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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20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2020년은 아주 먼 미래의 대명사격이었다. 그러니까 2020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전부 하늘로 다니고 로봇이 서빙을 하고 저마다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등…(응?)
그러나 시간은 단절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문명 세계에서 21세기를 살아 왔기 때문에 저마다 손에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전염병이다. 혁신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깜짝 놀랄 준비를 하고 있던 자들이 가장 원초적인 미생물들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코로나19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크게 뒤흔들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소설은 오랑이라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화롭지만 삭막한 이미지인 이 도시에 페스트가 발병하게 된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페스트의 발병으로 도시 전체는 폐쇄되게 되고, 시민들은 사실상 유배당한 삶을 살게 된다. 전염병은 도시 전체의 삶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꿔 버린다. 특수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대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엿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페스트라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같다.
주인공 격인 의사 리외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행위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또 다른 주인공인 타루는 성자가 되는 것보다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것이 더 어렵다고 답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보다는 질문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결국 내 관심사는 어떻게 성자가 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타루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
“어쩌면요. 그런데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내 생각에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 그래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야심이 덜하죠.”
-본문 인용-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어려운 대답이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알기 쉽다. 인간답지 않은 것, 참혹한 것, 바로 페스트 같은 것들이 인간답지 않은 것 아닐까?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와중에 굳이 작중에 인간의 무지를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2차 대전 즈음하여 나치즘이 등장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결국에 집권을 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윤리의 문제라는 게 복잡한 것이지만 무지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윤리의 많은 문제의 해결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 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

하지만 서술자는 오히려 이런 훌륭한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악에 대해 간접적이고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일 뿐이고, 또 인간의 행동에서 악의와 무관심이 더 흔한 원동력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악하기보다는 선하다. 사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는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며, 바로 이것이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분명 가능한 통찰력 없이는 참된 호의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을 것이다.-본문 인용-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 이후의 나치즘의 광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당시의 페스트였다고 하면 지금의 페스트는 무엇일까?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나치즘의 간균이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갖가지 혐오가 나치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본문 인용-

여혐, 남혐, 지역 혐오, 외국인 혐오 등등 셀 수 없다. 페스트 간균은 끈질기게 인간들 사이에 숨어 인간성을 말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페스트 간균을 살포할 준비가 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이 쯤 되면, 페스트 간균과 인간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 혐오라고 하는 것이 인간성의 한 부분이고, 인간이 인간성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부분만을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인간으로 살기 어렵다. -네루다. 사람되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등등 인간으로 산다는 문제는 쉽지 않는 것이다.

2020년 3월 중간 기록

아마 두 달 정도 전 일이었던 것 같다.
중국 주식이 의외로 하락한 날이 있었는데, 우한에서 무슨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게 그 이유라는 것이다. ‘아이고 또 무슨 이유를 그렇게 갖다 대는 것이냐. 시장 움직임에 일일이 소설같은 이유라도 대야한다니 애널리스트도 고달프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에서 일파 만파로 퍼지는 이슈가 됐다. 실제로 통제만 잘 된다면 그 질병 자체의 위험성은 크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계기로 몇 가지 드러나는 바가 있다.
첫째는 ‘신천지’라는 교단이 수면에 드러났다. 그렇고 그런 기독교계에서 이단 취급 받는 종파가 있나보다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의 엽기적인 행태에 대해서 전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더군다나 그들의 규모가 상당히 크더라는 점,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인가 새삼 놀랍다. 내가 접하는 주위의 인간들이 인간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 다시 느낀다.
둘째는 신천지와 맞먹게 막장성을 보여주는, 반문재인 세력의 행태이다. 문재인 정권이 망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연재해라고 볼 수 있는 힘든 시기에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또 놀라운 점은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의 규모다. 심지어 내 또래의 지인들 중에도 관찰되는 바이다.
이들의 전략은 정말 단순한데 아주 효과적인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싫어하는 집단 또는 인물에게 친중국 딱지를 붙이고 반복하는 것이다. 마치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 북한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공격하고 싶은 대상에게 친북 딱지를 붙이는 것과 같다. 이 전략이 효과적인 이유는 애초에 혐오 자체가 비이성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일단 딱지를 붙이고 나면 이성적인 설명으로 그 딱지를 떼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에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이번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잠재되어 있던 행태가 코로나를 계기로 드러났던 것일 뿐 곧 지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 한해서는 그게 맞았던 것 같다.
3월 중순이 된 지금에 와서는 Pandemic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3월 초순만 하더라도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기는 했지만 리스크를 전부 내던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상황은 미국, 유럽으로 전염병이 확대 되고, 그들의 대응이 형편 없음이 드러나면서 패닉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S&P500 지수와 EuroStoxx50 지수는 이틀 동안 10% 등락을 반복했다.
왜 그런지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금융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모두들 손상이 큰 상황이다.
여기서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 예측하는 것은 위험한 것 같다. 어떻게 대응해야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나는 우선 멘탈과 건강을 지키면서 사태가 길어질 것을 대비해야겠다.

