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욕을 들은 후의 심리 변화

평소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자전거 출퇴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이 많다. 하루 약 90분 운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체력이 좋아지지만, 그보다는 정서적인 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사람에 치이거나 운전을 해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거나, 출퇴근이 유쾌한 경험이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자전거 출퇴근은 특히 퇴근길은 일에서의 스트레스를 땀흘리면서 풀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오면서 자전거 도로가 복잡해지면 다양한 스트레스 요소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자전거 도로는 인도와 엄연히 구분 돼 있지만, 어떤 이는 그게 자전거 도로라고 생각을 못해서 자전거 도로로 산책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갑자기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들이 가장 스트레스 요소이다. 점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 목줄을 풀어 놓는 경우도 가끔 보고, 그렇지 않더라도 목줄을 길게 늘어 뜨리면 개들이 자전거 도로로 뛰어 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제 퇴근 길에는 황당하게도, 자전거 도로 양방향을 떡하니 막고 개 주인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그냥 지나가야 되는데, 운동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을 때면 꼭 한 마디씩 학 게 된다.
‘길을 이렇게 막으면 어떡합니까? 아.. 씨.’ 라고 말했다. 뒤에 ‘아.. 씨..’는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실수였다. 사실은 아무 말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러고 지나가는데, ‘X발넘이..’ 라는 말이 돌아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하다가. 클릿을 빼고 돌아 보며,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라고 했더니,
‘너만 자전거 타냐?’ 라는 것이다.
왜 욕을 하느냐고 항의를 했어야 되는데,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왜 길을 막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실 내가 길을 멈춘 것은 쌍욕을 들었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대꾸 없이 가던 길 왔는데, 끝까지 기분이 좋지가 않다. 원래는 운동을 끝내고 기분 좋은 상태였어야 되는데, 분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꾸를 못했나? 왜 같이 쌍욕을 해 주지 그랬나?
그렇지만 이내 거기서 같이 쌍욕을 하는 것은 내 입만 더러워지는 것이다라는 생각까지는 하게 되었다. 잘 참았다. 애초에 길막는 상황 자체에 대해 항의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뀌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지금 드는 생각은 다른 종류의 좌절감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릇이 작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다.
정중하게 ‘왜 욕을 하십니까?’ 라고 대꾸했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 게 이기는 건데, 아드레날린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사람됨이 부족하다. 천성이 그릇이 작은 것이지만, 지향해야 될 바는 군자가 됨이어야 평균은 될 것 같다.

결론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한 정도 되는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아직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나라도 그렇게 되자.

