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구보씨의 하루

구보씨는 부서원들과 점심 회식을 하였다. 이틀 전에 입사한 새파란 신입사원의 환영회를 겸한 회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보통의 신입사원이라면 술자리를 겸해서 저녁식사를 하였을 것이지만, 이번 신입사원은 특별하였다. 구보씨 부서에서 없던 고졸 신입사원이었던 것이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술자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고등학생쯤 되면 저희들끼리 몰래 술 한 잔씩 했겠지만, 직장에서는 오히려 더 조심해야만 하는 사정인 것이다. 점심 시간이 되어 구보씨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눈치 보고 있던 부서원들도 스르륵 일어났다. 이미 예약된 장소는 다들 알고 있었고 점심시간이야 뻔하므로 한 마디 말 필요 없었다. 눈빛도 필요 없고, 기척으로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한 셈이다.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는 다른 부서에 굳이 회식한다는 티를 낼 필요도 없으므로 기척 의사소통은 더욱 적절한 수단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스페인 식당에는 모두 여덟명이 자리했다.마침 4인분의 세트메뉴가 추천메뉴로 돼 있어 2세트를 시켰다. 그런데 착석하고 보니 소식가 4명이 한 테이블이고 대식가 4명이 다른 한 테이블에 모여 있는 것이다. 구보씨는 그 중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특히 적게 먹는 직원 1명과 특히 많이 먹는 직원 1명 자리 바꾸는 것을 제안하였다. 특히 적게 먹는 직원은 김다율이었고, 특히 많이 먹는 직원은 강현우였다. 구보씨가 생각 못했던 부분은 음식의 양이 점심식사 자리의 행복의 유일한 결정 요소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식사자리에서 음식만큼 중요한 것은 자리배치였다. 연장자이자 부서장이 제안하니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다율은 그러마하는 대답도 안 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는 것이었다. 구보씨는 깨달았다. ‘아 이 친구가 나와 겸상하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직장 생활 20년 넘게 해 온 구보씨는 타고난 성정과 상관 없이 눈치는 빨라졌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 다율과는 업무적으로 불편한 말을 주고 받은 기억이 있었다. 눈치만 채고 잠자코 있었다면 좋은 꼰대가 될 수도 있었는데, 속 좁은 구보씨는 입 밖으로 말을 꼭 내고야 만다.
“다율씨가 나랑 같이 먹기 싫구나. 그냥 이대로 먹지 뭐.”
구보씨는 안 해도 될 말을 또 했다고 생각하며 남 몰래 얼굴을 붉혔다.
그저께는 야단을 쳐 놓고 지금은 동석을 피한다고 토라지는 거냐? 자존감 한 단계 내려감. 역시 그릇 작은 놈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약한 사람은 쉽게 대하면서 미움은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냐.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거고, 그렇다고 가운데라는 것도 애매모호하단 말이다. 자존감 두 단계 내려감.
그래도 음식이 나오고 먹을 것 뱃속에 들어가고 나니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시덥잖은 취미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 여행 다녀온 잡설들을 나누면서 시끌시끌 점심을 먹었다. 서로 간에 적절한 거리 유지하면서, 우리 친한 사이라고 확인하는 정도의 시끌시끌함이다. 이것이 사회생활. 오늘도 직장생활이라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오후에는 스터디 모임 시간이 있었다. 구보씨는 평소 부서 직원들의 전문성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특히 강현우는 연차에 비하여 아는 것이 부족하여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늘상 생각해 왔고, 이번에 책 한권을 정해 주고서 발표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구보씨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첫인상으로 선입견을 갖는 경우는 별로 없으나, 한 번 정한 평가를 쉽게 바꾸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머리가 둔하다고 일단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었다. 현우는 이미 그 단계에 접어 들어 있는 상태였다. 비록 그 둔한 머리를 개발해 주고자 좋은 의도에서 공부를 시킨 것이지만, 시킬 때마다 실망하고는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의 텍스트만 읽었을 뿐 행간을 읽지 못하고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번역을 잘못한 것까지 있었다. (정해준 책은 영어로 된 책이었다.)
“이거 번역이 맞나? hard enough that ~~ 이라고 하면 ~~하도록 충분히 어렵다는 뜻 아냐? ~하기 어렵다는 뜻이야?”
현우도 안 좋은 버릇이 있었는데, 바로 머리는 둔한데 지는 것을 싫어해서 우기기를 잘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같은 뜻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그게 같은 뜻이야? that 이하가 어려운 거야? 지금이 영문법 시간도 아니고, 내가 번역까지 바로 잡아줘야 돼?”
당신 평소에 유학파라고 영어 잘한다고 티내고 다니지 않았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점심시간의 섣부른 혓바닥의 실수가 약이 됐던 모양이다.
“제 뜻은 같은 뜻으로 말한 거였는데… 그럼 제가 잘못 쓴 거 같습니다.”
“번역 잘못했다고 하면 되지 왜 우기길 우기나?”
역시 작은 그릇은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비아냥거리면서 얘기할 거리는 아니었는데 또 이런다. 이러면서 또 미움은 받고 싶지 않겠지. 구보씨는 그 뒤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화제가 전환되면서 영어 번역 문제는 금세 잊혀졌지만 구보씨 자존감은 또 한 단계 하락.
퇴근이나 해야겠다. 아내에게 말을 거니 아내가 선수를 쳤다. 중년의 우울감을 먼저 토로하는 것이다. 여자의 갱년기가 무섭다고들 하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게다가 구보씨도 아내의 갱년기에 대하여 짐작은 하고 있었던 터라, 신중하게 대꾸했다. 나도 오늘 별로 유쾌하지 않단다. 네 우울감 들어줄 여유가 없단다.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구보씨는 사려 깊고 진지한 말투로 아내를 위로하였다. 구보씨 자존감 한 단계 상승. 이렇게 속 넓은 사람이었다니. 스스로 대견해했다.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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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새벽 달리기. 25년 1월 14일 새벽.


