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하게 살겠다고 해매다, 달마다 다짐을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담백하게 산다는 것이 득도의 경지임을 깨닫고, 그런 다짐을 한 내가 오만했구나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다시, 담백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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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
업신여기지 않고,
업신여김 당할까 겁내지 않고,
담백하게 살자.
담백하게 살기
주기적으로 사단법인 더불어숲으로부터 메일을 받아 보고 있다.
신영복 선생을 기리는 재단인데, 메일 읽을 때마다 ‘샘터 찬물’에 세수하는 듯 정신이 들고는 한다.
巧詐不如拙誠이라는 메세지를 받았다. 그대로 옮기자면, 교묘한 속임수가 졸한 진실만 못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잔머리를 쓰고 똑똑한 척 해 봐야 요새 유행하는 말로 ‘진정성’을 당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하물며 머리도 안 좋은 사람이니 담백하게 살자고 다짐을 매번 하지만, 이리 저리 머리 쓰다가 혼자 괴로워하고는 한다.
다시 찬물에 세수 한 번 하고, 담백하게 살아 보자.
교육 문제
문제인 대통령이 어제(10/22) 국회 시정 연설에서 대입 정시 비중 확대를 언급해서 이슈가 되고 있다. 워딩으로 보면 아주 정말 간단히 한 줄, ‘정시 비중 상향’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그만큼 관심들이 많은 사안이다 보니 파장이 작지 않아 보인다. 분명 교육계에서 진행되어 오던 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조율이 제대로 안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진짜로 문재인 대통령이 정시 비중 상향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면, 교육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교육 문제를 이용하여 정치적 실익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육의 선진 사례로 얼마 전까지 핀란드를 많이들 얘기했었다. 아마도 입시 경쟁에 어릴 적부터 치이지 않고 교육의 이상적인 목표, 즉 성인이 되어 충만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준비를 추구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뿐만 아니라, 어떤 기회에서든지 서구에 아이를 보낼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 곳에서는 아이들이 행복해했고 한국 학교에 다시 돌아오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 곳에서는 입시 준비가 아니라 교육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교육 문제의 해법을 논의할 때 제일 먼저 입시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뭔가 좀 이상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상적인 교육인가?
나는 몇 가지 상이한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다 보니 혼란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는 청소년기의 지상 과제라는 전제가 있다. 한국에서 모든 교육은 그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공교육이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공교육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 기관은 목적 자체가 입시이기 때문이다. 목적 자체가 그러하다면, 입시에 대비하는 것은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잘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이런 얘기를 하면, “역시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 “현실을 너무 모른다.” 등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다. 이해는 한다. 다들 한 발자국 앞에서 시작하는데 내 아이만 뒤쳐지는 것 같다는 생각. 공포의 힘은 강력하니까 이해는 한다. (나는 그 안에 탐욕, 선민의식 등 보다 저열한 동기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생부종합전형이라는 제도로 나는 상당 부분 개선이 되어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취지 자체가 학교생활을 충실히 한 자에게 대학을 잘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가장 관심 있는 입시와 연관시켜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그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종 전형의 비율을 유지하고 공정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것이 그 전까지의 기조였는데, 갑자기 정시 비중 확대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 바탕에는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이 포퓰리즘 아닌가?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공정성에 대한 ‘공포’를 조장한 탓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조국 전 장관이었고, 그 이전에는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식 사랑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강력한 감정을 자극 받아 정시 확대 쪽으로 여론은 기울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어떻게 보면 정시 확대 되면 당장 우리 아이들은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순전히 아이들 성향으로 봐서인데, 시험에 잘 적응할 것처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입시 경쟁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다시 없는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팍팍한 것은 모든 국민들이 줄세우기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시나 두서 없지만, 결론적으로 정시 확대는 것은 공교육 정상화로부터 한 발작 멀어지는 길이다. 공정성은 쉽게 확보할 수 있겠지만, 희생하는 대가가 크다. 학원들만 만세 부르겠구나.
트럼프의 허세
A sad day for the Democrats, Kirsten Gillibrand has dropped out of the Presidential Primary. I’m glad they never found out that she was the one I was really afraid of!
— Donald J. Trump (@realDonaldTrump) August 28, 2019
기록해 두고 싶었다.
출근길
빅토르 최의 생일입니다
팩트풀니스 Factfulness
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
얼마 전에 타계한 공중보건학자 한스 로슬링의 베스트셀러이다. 인간이 세상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중보건학자로서 그의 이러한 분석의 목적은 인류의 보편적인 후생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점에서 숭고하다고도 여겨진다.
사실 인간이 세상을 오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여기 저기서 많이 들어본 바이고 약간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행동경제학에서도 인간의 편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런 거)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는 구석기 시대에 진화를 멈춘 인간의 뇌에 대해서 설명하고는 한다. 이런 저작들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즐거운 것들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래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한스 로슬링의 목적은 분명하다. 세상을 사실(Fact)에 기반하여 오해 없이 바라봄으로서 인류가 얼마나 어떤 속도를 통해서 나아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이라는 것은 정확히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다루는 데이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성도 차별 받지 않고 교육을 받고, 적절한 가족 계획을 하고,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음으로써 어린 나이에 죽지 않는 등 그가 분류한 ‘4단계’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우리는 이미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 공중보건의 사례는 우리와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본적인 그의 10가지 법칙은 ‘4단계’ 생활 수준의 우리도 더 나은 삶을 누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메모하는 차원에서 10가지 법칙을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간극 본능 The Gap instinct
인간은 극단의 이야기에 끌리게 돼 있다. 양 극단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 세상을 두 가지로 양분해 버리고서는 그 사이에 수 많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2. 부정 본능 The Negativity instinct
나쁜 소식만 기억에 남는다. 점진적 개선은 인지하지 못하고 아주 먼 옛날을 아련히 그리워하고는 한다.
