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의 새벽 달리기. 25년 1월 14일 새벽.
조깅을 하면서 오늘 둘러 볼 세비야의 지리를 파악해 보려고 한다. 세비야 대성당 주변의 구도심을 한 바퀴 돌아 보고 아침식사 먹을 만한 장소도 물색하는 것이 목표였다. 세비야 숙소는 아파트형 숙소라서 아침을 알아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desayuno(스페인어로 아침식사)라는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적당한 곳을 하나 찍어 두고 대성당을 찾아가 보았다.
새벽녘 인적 드문 대성당 분위기는 부지런한 자 (aka 시차적응 못한 자)의 특권이다.
생각보다 날씨가 차다. 어제 휴대폰 충전을 제대로 안 한 데다 날씨가 차니 금세 방전이 돼 버렸다. 구글맵을 사용 못하니 조금 불편할 것 같지만, 지도를 잘 숙지했으므로 감각으로 길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결국 길 잃고 숙소를 코 앞에 두고 빙빙 돌아 집에 복귀했다.
알사카르와 세비야 대성당. 25년 1월 14일 오전.
첫 일정은 세비야 대성당이다.
그렇지만 식후경 해야하지 않겠는가? 청소년들을 데리고 아까 찍어 둔 데싸유노(desayuno)가 가능한 레스타우란테(restaurante)를 찾아 간다. 스페인 사람들 먹는 것처럼 아침 식사를 해 보고 싶었다. 대충 보니 빵이 기본이고 빵 위에 얹거나 발라서 먹는 것들은 다양한 것 같았다. 토마토 다져서 올리브 오일에 얹어서 먹기도 하고 하몽을 얹어 먹기도 한다. 때로는 빵이 아닌 츄로스를 아침으로 먹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도 Pan con tomate(Bread with tomato)와 churros con chocolate를 시켜 보았다. 커피도 현지인처럼 먹어 보도록 하자. 나는 cafe solo(coffee only라는 뜻인데, 이렇게 말하면 그냥 espresso이다) 아내님은 cafe con leche(coffee with milk, 라테 느낌)을 마셨다. 나중에 알아챈 사실이지만 현지인들이 제일 많이 먹는 커피는 cafe cortado였다. espresso에 우유 얹은 거라고 하는데 조금 우유양이 많은 게 특징인 것 같다. 먹어 본 느낌 상 그랬다는 거고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세비야 성당 앞에 갔더니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됐다. 비수기라는 것만 믿고 예약도 안 하고 오다 보니 오픈 시간도 몰랐던 것이다. 순서를 바꿔 알카사르를 먼저 방문하기로 한다.
스페인 여러 도시를 몇 군데 다니다 보니 유적들 이름이 헷갈린다. 알카사르는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궁전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라고 봐야겠다. 그래서 도시마다 알카사르가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정식 명칭은 ‘Real Alcazar de Sevilla’가 되겠다. 그 외에도 누에바 거리(new street)도 어디나 있고, 스페인 광장이라는 지명도 도시마다 있다.
알카사르도 티켓을 따로 예매하지 않았지만, 티켓 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미리 준비했으면 오가는 시간을 좀 절약할 수 있었을 것 같긴 하다. 입장 시간을 정해서 티켓을 판매하고 있지만 간격이 촘촘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은 안 써도 될 것 같다.
세비야 알카사르는 ‘작은 알람브라’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이슬람식의 화려한 장식이 눈길을 끈다. 화려함으로만 치면 정말로 알람브라보다 더한 수준인 것 같다. 조금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이 쪽이 조금 더 카톨릭 색채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슬람식 장식들 사이에 스페인 통일 전의 각 왕국들의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화려한 것은 내 취향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과하다. 이들에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褸 華而不侈)를 알려 주고 싶다.
알카사르를 나와서 청소년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츄로스를 한 번 더 먹고, 세비야 대성당 입장한다. 이번에는 간식 타임에 미리 입장권 구매를 했고, 덕분에 빠르게 입장할 수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은 보통의 카톨릭 성당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아내님의 감상에 따르면, ‘holy’한 느낌이 덜하다고 한다. 보통 카톨릭 성당은 주 예배단이 있고 건물 자체가 십자가 형태를 띄는 형태가 많다… 고 알고 있다. 그와 달리 이 성당은 그냥 직사각형이다. 마치 미술관과 같은 느낌이 든다. 흔히 보이는 회랑 같은 것은 없고, 어디가 예배단인가도 모호하게 돼 있다. 대신에 좀 가치가 있어 보이는 그림들이 다수 전시 돼 있다. 벽면 쪽으로는 전부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된 방들이 다수 있다. 각 방 안에는 성경 이야기 또는 세비야 지역의 성인들 이야기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 전시 돼 있거나, 옛 주교들의 무덤이 안치 돼 있다. 그래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방마다 옮겨 다니는 형태가 된다.