조깅을 하면서 오늘 둘러 볼 세비야의 지리를 파악해 보려고 한다. 세비야 대성당 주변의 구도심을 한 바퀴 돌아 보고 아침식사 먹을 만한 장소도 물색하는 것이 목표였다. 세비야 숙소는 아파트형 숙소라서 아침을 알아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desayuno(스페인어로 아침식사)라는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적당한 곳을 하나 찍어 두고 대성당을 찾아가 보았다.

새벽녘 인적 드문 대성당 분위기는 부지런한 자 (aka 시차적응 못한 자)의 특권이다.
생각보다 날씨가 차다. 어제 휴대폰 충전을 제대로 안 한 데다 날씨가 차니 금세 방전이 돼 버렸다. 구글맵을 사용 못하니 조금 불편할 것 같지만, 지도를 잘 숙지했으므로 감각으로 길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결국 길 잃고 숙소를 코 앞에 두고 빙빙 돌아 집에 복귀했다.

알사카르와 세비야 대성당. 25년 1월 14일 오전.

첫 일정은 세비야 대성당이다.

그렇지만 식후경 해야하지 않겠는가? 청소년들을 데리고 아까 찍어 둔 데싸유노(desayuno)가 가능한 레스타우란테(restaurante)를 찾아 간다. 스페인 사람들 먹는 것처럼 아침 식사를 해 보고 싶었다. 대충 보니 빵이 기본이고 빵 위에 얹거나 발라서 먹는 것들은 다양한 것 같았다. 토마토 다져서 올리브 오일에 얹어서 먹기도 하고 하몽을 얹어 먹기도 한다. 때로는 빵이 아닌 츄로스를 아침으로 먹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도 Pan con tomate(Bread with tomato)와 churros con chocolate를 시켜 보았다. 커피도 현지인처럼 먹어 보도록 하자. 나는 cafe solo(coffee only라는 뜻인데, 이렇게 말하면 그냥 espresso이다) 아내님은 cafe con leche(coffee with milk, 라테 느낌)을 마셨다. 나중에 알아챈 사실이지만 현지인들이 제일 많이 먹는 커피는 cafe cortado였다. espresso에 우유 얹은 거라고 하는데 조금 우유양이 많은 게 특징인 것 같다. 먹어 본 느낌 상 그랬다는 거고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세비야 성당 앞에 갔더니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됐다. 비수기라는 것만 믿고 예약도 안 하고 오다 보니 오픈 시간도 몰랐던 것이다. 순서를 바꿔 알카사르를 먼저 방문하기로 한다.
스페인 여러 도시를 몇 군데 다니다 보니 유적들 이름이 헷갈린다. 알카사르는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궁전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라고 봐야겠다. 그래서 도시마다 알카사르가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정식 명칭은 ‘Real Alcazar de Sevilla’가 되겠다. 그 외에도 누에바 거리(new street)도 어디나 있고, 스페인 광장이라는 지명도 도시마다 있다.
알카사르도 티켓을 따로 예매하지 않았지만, 티켓 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미리 준비했으면 오가는 시간을 좀 절약할 수 있었을 것 같긴 하다. 입장 시간을 정해서 티켓을 판매하고 있지만 간격이 촘촘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은 안 써도 될 것 같다.

