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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Slam Dunk

명작이라 할 만 하다.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하여 원작의 일부 스토리를 보강한 정도로 플롯은 단순하다. 조금은 과하게 신파조로 흐르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플롯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장면마다 완성도가 높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과 감동을 오가게 만드는 구성 또한 치밀하게 계산된 듯 하다.
도입부부터 완벽했다. 등장 인물들이 차례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 나 자신이 2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후반 부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과 몇 분 간의 정적 또한 완벽하게 압도적이다.

다만, 원작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감동이 덜할 수도 있겠다만 내 또래의 아저씨들은 다들 훌쩍 거리며 극장을 나서게 된다.

소년 시절로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태원 할로윈 사고

일요일 오전 늦잠 자는 중 걸려 온 엄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카톡방에 보니 동생이 ‘이태원 사고 때문에 전화하셨었어요?’ 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마 동생도 전화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이태원 무슨 사고?’라며 좀 뒤져 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응? 압사? 길거리에서??
할로윈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를 뿐더러 인파가 붐비는 곳을 싫어하니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을 상상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양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첫째로 든 생각은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젊든 늙든 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태원이라는 동네였어야 하는가, 그렇게 좁은 공간에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모르겠다. 짐작하기 어렵지만, 짐작해 보자면, 즐기려고 했다기 보다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순전히 사람이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일까? 여튼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젊은 목숨이 사라졌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런데 더 놀랍다고 느낀 것은 누구 하나 모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측이 따로 없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
여기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책임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은데, 사실 이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행사에 (실제로 어떻게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므로 그것이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것 같다. 그렇지만, 미리 통제를 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선택적인 공감에 대한 거부감이다. 분명히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이 사고는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고 뉴스로서 잘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근거 없이 장례비, 위로금 등을 준다고 하고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과도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므로 선정적인 이슈에 과하게 자원이 몰린다면 어디에선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150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는 매년 1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 중 상당 수가 노인 인구이다. 물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방 조치는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과한 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의 본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졸업 후에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상가집, 결혼식 등에서 스쳐간 적만 있었던 후배였지만, 재학 중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던 사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이태원 사고가 갑자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다니.
그가 개인적으로 느꼈을 고통과 회한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하기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한 아이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고통,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차갑게 원칙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효용과 올바른 정치적인 태도를 따지던 차원에서 한 개인의 못 다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두 차원의 간극은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다. 인간이므로 둘 다 필요한 차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차갑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 또한 큰 의미로 비인간적이다.
나는 분명 이것도 곧 잊고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윤미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고 살면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궁평항 라이딩 후기 – 이런 것이 불행 중 다행

자전거를 타다가는 심각한 부상 또는 사망의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라고 한다.

로드 바이크 입문 후에 두 번의 낙차 경험이 있었으나 모두 빗길 자빠링이었고 그렇게 고속 주행 중은 아니었다.
이번에 당한 낙차처럼 아찔한 순간은 처음이다. 상세히 경위를 기록해 두어 앞으로 안전 라이딩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화성시 마도산업단지에서 궁평항에 이르는 길은 마도미개통로라고 불리우는 13km가 넘는 평지 구간으로 속도를 내기에 좋은 구간이다. (실제로는 개통된 도로이다.)

2022년 8월 15일 광복절 약 20여명의 팩으로 이 구간을 포함하는 코스를 라이딩할 계획이었다.
남서풍이 매우 강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역풍이다. 마도에서 궁평항까지 가는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250W 파워를 내도 30km/h를 넘기기 쉽지 않았다. (내 몸무게는 62kg이고 ftp는 230w 정도이므로 한계영역에 해당하는 파워이다.) 그런 역풍을 뚫고 13km를 행군하다시피 라이딩하고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당연히 돌아갈 때의 순풍에 대한 기대를 하게 마련이다. 복귀 길은 50km/h 넘게 나오겠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살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인원 수가 많고 오픈 구간이므로 자유롭게 달릴 것인데, 역풍에 대한 보상으로 다들 속도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막상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는 팩에서 흐를 것이 두려웠다.

