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종주기 2020년 6월

동해안 자전거 종주는 최종적으로 3명(나와 내 친구 B군, 그리고 그의 직장 동료 P선생)이 동행하게 되었다.
멤버가 확정된 이후로 이것 저것 미리 준비를 하기는 하였으나, 뭔가 빼놓고 온 것만 같고 괜히 쓸데 없는 짐을 갖고 온 것만도 같았다. (자전거 여행 특성 상 짐은 가능한 줄여야 했다. 부끄럽지만, 새들백에는 담요도 들어 있었다. 고속버스의 과도한 냉방으로 추울까봐 걱정하여…)

모임의 시작은 2020년 6월 11일 목요일 저녁 반포 고속 터미널. 퇴근 후 각자 직장에서 반포 터미널까지 자전거로 집결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국토종주 수첩의 스탬프를 찍기 위해서는 영덕에서 출발하여 고성까지 가는 길이면 충분했지만, 영덕까지 가는 교통편은 일찍 끊기므로 포항에서부터 시작한다.

터미널에서 든든히 저녁을 먹고 대기한다.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여행한다는 경험담은 많이 들었지만 기사님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조언들을 들었으므로, 미리 긴장한 상태에서 버스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버스가 들어오고 기사님에게 최대한 착한 모습으로 인사를 한 후에 자전거 세 대를 싣기 시작한다. 다행히 다른 손님들 짐이 많지 않아 세 대 다 싣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잘 되지 않는다. 버벅이다가 앞 바퀴를 떼고서야 세 대를 겨우 실었다. 결국에 빨리 출발해야 된다는 기사님의 재촉을 피할 수는 없었다.
포항에 도착해서는 가까운 모텔을 찾기 시작했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고 다음 날 해만 뜨면 출발할 생각이었기에 가능한 싼 모텔을 찾았다. 우리의 구세주는 신돈 모텔.

싸지만… 빨리 벗어나고 싶다. 더러운 침대에 누워 있자니 괜시리 서글프다. B군은 편의점이 가깝고 가격이 싸서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만 나는 그냥 야간 라이딩을 시작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12일 새벽 4시에 기상해서 편의점에서 든든히 아침을 먹는다. 며칠 전 동부 7고개에서 봉크 비슷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장거리 라이딩하면서 최선을 다해 먹게 되었다.

미리 준비한 같은 GPX 파일을 세 명이 같이 따라 가기로 했다. 포항에서 출발해서는 찻길을 좀 따라가고 시내 길이라 길이 헷갈리긴 했지만, B군이 잘 인도하여 자전거 도로를 찾아냈다. 이제 영덕까지 열심히 달리면 된다.
동해안 종주길 내내 자전거 도로보다는 차도를 많이 탔다. 자전거 도로들이 대부분 노면 상태가 좋지 않았고, 옆에 있는 차도는 오히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쾌적한 경우가 많았다.

영덕까지 가는 길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큰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타게 된다. 길도 다시 찾아볼 겸 편의점에 들렀는데, 자전거가 많이 다니는 해안도로가 아니라 찻길이다 보니 편의점 사장님이 살짝 관심을 보인다.
“어디서 오시는 거에요?”
“저희 포항에서 출발했습니다.”
“포항에서 여기까지요? 대단하십니다. 오늘 울진까지도 가실 수 있겠네요.”
살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첫 날 목표는 최소한 동해, 잘 풀리면 정동진이었다. 로드 자전거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로드 자전거는 훨씬 멀리 갈 수 있다.

영덕이다.
첫 번째 인증 센터는 영덕 해맞이 공원인데 첫 인증 센터라 경황이 없어 사진으로 담을 생각을 못했다. 해맞이 공원을 조금 지나면 이런 조형물이 나온다.

대게가 저렇게까지 신성한 것인가 살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신성하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너무 노골적이라는 점이 예술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있을 뿐이지. 이후로도 삼척까지는 계속 대게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영덕 고래불 해변에서 스탬프를 찍는다.