세비야 알카사르는 ‘작은 알람브라’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슬람식의 화려한 장식이 눈길을 끈다. 화려함으로만 치면 정말로 알람브라보다 더한 수준인 것 같다. 조금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이 쪽이 조금 더 카톨릭 색채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슬람식 장식들 사이에 스페인 통일 전의 각 왕국들의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화려한 것은 내 취향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과하다. 이들에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褸 華而不侈)를 알려 주고 싶다.
알카사르를 나와서 청소년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츄로스를 한 번 더 먹고, 세비야 대성당 입장한다. 이번에는 간식 타임에 미리 입장권 구매를 했고, 덕분에 빠르게 입장할 수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은 보통의 카톨릭 성당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아내님의 감상에 따르면, ‘holy’한 느낌이 덜하다고 한다. 보통 카톨릭 성당은 주 예배단이 있고 건물 자체가 십자가 형태를 띄는 형태가 많다… 고 알고 있다. 그와 달리 이 성당은 그냥 직사각형이다. 마치 미술관과 같은 느낌이 든다. 흔히 보이는 회랑 같은 것은 없고, 어디가 예배단인가도 모호하게 돼 있다. 대신에 좀 가치가 있어 보이는 그림들이 다수 전시 돼 있다. 벽면 쪽으로는 전부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된 방들이 다수 있다. 각 방 안에는 성경 이야기 또는 세비야 지역의 성인들 이야기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 전시 돼 있거나, 옛 주교들의 무덤이 안치 돼 있다. 그래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방마다 옮겨 다니는 형태가 된다.
세비야 대성당에서 특별히 유명한 것은 콜럼버스의 무덤이다. 쿨럼버스가 말년에 삐져서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공중에 떠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하나 세비야 대성당에서 유명한 것은 히랄다 탑이다. 탑은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다만 티켓 구매 시 탑까지 올라갈 수 있는 옵션을 선택해야 가능하다.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아이들 걸음으로도 15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었다. 또한 계단이 아니라 경사로로 돼 있어서 체력적으로 큰 무리는 없다. 탑에 오르면 세비야 경관이 한 눈에 펼쳐지는 것이 볼만하니 히랄다탑은 올라가볼 것을 추천한다.

히랄다는 풍향계라는 뜻으로 탑 꼭대기에 사진과 같은 풍향계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막상 히랄다 탑에서는 히랄다를 구경할 수 없으므로 성당 입구에 일부러 복제품을 만들어 둔 것 같다. 히랄다의 복제품을 봤을 때는, ‘아 스페인 사람들은 풍향계도 참 멋지게 만들었구만.’ 정도로 생각했었다. 탑에서 시내 경관을 보고 나와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서 히랄다 탑이 보이는데, 그제서야 세비야의 랜드마크는 저 녀석이었구나 알 수 있다. 아니면 왠지 한 번 본 녀석이라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스페인 광장. 25년 1월 14일 오후.