채 2km를 가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어이 없게 혼자서 왼쪽으로 구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원인은 노면의 세로 홈이었다.

원래부터 이런 상태였는지 폭우 후에 망가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로드 바이크로서는 치명적인 세로 방향 홀이 있었고 거기에 딱 걸려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홀을 피하지 못하고 낙차까지 이어지게 된 원인을 좀 생각해 보아야겠다.

다른 블랙박스 화면을 보면 우측에 작업하는 트럭이 보인다.

자전거는 우측 차로로 주행하게 돼 있으나, 이 트럭으로 주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좌측 차로로 나갔다가 다시 우측으로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오픈 상황이었기 때문에 열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서 좌우로 주행 라인이 조금씩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홀과 겹치게 된 것이다.
또한 속도가 매우 빨랐다. 스트라바 기록으로 보면 낙차 직전 속도가 43 km/h로 돼 있다. 게다가 드래프팅을 하기 위해서 간격을 좁게 주행하고 있어서 홀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서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으로 영상을 자세히 보면 내가 우측에 홀을 가리키는 신호를 하는 것이 보인다. 내가 걸려 넘어진 홀 우측에 다른 홀이 있어서 거기에 시선이 쏠리고 후미에 주의를 주느라 내 앞의 홀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앞 사람의 홀에 대한 콜이 없었다. 이 날 전반적으로 콜이 없었는데, 다들 속도감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리고 오픈 상황일수록 콜을 잘 해야 될 거 같은데 힘들어지면 오히려 다들 소홀해지는 경향을 자주 본다.
이런 모든 원인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정확하게 걸린 것은 불운에다가 노면 주시를 게을리한 나의 과실이 겹친 결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첫째는 내 뒤에 오던 일행 중에 가티 낙차에 휘말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매우 빠른 속도였음을 감안하면 기적적인 일이다. 영상에서도 보면 간발의 차이로 피한 것을 볼 수 있다. 피했다기보다는 피해졌다고 봐야 되는데, 내가 왼쪽으로 구르면서 자전거는 바닥에 부딪히며 튀어 올랐는데 그 때 휠이 지면에 수직으로 튀어 올랐던 것이다.
둘째는 빠른 속도의 낙차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몸을 둥그랗게 만 상태에서 굴러서 충격이 최소화 됐다. 운동신경이 둔한 편인 나로서는 또한 기적인 일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뭐냐. ftp가 향상 되고 VO2Max가 높아졌다고 고수가 아니다. 노면 주시 게을리한 나는 아직도 자린이었다고 반성해 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 정도 부상으로 싸게 막은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안전한 라이딩, 즐거운 라이딩 천년 만년 즐겨 보자.

P.S.
소중한 시간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보살펴 주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감사한 말씀 드립니다.
우헤헤님 특히 너무 잘 케어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나중에 소식 듣고 걱정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 말씀 드립니다.

나의 애마는 휠 스포크가 한 개 나가고, 왼쪽 레버가 갈리고 바테잎 너덜너덜해진 정도의 피해인데 이미 이틀 만에 수리 완료 됐습니다.
나의 몸은 양 무릎, 팔꿈치, 어깨에 다양한 깊이의 찰과상이 있는 정도이고, 가슴팍에 통증이 있는 정도입니다. 아마도 가슴팍은 핸들바에 부딪힌 거 같습니다. 앞으로 1주일이면 라이딩 가능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간디가 말하는 행복 – 어쩌다 보니 일기

Happiness is when what you think, what you say, and what you do are in harmony.

행복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조화로울 때이다.

Mohandas Karamchand Gandhi

오늘(2022/07/26) 아침 블룸버그 단말기에서 만난 격언이다.

간디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거짓 없이 말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내면의 평화를 이야기를 한 것일까?

나는 내면의 평화를 말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한다면 적어도 내 안의  모순에 의한 갈등, 번민 등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의 모토 중 하나인 ‘담백하게 살자’와 상통하는 말이다. 내가 아닌 나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부풀리는 일에서 인생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내 생각이 말할 수 있는 생각이어야 한다. 부끄러운 생각, 나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생각과 말이 조화롭게 하는 것은 결국 내 가치관을 올바르게 세우라는 뜻으로 이해 된다.

