘이전에 촛불이나 북한강에서와 같은 노래를 부르던 시절…’이라는 멘트를 할 때, ‘아 민중가요 부르기 전에는 말랑한 가수였구나.’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를 평범한 민중가요 가수로 묶는 것 또한 맞지 않다. 80년대 말 이후 그의 노래가 직설적이고 과격해졌다고는 하나 그의 노래는 ‘조국과 청춘’, ‘꽃다지’처럼 선동적인 요소는 없다.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대작이고 명작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선 위치에서 자신의 수단으로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지금 시대에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그 누구도 정태춘에게 빚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권리들이 많은 선배들의 싸움의 결과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만큼은 온 시대가 정태춘 한 사람에게 빚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갖지 못한 것이다.
정태춘은 옛날 가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해다.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창작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2012년 발매한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와 2019년 12집 ‘사람들 19’는 현대적 감각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태춘이라는 가수의 목소리는 노년에 접어 들면서 더욱 매력적인 음색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지금이 그의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2022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흥행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런 영화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영화와 함께 미니 콘서트를 연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접하게 되었다. 짧은 콘서트라 아쉬움이 남았으나, 그의 더욱 완성 되어 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쁘다. 내년에 앨범을 또 낸다고 하니 기대해 본다.
약 2년 전, 2021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싸 안양방에 열심히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중간 보급지에서 샤콘느 형님이 물으셨다.
“압지는 장거리는 안 타나?”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장거리 타는 거 좋아합니다. 200km 정도는 가끔 타지요.”
“아니, 장거리는 안 타냐고..”
“??????”
보통 사람이 탈 수 있는 한계가 200km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옆에 있던 소가 거들었다.
“조만간 안부 한번 올릴게요.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안부가 뭔가요?”
“안양 부산이요.”
“아. 국토 종주하는 거군요? 보통 2박 3일 하죠?”
“아뇨. 우리는 당일치기 해요.”
뭐야. 이 사람들… 이상해.
21년 10월에 소의 안부 벙이 올라 왔으나, 아직 코로나 시국이고 해서 참가자가 부족으로 성사 되지 못했었다. 어차피 나는 참가할 엄두를 못 냈었던 때였다.
2개월 전 – 훈련의 시작과 추노
23년 7월 중순. 이번에는 쇼님(소님 아니고)의 안부 계획이 공지 되었다. 진짜 ‘장거리’에 굶주렸던 사람들이 모여 훈련이 시작 되었다. 나는 참석 못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부러워하고만 있는 와중에, 다들 체계적으로 거리를 늘려 가며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2차 훈련이 끝나고 3차 훈련 즈음에 상황이 바뀌어서 슬쩍 중간 합류 가능을 물었더니 고맙게도 받아 주셨다. 막상 참가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훈련량 부족인 것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러나 이 정도 뭐 금세 따라잡을 줄 알았다. 올해 마일리지가 되는 편이니까 잘 될 거다 생각했다.
3차 훈련, 서울 300 코스. 진심으로 라이딩 중 토할 뻔 했다. 이거 큰일이다. 훈련 상태가 다들 장난 아니다. 훈련량도 부족한 주제에, 살살 끌어 보고자 교만했었다. 살아 남는 것을 목표로 수정. 훈련량을 추노하기로 한다.
D-7
다급한 마음으로 몸 관리에 들어간다. 하필 비가 와서 실전 훈련이 안 된다.
주말 동안 즈위프트 100km 1회, 160km 1회로 훈련했다. 이것으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까…
술도 안 마시고, 일도 잘 안 하고, 긴장 타면서 몸관리를 했다. D-5일부터 기상 시간을 1시간씩 앞당겨 22일은 새벽 3시 기상했다. 멍때리다 아침 회의 안 들어간 건 비밀.
D-3일부터는 탄수화물을 달고 살았다. 살아야 되니까, 최선을 다해 먹었다. 결과는 D-1일 평소 몸무게보다 3kg 증가. 원래 고무줄 몸무게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로딩 됐겠지.
D-Day 새벽 01:30 – 와이프 찬스를 쓰다
라이딩의 성패는 모닝 경량화에 있는 법. 처절하게 실패했다. 0%.
비우지는 못했지만 다시 피자와 스파게티를 입에 처 넣는다. 살아야 되니까…
모임 장소인 인덕원까지는 집에서 자전거로 22km 정도이다. 평소 주말 라이딩 같으면 그냥 자전거 몰고 오겠지만, 생존이 목표이므로 와이프 찬스를 썼다. 01:50 와이프를 깨우고 차에 자전거를 싣고 인덕원을 출발. (마눌님께 충성! 충성! 충성!)
02:30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의 서포터 꾸숑 형님과 도채가 와 있다. 2등.