다음 목적지는 스페인 광장이다. 잠깐 말했듯이 또 하나 헷갈리는 지명이 스페인 광장이다. 스페인 많은 도시에는 다 ‘스페인 광장’이 있다. 우리로 치면 대전시에 ‘대한민국 광장’이라는 지명이 있는 셈이므로 좀 어색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스페인 전역에는 수 많은 광장(plaza)가 있다. 광장이라고 해도 규모가 전부 제각각이다. 모여 봤자 한 20명 모이면 꽉 찰 거 같은, 건물들 사이의 빈 공터에도 무슨 무슨 plaza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반면에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꽤 큰 광장이다. 지금은 정부의 무슨 청사로 쓰이고 있다고 하는 둥근 형태의 건물이 광장을 둘러 싸고 있다. 애초에 광장을 만들기 위해 건물을 만든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둥근 광장 둘레에는 스페인의 주요 도시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둘러 싸고 있다. 스페인 역사나 도시의 특색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면 그림을 보는 재미가 더 있을 것 같다.
스페인 광장은 성당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편이다. 관광객들 중에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춥기도 하지만 말똥냄새가 싫다고 주장하여 버스를 타고 이동해 보기로 했다. 사실 어느 도시든지 그 동네 대중교통 시스템과 시장, 이 두 가지는 체험해 볼만한 소소한 재미라고 생각한다.


스페인 광장에 앉아서 따뜻한 햇빛 쬐면서 노닥거리며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피곤한 몸 쉬었다가 다시 이동한다.

플라멩코. 25년 1월 14일 저녁.

다시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이동한다. 이 공연장은 ‘메트로폴 파라솔’이라는 현대적인 조형물 근처에 있다. 메트로폴 파라솔에서 보는 석양이 좋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날은 개방하지 않았다. 이 근처는 명동 느낌나는 번화한 거리이다.
스페인에서 플라멩코는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 일정 어디에서나 끼워 넣을 수 있었지만, 세비야가 좋다고들 한다. 플라멩코라는 게 뭔지 처음 접해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뭐가 좋은지 알 도리는 없으므로 일정에 따라 정하면 될 것 같다.
플라멩코 공연은 Casa de Memoria라는 곳으로 미리 예약을 했다. 사실 플라멩코 공연장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려운데, 구글링 통해 서양 여행 블로거들의 순위를 참고로 했다. 아까 말했듯이, 문외한이 보기에는 뭐든지 상관은 없을 거 같다.
공연장 분위기로 보았을 때 대부분 관광객들인 것 같았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작은 공연장이다. 무대가 있고 무대를 둘러싸고 2줄 내지 3줄의 객석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 많을 때는 위층 발코니처럼 생긴 곳에서 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공연장이 작아서 조금 더 친밀한 분위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 이 공연장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에는 친밀한 분위기라는 점이 우리를 괴롭게 만든 부분이 되었다. 여행 피로가 쌓인 점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열정적인 무대 앞에 두고 너무 졸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네 가족 모두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조는 모습을 보이면 예술가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 냈다. 공연 시간이 한 시간 남짓으로 길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판소리도 듣고 있으면 졸리지 않나? 알아 듣지도 못하고 공감하기도 어려운 정서의 생소한 예술을 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험 삼아 보기는 했지만,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진리였다.
그렇다고 공연에 아무 감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박수와 기타, 추임새 등과 어울려 부르는 한스러운 노래와 격정적인 춤은 인상적이었다. ‘경험삼아’ 볼만한 것 같다.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공연장을 나왔다. 저녁으로 안달루시아 요리와 세르베사, 비노를 곁들여 마시고 숙소인 우리의 아파트로 돌아가서 긴 세비야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은 렌트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로 바르셀로나로 이동할 예정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비야에서의 일정이 짧게 느껴진다.