3. 직선 본능 The Straight Line instinct
섣불리 선형 회귀를 하고는 한다. 내가 보고 있는 추세는 다양한 곡선의 일부일 수도 있다.
4. 공포 본능 The Fear instinct
내 공포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계산해 봐야 한다.
5. 크기 본능 The Size instinct
인상적으로 보이는 숫자 하나, 또는 개별 사례에 집착할 수도 있다. 가능하면 비교 가능한 숫자를 찾아라.
6. 일반화 본능 The Generalization instinct
집단을 범주화하는 오류이다. 집단 내에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집단 간에도 유사점이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대다수라는 말은 과연 51%인가 99%인가?
7. 운명 본능 The Destiny instinct
흔히 문화라는 말로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다라고 낙인 찍는다. 느린 변화라도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 내가 몇 년 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 그 집단은 지금은 전혀 다른 집단일 수 있다.
8. 단일 관점 본능 The Single Perspective instinct
망치를 쥐어 주면 온통 다 못으로 보인다. 내 전문성은 하나의 망치일 뿐이니 겸손해라. 다른 연장들을 갖추려고 노력해라.
9. 비난 본능 The Blame instinct
일이 잘못 되면 범인을 지목하려고 한다. 그러면 마음은 편해지지만 일이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악당을 찾지 말고 원인을 찾아라.
10. 다급함 본능 The Urgency instinct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요구 받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생각을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그렇게 급하게 행동해야 될 일은 드물다.
간략하게 말하면 겸손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안다는 생각하지 말고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나의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짜 뉴스와 언론의 호들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한스 로슬링의 버블 챠트는 오래 전에 TED를 통해 이미 접해본 적이 있었다. (여기)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에 이 정도의 경지가 있을 수 있다니 놀라워 했던 기억이 있다. 갑자기 이케아가 떠오르면서 이런 게 스웨덴스러움인가 감탄하게 된다.
아래 링크 추천.
Gap Minder.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의 신기원
Dollar Street. 발로 뛰는 통계에 감수성까지..
하트코스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Yuval Noah Harari, 2018.
‘Sapiens’, ‘Homo Deus’등의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이다. 그렇지만 이미 작년.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Sapiens’에서는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영장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됐는지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았고, ‘Homo Deus’에서는 신이 되어 버린 인류의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저자는 ’21 Lessons..’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고 밝히고 있다. 복잡해지고 현혹되기 쉬운 세상에서, 일상 생활에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조차 사치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명료함(clarity)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현재 몇 가지 측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트럼프류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liberalism, 그냥 자유주의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는 19세기 이래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과 경쟁하면서 보완해 나가면서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한 자들도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트럼프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구 온난화는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해 가고 있으며, 이 두 기술을 융합되어 갈 것이다. 이 두 기술의 융합은 인류의 대부분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앞으로 착취(exploitation)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irrelevance)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Homo Deus’의 주된 주제이다.) 먹고는 살겠으나, 의미 있는 일자리는 더욱 없어질 것이고, 일부 데이터를 독점하는 자와 그 외 대다수로 명확히 계급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인 수준에서만 대응이 가능한 것들인데, 오히려 벽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현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트럼프의 MAGA는 먹혀 들고, 영국인은 Brexit가 실업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시진핑은 모택동이 되고 싶어하고, 푸틴은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서는 크림반도를 때림으로서 국수주의를 선동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IS라는 단체가 득세하고 있는데, 테러리즘은 이런 상황에서 더 효과적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암울하다. 사실 암울하다. 해결책이라고 떠오르는 것들은 별로 없다. 이 쯤에서는 애국주의(Nationalism)를 선동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에 가깝다. 종교는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저자는 현대의 종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애국주의의 시녀(Handmaid of Nationalism)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자의 해법은 명확하지 않다. 도입에서 말했듯이 저자의 목적은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위한 논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당황하지 말고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겸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21세기에는 너무 상투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뇌과학이 발달하고 관련하여 경제학 분야에서도 행동경제학이 부각되듯이, 사람들은 편견에 쉽게 노출 된다. 일단 믿는 것은 계속 믿는다. 믿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은 큰 고통이니까… 우리 나라에도 아직 20% 이상의 자유당 지지자들이 심각한 바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때려 놓고 맞은 놈이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견을 주입한는 언행, 혐오를 선동하는 언행은 매우 사악한 것이고 생각보다 폐해가 크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더 절망적이구나. 그렇지만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난다면 편견에서 빠져 나오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가치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해야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Justice)의 정의가 달라져야 될 수도 있다.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Sapiens’에서부터 주장하던 내용인데, 인류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의 상당 수는 단지 믿음일 뿐이다)
결국에 눈에 보이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겁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Keep calm and carry on… 하는데, carry on 할 것은 일상 생활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되새김인 것 같다.
두 번 읽을만한 가치 있고 그 정도의 재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