자전거는 못 타도 집합은 빨리
“이 순서대로 부산 들어갈 거다!” 꾸숑형님 말씀해 주셨지만, ‘형님 저는 오늘 겸손한 라이더입니다.’라고 생각했다.
다들 긴장하셨는지 집합 시간 한참 전에 도착하시고 (이 정도 거리는 껌이신 봄날 형님만 여유 있게 딱 맞춰 오심) 번짱 쇼사마님의 간단한 브리핑 후 03:00 정시 출발하였다.
드디어 Grand Depart!! 2년 전에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무리에 내가 끼게 된 것이다.
13명 모두 정시 도착, 정시 출발Grand Depart!
안양에서 여주까지.
75km.
03:00 출발. 05:45 도착.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아직 도심이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소의힘, 쇼사마, 레이닝, 요나스 등 강력한 말들의 안정적인 리드로 편안하게 달릴 수 있었다. 이 정도 페이스면 딱 좋다. 완주할 수 있겠다. 자신감도 좀 생기지만 이러다가 오버하면 큰일이니 흥분하지 않도록 한다.
꾸숑 형님의 서포트 덕분에 더욱 차량 위협은 크게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길이 어두울 때 상향등으로 앞을 비춰주는 센스까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꾸숑 형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린 모양인데, 그 이후로 팩을 놓치신 모양이다. 게다가 길까지 잘못 들어서 결국에 합류한 지점은 1차 보급지인 여주 휴게소였다.
여주 휴게소까지는 수월하게 온 편이다. (당시에는 힘들었으면서 지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글로 쓰니까 75km가 순식간이구나. 그러니까 자전거 또 타러 나가지.)
보급지에서 파랑나사는 똥참치 신화의 시작을 알리는 첫 경량화를 성공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급은 생략한다. 봐주는 거 없이 보급 못했다고 해도 그냥 출발한다. 그렇지만 조금 부럽다. 보급보다 경량화 성공이 이득인 것 같다.
토막 상식: 참치는 멸치와 반대로 덩치 큰 라이더를 말한다. 참치는 의외로 빠르다.
파랑나사는 어디에?
여주에서 조령까지.
82km, 누적 157km.
06:00 출발. 08:50 도착.
기온이 올라가 주유소에서 바막을 벗고 잠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와중에 누군가는 2차 경량화를 성공했다.
여주 휴게소를 출발하고 조금 달리다 보니 해가 뜨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조금씩 로테를 돌았다. 다들 폼이 괜찮은 것 같다. 누구 하나 페이스 떨어뜨리는 사람이 없다. 간혹 페이스를 너무 올리는 말이 나타나면 곧바로 제어 들어간다. 3차에 걸친 연습 라이딩을 통해 말 관리 노하우가 생긴 듯 하다. 노련하다.
다음 보급지인 조령휴게소가 가까워지자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근 최상의 폼을 자랑하고 계시는 요나스 형님은 지치지 않는 페이스로 치고 나가기 시작하시고 마침내 소조령 터널 안에서 팩이 갈라졌다. 꾸숑 형님께서 ‘후미 쳐졌어!’라고 소리 치셨지만, 다들 너무 힘들어지면서 말 관리할 여력이 없나 보다. 다행히 갈라진 팩은 레이닝형님이 수거하셔서 무사히 조령 휴게소까지 도착했다.
끌어재끼시는 요나스형님.수거 담당 레이닝 형님과 수거 당하는 연비. 그러나 수거 당하는 연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조령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조령휴게소는 맛집휴게소이다. 자덕한테 맛집 추천 받지 말라던데…
꾸숑 형님의 서포트는 여기까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형님과는 작별했다. 형님의 이 은혜를 어찌 갚나.
아직 절반도 못 왔지만, 이제 로동당사 다녀오는 정도만 타면 도착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인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렇게 위안을 삼아 본다.
다음은 계획 상으로 가장 긴 구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령, 이화령을 넘어간 구긴이기 때문에 다행히 대부분 다운힐이다. 그러나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바람 방향도 살짝 역풍인 것 같다. 쉽지 않은 구간이 예상된다.
이번 라이딩의 유일한 아쉬움. 낙차.. 204km 지점
예천에 접어 들어 다운힐을 하는데 다운힐 끝에 로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속도가 조금 빠른 듯 싶었고 로타리가 각이 급해 불안하게 빠져 나오는데 뒤에서 퍽 소리가 들린다. 보지 않고도 낙차인 걸 알고 선두를 불렀다. 우리의 에이스 1번말 요나스 형님께서 슬립으로 낙차하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전거가 거의 전손 되면서 모든 충격을 떠안고 형님은 크게 다치진 않으신 점이다.
체력 떨어진 시점에 다들 각성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아쉽지만 요나스 형님은 콜택시를 불러 복귀하실 수 밖에 없었다. (복수전 가시죠 형님. 제가 능력은 안 되고 쇼나 소가 복수전 기획할 겁니다. 그렇죠?)