불안감은 아이를 망친다

그 동안 나는 사교육 열풍, 선행학습 등의 비상식적인 ‘교육’ 행태에 대해서 부모의 불안감으로 인한 헛짓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이의 정상적인 정서 발달과 학교 생활 심지어 학업 성취에 있어서까지 역효과가 더 크리라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대학입시에 조차도 효과가 적다는 게 지론이었다. 할 놈은 다 하게 돼 있고, 학교 공부로 부족한 게 있다고 하면 요즈음은 인강이 그렇게 잘 돼 있다는데 우리 때에 비하면 더 쉬운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주 우연히 아내와 대학 입시 제도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현재 입시 제도에 대해서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흔히 말하는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이 부분은 마치 부동산 정책과 같이 손을 쓰면 쓸수록 의도한 바와 반대로 가게 되는 정책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청년들이 왜 공정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납득을 할 수 있을 거 같고, 무식하게 전부 정시로 가자고 하는 주장 또한 납득이 되는 것이다. 그러더니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고, 이런 현실을 모르고 내가 아이를 망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그 헛짓거리 열풍에 참여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으로 괴로웠고 심지어 아내와 약간의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순간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다. 불안감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아직 ‘커서 꿈이 무어냐?’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수시로 바뀌는 시기인데 대학 입시를 위한 총력 모드로 돌입하고자 했다니 말이다. 마치 대학이 인생의 목표이고, 좋은 대학만 나오면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는 식의 태도 아닌가 말이다. 나 스스로 그러한 ‘대학인생결정론’의 피해자이자 반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평소에 생각했던대로, 어느 정도의 좋은 대학을 가고 못 가고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단지 헛짓거리를 이용해서 대학 가는 비중이 높을 뿐이다. 불안할 필요 조차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평생을 되묻고 답하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부질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반대로, 이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은 인생을 버리는 것과 다름 없지 않나 생각한다.
생활이 버거울 때, 사는 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에는 ‘사는 건 하루 하루 충실하게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카르페디엠 모드이다. 간혹 의욕에 넘치고 어렴풋이나마 성취에 대한 희망이 느껴질 때는, ‘내가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달란트 모드라고 부르겠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지만, 내가 겪었던 과정 중에 그나마 긍정적인 상태 두 가지가 카르페디엠하는 상태와 달란트를 추구하는 상태였다.
인생의 시점마다 상황에 따라서 카르페디엠 모드와 달란트 모드를 오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인생의 단계로 봤을 때 어렸을 때는 달란트 모드가 지배적인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도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조언을 해 주는 정도라고 생각해 왔다. 때로 아주 어긋나는 길로 가고 있다면 강하게 막아야겠지만, 어디까지나 부모는 자녀의 인생에 있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러한 생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아이가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지금 시점이야말로 육아가 아닌 인생의 조력자 혹은 멘토로서 부모의 역할이 시작되는 상황이다.
이제서야 느낀다. 역시 현실은 생각과는 다르다. 현실과 가까워지니 아이의 운명을 내가 결정해 주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은연 중에 ‘대학인생결정론’에 기대고 입시에 실패할까 두려워 떠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 없는 행동이다. 깊은 고민 끝에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변호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채 던지지도 않고 자신의 불안감에 휘둘려 행동하는 셈이다.
역시 닥쳐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다.
불안감은 강력한 감정임을 다시 느낀다. 초조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도덕적 감수성

프X킷이라는 직구 사이트가 있다.
주로 자덕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인데, 가격은 합리적이지만 배송이 무지 느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아마도 1개월 안에 배송 되리라고 기대하면서 주문하는 자덕은 없을 것이다.
한 번은 간단한 소품 몇 가지를 주문한 적이 있다. 단가는 다 합쳐서 10만원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5만원은 넘었을 듯.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다 돼 가는데도 배송이 되지 않자 몇 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주문을 했었다. 몇 번 이메일이 오간 끝에, 이 상품은 배송 중 잃어버린 것 같다며 환불 처리를 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2개월 가까운 기다림이 쓸데 없는 일이 돼 버렸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살짝 화가 나기까지 했으나, 그래도 큰 회사라고 환불을 쿨하게 해 주는 것이 기특하다고나 할까 그런 묘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 후, 정말로 2개월이 넘어가려는 시점에 물건이 떡 하니 배송이 돼 온 것 아닌가.
물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패키지는 다 뜯어지고 결정적으로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겉표지에는 아마도 우체국이 붙였을 것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물건 상태가 이렇게 된 건 자기네 책임이 아니네 어쩌네 하는 글귀였다.
일단 물건 값은 다 환불을 받았으니 상품의 상태가 엉망이건 말건 별 관심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작동을 시켜 보니 제대로 작동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배터리 들어가는 작은 전자제품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너네가 늦게 보내 주고 상태까지 이런 물건이니 그냥 써 주겠다라고 생각하고 꿀꺽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고서 거의 1년 가까이 흘렀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도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을 훑다가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질문을 올린 것을 보았다.
프x킷에서 배송이 지연 돼 컴플레인해서 환불을 받았는데, 상품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상품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답변들이 한결 같이 돈을 다시 입금해 줘야 된다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비양심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제품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모양으로 도착하긴 했으나, 판매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물에 젖었던 제품일지라도 작동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간혹 작은 이익에 움직였던 기억들이 몇 번 있다.
소탐대실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 약간의 성격 장애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도벽하고 비슷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도덕적인 감수성이 무뎌졌다고 설명해야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닳고 닳은 것인가 때 묻은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아무리 고민해 보면 뭐하나… 생활과 동떨어진 그런 고민들은 허영심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다.) 부끄럽다. 담백하고 단순하고 솔직하게 살자는 게 이리 어렵다.