이제부터 붉은 색 박스만 보면 혹시 스탬프 찍는 포인트가 아닌가 반가워하는데, KT 공중전화 박스가 왜 이렇게 비슷하게 생겼는지…

이 즈음에서 그랜드 슬래머 A형을 만나게 된다. 내 전조등이 자전거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애초에 결합 상태가 어설프더라니…) 뒤따라 오던 라이더 A형이 전조등을 집어 주는 호의를 베풀면서 인연은 시작 됐다. 어차피 같은 길을 가다 보니 중간 중간에 자주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동행을 청하고 4명이 팩이 되었다. 알고 보니 이번 동해안 경북 코스가 국토 종주 그랜드 슬램의 마지막 코스라고 한다. 존경스럽다. 봉크에 처한 B군에게 소세지를 친히 선사하시고 (사실 B군은 소세지를 안 좋아한다고 한다.) 가끔 앞에서 팩을 이끌기도 하면서 초면이지만 라이더끼리의 유대감을 확인하면서 열심히 밟으며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A형과 라이딩 동반하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발생한다. 펑크.

약한 업힐을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뒤에서 뻥하는 소리가 들렸다. 멈추고 뒤돌아 보니 A형이 흠칫 놀란 상태로 멈춰 있길래 A형이 펑크난 줄 알았는데 펑크 주인공은 P선생이었다. 큼지막한 돌덩이를 밟고 펑크가 났고, A형은 돌덩이 파편이 튀어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프로급의 숙련도로 10분만에 펑크 수리 완료. 고난은 있었으나 여행은 순조로울 것이다.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다시 열심히 밟아 울진에서 스탬프 다시 한번. 울진 월송정까지 오면서 너무 페이스가 빨랐던가, B군이 살짝 봉크의 기운이 느껴진다.

소세지 얻어 먹고 기운 내서 다시 달려서 망양 휴게소 인증센터에 도착한다.


봉크의 기운이 느껴져던 B군은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한참 쉬기로 한다.
달리는 스템의 유튜브 채널에서 본 바로는 아주 경치가 좋은 곳이어야 하는데, 이 날 안개가 자욱해서 별로 보이는 것은 없다.
안개 때문에 동해안의 경치를 구경하기는 힘들었으나, 오히려 안개 덕분에 사전에 걱정했던 더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람 또한 뒷바람 불어 라이딩에 이보다 쾌적한 날씨는 없다.
다시 출발.
이 곳은 은어다리. 설마 이렇게 노골적인 은어 모양 다리일 줄은 몰랐다. 이 곳이 경북 코스의 마지막이고, 다음은 강원도로 넘어간다.

경북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자전거 길은 상태가 그리 양호하지는 않았다. 관리 주체가 모호해서 그런가, 과연 자전거길이 맞나 싶은 곳도 더러 보였으나 그렇다고 아주 못 갈 길은 아니고 조심조심 다니면 위험하지는 않겠다. 한 두번 길을 잘못 들어서긴 했지만, 세 명이 같은 지도를 보고 가니 곧바로 바로 잡을 수 있어 크게 시간 낭비하지는 않았다.

동해안 종주길 전반적으로 업힐이 꽤 있는 편이다. 사전에 평지만 있는 코스는 아니다라는 정보는 들었으나 흘려 들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는 잔잔한 업힐이 많다.
이 곳은 강원도로 넘어와 삼척 임원 인증센터 근처이다. 임원 인증센터는 약간의 업힐 구간을 올라선 후에 있다. B군은 이쯤에서 다시 봉크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한참 쉬고 다시 출발.