편치 않은 마음이지만 목표한 바가 있으므로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하고 어찌어찌 다음 보급지에 도착한다. 가장 긴 구간이었으나 중간에 사건으로 인해 잠시 쉰 덕에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다.
원래 계획은 70~80 km마다 보급이었으나 다들 체력적으로 힘들어진 관계로 50km 보급으로 변경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 동네는 평지라고는 없는 것 같다. 무한 낙타등의 반복. 안장통이 시작되려고 한다. 입문 후에 몇 년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다. 이 즈음에서는 꾸숑 형님도 안 계시고, 다들 힘들어서 사진 한장 찍을 겨를도 없다.
죽으란 법은 없으니 지점의 보급은 우연히 발견한 중국집. 짜장면 후루룩 마시고 숨 돌릴 틈 없이 다시 출발한다. 역시 편의점 보급에 비해 든든함이 다르다. 힘이 좀 나는 것 같다.
이제 100km만 더 가면 된다. 출발 전에 가장 걱정했던 구간이 이 곳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차량이 많아질 것을 걱정했었다. 운 좋게도 차량도 그렇게 많지도 않다. 감사합니다. 바람도 순풍이다.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신나게 달린 것 같다. 심지어 신호마저 칼 같이 떨어져서 거의 멈춤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힘든 것은 힘든 것. 안장통이 심해진다. 50km 주행 후에 보급지를 애타게 찾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예상보다 늦게 보급지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그만큼 남은 거리가 줄었다.
남은 구간 역시 신나게 달린다.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게다가 마지막 업힐 하나만 제외하면 대부분 다운힐이라고 봄날 형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물론 용기를 북돋아 주시기 위한 말씀이셨다. 당연히 낙타등 자그마한 업힐들 넘어야만 했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다. 이제 다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벌써 밀려들어 살짝 흥분 상태가 유지된다.
마지막 남은 힘 짜내 마지막 긴 업힐도 영차영차 올라간다. 그 와중에 우리의 연비는 아직 힘이 남았는지, ‘나는 참치들과 다르다’라고 말하는 듯 마지막 업힐을 날아 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역시 훈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노포동 업힐이 있어 오히려 극적인 라이딩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관문을 쉽게 내줄 수 없다는 듯 긴 업힐. 업힐이 끝나는 시점에 나타나는 ‘부산광역시’ 표지판이 극적인 효과를 더해 감격스럽다. 이게 별거라고 이정표 앞에서 너도 나도 사진 찍다가 번짱의 채찍질에 마지막 다운힐을 하고 라이딩은 끝이 난다.
임무 완료!
이후
열심히 끌어주시기만 하시던 소님께서는 저녁도 못 드시고 익일 출근을 위해 올라가야만 했다. 아쉬움. 우리도 식당을 찾아 약 2km를 다시 자전거로 이동해서 삼겹살 집을 찾아 폭풍 흡입을 했다. 폭풍 흡입을 하긴 했지만, 자덕에게 맛없게 느껴지는 식당이라니… 다시 자전거로 터미널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몇 잔 마시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 뒷풀이를 기대해 본다. 숙박을 하시며 2차를 달리실 형님들을 뒤로 하고 복귀파들은 다시 터미널로 향하고 버스 시간까지 긴 기다림에 들어갔다. 편의점에서 편맥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은 23시가 넘으면 무인 점포로 전환 되면서 맥주 판매가 중단 된다. 내가 맥주를 집어 든 시간은 23:02였다. 술 그만 먹고 얌전하게 올라가라는 계시였던 거다.
벅찬 마음으로 버스에 오르자 마자 골아 떨어지고 긴 여정은 끝났다.
나 자신이 부산을 무박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맺으며
어려운 행사 준비해 준 쇼사마님께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모범이 돼 주시는 샤콘느, 마산아재, 코시스 5학년 3인방 형님들 덕분에 즐거운 라이딩이었습니다. 저도 빨리 5학년 돼서 자전거 잘 타고 싶습니다.
랜도너스의 천상계에서 몸소 인간계에 내려와 주신 봄날 형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이 라이딩할 때마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꿀벅지 널브로 형님, 여전한 클라스! 순간적인 밀바까지 너무 감사합니다.ㅎㅎ 똥참치 파랑나사와 근육참치 도채아빠 덕분에 라이딩 내내 유쾌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라이딩은 레이닝 형님과 소님의 엔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미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비님 총무하느라 고생 많으셨고 날이 갈수록 성장하시니 무섭습니다. 역시 훈련의 힘. 요나스 형님. 힘들게 끌어만 주시고 끝까지 함께 못해서 너무 아쉽습니다. 건강하게 복귀하시길 빌겠습니다. 꾸숑 형님의 감동적인 서포트카 정말 감사 드립니다. 리커버리 잘들 하시고 인간적인 라이딩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