서울역 계단

오래 전 부끄러운 일을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불현듯 떠올라 혼자 얼굴 붉히고 마는 일들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으므로, 아마도 의식적으로 꾹꾹 눌러 놓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뇌 어느 한 부분에 상처를 낸 기억일 것이므로 지워지지 않고 내 뜻과 상관 없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그런 것들 하나씩 적어 보려고 한다.

너 같은 애들을 반달이라고 한다며…

1995년 근처라고 생각 된다. 당시는 내가 살았던 하루하루가 부끄러운 나날들이었다.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으나 학교는 잘 나가지 않았다. 운동권 흉내를 내고 싶어서 데모에도 쫓아 다녔으나 구체적인 문제 의식은 별로 없었다. 그저 누구에게라도 풀고 싶은 불만은 조금 있었겠지. 일정한 거처 없이 친구집을 전전해 다녔고,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는 사나흘에 한번 들어가고는 했다.
무엇보다도 인생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당시 처한 가난에 대해서 과장하였고, 그것을 핑계로 사는 의지를 놓아 버렸다. 인생을 허비한 죄란 그 시절 내게 해당하는 죄목이다.
내 정체를 규정하자면 공부를 안 했으니 학생은 아니었고, 세상을 바꿔 보고 싶었지만 실천은 없었으므로 활동가도 아니었다. 운동권 흉내내는 반(半)동권 정도였겠다.

저것도 인간이라고…

막상 데모대를 따라 다니다 보면 그렇게 열의가 있지도 않았다.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빨리 해산하고 술이나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런다고 바로 세상이 바뀌지도 않을테고, 나는 데모에 나왔으니 의식 있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데모에 자주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별로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처럼 백골단에게 머리 깨질 염려는 거의 없었다. 가끔 지랄탄에 곤혹스럽긴 해도 그 뿐이다. 눈에 띄게 설치지 않는 이상 잡혀갈 염려도 없었다. 물론 잡혀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잡혀간다고 해서 고문을 당하거나 빨간 줄을 그을 염려는 없었다.
그 날도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데모대를 따라 다녔던 것 같다. 늦게 해산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려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기다리다가 계단에 앉아서 쪽잠을 잤다. 일정치 않은 잠자리와 불규칙한 식사 그리고 줄담배로 인해 체력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나 쪽잠을 자는데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나는 데모하고 온 사람이니까, 특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 지나다니는데 불편하니 일어나라는 얘기를 들었다.
한 쪽에서 자고 있긴 했지만, 서울역은 유동인구가 많으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나를 깨운 이의 모습이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나를 깨운 이는 점퍼 차림의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 남성이 입고 있는 점퍼의 한쪽 팔이 비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내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아 씨. 이 옆으로 지나 다니면 되잖아요.”
어떤 사고의 흐름을 거쳐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스스로 너무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잠결에 짜증이 섞여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는 분명히 순순히 자리를 피하려고 했었다. 상대방이 약한 것을 깨닫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
어이 없는 눈빛으로 그 남성은 나를 쳐다 보았다.
“저것도 인간이라고…”
그 남성이 한심한 듯 나를 쳐다 보면서 나즈막히 읖조린 말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라져 갔다.
나보다 훨씬 약한 상대라고 여겨졌던 사람에게서 들은 경멸의 말은 충격이었다.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항상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이 내 안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반동권이지 않았나.
그러나 그 때의 충격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가끔 아주 뜬금 없이 아무 맥락 없이 그 남성의 눈빛이 떠오른다. 머리 속 어딘가에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임에 분명하다. 그는 정곡을 찌른 것이다. ‘너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내게 말한 것이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주제에 약자에게만 강하구나. 게으른 줄만 알았더니 비겁하기까지 하구나.
너는 지금 사람으로 살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그 대답에 자신은 없다. 오히려 무뎌진 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은 여전하다. 다만 세상 그런 거 아니겠냐며 어른인 척 하고 그렇게 아파하지는 않는다.
인간으로 살기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