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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열 살 짜리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한 번도 뵌 적 없는 어머니 모습이다.
어머니는 1949년 전라도 함평 어느 시골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니었다. 첩이었는지 모르겠다. ‘애첩’이라고 하기에는 어머니에게 씨가 다른 언니가 있다는 점이 의아하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어릴 적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늦둥이니까 외할아버지가 요절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씨 다른 언니만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어머니와는 소식을 끊고 살았다.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틈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르지 않으신 외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정도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었다.
어머니의 큰 오빠는 어머니와 20살 가량 나이 차이가 났었다. 어머니가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시기가 되자, 그 오빠의 자식들, 그러니까 조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큰외삼촌은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술이 과했고 도박을 했다. 외할아버지 사후에 집안은 날로 기울었다. 나의 어머니는 기울어져 가는 집의 군식구였던 것이다. 학교 갈 나이가 지났어도 학교에 하루도 가본 적이 없으셨다. 매를 맞는 날이 많았다. 일을 잘 못했거나 아니면 별 이유 없이 억울하게 오빠와 올케에게 매 맞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10세 전후에 가출을 하셨다. 집안일에 실수를 했는데, 매 맞을 일이 두려워 집을 나왔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을 목적지도 없이 먹고 마실 것도 없이 걸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으셨다. 얼마나 처참한 모습이셨을지 보지 않았지만 눈에 그려진다.
피로와 허기에 지쳐 길가에 앉아 울고 계시던 어머니를 우연히 지나던 청년이 발견했다. 청년은 광주에 있는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그 청년을 따라 광주로 오게 됐다. 그 청년이 하숙하던 집에 식모 자리를 구하고 있었고 그 청년은 내 어머니를 그 곳에 맡겼다. 지금으로 치면 범죄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1960년 즈음에는 선의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는 하숙집 식모로 일했으나 억울하게 매 맞거나 굶을 일은 없었다. 하숙생 중에는 어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주신 분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신데, 읽고 쓰실 줄 아셨다. 아마도 그 대학생 덕분일 것이다. 광주에서 식모 생활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매 맞으며 사는 것보다는 나았던 셈이다.

어른이 되고 결혼 전까지 어머니는 광주의 대형 제과점에서 일했다. ‘프린스 제과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제과점의 안주인은 내 어머니를 어여삐 보시고 잘 챙겨 주셨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프린스 언니’라는 분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찾아뵌 적도 있었다. 그 때까지는 프린스 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나셨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통점이 있다.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심에도 버림 받고 고아처럼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의지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내 아버지는 여린 분이시다. 내 어머니와 달리 내 아버지는 모성을 그리워하셨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친할머니를 찾아 다니셨다. 장성하고 나서도 술에 취하시면 ‘울 엄니. 울 엄니’하셨다. 여린 분이셨다.
아버지는 졸업은 못했지만 중학교를 다녀본 적은 있으셔서 어머니보다 잘 읽고 잘 쓰셨다. 어머니는 읽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글 쓸 일이 있을 때 난감해 하셨다. 연필을 몇 번 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생 글씨와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아버지께 의지를 하셨던 것 같다.
내 아버지는 흥이 많은 분이다. 즐길 줄 알고 놀 줄 아는 분이셨다. 멋내는 것도 좋아하시고 친구도 좋아하신다. 천성이 선한 분이시고 기회만 주어졌다면 멋진 인생을 사셨을 것 같은 분이다.

