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북 Green Book

Dignity always prevails.

돈 셜리(Don Shirley)라는 실존했던 흑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배경은 1950~60년대 미국으로, 형식적으로 노예 해방이 되었으나 남부에서는 여전히 불합리한 차별 제도(Segregation)가 시행되고 있던 시절이다.
돈 셜리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품위 있게 행동했으며 교양 있는 말투를 구사하는 등, 흔히 생각하는 흑인의 전형과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없었으며 항상 외로움에 위스키를 끼고 살고 있었다.
한편 토니는 이태리계 미국인이었으며,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요새로 말하면 클럽의 기도로 꽤 ‘성공’하고 있었으며, 이런 저런 험난한 일 가리지 않고 살아 왔었다.
셜리는 남부 일대의 순회 공연을 기획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굳이 신변 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부 일대를 여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흑인으로서 백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차별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위험한 여행의 운전기사 겸 보디 가드로 토니가 채용 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영화 제목인 그린북(Green Book)은 흑인 여행자들이 남부의 주에서 안전하게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에 대한 가이드북이었다. 토니와 돈 셜리는 그린북을 들고 떠나는 여행 길에 우여 곡절을 겪게 되고, 그 사이에 둘 사이의 우정이 싹튼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소위 ‘단일민족’을 자랑하는 우리로서는 인종 문제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 문제였었고 영화에서만 접해 보는 일이었다. 미국이란 참 야만적이고 교양 없는 놈들이로군이라고 생각해 버리던 남의 이야기였지만, 작년(2018년)에 있었던 제주도 난민 문제에 대한 반응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말 할 게 못 된다. 오히려 배척하고 무리짓는 본능에 충실한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영화 하나 보고 정리가 될 얘기들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쪽으로 흘러온 것을 보니 제주도 난민에 대한 반응에서 느낀 좌절이 컸던 모양이다.
많은 부분이 불안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고 해도 광기에 가까운 반응들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자주 소통하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까?

Endurance – Shackleton’s Incredible Voyage

100여년 전 남극을 횡단하려다 좌초된 Endurance라는 배와 그 선원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린 책이다.

당시는 바야흐로 모험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개인과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는 부를 위해서, 국가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탐험가들이 북극점, 남극점을 정복하던 시기였다. 남극점 정복에 참여한 바 있었던 셰클턴은 보다 더 어려운 모험, 그래서 더 명예로운 과제로 남극 대륙의 횡단을 계획했다. 현대에 비하면 부족한 장비로 어마어마하게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음은 자명하였음에도 지원자는 넘쳐났다고 한다. 마치 요새 아이돌이 되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듯이 이 모험에 참여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다고 하니, 현대인과 100년 전 사람들 사이의 정서에는 차이가 작지 않다.

Endurance호의 계획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하여 South Georgia 섬에 잠시 정박 한 뒤, Weddell 만으로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남극 횡단은 커녕 남극 대륙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하게 된다. 그들의 배는 웨델만에 들어서서 얼마 있지 않아 유빙에 갇혀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에 배는 얼음과 얼음 사이에 갇혀 그 압력으로 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행은 배를 버리고 유빙 위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해류와 바람이 유빙을 육지 가까운 곳으로 보내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펭귄과 물개를 사냥해서 그 기름으로 연료를 삼고, 식량을 삼아 버티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희망적이었고, 설마 이 사태가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바람과 해류만 바라보다 시간은 가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물이 사라짐으로써 사냥감을 구할 수 없고 비축해둔 식량과 연료로 버틸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됨을 깨닫자 그들은 보트를 끌고 열린 바다를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얼음으로 뒤덮혀 보트를 띄울 수가 없었으므로 열린 바다(Open Sea)를 찾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추운 것은 물론 고통이었다. 남극이니까… 그러나 날씨가 따뜻한 날에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빙이 녹아 위험해지는 경우도 생겼으며, 질척한 눈 때문에 전진에 방해가 되기도 했었다. 보트를 짊어지고 질퍽한 눈 위를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바다를 찾아서 걷는다니 그 참혹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불굴의 의지로 바다를 찾아 보트를 띄울 수 있게 됐으나, 이제부터 새로운 형태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칠다는 바다에서 작은 보트 세 척에 의지해서 육지를 찾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시계와 별자리에 의존해야만 했던 시절인데, 이 시점에 모든 대원을 통틀어서 작동 가능한 시계는 오직 한 개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별자리가 전혀 안 보일 때는 항해사의 직감에 의존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코끼리섬(Elephant island)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세 척의 보트는 드디어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육지에 닿은 안도감으로 그들은 잠시 동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움막도 만들었고, 펭귄을 잡아 식량도 비축해 놓았으나 계속 그렇게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셰클턴은 결단을 내리고 세 척의 보트 중 가장 상태가 좋은 한 척을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South Georgia 섬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한 채 출발하였다. 여전히 방향은 잡기 어려웠고 높은 파도, 추운 날씨로 고생을 하다가 식수마저 떨어진 시점에 기적적으로 South Georgia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South Georgia에서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의 반대편이었다. 보트를 정박할만한 곳도 찾기 힘들 정도였으나 문제는 보트를 정박한 후에도 구조를 요청하러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가야만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등산로가 있을리는 없다. 사람의 발이 한 번도 닿은 적이 없는 산을 넘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산을 넘다가 호수를 발견하고 기뻐하였으나 반대편의 바다로 내려와 버린 것을 알고 다시 올라가기도 했으며, 높은 고도의 추위에서 얼어 죽을 것이 두려워 비탈길을 미끄럼 타듯이 내려오기도 하는 등의 고생 끝에 포경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즈음 코끼리 섬에 갇혀 있던 나머지 대원들은 셰클턴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만간 겨울이 다가올 것이고 얼음으로 길이 막히면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렵다고 자포자기할 시점 셰클턴은 그 얼음을 뚫고 갈 배를 수배하여 결국 대원들을 모두 구조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참혹한 고난의 여정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듯이 흥미진진하다. 이 여정의 결과가 놀라운 것은 단 한 명의 사망, 실종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유일한 부상자는 동상으로 발을 잘린 대원 한 명 뿐이었다. 비록 애초에 목표했던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위기 상황에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셰클턴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참혹한 환경,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구성원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매 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실행하는 능력은 보통 사람이 갖기는 어려운 자질일 것이다.