세비야 대성당에서 특별히 유명한 것은 콜럼버스의 무덤이다. 쿨럼버스가 말년에 삐져서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 공중에 떠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하나 세비야 대성당에서 유명한 것은 히랄다 탑이다. 탑은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다만 티켓 구매 시 탑까지 올라갈 수 있는 옵션을 선택해야 가능하다. 올라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아이들 걸음으로도 15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었다. 또한 계단이 아니라 경사로로 돼 있어서 체력적으로 큰 무리는 없다. 탑에 오르면 세비야 경관이 한 눈에 펼쳐지는 것이 볼만하니 히랄다탑은 올라가볼 것을 추천한다.
히랄다는 풍향계라는 뜻으로 탑 꼭대기에 사진과 같은 풍향계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막상 히랄다 탑에서는 히랄다를 구경할 수 없으므로 성당 입구에 일부러 복제품을 만들어 둔 것 같다. 히랄다의 복제품을 봤을 때는, ‘아 스페인 사람들은 풍향계도 참 멋지게 만들었구만.’ 정도로 생각했었다. 탑에서 시내 경관을 보고 나와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서 히랄다 탑이 보이는데, 그제서야 세비야의 랜드마크는 저 녀석이었구나 알 수 있다. 아니면 왠지 한 번 본 녀석이라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스페인 광장. 25년 1월 14일 오후.
다음 목적지는 스페인 광장이다. 잠깐 말했듯이 또 하나 헷갈리는 지명이 스페인 광장이다. 스페인 많은 도시에는 다 ‘스페인 광장’이 있다. 우리로 치면 대전시에 ‘대한민국 광장’이라는 지명이 있는 셈이므로 좀 어색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스페인 전역에는 수 많은 광장(plaza)가 있다. 광장이라고 해도 규모가 전부 제각각이다. 모여 봤자 한 20명 모이면 꽉 찰 거 같은, 건물들 사이의 빈 공터에도 무슨 무슨 plaza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반면에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꽤 큰 광장이다. 지금은 정부의 무슨 청사로 쓰이고 있다고 하는 둥근 형태의 건물이 광장을 둘러 싸고 있다. 애초에 광장을 만들기 위해 건물을 만든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둥근 광장 둘레에는 스페인의 주요 도시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둘러 싸고 있다. 스페인 역사나 도시의 특색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면 그림을 보는 재미가 더 있을 것 같다.
스페인 광장은 성당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편이다. 관광객들 중에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춥기도 하지만 말똥냄새가 싫다고 주장하여 버스를 타고 이동해 보기로 했다. 사실 어느 도시든지 그 동네 대중교통 시스템과 시장, 이 두 가지는 체험해 볼만한 소소한 재미라고 생각한다.
스페인 광장에 앉아서 따뜻한 햇빛 쬐면서 노닥거리며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피곤한 몸 쉬었다가 다시 이동한다.
플라멩코. 25년 1월 14일 저녁.
다시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이동한다. 이 공연장은 ‘메트로폴 파라솔’이라는 현대적인 조형물 근처에 있다. 메트로폴 파라솔에서 보는 석양이 좋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날은 개방하지 않았다. 이 근처는 명동 느낌나는 번화한 거리이다.
스페인에서 플라멩코는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 일정 어디에서나 끼워 넣을 수 있었지만, 세비야가 좋다고들 한다. 플라멩코라는 게 뭔지 처음 접해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뭐가 좋은지 알 도리는 없으므로 일정에 따라 정하면 될 것 같다.
플라멩코 공연은 Casa de Memoria라는 곳으로 미리 예약을 했다. 사실 플라멩코 공연장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려운데, 구글링 통해 서양 여행 블로거들의 순위를 참고로 했다. 아까 말했듯이, 문외한이 보기에는 뭐든지 상관은 없을 거 같다.
공연장 분위기로 보았을 때 대부분 관광객들인 것 같았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작은 공연장이다. 무대가 있고 무대를 둘러싸고 2줄 내지 3줄의 객석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 많을 때는 위층 발코니처럼 생긴 곳에서 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공연장이 작아서 조금 더 친밀한 분위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 이 공연장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에는 친밀한 분위기라는 점이 우리를 괴롭게 만든 부분이 되었다. 여행 피로가 쌓인 점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열정적인 무대 앞에 두고 너무 졸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네 가족 모두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조는 모습을 보이면 예술가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 냈다. 공연 시간이 한 시간 남짓으로 길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판소리도 듣고 있으면 졸리지 않나? 알아 듣지도 못하고 공감하기도 어려운 정서의 생소한 예술을 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험 삼아 보기는 했지만,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진리였다.
그렇다고 공연에 아무 감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박수와 기타, 추임새 등과 어울려 부르는 한스러운 노래와 격정적인 춤은 인상적이었다. ‘경험삼아’ 볼만한 것 같다.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공연장을 나왔다. 저녁으로 안달루시아 요리와 세르베사, 비노를 곁들여 마시고 숙소인 우리의 아파트로 돌아가서 긴 세비야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은 렌트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로 바르셀로나로 이동할 예정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비야에서의 일정이 짧게 느껴진다.
질풍노도 스페인 여행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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