이제부터는 다들 힘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자주 쉬도록 한다.
한재공원, 추암, 망상해변까지 자주 쉬면서 가니까 갈만하고 날씨도 도와주어 정동진까지 충분히 갈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놓인다. 중간 중간 살짝 어이 없는 길들이 있다. 바닷가라 그런지 모래가 뒤덥혀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길도 있고, 자전거 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급하고 좁아서 끌바를 강요하는 곳도 보인다. 그런 곳을 도전하기보다는 큰 그림을 보고 끌바의 굴욕을 달게 받는다.

망상해병에서 정동진까지는 10여km 밖에 되지 않는다. 200km 넘는 거리를 새벽부터 출발한 자신들에 대한 뿌듯함과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름 진지한 성취감으로 가슴 뭉클해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 숙소와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달린다. 다만, 너무 순조로운 점이 불길히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정동진 다 와 가지는 지점에 예상치 못한 업힐이 나타나는데… 상승 고도 200m 정도로서 어마어마한 업힐은 아니었으나, 기습 공격을 당한 터라 다들 힘들어한다. 그래도 넘는다.
드디어 정동진 도착.


숙소는 ‘1박 3만원’이라는 전광판이 크게 돌아가는 모텔로 정하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자전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많으셨는지 탐탁치 않아 하셨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 주신다.
“그냥 3만원에 해 드릴게요.”
무슨 말이지? 우리는 3만원이라는 전광판을 보고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주말은 3만원이 아닌데, 평일 가격에 해 준다는 뜻이었다. 코로나 여파로 방이 없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먹고 사는 일이라 용서해줄 법도 하지만, 그렇게 커다랗게 3만원이라고 광고를 하고서는 쉴 곳을 찾아온 손님한테 ‘주말은 5만원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을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는 않다.
저녁은 역시 회로 정했다.

이 곳에서 B군께서 이 여행의 첫 번째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바로 회를 앞에 두고 소주를 사양하신 것이다. 오늘 봉크의 기억으로 내일 일정이 부담되는 모양이긴 하나, 과연 기적이라고 말할만한 일이다.
숙소 상태는 포항의 신돈모텔에 비해서는 훨씬 좋다. 이 또한 의견이 갈리는데, B군은 신돈모텔과 큰 차이 없다고 했다. 내게는 감당할 수 있는 경계선의 살짝 위와 아래에 있었던 것 같다. 꿀잠 자고 2일차를 시작하기로 한다.

2일차 아침. 어제와 날씨는 딴 판이다. 안개 따위는 전혀 없이 쾌청하다.

전일 많이 달려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정에는 여유가 있다. 어제처럼만 순조롭다면 충분히 4시 이전에 대진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겠다. 노닥노닥 라이딩을 시작한다.
역시 편의점에서 든든하게 먹고 라이딩을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포대에 도착하는데, 경포해변 인증센터를 찾을 수가 없다. 오르락 내리락 경포해변 주변을 헤매다가 결국 현수막을 하나 찾았다. “임시 인증센터 안내”라는데, 그걸 모르고 서너바퀴 해변을 돌아다녔으니 허탈하다. 우리는 붉은 색 박스만 찾아 다녔으니 찾을 수 있을 리가 있나. 관광 안내소에 설치된 임시 인증센터에서 스탬프를 찍고 이왕 쉰 김에 경포대에서 한참 노닥인다.

전일부터 B군은 안장 높이에 대해서 살짝 불만이 있었는데, 이 즈음에서 거의 2cm를 높이는 결정을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B군은 안장 높이가 너무 낮아서 전일 고전했던 것이었다. 출발 직전에 안장을 바꿨다고 하는데… 역시 중요한 이벤트 전에 장비에 손 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다시 다리를 움직여 북쪽으로 출발한다. 강원도에 들어섰지만, 전날에 비해서 업힐은 거의 없어서 속도는 빠르게 낼 수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양양을 지나는데, 얼마 전 가족들과 하루 묵었던 곳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스 커피 한잔 마시고 사진 찍어 둔다.