다음: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5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1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2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3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4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5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6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7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8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9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마무리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팁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열 살 짜리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한 번도 뵌 적 없는 어머니 모습이다.
어머니는 1949년 전라도 함평 어느 시골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니었다. 첩이었는지 모르겠다. ‘애첩’이라고 하기에는 어머니에게 씨가 다른 언니가 있다는 점이 의아하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어릴 적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늦둥이니까 외할아버지가 요절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씨 다른 언니만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어머니와는 소식을 끊고 살았다.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틈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르지 않으신 외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정도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었다.
어머니의 큰 오빠는 어머니와 20살 가량 나이 차이가 났었다. 어머니가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시기가 되자, 그 오빠의 자식들, 그러니까 조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큰외삼촌은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술이 과했고 도박을 했다. 외할아버지 사후에 집안은 날로 기울었다. 나의 어머니는 기울어져 가는 집의 군식구였던 것이다. 학교 갈 나이가 지났어도 학교에 하루도 가본 적이 없으셨다. 매를 맞는 날이 많았다. 일을 잘 못했거나 아니면 별 이유 없이 억울하게 오빠와 올케에게 매 맞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10세 전후에 가출을 하셨다. 집안일에 실수를 했는데, 매 맞을 일이 두려워 집을 나왔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을 목적지도 없이 먹고 마실 것도 없이 걸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으셨다. 얼마나 처참한 모습이셨을지 보지 않았지만 눈에 그려진다.
피로와 허기에 지쳐 길가에 앉아 울고 계시던 어머니를 우연히 지나던 청년이 발견했다. 청년은 광주에 있는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그 청년을 따라 광주로 오게 됐다. 그 청년이 하숙하던 집에 식모 자리를 구하고 있었고 그 청년은 내 어머니를 그 곳에 맡겼다. 지금으로 치면 범죄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1960년 즈음에는 선의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는 하숙집 식모로 일했으나 억울하게 매 맞거나 굶을 일은 없었다. 하숙생 중에는 어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주신 분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신데, 읽고 쓰실 줄 아셨다. 아마도 그 대학생 덕분일 것이다. 광주에서 식모 생활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매 맞으며 사는 것보다는 나았던 셈이다.

어른이 되고 결혼 전까지 어머니는 광주의 대형 제과점에서 일했다. ‘프린스 제과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제과점의 안주인은 내 어머니를 어여삐 보시고 잘 챙겨 주셨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프린스 언니’라는 분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찾아뵌 적도 있었다. 그 때까지는 프린스 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나셨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통점이 있다.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심에도 버림 받고 고아처럼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의지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내 아버지는 여린 분이시다. 내 어머니와 달리 내 아버지는 모성을 그리워하셨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친할머니를 찾아 다니셨다. 장성하고 나서도 술에 취하시면 ‘울 엄니. 울 엄니’하셨다. 여린 분이셨다.
아버지는 졸업은 못했지만 중학교를 다녀본 적은 있으셔서 어머니보다 잘 읽고 잘 쓰셨다. 어머니는 읽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글 쓸 일이 있을 때 난감해 하셨다. 연필을 몇 번 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생 글씨와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아버지께 의지를 하셨던 것 같다.
내 아버지는 흥이 많은 분이다. 즐길 줄 알고 놀 줄 아는 분이셨다. 멋내는 것도 좋아하시고 친구도 좋아하신다. 천성이 선한 분이시고 기회만 주어졌다면 멋진 인생을 사셨을 것 같은 분이다.