말이 행동과 조화롭게 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게을러지기 십상이다. 게을러지는 것은 유전자에 박혀 있는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은 정도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의 동물의 뇌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부끄럽지 않은 가치관을 갖고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려면, 깊이 읽고 생각하고, 취하지 않고 (그것이 술이든, 약이든, 허튼 사상이든) 찬 물에 세수한 듯 깨어 있는 채로 살아야 될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실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읽고 생각하고 끄적이는 짓을 반복해서 생각나는 대로 살지는 않도록 하자.

우리 사람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강화도 라이딩 – 2022/07/23

오늘 라이딩 일정은 05:00 쌍개울 출발,(신정교 05:30 2명 합류) 봄날님의 강화도 코스를 맛본 후 17:00 쌍개울 복귀하는 계획입니다.
우리 집의 최고 존엄께서 16시 외출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 전에 돌아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살짝 무리한 일정 같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용서 받는 쪽을 선택하고 라이딩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04:00 기상합니다.
일찍 일어나서 커피와 아침을 먹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경량화를 시도합니다.
경량화의 성공 여부가 그 날의 라이딩 컨디션을 좌우하지요.

05:00에 집을 나서 05:15 신정교 도착합니다. 좀 일찍 도착했습니다. 앗! 심박계가 잡히지 않습니다. 신정교 기둥 뒤에 숨어서 심박계를 벗었다 찼다 해보는데, 쇼사마님께 딱 걸립니다.
“왜 거기서 옷을 벗고 계세요?”
“아니, 그게 어버버버…”
심박계 없이 라이딩합니다. 이 정도는 사소한 해프닝이지요.

쌍개울 출발이 순조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약 30분 이상 늦어지는 것으로 예상되고, 번짱이신 쇼사마께서는 교통 상황, 오후의 비 예보 등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고 존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번에는 용서 받지 못하는 것 아닐까…’

정시 출발은 실패

06:00 쌍개울 출발 팀과 합류합니다.
멀리서부터 소님께서 강력하게 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원 수가 꽤 많습니다.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꼬리에 붙어서 열심히 달립니다.
아마도 늦은 시간을 만회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만, 방화대교에서 멈춥니다.
음, 보급하기에는 살짝 이른 시점인데 이상하다 싶었는데… 마산아재님께서 안 보이신답니다.
10분 이상 후에 아재님께서 거친 숨을 내쉬며 도착하셔 버림 받은 설움을 토로하십니다.
전화 받는 사이에 (이 전화는 쇼사마님이 출발을 독려하려 걸었던 걸로 판명) 팩이 출발해 버렸다는 겁니다.
“먼저 가라 하셨습니다.” 라는 증언은 의사소통 오류였던 것입니다. 여튼 여기서 10분 지체.
그런데, 이렇게 기다릴 거면 그렇게 페이스 올릴 필요가 없었네?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앗 그런데 또 하나 걱정거리가 떠오릅니다.
강화인삼센터에서 조인하기로 한 분들은 점점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역시 지체 않고 달려야겠습니다.

김포아우토반.
때려 밟기에 딱 맞는 감동적인 구간이죠.
오픈 신호 받자 열심히 밟아 보았으나, 역시 성냥개비만 태우고 BA는 실패. 결론을 알면서도 항상 이 짓을 합니다.
오늘은 그린 저지를 입었으니까 시도해 볼만 했습니다.
마주 오는 MTB가 좌측 통행을 하는 것 정도는 아주 가벼운 해프닝.


김포에서 강화로 가는 공도 구간.
역시나 차량이 좀 많습니다만, 2열로 질서 있게 갈만합니다. 순조로운 듯 보입니다.
팅이라그님의 전조등이 발사되고 그것이 샤콘느 형님 다리를 맞은 후 실종된 것은 아주 아주 아주 사소한 해프닝.
신호대기에서 출발하는 순간, ‘푸쉬쉭’ 소리가 들립니다.
펑크임에 분명합니다. 쇼사마님의 펑크네요. 튜블러. 아 골치 아픈데.
타이어 상태를 보니, 지금 터진 게 다행입니다.
이것은 펑크가 아니라, 타이어가 닳아서 없어지기 직전입니다.
“보통 타이어 한 번 갈면 1만 킬로씩 타는 거 아닌가요??”