지경공원까지 가는 길은 공사로 인해 끊어져 있었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자전거로 가시는 길을 보고 따라 갔으나, 자전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길이라 끌바할 수 밖에 없었다. 지경공원 인증센터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붉은 박스만 있었다. 원래 공원이 있긴 했던 것인가.

동호해변까지 가는 길은 수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증센터는 약간은 쌩뚱 맞게도 동호해변을 지나서 한참을 언덕길을 올라가는 중간에 있었다. 스탬프 한번 또 쾅 박아 주고 다운힐을 내려간 다음 만난 편의점에서 잔뜩 보급을 한 후에 다시 속초까지 열심히 밟는다.
이 즈음부터 다들 컨디션도 괜챃고 길도 평탄한 편이라 꽤 빠르게 속초에 이르렀다. 여기서도 인증센터 찾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경로 파일을 누군가 직접 다녀온 경로를 받아온 게 아니고 스트라바에서 지도 보면서 슥슥 만들었더니 인증센터를 지나치기도 한다.
점심은 속초의 유명한 물회집으로 정했다. 이미 출발 전부터 거기로 정했다. 예전에 설악산 다녀오는 길에 들른 적이 있던 집이다. 당시에는 바닷가에 위치한 집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확장 이전해서 동해안 자전거 종주 코스 가운데에 있다.

사실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즈음이었다고 해 두자. B군이 이번 여행의 두 번째 기적을 보여주는데…

(사진 출처: 달리는 스템 유튜브)
이런 길을 끌바 없이 올라가셨다. 사진상으로는 그 위용을 느끼기 어려운데, 나와 P선생은 저 길을 보자마자 클릿을 풀었다.

봉포해변까지도 크게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첫째 날에 안개가 먼 길 가도록 도와줬다면, 오늘은 화창한 날씨 덕에 관광 모드로 라이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동해안에 수 많은 해수욕장이 있을텐데,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물도 좋아지고 사람도 적어 한산한 느낌이었다. 한 여름에도 이 정도 한산할지는 모르겠으나 가족들과 다시 방문해 보고 싶다.

몇 번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이 날도 순조로운 라이딩이라고 생각했으나 단조로운 여행이 될까 걱정 됐는지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해 주신다.
P 선생의 기재가 다시 말썽을 일으킨다. 어제 한 번 펑크를 경험했는데 또 다시 같은 위치에 펑크가 난 것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펑크가 나서 더 불길히다. 펑크와 함께 가벼운 낙차, 그리고 날렵한 낙법까지 보여주셨다. 펑크 수리한 경험이 이미 있으니 어렵지 않게 튜브 교체할 줄 알았으나, 이상하게도 두번째가 시간이 더 걸렸다. 이것도 역시 불길함.
아니나 다를까 몇 km 못 가서 다시 펑크가 발생한다.