나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많은 분이셨다. 아버지는 주방장 일을 하셨으나 자주 주인과 싸우고 일을 쉬셨다. 어머니는 항상 ‘쪼들린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두 분이 결혼하실 때 ‘프린스 언니’는 어머니께 큰 돈을 해주셨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월세로 시작하면 힘드니 전세방을 구해라’라며 주셨다고 하니 큰 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 돈이 사라지는 데는 얼마 안 걸렸으리라 짐작한다.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리어카 포장마차 일도 하셨고 노점에서 고둥, 번데기 등을 파는 일도 하셨었다.
하루는 하교길에 어머니 고둥 장사하시는 자리를 찾아 갔었다. 어머니는 당시 취학 전인 내 동생을 데리고 노점에서 고둥을 팔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가서려는데 어머니는 고둥 다라이를 급하게 챙기시고 동생 손을 잡고 근처 풀숲으로 몸을 숨기시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고 나는 어머니를 찾아 불렀다. 그 때 갑자기 억센 팔뚝이 나타나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계시던 다라이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당시에도 노점 단속을 했던 모양인데, 눈치 없는 내가 어머니 계신 곳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무슨 일인지 이미 아는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억센 남자에 맞서서 알겠다, 가면 될 거 아니냐고 싸우셨고, 나는 어머니 억센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내가 11살 때 수도권으로 이사를 오면서 친척의 도움을 약간 받아 식당을 시작하셨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장사할 줄을 모르셨다. 언제나 쪼들렸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도 아버지는 놀러 나가셔야 했다. 생계를 걱정하고 가게를 지키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영수증을 달라는 손님이었다. 글씨를 써야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게에 있을 때면 영수증 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거들지 않았다.
당시 살던 단칸방은 1층 단독 주택의 옥상에 불법으로 가건물을 올린 것이었다. 집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벽의 재질은 합판에 스티로폼을 댄 것이었다. 스티로폼이 방의 안쪽으로 대어져 있고 다른 특별한 처리를 하지 않아서 내가 주먹으로 툭 치면 안으로 푹 꺼지고는 했다. 그게 재밌어서 벽에 수 없이 구멍을 내었다. 방한이 되지 않았다. 겨울이면 방 안에서 얼음이 얼었다.
그래도 나는 컴퓨터 학원을 다녔었다. 변변한 부엌도 없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을 썼었으나, 단칸방 한 구석에는 자랑스럽게 8비트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그 즈음에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찾아 왔었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내가 외할머니를 뵌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고, 어머니도 그렇게 쌀쌀맞게 대할 수가 없었다. 왜 찾아 오셨는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엄마한테도 엄마가 있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외할머니는 사변 때나 있을 법한 판자집에 살고 있는 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 날 어머니는 슬퍼하시는 것 같았다. 울지는 않으셨다.
식당이 잘 안 되자 아버지는 보험설계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식당 일은 어머니 혼자서 하셨다. 그러다가 무허가 건물이었던 식당 건물이 헐리게 되면서 결국에는 식당도 문을 닫았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다른 식당에 품을 팔러 나가기 시작하셨다. 중간 중간 다른 장사를 시도했으나 모두 잘 되지 않았다. 장사 수완이 있는 편은 아니셨다. 자본이라고는 없었고 남의 돈 쓰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결국에 다시 어머니가 식당에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새벽에 일어나 나와 동생의 아침을 챙기고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챙기셨고 밤 늦게까지 일하셨다. 항상 잠이 부족하셨고 뼈마디가 아프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험하게 일하시는데 아버지는 양복 입고 설계사라고 돌아다니시는 게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아버지 설계사 수입은 당신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아버지 닮아서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다. 그렇지만 염치는 있는 편인가 보다. 어머니 일하시는 것만큼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공부했다.