번짱 사수 실패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코스의 설계자이신 봄날님께서 계시니까요.
봄날님 믿고 번짱은 버리고 우리끼리 출발하도록 합니다.

다시 열심히 달려, 차량들과 부대끼며 강화대교를 건넙니다.
건너자마자 인삼센터가 보이는데… 합류하기로 한 일행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뿔싸, 초지인삼센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입니다.
강화에는 인삼센터가 두 개. 최근에 항상 초지에서 기다렸으니 그 쪽으로 간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초지에서 강화인삼센터까지 차로 20분.
초코정님과 박사일기님을 기다리며 화기애애 담소 타임을 갖습니다.
우리도 늦게 출발했으니 비긴 걸로 합니다.
덤앤더머?막하막하?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2

우여 곡절 끝에 이제 강화도 한 바퀴 돌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 애초에 계획했던 코스의 수정은 불가피합니다.
길을 잘 모르니 대충 짐작으로 이해합니다.
아마도 교동도를 생략하기로 하신 모양입니다.
‘아 어쩌면 용서 받을 수도 있겠구나.’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이제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민통선을 통과하고 오른쪽 철책을 끼고 쭉 뻗은 길이 나옵니다.
김포아우토반 찜쪄 먹는 때려 밟아라 구간이네요.
한 번 와 본 구간이지만, 반대방향이었습니다.
역시나 봄날님께서 오픈 신호를 주시고 다들 참지 못하고 성냥개비 태웁니다만.. 결론은 항상 같죠.
침 좀 흘리면서 달리다 이제 좀 그마안~이라는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오픈 구간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후미에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두시맨님 쌍 펑크가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튜브를 누가 두 개를 들고 다니겠습니까.
튜브를 들고 석수님께서 두시맨님께 내려갑니다.
우리는 또 하하호호(데이빗의 하하호호와는 다릅니다) 담소 타임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사라지면, 나중에는 몇 명이 남는 걸까?
공포 영화의 상투적인 시나리오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다행입니다. 클린처라 복구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 기다리지 않고, 보급지에서 세팅해 놓고 기다리기로 합니다.

교동도는 생략하지만, 교동도 입구의 편의점에서 보급을 하기로 합니다.
역시나 강화도는 낙타등이 많습니다.
다들 휴식 시간이 길어서 힘이 남으시는지, 달리는 동안에는 인터벌 치십니다.
아… 좋습니다. 하하호호.
팩에서 떨어지신 분들 몇 분 계시고, 봄날형님께서는 갈림길에 후미 담당을 남겨 두십니다.
길이 좀 헷갈리는데 다들 제대로 합류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됩니다.
편의점에서 보급하는 동안 너무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걱정이 현실이 되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니다.
그러나, 소님, 두시맨님, 석수님은 펑크를 이겨내고 성공적으로 복귀하셨습니다.
길도 제대로 찾아 오셨습니다.
참으로 개선군의 모습입니다.

펑크 대처 성공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쇼사마님도 복귀하셨습니다.
동생분의 차를 호출하시고 잠들어 있는 샵 사장님을 깨워 타이어 교체하신 겁니다.
역시 개선군의 모습입니다.

펑크 대처 성공 #2(?)

역시 교동도는 생략하기로 하고 다시 출발합니다.
강화도 현지인의 자부심으로 고인돌 구경을 갑니다.
큽니다. 신기합니다.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한 번짱님의 계획이었던 거 같습니다.

고인돌을 뒤로 하고 시골길을 한참 달립니다.
여기도 사진 흥벙을 위한 번짱님의 계획 구간인 듯 합니다.
경치 좋고, 한적하고, 시골길 주제에 포장도 잘 돼 있습니다.
사진 잘 나오는 구간입니다.

고수는 포즈부터 다릅니다.