결론적으로는, 1차 펑크 때 이미 타이어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타이어에서 실밥 같은 게 관찰이 됐었으나 간과했고 그게 점점 커져서 사진처럼 도저히 진행이 어려운 상황이 돼 버렸다.
통일 전망대까지는 20km 만 더 가면 될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P선생은 대진 터미널까지 택시로 가고 나와 B군만 라이딩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같이 출발한 일행 중 한 명을 두고 오려니 당연히 마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빨리 마무리하고 대진터미널에서 합류하기 위해 다소 서두르게 된다.
내가 앞에서 끌었고 속도는 상당히 올렸던 것 같다. 자동차 통행이 많은 길을 지나 딱 달리기 좋은 길에 들어섰다. 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길이었다. 갑자기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도로에 SUV 한대가 다가서는 게 보였다. 그러넫 SUV가 속도를 줄일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놀란 나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충분한 신호를 주지 못했다.
결국에 B군과 추돌하는 사고가 났다. (그 SUV는 합류 직전에 급정거를 했다.) B군은 ‘어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낙차를 하고, 나는 겨우 중심을 잡고 낙차를 면할 수 있었다. 속도가 상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브레이크를 같이 잡기 시작한 이후에 추돌하기는 했으나 충격이 상당한 것 같았다. 다행히 계속 라이딩을 할 수는 있었으나 20km/h 속도도 못 쫓아와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평소 가까운 거리 라이딩 같으면 그냥 복귀했을만한 상황인데, 종주 마무리를 해야 되는 상황이라 그러지도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라이딩을 계속했다.
설상가상 이 때 하필 업힐까지 나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넘을 수 있었겠으나, B군 상태로는 쉽지 않아 보였다. 보통은 업힐 나오면 오픈하고 먼저 올라가고는 했으나, 이 업힐은 B군이 앞에 서고 뒤에서 보조 맞춰서 가야만 했다. 더위마저 심해지는 듯 하고,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으나 꾸역꾸역 언덕을 넘어 쉴만한 편의점을 찾았다.
그런데, 편의점에 들어서기 위해 자전거에 내리는 순간 B군이 조금 전 낙차로 인해 뒷바퀴 림브레이크가 틀어져서 브레이크슈가 바퀴에 닿은 상태로 계속 오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20km/h 속도도 못 쫓아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20km/h 속도를 내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이 대목이 B군의 세 번째 기적이다. 낙차한 몸으로 뒷브레이크를 잡은 상태로 업힐을 오른 것이다.
브레이크 조정하고서는 통일전망대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남은 거리를 수월하게 다녀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동해안 종주를 끝냈으나 마무리가 찝찝했다. 부주의로 동료를 낙차 시키고, 모두 다 같이 완주하지도 못하다니…
이제 대진 터미널까지 가서 버스에 잘 싣기만 하면 끝난다.  통일전망대 인증센터에서 대진 터미널까지는 몇 km 되지 않는다. 4시 버스는 충분히 탈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게 도착해서 P선생과 합류할 수 있었다.

버스가 들어오자 급하게 또 싣기 시작하는데, 서울에서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우리 외에도 자전거를 싣고자 하는 일행이 두 명 더 있어서 총 5대를 실어야만 했다. 결국에 나와 B군의 자전거는 겹쳐서 싣고서 출발했다. 대진 터미널을 떠난 버스는 거진에서도 손님을 싣도록 돼 있었다. 당황스럽게도 거진 터미널에서도 자전거를 싣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어서 또 한번 기분 상한 일이 있었으나 어쨌든 서울로 출발한다.

마무리가 이러하니 이틀 간의 좋은 기억들이 다 도루묵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 특별히 큰 자극이 아니라면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 아니던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B군과 P선생의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에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동서울에 도착하여 맥주 한잔 하면서 이틀 간을 되짚어 보며 즐거운 기억을 되새기고 앞으로 있을 더 즐거운 라이딩을 이야기하면서 성공적으로 마지막 장면을 긍정적인 기억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여행을 기획하고 같이 참여하도록 내게 모티베이션을 지속적으로 했던 B군에게 감사드린다. 낙차 충격으로 아직도 고통 받고 있다니 너무 안타깝다. 자전거 빠른 속도로 타는 사람이 아니고, ‘잘’ 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기운 북돋아 주고, 라이딩 내내 분위기 밝게 해 주면서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신 P선생께도 감사드린다. 즐거운 라이딩 쭈욱 함께 이어가길 바란다.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1996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역사에서 배워야합니다.

무감어수(無鑑於水) 감어인(鑑於人)

평등은 단지 ‘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 ‘자유의 최고치(最高値)’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여행기를 1996년에 책으로 묶은 것이다.
선생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말투로 여행지에 얽혀 있는 사연과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그간의 선생의 저작에서 효율보다는 관계 발전보다는 인간을 강조하는 선생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한가해 보인다.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보면 (비록 온화한 말투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급진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회주의/자본주의 패러다임 자체를 보고 구시대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 보수의 패러다임을 떠난 성찰의 말씀들이다. 쉴새 없이 돌아가며 풍족한 가운데 불안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되돌아 보는 시간이다.
이미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경계해야하는지…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몽롱한 가운데 찬물로 낯을 씻는 기분이다.