나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많은 분이셨다. 아버지는 주방장 일을 하셨으나 자주 주인과 싸우고 일을 쉬셨다. 어머니는 항상 ‘쪼들린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두 분이 결혼하실 때 ‘프린스 언니’는 어머니께 큰 돈을 해주셨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월세로 시작하면 힘드니 전세방을 구해라’라며 주셨다고 하니 큰 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 돈이 사라지는 데는 얼마 안 걸렸으리라 짐작한다.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리어카 포장마차 일도 하셨고 노점에서 고둥, 번데기 등을 파는 일도 하셨었다.
하루는 하교길에 어머니 고둥 장사하시는 자리를 찾아 갔었다. 어머니는 당시 취학 전인 내 동생을 데리고 노점에서 고둥을 팔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가서려는데 어머니는 고둥 다라이를 급하게 챙기시고 동생 손을 잡고 근처 풀숲으로 몸을 숨기시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고 나는 어머니를 찾아 불렀다. 그 때 갑자기 억센 팔뚝이 나타나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계시던 다라이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당시에도 노점 단속을 했던 모양인데, 눈치 없는 내가 어머니 계신 곳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무슨 일인지 이미 아는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억센 남자에 맞서서 알겠다, 가면 될 거 아니냐고 싸우셨고, 나는 어머니 억센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내가 11살 때 수도권으로 이사를 오면서 친척의 도움을 약간 받아 식당을 시작하셨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장사할 줄을 모르셨다. 언제나 쪼들렸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도 아버지는 놀러 나가셔야 했다. 생계를 걱정하고 가게를 지키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영수증을 달라는 손님이었다. 글씨를 써야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게에 있을 때면 영수증 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거들지 않았다.
당시 살던 단칸방은 1층 단독 주택의 옥상에 불법으로 가건물을 올린 것이었다. 집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벽의 재질은 합판에 스티로폼을 댄 것이었다. 스티로폼이 방의 안쪽으로 대어져 있고 다른 특별한 처리를 하지 않아서 내가 주먹으로 툭 치면 안으로 푹 꺼지고는 했다. 그게 재밌어서 벽에 수 없이 구멍을 내었다. 방한이 되지 않았다. 겨울이면 방 안에서 얼음이 얼었다.
그래도 나는 컴퓨터 학원을 다녔었다. 변변한 부엌도 없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을 썼었으나, 단칸방 한 구석에는 자랑스럽게 8비트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그 즈음에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찾아 왔었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내가 외할머니를 뵌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고, 어머니도 그렇게 쌀쌀맞게 대할 수가 없었다. 왜 찾아 오셨는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엄마한테도 엄마가 있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외할머니는 사변 때나 있을 법한 판자집에 살고 있는 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 날 어머니는 슬퍼하시는 것 같았다. 울지는 않으셨다.
식당이 잘 안 되자 아버지는 보험설계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식당 일은 어머니 혼자서 하셨다. 그러다가 무허가 건물이었던 식당 건물이 헐리게 되면서 결국에는 식당도 문을 닫았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다른 식당에 품을 팔러 나가기 시작하셨다. 중간 중간 다른 장사를 시도했으나 모두 잘 되지 않았다. 장사 수완이 있는 편은 아니셨다. 자본이라고는 없었고 남의 돈 쓰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결국에 다시 어머니가 식당에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새벽에 일어나 나와 동생의 아침을 챙기고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챙기셨고 밤 늦게까지 일하셨다. 항상 잠이 부족하셨고 뼈마디가 아프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험하게 일하시는데 아버지는 양복 입고 설계사라고 돌아다니시는 게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아버지 설계사 수입은 당신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아버지 닮아서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다. 그렇지만 염치는 있는 편인가 보다. 어머니 일하시는 것만큼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공부했다.