번짱님은 사진찍기 의무에 충실하시고 어쩌다 보니 제가 선두가 됐습니다.
‘어라, 길 모르는데… 코스 파일하고 길도 다르네.. 어쩌지…’
괜찮습니다. 바로 뒤에 봄날님께서 조종을 해 주십니다.
‘좌회전, 우회전, 다음 좌회전’

한참 달리는데, 뭔가 순탄치 않은 것 같습니다.
봄날님이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십니다.
뒤돌아 보니, 팩 숫자가 줄어 있습니다.
번짱님도 없네요. 하하하.
이 길이 아니라고 외치시는데, 앞에서 못 들었던 겁니다.
결국 조양방직 앞에서 기다리기로 합니다.
우리의 하하호호 타임은 다시 시작 됐습니다.
여기서도 한 10분 대기 후에 찢어진 그룹 합류합니다.
마침 그 무리에 아재형님도 계시네요. 거친 숨 몰아 쉬시며,
“나 오늘 두 번 버림 받았어!” 하십니다.
번짱께서는,
“자아 번짱 버리신 분들은 다 머리 박으세요~” 하십니다.
머리 박는 거 대신 이 후기 쓰는 걸로 쇼부..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3, 번짱 사수 실패 #2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 다시 다 모였으니까요.
이제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고려산 넘고, 낙타등 넘습니다. 밥도 먹었지요.
강화도 3대 카페는 지나쳐서 CU에서 대신했습니다.

역시 중급이라고 흐르시는 분들 안 챙기더군요.
저는 초급 마인드라 흐르시는 분들 계시면 스위핑하고 싶어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살짝 갭 벌어진 것도 좁히는 게 쉽지 않네요.
프로 선수들 BA 치는 것도, 추격하는 것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10미터 정도 갭 벌어진 사이로 트럭이 들어오는 바람에 급브레이크를 잡아 석수님하고 추돌할 뻔 한 건 조금 큰 해프닝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자린이 같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 생각을 했어야 되는데, 손가락이 먼저 반응하고 아차 싶었습니다.

복귀길은 비교적 순탄합니다.
새하얗게 태우신 분 몇 분 계시지만, 그런 모습이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비가 올 거 같은데,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좀 빨리 가야겠습니다.

저와 쇼사마님은 신정교에서 이탈해서 목감천을 타고 복귀합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많이 맞지 않았네요.
‘그래 비까지 맞으면 너무 잔혹하게 사건 사고가 많은 거지.’

그러나, 쌍개울 복귀하시는 분들은 비 쫄딱 맞으셨더군요.
완벽하게 다사다난한 라이딩이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어느 분도 오늘 라이딩 후회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이딩은 언제나 즐거운 거니까요.

오늘 라이딩 준비하신 쇼사마님 감사 드리고, 다사다난하고도 즐거운 라이딩 위해 애써 주신 모든 분들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아 참, 마지막으로… 최고 존엄께서는 관대하십니다.

