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계단

오래 전 부끄러운 일을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불현듯 떠올라 혼자 얼굴 붉히고 마는 일들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으므로, 아마도 의식적으로 꾹꾹 눌러 놓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뇌 어느 한 부분에 상처를 낸 기억일 것이므로 지워지지 않고 내 뜻과 상관 없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그런 것들 하나씩 적어 보려고 한다.

너 같은 애들을 반달이라고 한다며…

1995년 근처라고 생각 된다. 당시는 내가 살았던 하루하루가 부끄러운 나날들이었다.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으나 학교는 잘 나가지 않았다. 운동권 흉내를 내고 싶어서 데모에도 쫓아 다녔으나 구체적인 문제 의식은 별로 없었다. 그저 누구에게라도 풀고 싶은 불만은 조금 있었겠지. 일정한 거처 없이 친구집을 전전해 다녔고,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는 사나흘에 한번 들어가고는 했다.
무엇보다도 인생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당시 처한 가난에 대해서 과장하였고, 그것을 핑계로 사는 의지를 놓아 버렸다. 인생을 허비한 죄란 그 시절 내게 해당하는 죄목이다.
내 정체를 규정하자면 공부를 안 했으니 학생은 아니었고, 세상을 바꿔 보고 싶었지만 실천은 없었으므로 활동가도 아니었다. 운동권 흉내내는 반(半)동권 정도였겠다.

저것도 인간이라고…

막상 데모대를 따라 다니다 보면 그렇게 열의가 있지도 않았다.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빨리 해산하고 술이나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런다고 바로 세상이 바뀌지도 않을테고, 나는 데모에 나왔으니 의식 있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데모에 자주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별로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처럼 백골단에게 머리 깨질 염려는 거의 없었다. 가끔 지랄탄에 곤혹스럽긴 해도 그 뿐이다. 눈에 띄게 설치지 않는 이상 잡혀갈 염려도 없었다. 물론 잡혀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잡혀간다고 해서 고문을 당하거나 빨간 줄을 그을 염려는 없었다.
그 날도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데모대를 따라 다녔던 것 같다. 늦게 해산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려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기다리다가 계단에 앉아서 쪽잠을 잤다. 일정치 않은 잠자리와 불규칙한 식사 그리고 줄담배로 인해 체력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나 쪽잠을 자는데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나는 데모하고 온 사람이니까, 특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 지나다니는데 불편하니 일어나라는 얘기를 들었다.
한 쪽에서 자고 있긴 했지만, 서울역은 유동인구가 많으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나를 깨운 이의 모습이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나를 깨운 이는 점퍼 차림의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 남성이 입고 있는 점퍼의 한쪽 팔이 비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내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아 씨. 이 옆으로 지나 다니면 되잖아요.”
어떤 사고의 흐름을 거쳐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스스로 너무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잠결에 짜증이 섞여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는 분명히 순순히 자리를 피하려고 했었다. 상대방이 약한 것을 깨닫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
어이 없는 눈빛으로 그 남성은 나를 쳐다 보았다.
“저것도 인간이라고…”
그 남성이 한심한 듯 나를 쳐다 보면서 나즈막히 읖조린 말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라져 갔다.
나보다 훨씬 약한 상대라고 여겨졌던 사람에게서 들은 경멸의 말은 충격이었다.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항상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이 내 안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반동권이지 않았나.
그러나 그 때의 충격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가끔 아주 뜬금 없이 아무 맥락 없이 그 남성의 눈빛이 떠오른다. 머리 속 어딘가에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임에 분명하다. 그는 정곡을 찌른 것이다. ‘너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내게 말한 것이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주제에 약자에게만 강하구나. 게으른 줄만 알았더니 비겁하기까지 하구나.
너는 지금 사람으로 살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그 대답에 자신은 없다. 오히려 무뎌진 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은 여전하다. 다만 세상 그런 거 아니겠냐며 어른인 척 하고 그렇게 아파하지는 않는다.
인간으로 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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