어머니가 식당 일을 그만하실 수 있었던 것은 환갑이 지나셨을 때이다. 아들들도 가정을 꾸리고 그제서야 남편은 쓰는 것보다 버는 것이 많게 되었다. 어찌어찌 1톤 트럭 한 대를 마련하셔서 화물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적성이 맞았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자유로운 성격의 내 아버지는 제대로 된 가정, 학교에서 길러지지 못했고,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셨던 것 같다. 젊고 흥이 많아 조그만 가게에 머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트럭 몰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을 하신 이후로 어머니는 생계의 부담을 덜게 되셨다. 언젠가 내가 갓 취업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트럭 하나만 해 달라고 하셨었다. 지금까지 어머니 고생만 시키더니 아들 취직하자마자 손을 벌리는 모습에 화를 내고 무시해 버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 있었더라면 그리고 생각이 있었더라면 빚 내서라도 트럭 한 대 해 드렸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는 그만한 빚을 낼 용기도 없었다. 생활고는 손톱만큼 남아 있는 용기도 빼앗아 버린다.
어머니는 평화를 찾으신 것 같다. 그래도 아들들은 무심했고, 어머니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가 화려한 걸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결혼 후에 아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집이 가난해 네게 날개를 달아 주지 못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자꾸 그런 말씀 마시라며 오히려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일하셔야 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와 애틋한 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연민에 가깝다.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급하게 늙어가셨다. 이제 일 하시지 않아도 되니 늙어도 된다는 듯이 급하게 늙어가셨다. 겉모습도 늙으셨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못 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지만, 저런 분들이 오래 사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여느 주말과 다름 없이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 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말 이른 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좋은 소식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다시 전화 드리기로 마음 먹고 받지 않았으나 여러 번 다시 전화가 울렸다.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다. 어머니 관련한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 아버지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의식이 없으시고 119로 응급실로 가고 계시다고 했다. 택시가 잡힐만한 곳까지 가는 데 1시간 가량 걸렸다. 택시를 탄 곳은 양주 시청 근처였다.
택시 안에서 어머니는 뇌출혈이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주에서 고대안산병원까지 꽤 긴 거리였다. 그러나 택시 안에서 보낸 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여러 가지 상상들을 하면서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 병상이 수술실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의식이 없으시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모습은 충격이었다. 정말로 의식이 없으셨다. 눈은 반쯤 뜨고 계셔서 초점이 없다는 것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이미 돌아가신 것처럼 보였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삭발해 놓은 모습에 놀란 것도 같다. 그래도 아직 무슨 일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수술은 두 시간 안 걸렸던 것 같다. 그 사이에 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드셨다고 한다. 나도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으셔도 나는 배가 고프고 잠이 온다. 설렁탕 한 그릇 뚝딱 먹었다. 평소처럼 깍두기 국물도 넣어 먹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설렁탕 한 그릇 같이 먹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도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따로 듬뿍 넣어 드신다. 여태 서로 같이 마주하고 먹은 적 없는데도, 먹는 방법은 똑같다 생각했다. 갑자기 내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초적 욕구가 지배하는 것을 보니 나도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술 후에 담당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조차도 암울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30일 생존률이 30%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슬프다기보다는 분한 감정이었다. 억울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는 것인가 화가 치밀었다. 한 친구는 내가 어떻게 어머니 인생을 평가하느냐고 말했다. 훌륭하게 사셨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며칠이 지난 지금, 나는 어머니 깨어나실 거라고 믿는다. 어설프게 찾아 본 숫자들을 조합해 본 결과 지금 시기까지 더 나빠지지 않으셨으면 깨어나실 가능성이 높은 듯 하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어머니 삶이, 이런 삶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 늦기 전에 글을 쓴다.

여기까지 쓴 후 며칠이 지나 의사를 다시 만났다. 수술 당일에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던 모양이다. 보수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깨시는 건 어렵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동생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큰아들만 어리석게 희망을 품고 있었구나.

어머니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 다 쓰고 보니 어렵게 사셨다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연들 모르고 그냥 아무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잊혀지기에는 억울하다. 비참한 환경에서 평범한 아들 둘 부족한 것 모르게 키워낸 것만으로도 훌륭한 삶이시다. 그리고 아들 둘 기른 것만이 어머니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많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해서 우리 어머니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태원 할로윈 사고

일요일 오전 늦잠 자는 중 걸려 온 엄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카톡방에 보니 동생이 ‘이태원 사고 때문에 전화하셨었어요?’ 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마 동생도 전화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이태원 무슨 사고?’라며 좀 뒤져 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응? 압사? 길거리에서??
할로윈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를 뿐더러 인파가 붐비는 곳을 싫어하니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을 상상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양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첫째로 든 생각은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젊든 늙든 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태원이라는 동네였어야 하는가, 그렇게 좁은 공간에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모르겠다. 짐작하기 어렵지만, 짐작해 보자면, 즐기려고 했다기 보다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순전히 사람이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일까? 여튼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젊은 목숨이 사라졌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런데 더 놀랍다고 느낀 것은 누구 하나 모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측이 따로 없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
여기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책임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은데, 사실 이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행사에 (실제로 어떻게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므로 그것이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것 같다. 그렇지만, 미리 통제를 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선택적인 공감에 대한 거부감이다. 분명히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이 사고는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고 뉴스로서 잘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근거 없이 장례비, 위로금 등을 준다고 하고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과도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므로 선정적인 이슈에 과하게 자원이 몰린다면 어디에선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150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는 매년 1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 중 상당 수가 노인 인구이다. 물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방 조치는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과한 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의 본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졸업 후에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상가집, 결혼식 등에서 스쳐간 적만 있었던 후배였지만, 재학 중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던 사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이태원 사고가 갑자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다니.
그가 개인적으로 느꼈을 고통과 회한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하기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한 아이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고통,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차갑게 원칙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효용과 올바른 정치적인 태도를 따지던 차원에서 한 개인의 못 다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두 차원의 간극은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다. 인간이므로 둘 다 필요한 차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차갑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 또한 큰 의미로 비인간적이다.
나는 분명 이것도 곧 잊고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윤미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고 살면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쌍욕을 들은 후의 심리 변화