쌍욕을 들은 후의 심리 변화

평소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자전거 출퇴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이 많다. 하루 약 90분 운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체력이 좋아지지만, 그보다는 정서적인 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사람에 치이거나 운전을 해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거나, 출퇴근이 유쾌한 경험이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자전거 출퇴근은 특히 퇴근길은 일에서의 스트레스를 땀흘리면서 풀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오면서 자전거 도로가 복잡해지면 다양한 스트레스 요소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자전거 도로는 인도와 엄연히 구분 돼 있지만, 어떤 이는 그게 자전거 도로라고 생각을 못해서 자전거 도로로 산책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갑자기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들이 가장 스트레스 요소이다. 점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 목줄을 풀어 놓는 경우도 가끔 보고, 그렇지 않더라도 목줄을 길게 늘어 뜨리면 개들이 자전거 도로로 뛰어 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제 퇴근 길에는 황당하게도, 자전거 도로 양방향을 떡하니 막고 개 주인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그냥 지나가야 되는데, 운동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을 때면 꼭 한 마디씩 학 게 된다.
‘길을 이렇게 막으면 어떡합니까? 아.. 씨.’ 라고 말했다. 뒤에 ‘아.. 씨..’는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실수였다. 사실은 아무 말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러고 지나가는데, ‘X발넘이..’ 라는 말이 돌아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하다가. 클릿을 빼고 돌아 보며,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라고 했더니,
‘너만 자전거 타냐?’ 라는 것이다.
왜 욕을 하느냐고 항의를 했어야 되는데,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왜 길을 막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실 내가 길을 멈춘 것은 쌍욕을 들었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대꾸 없이 가던 길 왔는데, 끝까지 기분이 좋지가 않다. 원래는 운동을 끝내고 기분 좋은 상태였어야 되는데, 분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꾸를 못했나? 왜 같이 쌍욕을 해 주지 그랬나?
그렇지만 이내 거기서 같이 쌍욕을 하는 것은 내 입만 더러워지는 것이다라는 생각까지는 하게 되었다. 잘 참았다. 애초에 길막는 상황 자체에 대해 항의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뀌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지금 드는 생각은 다른 종류의 좌절감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릇이 작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다.
정중하게 ‘왜 욕을 하십니까?’ 라고 대꾸했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 게 이기는 건데, 아드레날린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사람됨이 부족하다. 천성이 그릇이 작은 것이지만, 지향해야 될 바는 군자가 됨이어야 평균은 될 것 같다.

결론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한 정도 되는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아직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나라도 그렇게 되자.

Don’t look up

 

새로이 발견된 혜성이 지구를 향해 곧장 돌진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각계 각층의 인간 군상들의 행태를 풍자하는 아주 가벼운 블랙코메디이다.
배경은 흔하디 흔한 ‘미국 만세’를 주제로한 헐리우드 영화와 판박이이지만 이야기의 진행, 영화의 분위기는 정반대이다. 영웅은 등장하지 않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각자의 뻘짓거리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런 면에서 인디펜던스 데이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이라는 측면에서 씁쓸하다.
영화는 나라를 운영한다는 의미의 ‘정치’보다는 ‘정치적이다’라는 표현에서 풍기는 ‘정치’를 비웃는다. 백악관의 대통령은 단 한 가지의 잣대만을 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그것이 인류가 멸명할만한 일이더라도 다음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긍정저인 것이다. 반대로 전 인류가 행복해진다고 하더라도 다음 선거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나쁜 일이다.
대의나 공공선, 어떤 가치보다 선거가 지상의 목표가 되는 현상은 대의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래로 보편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다. 모든 나라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과 미국에서는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세대를 막론하고 관찰된다. 대학의 학생회 선거에서부터 대통령 선거에서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물론 신념을 갖고 일하는 정치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신념만 가지고 선거에 이기는 것은 어림 없는 일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신념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친한 척 해야한다. 오히려 선거를 거치면서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오리무중이 돼 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영화는 정치인 뿐만 아니라 정치인을 추종하는 대중들을 비웃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인정하지 않을테지만, 정치적 성향은 종교적 신념과 유사하다. 아무리 이성적인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믿지 않고 용서해주고 싶은 사람은 용서가 되고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쁜 놈인 것이다. 영화에서는 트럼프 추종자를 연상시키는 대중들을 등장 시키는데, 그들은 무식한 집단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화에는 BASH라는 기업과 그 기업의 CEO가 등장한다. BASH는 아마도 개인정보를 가지고 머신러닝으로 무장하여 ‘나는 너희가 모르는 너희를 알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행태에서 페이스북이나 애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CEO는 대중들에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종교적인 추앙을 받는다는 점에서 스티브 잡스를 그린 듯 하고 오만한 성격은 머스크를 연상시키려는 것 같다.
BASH는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의사 결정에 결정적이고 노골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최대 자금줄이기 때문에 서열 상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BASH의 논리는 경제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BASH의 CEO는 스스로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신 기술을 통해 너희에게 미래를 열어줄 메시아적인 존재로 자신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 그의 논리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일 뿐이다.
미디어에 대한 풍자도 빼놓지 않는다. 신문은 그나마 시작점에서는 사안을 가치관에 따라 판단을 하려는 듯 하나 결국에는 책임질 일은 하지 않고 발을 뺀다. TV는 아주 가볍기 그지 없고, 모든 것을 오락거리로 삼는다. 그것이 지구 멸망에 관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돌 커플의 결별 소식보다 중요한 사안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정치인들은 평소 하던대로 다음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 인기 관리를 하고, 거대 기업은 평소 하던대로 최대한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TV는 평소 하던대로 히히덕 거리며, 대중들은 평소 하던대로 휩쓸려 다닌다.
결국에 멸망의 날이 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굳이 멸망의 날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누가나 개인적으로는 소멸의 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제인지 멀게만 느껴질 뿐이고,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에 잊고 평소 하던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매일 매일 내가 결국에 소멸하게 될 존재라는 것만 상기하더라도 삶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적고 나니 아주 가볍게만 볼 영화는 아니었다. Rotten tomato의 평론가 평점이 매우 좋지 않은데, 아마도 깊이가 없다는 점이 이유일 것 같다. 많이 배운 평론가가 아닌 입장에서 그리고 평소 휩쓸려 다니고 있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다.