제주잔혹여행기

Photos

  • 2018/01/07, 일요일.
제주로 출발합니다. 불행히도 여행 기간 중 3일 비 소식이 예정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미리 우산을 잘 챙겨 가니, 나는 참 준비가 철저한 인간입니다.
  • 2018/01/08 ~ 09.
제주시에서 1박 후 서귀포 중산간 언저리에 있는 숙소로 어슬렁어슬렁 구경하며 이동합니다.
따뜻한 날씨를 예상했는데, 바람도 불고 기온도 내려가고 있습니다. 사악한 날씨네요.
어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눈이네. 그래도 이 정도면 돌아다닐만 합니다.
내일은 한라산에 갈 예정이고, 모레는 마라도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만, 산간 지방은 대설주의보, 바다는 풍랑 주의보랍니다. 산행도 좌절 되고, 마라도도 좌절 됐지만, 괜찮습니다. 서귀포 시내 관광을 하기로 합니다.
  • 2018/01/10.
눈이 많이 옵니다. 호텔 직원들이 눈 때문에 출근을 못한다고 합니다. 산간지방은 대설 경보, 해안은 대설 주의보입니다. 공항이 마비 됐다고 하네요.
그러나 역시 제주도는 따뜻하네요. 12시쯤 되니 길이 녹기 시작합니다. 조심조심 내려가 보도록 합니다.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에 다녀왔습니다. 다녀오는 길에 장도 좀 보고 오기로 하고 마트에 들렀습니다.
짜증나게도 마트에서 접촉 사고가 났습니다. 주차 공간이 아닌 곳에 주차된 마티즈를 살짝 긁었습니다.
늦으면 길이 얼지도 몰라 걱정이 되기 시작하여 현금 바로 주고 뜨려고 하는데, 보험이 완전 면책이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보험사에 연락하고 기다려 봅니다. 30분 이상 소요된 것 같습니다. 곧 길이 얼것만 같아 걱정이 됩니다.
서둘러 중산간 호텔까지 올라가는데,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길은 이미 얼기 시작했고, 한번이라도 멈추면 못 올라갈 것 같습니다.
아뿔싸. 전방에 눈길에 미끄러진 차들이 엉켜 있습니다. 이미 접촉사고 나 있는 상태고, 차량 대여섯대가 앞뒤로 몰려 있습니다. 망했다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습니다. 차가 멈춰 버렸으니 이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바퀴는 헛돌고 엑셀을 밟으니 옆으로 돕니다.
다행이 바로 옆에 교회가 있고, 그 앞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차를 밀어서 기적적으로 평지에 차를 댔습니다. 주님의 은총이죠.
5시 30분. 이제 곧 해가 질테고, 숙소까지는 1.5km 오르막에 1.0km 평지가 남았습니다. 내려가서 다른 숙소를 잡으러면 2.0km 내려가서 택시 잡아서 중문이나 서귀포 시내로 가야 하는데, 택시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호텔에 전화를 걸었더니 도울 방법이 없다고 하고, 렌트카에서는 견인차를 불러야 되는데, 제주 전역에 품귀라 언제 구할지 알 수 없고 가격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합니다.
해가 질 거 같아 더 판단을 늦출 수가 없어 급히 걷자고 합니다. 걷기 시작합니다.
작은 아이는 업다가 걸리다가 하고 큰 아이는 계속 걸었습니다.
금세 해가 집니다. 눈은 더 거세지고 앞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간간히 내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위안이 되지만, 그 차들도 미끄러질가 위태위태합니다.
약 30분 정도 걸으니 호텔에서 연락이 옵니다. 내려갈 수 있는 차를 마련했으니 데리러 온답니다.
15분 후에 마티즈 흰색 한 대가 나타납니다. 심지어 체인도 없습니다. 차가 그것밖에 없다네요.
역시나. 못 갑니다. 이미 이때는 평지를 걷고 있었는데도 못 갑니다.
애들하고 아내는 태우고 저는 뒤에서 다시 차를 밀어서 겨우 출발시켰습니다.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7세, 9세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으나, 그냥 힘들었다고만 합니다.
피어슨이 남극 탐험에 실패하고 조난당해 죽은 위치가 스스로 남겨 놓은 보급 지점에서 불과 150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는 게 생각난 저만 패닉에 빠진 거죠.