어머니가 식당 일을 그만하실 수 있었던 것은 환갑이 지나셨을 때이다. 아들들도 가정을 꾸리고 그제서야 남편은 쓰는 것보다 버는 것이 많게 되었다. 어찌어찌 1톤 트럭 한 대를 마련하셔서 화물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적성이 맞았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자유로운 성격의 내 아버지는 제대로 된 가정, 학교에서 길러지지 못했고,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셨던 것 같다. 젊고 흥이 많아 조그만 가게에 머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트럭 몰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을 하신 이후로 어머니는 생계의 부담을 덜게 되셨다. 언젠가 내가 갓 취업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트럭 하나만 해 달라고 하셨었다. 지금까지 어머니 고생만 시키더니 아들 취직하자마자 손을 벌리는 모습에 화를 내고 무시해 버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 있었더라면 그리고 생각이 있었더라면 빚 내서라도 트럭 한 대 해 드렸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는 그만한 빚을 낼 용기도 없었다. 생활고는 손톱만큼 남아 있는 용기도 빼앗아 버린다.
어머니는 평화를 찾으신 것 같다. 그래도 아들들은 무심했고, 어머니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가 화려한 걸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결혼 후에 아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집이 가난해 네게 날개를 달아 주지 못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자꾸 그런 말씀 마시라며 오히려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일하셔야 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와 애틋한 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연민에 가깝다.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급하게 늙어가셨다. 이제 일 하시지 않아도 되니 늙어도 된다는 듯이 급하게 늙어가셨다. 겉모습도 늙으셨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못 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지만, 저런 분들이 오래 사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여느 주말과 다름 없이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 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말 이른 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좋은 소식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다시 전화 드리기로 마음 먹고 받지 않았으나 여러 번 다시 전화가 울렸다.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다. 어머니 관련한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 아버지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의식이 없으시고 119로 응급실로 가고 계시다고 했다. 택시가 잡힐만한 곳까지 가는 데 1시간 가량 걸렸다. 택시를 탄 곳은 양주 시청 근처였다.
택시 안에서 어머니는 뇌출혈이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주에서 고대안산병원까지 꽤 긴 거리였다. 그러나 택시 안에서 보낸 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여러 가지 상상들을 하면서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 병상이 수술실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의식이 없으시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모습은 충격이었다. 정말로 의식이 없으셨다. 눈은 반쯤 뜨고 계셔서 초점이 없다는 것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이미 돌아가신 것처럼 보였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삭발해 놓은 모습에 놀란 것도 같다. 그래도 아직 무슨 일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수술은 두 시간 안 걸렸던 것 같다. 그 사이에 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드셨다고 한다. 나도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으셔도 나는 배가 고프고 잠이 온다. 설렁탕 한 그릇 뚝딱 먹었다. 평소처럼 깍두기 국물도 넣어 먹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설렁탕 한 그릇 같이 먹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도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따로 듬뿍 넣어 드신다. 여태 서로 같이 마주하고 먹은 적 없는데도, 먹는 방법은 똑같다 생각했다. 갑자기 내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초적 욕구가 지배하는 것을 보니 나도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술 후에 담당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조차도 암울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30일 생존률이 30%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슬프다기보다는 분한 감정이었다. 억울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는 것인가 화가 치밀었다. 한 친구는 내가 어떻게 어머니 인생을 평가하느냐고 말했다. 훌륭하게 사셨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며칠이 지난 지금, 나는 어머니 깨어나실 거라고 믿는다. 어설프게 찾아 본 숫자들을 조합해 본 결과 지금 시기까지 더 나빠지지 않으셨으면 깨어나실 가능성이 높은 듯 하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어머니 삶이, 이런 삶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 늦기 전에 글을 쓴다.

여기까지 쓴 후 며칠이 지나 의사를 다시 만났다. 수술 당일에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던 모양이다. 보수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깨시는 건 어렵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동생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큰아들만 어리석게 희망을 품고 있었구나.

어머니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 다 쓰고 보니 어렵게 사셨다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연들 모르고 그냥 아무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잊혀지기에는 억울하다. 비참한 환경에서 평범한 아들 둘 부족한 것 모르게 키워낸 것만으로도 훌륭한 삶이시다. 그리고 아들 둘 기른 것만이 어머니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많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해서 우리 어머니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태원 할로윈 사고

일요일 오전 늦잠 자는 중 걸려 온 엄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카톡방에 보니 동생이 ‘이태원 사고 때문에 전화하셨었어요?’ 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마 동생도 전화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이태원 무슨 사고?’라며 좀 뒤져 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응? 압사? 길거리에서??
할로윈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를 뿐더러 인파가 붐비는 곳을 싫어하니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을 상상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양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첫째로 든 생각은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젊든 늙든 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태원이라는 동네였어야 하는가, 그렇게 좁은 공간에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모르겠다. 짐작하기 어렵지만, 짐작해 보자면, 즐기려고 했다기 보다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순전히 사람이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일까? 여튼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젊은 목숨이 사라졌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런데 더 놀랍다고 느낀 것은 누구 하나 모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측이 따로 없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
여기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책임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은데, 사실 이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행사에 (실제로 어떻게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므로 그것이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것 같다. 그렇지만, 미리 통제를 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선택적인 공감에 대한 거부감이다. 분명히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이 사고는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고 뉴스로서 잘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근거 없이 장례비, 위로금 등을 준다고 하고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과도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므로 선정적인 이슈에 과하게 자원이 몰린다면 어디에선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150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는 매년 1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 중 상당 수가 노인 인구이다. 물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방 조치는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과한 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의 본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졸업 후에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상가집, 결혼식 등에서 스쳐간 적만 있었던 후배였지만, 재학 중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던 사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이태원 사고가 갑자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다니.
그가 개인적으로 느꼈을 고통과 회한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하기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한 아이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고통,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차갑게 원칙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효용과 올바른 정치적인 태도를 따지던 차원에서 한 개인의 못 다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두 차원의 간극은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다. 인간이므로 둘 다 필요한 차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차갑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 또한 큰 의미로 비인간적이다.
나는 분명 이것도 곧 잊고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윤미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고 살면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쌍욕을 들은 후의 심리 변화