불안감은 아이를 망친다

그 동안 나는 사교육 열풍, 선행학습 등의 비상식적인 ‘교육’ 행태에 대해서 부모의 불안감으로 인한 헛짓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이의 정상적인 정서 발달과 학교 생활 심지어 학업 성취에 있어서까지 역효과가 더 크리라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대학입시에 조차도 효과가 적다는 게 지론이었다. 할 놈은 다 하게 돼 있고, 학교 공부로 부족한 게 있다고 하면 요즈음은 인강이 그렇게 잘 돼 있다는데 우리 때에 비하면 더 쉬운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주 우연히 아내와 대학 입시 제도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현재 입시 제도에 대해서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흔히 말하는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이 부분은 마치 부동산 정책과 같이 손을 쓰면 쓸수록 의도한 바와 반대로 가게 되는 정책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청년들이 왜 공정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납득을 할 수 있을 거 같고, 무식하게 전부 정시로 가자고 하는 주장 또한 납득이 되는 것이다. 그러더니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고, 이런 현실을 모르고 내가 아이를 망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그 헛짓거리 열풍에 참여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으로 괴로웠고 심지어 아내와 약간의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순간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다. 불안감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아직 ‘커서 꿈이 무어냐?’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수시로 바뀌는 시기인데 대학 입시를 위한 총력 모드로 돌입하고자 했다니 말이다. 마치 대학이 인생의 목표이고, 좋은 대학만 나오면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는 식의 태도 아닌가 말이다. 나 스스로 그러한 ‘대학인생결정론’의 피해자이자 반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평소에 생각했던대로, 어느 정도의 좋은 대학을 가고 못 가고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단지 헛짓거리를 이용해서 대학 가는 비중이 높을 뿐이다. 불안할 필요 조차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평생을 되묻고 답하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부질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반대로, 이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은 인생을 버리는 것과 다름 없지 않나 생각한다.
생활이 버거울 때, 사는 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에는 ‘사는 건 하루 하루 충실하게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카르페디엠 모드이다. 간혹 의욕에 넘치고 어렴풋이나마 성취에 대한 희망이 느껴질 때는, ‘내가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달란트 모드라고 부르겠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지만, 내가 겪었던 과정 중에 그나마 긍정적인 상태 두 가지가 카르페디엠하는 상태와 달란트를 추구하는 상태였다.
인생의 시점마다 상황에 따라서 카르페디엠 모드와 달란트 모드를 오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인생의 단계로 봤을 때 어렸을 때는 달란트 모드가 지배적인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도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조언을 해 주는 정도라고 생각해 왔다. 때로 아주 어긋나는 길로 가고 있다면 강하게 막아야겠지만, 어디까지나 부모는 자녀의 인생에 있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러한 생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아이가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지금 시점이야말로 육아가 아닌 인생의 조력자 혹은 멘토로서 부모의 역할이 시작되는 상황이다.
이제서야 느낀다. 역시 현실은 생각과는 다르다. 현실과 가까워지니 아이의 운명을 내가 결정해 주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은연 중에 ‘대학인생결정론’에 기대고 입시에 실패할까 두려워 떠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 없는 행동이다. 깊은 고민 끝에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변호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채 던지지도 않고 자신의 불안감에 휘둘려 행동하는 셈이다.
역시 닥쳐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다.
불안감은 강력한 감정임을 다시 느낀다. 초조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죽음