지쳐 잠이 듭니다.
  • 2018/01/11
밤새 눈이 왔습니다. 오늘은 좀 눈이 잦아들 거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오전 내내 퍼부었습니다.
12시가 되자 겨우 조금 진정이 되어 차 상태를 보러 갔습니다. 잘 하면 올라오기는 어려워도 내려갈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우선 체인을 구해 보려고 합니다. 3km 이상 걸어서 찾아간 하나로마트에는 체인이 동난지 오래 됐습니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서귀포 시내에도 체인은 전부 동이 나고 체인 구하러 온 사람들만 넘쳐납니다.
겨우 먹거리만 좀 사와서 돌아옵니다.
눈발은 다시 세지지만, 내일은 기온이 올라간다는 예보를 믿고 차는 내일 빼 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눈은 밤새 내렸습니다. 퍼부었습니다.
  • 2018/01/12
오늘은 제주시까지 나가야 됩니다.
눈은 계속 내렸습니다. 도로 상황은 어제보다 훨씬 안 좋습니다.
결국 가족들은 호텔 지원 차를 빌려서 해안가로 내려 보내고 저는 중산간에 서서 주차돼 있는 차를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빠졌습니다.
도전해 볼까. 해보기로 합니다. 이런…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앞뒤로 쌓인 50cm 눈밭에 바퀴가 푹 잠겼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유일하게 옳은 판단을 햇습니다. 견인차를 불러 해안가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차를 몰고 다시 제주시로 향합니다. 돌아오는 길은 해안가로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 2018/01/13
제주시에서 문명을 만끽했습니다.
  • 자! 여기서 저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첫 번째, 대전략의 실패입니다. 비록 산에 가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고 하나 굳이 중산간에 숙소를 잡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15년 전쯤 중산간에서 바라본 풍경이 인상적이었고, 여름에는 항상 바닷가에만 있었다는 게 이유였으나, 겨울에 중산간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두 번째, 리스크 관리의 실패입니다. 기온이 높아서 비 예보가 있었다고는 하나, 섬의 날씨는 마치 금융시장처럼 변화 무쌍한 것. 언제든지 비가 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체인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세 번째,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여 자치 따른는 자들을 더 불안하게 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네 번째, 밸류에이션의 실패입니다.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차와 미리 예약한 숙소를 포기하고 즐긴 후에 생각해 봐도 됐엇지만, 혹시나 날씨가 나아질 거라는 기대로 버텼습니다. 물론 일기 예보 상으로 10일보다 11일이, 11일보다 12일 날씨가 좋았지만, 사실은 반대로 실현되었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안전마진을 확보하지 못한 프라이싱의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실책은 순간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니다.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즐거웠습니다. 폭설에는 눈사람 만들고 눈장난을 하고 지겨워지면 수영장에서 즐겼습니다. (수영장은 매우 좋았습니다.) 휴가란 게 특별한 게 아니라 가족과 같이 시간 보내는 의미가 가장 클텐데, 5분 간격으로 날씨 확인하고 창 밖에 쌓인 눈을 보며 걱정하는 모습 좋지 못했습니다.
힘 빼고 살자고 다짐한지 오래 됐지만, 아직도 힘이 안 빠집니다. 하루하루 충실히 즐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