절대로 셰클턴의 모든 판단이 올바른 것이었고, 천재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 많은 실책을 범했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도 있었다. 그러나 셰클턴은 자신이 내린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인정했으며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본인이 했던 지시와 반대되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번 내뱉은 말을 뒤집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권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내뱉은 말을 아래 사람들이 해석하느라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과정을 많이 목격한다. 권위적이고 경직된 조직에서 높은 분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고 뒤 돌아서서 투덜 거리는 장면도 많이 목격한다. 분명히 셰클턴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지만,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아니었기에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었고, 구성원들도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내뱉은 마오쩌뚱의 한 마디 말에 참새들을 몰살시켰고, 병충해로 인한 기근을 가져왔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마오쩌뚱 주변에는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또는 없어졌고- 마오쩌뚱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에 수 많은 아사자가 나온 후에, ‘참새를 더 잡아야 할까요?’라고 겨우 묻는 말에 (이 사람은 그나마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라고 한 이후에야 참새 사냥은 멈출 수 있었다.

우리 조직은 대약진 운동 시기의 중국에 가까운가, 셰클턴의 남극 횡단 탐험대에 가까운가? 나는 잘못된 판단을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체면을 위해 또는 권위를 위해 침묵하는 자인가 반성해 본다.

셰클턴의 항해에 관한 영문 위키피디아

Why nations fail?

‘Why nations fail?’은 왜 어떤 나라는 풍요롭고 어떤 나라는 가난에 허덕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는 인종, 종교, 지리 등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의 노갈레스라는 지역은 국경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오랜 역사를 공유하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어떤 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장기간에 걸친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져만 갈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아주 간단한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착취적(Extractive)이냐 포괄적(Inclusive)가 빈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포괄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권력이 넓게 분산돼 있지만 동시에 법치(rule of law)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 개인에게 집중 되어 있어 사회 대다수의 계층은 접근하기 힘든 경우이다.
포괄적인 경제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 사유 재산을 보장하며 둘째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는 이와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고 사유 재산에 대하여 약탈, 착취가 빈번하고 이로 인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모험 정신의 등장을 방해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의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단 어떤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낳고, 다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해 더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착취하고자 한다. 또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지배층은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고, 반대로 기득권을 놓았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 개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정치경제 제도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결론이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한은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결코 ‘포괄적이다’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 압축 성장의 경험해 왔었다. 흔히들 적폐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냉전 시대의 기형적인 정체 경제 제도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하는 국가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주제는 중국에 관한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성장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과연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인가?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간만에 들은 개소리

‘내 직업은 아가씨가 아닙니다.’ 이게 말이 되냐? 그럼 의사한테 의사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내 직업은 선생님이 아닙니다.’라고 하겠네? 말이 안 되쟎아!

어떤 쓰레기

간만에 적어 두고 싶은 개소리가 있어서 기록해 둔다.
평소에도 주변의 성별이 여성인 직원을 지칭할 때 ‘아가씨’라고 함으로써 불쾌하게 만들고는 했던 인격의 발언이다. (다행히도 호칭할 때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못 봤다. 비겁한 인간이므로 돌아올 반응이 두려웠으리라.)
평소에 ‘모 부서의 아가씨가 이랬다.’라는 식의 발언을 많이 했으므로, ‘내 직업은 아가씨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를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를 위해 저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애초에 그 정도 인격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바이긴 하다. 그러나, 나이와 인간의 성숙도와는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으며, IQ와 인간성은 더욱 더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게다가 스스로 그렇게 논리적이고 똑똑하다는 걸 내세우던 사람이 본인의 방어를 위해 저렇게 허접한 초등학생 논리로 독해를 못하는 척한다는 게 놀랍다. (스스로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똑똑하다는 말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서슴치 않고 말하는 바람에 당혹한 경험이 많다.)
또 한 가지 이 사람의 특징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드는 것을 인류 최악의 악행인 양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아가씨라고 불리우고는 하던 직업의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에 공명하지 못했으리라.
이럴 때마다 소위 보수의 가치라는 것의 민낯이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하고는 한다. 다만 저 인간은 그것을 너무 솔직히 말하는 것일 뿐… (이 주장은 좀 과격하지만, 지금 심정이 그러하므로 기록해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