그린 북 Green Book

Dignity always prevails.

돈 셜리(Don Shirley)라는 실존했던 흑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배경은 1950~60년대 미국으로, 형식적으로 노예 해방이 되었으나 남부에서는 여전히 불합리한 차별 제도(Segregation)가 시행되고 있던 시절이다.
돈 셜리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품위 있게 행동했으며 교양 있는 말투를 구사하는 등, 흔히 생각하는 흑인의 전형과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없었으며 항상 외로움에 위스키를 끼고 살고 있었다.
한편 토니는 이태리계 미국인이었으며,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요새로 말하면 클럽의 기도로 꽤 ‘성공’하고 있었으며, 이런 저런 험난한 일 가리지 않고 살아 왔었다.
셜리는 남부 일대의 순회 공연을 기획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굳이 신변 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부 일대를 여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흑인으로서 백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차별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위험한 여행의 운전기사 겸 보디 가드로 토니가 채용 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영화 제목인 그린북(Green Book)은 흑인 여행자들이 남부의 주에서 안전하게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에 대한 가이드북이었다. 토니와 돈 셜리는 그린북을 들고 떠나는 여행 길에 우여 곡절을 겪게 되고, 그 사이에 둘 사이의 우정이 싹튼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소위 ‘단일민족’을 자랑하는 우리로서는 인종 문제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 문제였었고 영화에서만 접해 보는 일이었다. 미국이란 참 야만적이고 교양 없는 놈들이로군이라고 생각해 버리던 남의 이야기였지만, 작년(2018년)에 있었던 제주도 난민 문제에 대한 반응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말 할 게 못 된다. 오히려 배척하고 무리짓는 본능에 충실한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영화 하나 보고 정리가 될 얘기들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쪽으로 흘러온 것을 보니 제주도 난민에 대한 반응에서 느낀 좌절이 컸던 모양이다.
많은 부분이 불안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고 해도 광기에 가까운 반응들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자주 소통하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까?

말 좀 조심하자

제발 누구한테 XX충이란 말 좀 안 썼으면 좋겠다.
생각이 말을 만들지만, 말이 생각을 만들기도 하지 않냐.
XX충이란 말이 유행하는 게 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XX충이란 말 때문에 혐오가 강화되는 것 아닌가 싶다.
말 좀 조심하자.

지옥

오늘 오전, 노회찬 의원 투신 뉴스를 보며 주위에서 이런 말들이 들려 왔다.

이X명은 아직 살아 있냐? 이미 자살했어야 되는 거 아니냐?

또 이런 소리도 들려 온다.

죽은 거 보니까 5천만원이 말고 더 있네.

생전의 그 분을 싫어했을 수도 있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저런 표현이라니…
살아 있는 누군가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자살했어야 된다니…

이런 곳이 지옥 모습 아닌가? 사람이 인간성을 포기하는 곳…

몇몇 엇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잘 띄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일부의 일탈만은 아닌 것 같다.
최근의 일베와 워마드의 폭주, 외국인 혐오 현상이 겹쳐진다.

누가 내게 그래도 왜 희망을 가져야 되는지 얘기 좀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