카톡 메세지로 J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새해 인사려니 했다. 미국에 갈 때 얼굴 한번 보고 간다더니 그냥 훌쩍 떠나서 미안했겠지. 이제라도 안부 물어봐 주니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첫 마디가 너무 슬픈 소식이 있다길래 보통 일은 아니구나 각오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장난을 치더라도 이런 장난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난일 리가 없다.
J와 Y는 입사 동기로 내가 C사에서 막 대리를 달았을 즈음에 입사했었다. 내가 직접 같이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부서로서 꽤나 돈독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C사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고 만났고,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후로는 만나지는 않더라도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Y의 가족 사진을 모 소셜 미디어에서 보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그녀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회사에서 근무 중 쓰러졌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단 한 마디 인사도 못한 이별이다.
살고 죽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일이라니…
언제든 누구나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살아 있는 날들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작별 인사라도 준비할 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잔인한 일이다.
주변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셋 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여성이었고, 아이의 엄마였다. 남은 아이들이 안타깝다. 내가 신이라면 엄마들은 일찍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신이란 걸 믿지 않는다.
몇 년의 작별을 한 사람도 있고, 몇 달을 한 사람도 있었으나 인사를 못하고 떠난 건 처음이다. 부디 남은 아이들과 남편이 상처를 이겨내길 바란다.

도덕적 감수성

프X킷이라는 직구 사이트가 있다.
주로 자덕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인데, 가격은 합리적이지만 배송이 무지 느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아마도 1개월 안에 배송 되리라고 기대하면서 주문하는 자덕은 없을 것이다.
한 번은 간단한 소품 몇 가지를 주문한 적이 있다. 단가는 다 합쳐서 10만원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5만원은 넘었을 듯.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다 돼 가는데도 배송이 되지 않자 몇 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주문을 했었다. 몇 번 이메일이 오간 끝에, 이 상품은 배송 중 잃어버린 것 같다며 환불 처리를 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2개월 가까운 기다림이 쓸데 없는 일이 돼 버렸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살짝 화가 나기까지 했으나, 그래도 큰 회사라고 환불을 쿨하게 해 주는 것이 기특하다고나 할까 그런 묘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 후, 정말로 2개월이 넘어가려는 시점에 물건이 떡 하니 배송이 돼 온 것 아닌가.
물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패키지는 다 뜯어지고 결정적으로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겉표지에는 아마도 우체국이 붙였을 것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물건 상태가 이렇게 된 건 자기네 책임이 아니네 어쩌네 하는 글귀였다.
일단 물건 값은 다 환불을 받았으니 상품의 상태가 엉망이건 말건 별 관심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작동을 시켜 보니 제대로 작동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배터리 들어가는 작은 전자제품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너네가 늦게 보내 주고 상태까지 이런 물건이니 그냥 써 주겠다라고 생각하고 꿀꺽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고서 거의 1년 가까이 흘렀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도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을 훑다가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질문을 올린 것을 보았다.
프x킷에서 배송이 지연 돼 컴플레인해서 환불을 받았는데, 상품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상품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답변들이 한결 같이 돈을 다시 입금해 줘야 된다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비양심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제품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모양으로 도착하긴 했으나, 판매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물에 젖었던 제품일지라도 작동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간혹 작은 이익에 움직였던 기억들이 몇 번 있다.
소탐대실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 약간의 성격 장애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도벽하고 비슷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도덕적인 감수성이 무뎌졌다고 설명해야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닳고 닳은 것인가 때 묻은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아무리 고민해 보면 뭐하나… 생활과 동떨어진 그런 고민들은 허영심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다.) 부끄럽다. 담백하고 단순하고 솔직하게 살자는 게 이리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