평소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자전거 출퇴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이 많다. 하루 약 90분 운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체력이 좋아지지만, 그보다는 정서적인 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사람에 치이거나 운전을 해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거나, 출퇴근이 유쾌한 경험이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자전거 출퇴근은 특히 퇴근길은 일에서의 스트레스를 땀흘리면서 풀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오면서 자전거 도로가 복잡해지면 다양한 스트레스 요소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자전거 도로는 인도와 엄연히 구분 돼 있지만, 어떤 이는 그게 자전거 도로라고 생각을 못해서 자전거 도로로 산책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갑자기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들이 가장 스트레스 요소이다. 점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 목줄을 풀어 놓는 경우도 가끔 보고, 그렇지 않더라도 목줄을 길게 늘어 뜨리면 개들이 자전거 도로로 뛰어 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제 퇴근 길에는 황당하게도, 자전거 도로 양방향을 떡하니 막고 개 주인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그냥 지나가야 되는데, 운동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을 때면 꼭 한 마디씩 학 게 된다.
‘길을 이렇게 막으면 어떡합니까? 아.. 씨.’ 라고 말했다. 뒤에 ‘아.. 씨..’는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실수였다. 사실은 아무 말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러고 지나가는데, ‘X발넘이..’ 라는 말이 돌아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하다가. 클릿을 빼고 돌아 보며,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라고 했더니,
‘너만 자전거 타냐?’ 라는 것이다.
왜 욕을 하느냐고 항의를 했어야 되는데,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왜 길을 막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실 내가 길을 멈춘 것은 쌍욕을 들었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대꾸 없이 가던 길 왔는데, 끝까지 기분이 좋지가 않다. 원래는 운동을 끝내고 기분 좋은 상태였어야 되는데, 분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꾸를 못했나? 왜 같이 쌍욕을 해 주지 그랬나?
그렇지만 이내 거기서 같이 쌍욕을 하는 것은 내 입만 더러워지는 것이다라는 생각까지는 하게 되었다. 잘 참았다. 애초에 길막는 상황 자체에 대해 항의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뀌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지금 드는 생각은 다른 종류의 좌절감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릇이 작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다.
정중하게 ‘왜 욕을 하십니까?’ 라고 대꾸했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 게 이기는 건데, 아드레날린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사람됨이 부족하다. 천성이 그릇이 작은 것이지만, 지향해야 될 바는 군자가 됨이어야 평균은 될 것 같다.

결론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한 정도 되는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아직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나라도 그렇게 되자.

훈련일지 – 하체리드를 못한다

현상:

아이언 드라이버 모두 정타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드라이버는 훅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언은 생크를 내고 있다.

예상 원인:

며칠 전부터 헤드업 하지 않기 위해 어깨 집어 넣는 것에 신경 많이 쓰고 있다. 다시 상체 리드하는 스윙이 나오는 것 같다. 상체 꼬임 유지하면서 내려오는 데 신경을 쓰도록 해야겠다.
전일 연습 때 코킹을 빨리하는 시도를 했다. 생크의 원인이 아닌가 한다. 백스윙 때 뒤로 빠지는 모습이 관찰 됐다.

해결 방안:

백스윙을 일체감 있고 몸통부터 시작하는 데 신경 쓰자. 코킹 위로 올리는 느낌으로 하고 뒤로 빠지지 않도록 하자.
하체 리드하자. Waggle Hit 드릴 해보자.
제대로 맞을 때까지 한번 샷 하고 자세 검토하는 거 반복하자.

하체리드 스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