평소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자전거 출퇴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이 많다. 하루 약 90분 운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체력이 좋아지지만, 그보다는 정서적인 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사람에 치이거나 운전을 해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거나, 출퇴근이 유쾌한 경험이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자전거 출퇴근은 특히 퇴근길은 일에서의 스트레스를 땀흘리면서 풀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오면서 자전거 도로가 복잡해지면 다양한 스트레스 요소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자전거 도로는 인도와 엄연히 구분 돼 있지만, 어떤 이는 그게 자전거 도로라고 생각을 못해서 자전거 도로로 산책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갑자기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들이 가장 스트레스 요소이다. 점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 목줄을 풀어 놓는 경우도 가끔 보고, 그렇지 않더라도 목줄을 길게 늘어 뜨리면 개들이 자전거 도로로 뛰어 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제 퇴근 길에는 황당하게도, 자전거 도로 양방향을 떡하니 막고 개 주인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그냥 지나가야 되는데, 운동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을 때면 꼭 한 마디씩 학 게 된다.
‘길을 이렇게 막으면 어떡합니까? 아.. 씨.’ 라고 말했다. 뒤에 ‘아.. 씨..’는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실수였다. 사실은 아무 말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러고 지나가는데, ‘X발넘이..’ 라는 말이 돌아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하다가. 클릿을 빼고 돌아 보며,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라고 했더니,
‘너만 자전거 타냐?’ 라는 것이다.
왜 욕을 하느냐고 항의를 했어야 되는데,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왜 길을 막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실 내가 길을 멈춘 것은 쌍욕을 들었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대꾸 없이 가던 길 왔는데, 끝까지 기분이 좋지가 않다. 원래는 운동을 끝내고 기분 좋은 상태였어야 되는데, 분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꾸를 못했나? 왜 같이 쌍욕을 해 주지 그랬나?
그렇지만 이내 거기서 같이 쌍욕을 하는 것은 내 입만 더러워지는 것이다라는 생각까지는 하게 되었다. 잘 참았다. 애초에 길막는 상황 자체에 대해 항의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뀌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지금 드는 생각은 다른 종류의 좌절감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릇이 작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다.
정중하게 ‘왜 욕을 하십니까?’ 라고 대꾸했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 게 이기는 건데, 아드레날린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사람됨이 부족하다. 천성이 그릇이 작은 것이지만, 지향해야 될 바는 군자가 됨이어야 평균은 될 것 같다.

결론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한 정도 되는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아직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나라도 그렇게 되자.

훈련일지 – 하체리드를 못한다

현상:

아이언 드라이버 모두 정타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드라이버는 훅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언은 생크를 내고 있다.

예상 원인:

며칠 전부터 헤드업 하지 않기 위해 어깨 집어 넣는 것에 신경 많이 쓰고 있다. 다시 상체 리드하는 스윙이 나오는 것 같다. 상체 꼬임 유지하면서 내려오는 데 신경을 쓰도록 해야겠다.
전일 연습 때 코킹을 빨리하는 시도를 했다. 생크의 원인이 아닌가 한다. 백스윙 때 뒤로 빠지는 모습이 관찰 됐다.

해결 방안:

백스윙을 일체감 있고 몸통부터 시작하는 데 신경 쓰자. 코킹 위로 올리는 느낌으로 하고 뒤로 빠지지 않도록 하자.
하체 리드하자. Waggle Hit 드릴 해보자.
제대로 맞을 때까지 한번 샷 하고 자세 검토하는 거 반복하자.

하체리드 스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