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arbji
Department of Economics, Mathematics and Statistics:
Mathematical equations – Docs editors Help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 E.H.카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에 쓰여져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이미 이책이 자유롭게 번역 되어 읽히던 시절이었지만 아쉽게도 20년이 지난 2014년에 처음 읽게 되었다. 쓰여진 지 50년이 지난 책이니만큼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도 당시로서는 논쟁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객관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연과학에서조차 절대 진리라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에는 역사적 사실의 바탕에는 절대 진리가 있다는 생각도 유행했었던 것 같다. 상대성(?) 상대주의(?)가 일반화된 것도 이 책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일부분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책의 키워드는 ‘변증법’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미래에 비추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문제인데, 나로서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역사의 진보의 방향을 탐색하는 변증법적 과정이 역사다.’ 정도로 요약하는 것이 최선이다.
저자는 역사는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 즉,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라며 역사의 방향을 초이성적인 힘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문학도 아니라고 한다. 아무 가치 판단도 없는 옛날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느냐를 통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찾는 행위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역사에는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갈 길에 대한 모색이 목적일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 사회에 있어서,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진리에 가깝다.
Trauma and Recovery
Trauma and Recovery – Judith Herman
2014-06-18
처음 이 책을 집었을 때는, 요새 유행하는 말로 ‘힐링’이 되는 책이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트라우마라는 개념도 직장 생활에서 만나는 또라이들로부터 겪는 스트레스 정도를 생각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읽을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환경-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에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의 논문과 사례를 인용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등 다분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차갑게 객관적으로 트라우마와 그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는, 억압 받은 자들에 대한 관심이므로,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후학들 중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경계하는 말까지 하고 있다.
책 전반부는 PTSD의 공통적인 현상들과 사례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고 후반부는 그들이 회복하는 과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상세한 내용은 실제로 심리 상담사들을 위한 조언이라고 보여질만큼 전문적인 듯 하여 어렵고 너무 먼 얘기로 들려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다.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후기(Afterword)의 내용이었다. 후기에서 저자는 PTSD는 사회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 하며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나는 그 내용 대부분이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다양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회가 아닐까 한다. 70년이 지났지만, 최근 총리 지명에서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일제 치하의 경험들, 친일파들, 전쟁, 그리고 이후 군사 독재의 암울했던 시기들이 모두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적 경험일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는 사회 전체가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인 트라우마를 겪은 것이다.
개인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계를 저자는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가 안전의 확보 둘째가 기억과 애도, 세번째가 연결이다. 똑같은 단계가 트라우마 사회의 치유를 위해서도 필요한데, 우리는 아직 두번째 단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있다. 즉, 범죄 행위를 기억하고 진실을 밝히며 단죄하는 작업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허먼의 표현이 꼭 한국 사회를 두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형태로든 (범죄 또는 범죄에 대한 묵인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참회를 하지 않고서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과거에 대한) 부인과 은밀함이라는 부패한 역학 관계로 오염된 채로 남아 있다.’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폭력의 가해자는 진실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한다.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데, 대표적인 예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서을 훼손 시키는 것이다.그리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공격하고는 한다. 우리 사회적으로는 아직도 너무나 잘 먹히고 있는 ‘색깔론’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겠다.
과거에 대한 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미래에 대한 설계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지금 과거사를 청산해야 된다고, 이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한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지… 이대로 시간이 지나 방관자로서의 민족성이 체화 되어 갈 것만 같다.
나는 우리 역사에 피해자는 아닌 것 같다. 나 또는 친척 중에 직접적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도 없고, 딱히 먹고 살기 힘들지도 않다. 허먼의 구분에 따르면 방관자(bystander) 정도가 되겠다. ‘ 우리, 방관자들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매일 짜내야만하는 용기의 일부분이라도 우리 안에서 찾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살펴 봐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소시민으로서는 이 책에서 읽은 구체적인 내용들을 내가 다시 찾아 보며 실행해야 되는 상황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대화
대화 – 리영희
2014-04-23
리영희. 그들의 언어로는 의식화의 원흉. 우리 언어로는 시대를 앞서 간 지식인.
자서전이면서 대담의 기록이라는 형태로 기술 되어 있어서, 오히려 더 공감이 가능 면도 많았고, 솔직한 술회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남이 쓴 전기에서는 오히려 단점을 못 드러내는 면도 있지 않나 싶다.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가신 분. 때로는 약한 모습도 보이고, 폭력에 주눅들었던 경험도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기회주의자들만이 승리해온 암울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지금 시점에서 더욱 더 필요한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번도 청산하지 못하였는가. 내가 최근 들어 느끼고 있는 좌절감을 (나는 그저 생활인일 뿐이지만) 리영희 선생이 먼저 느꼈었다니, 내 좌절감에 근거가 더해지는 듯 하여 안타깝다.
결국에 우리는 뭉치지 못하는 우매한 민족성 때문에 큰 일을 못해낼 것이 분명하고, 뿌리 깊은 기회주의는 영영 청산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어릴 적 보았던 현학적인 언어를 남발하며 겉멋에 들어 활동했던 대학생 운동권들이 떠오른다.
자본주의 최첨단에서 일하고 있는 변절자이자만 아직도 ‘인간에 대한 존중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귀결된다.’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트 러셀
2014-04-23
에세이 모음이라 관통하는 주제를 찾기 어려운 듯도 보이나, 한 마디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류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러셀의 고민이다.
러셀의 30년대 고민과 제안이 우리 세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듯 하다. 그의 통찰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적어도 한국 사회는 러셀 생존 시기보다 풍요로워진 것 같지 않아 안타깝고 세월호 참사와 맞물려 참담하기도 하다.
근대를 말하다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2014-03-31
나는 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매우 못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재미 없었다는 점은 다들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특히 못했던 이유는 반골 기질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노예 근성 흘러 넘치는 지금의 내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나는 국사와 국민윤리에서 양을 받음으로써 국정 교과서에 대해 저항한 셈이다.
저자는 우리 국사 교육에서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망국의 과정과 식민지배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 비교적 쉽고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되는 수준에 도달한 것 같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얼마나 대책이 없었으며 독립 운동 세력들은 그 얼마 되지 않는 힘들을 통합하지 못해서 기력을 낭비했던지 하는 안타까움들이다.
잡생각 중 한 가지. 우리 선배 세대의 학생 운동의 노선 투쟁과 근대의 독립운동이 사뭇 비슷하다는 점이다. 막강한 적을 앞에 두고 실체도 불확실한 내부 권력 다툼, 노선 다툼 때문에 자멸하는 모습 말이다. 이거 혹시 우리 국민성 아닌가 문득 기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설명이 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대의를 중요시하는 부류와 내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류로 사람을 나눌 수 있다면, 대의를 중요시하는 부류는 독립 운동에 힘썼을 것이고 그 안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리라. 반면 반대 부류의 인간들은 친일을 했을 것이고 오직 한 가지 목적, 같은 세력의 영달을 위해 단결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선배 세대의 모습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부족했던 것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진짜로 국민성이 그래 먹은 것일까.
우리가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재를 용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친일 줄기 집단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에게 지배 받고 있는 답답한 현대를 살고 있는 것은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덤으로 얻은 독립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 운동 세력의 답답한 내부 분열을 보면서 착잡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디테일에 대해서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왈가 왈부 말이 많고, 같은 뉴스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180도 달라지기도 하고,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니, 역사적 사실이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왜곡도 밥 먹듯 일어나니, 역사 왜곡은 얼마나 또 쉬운 일이겠는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들의 사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인데, 인문학은 천대 받고 있고 우리 고등학생들에게 국사가 필수 과목이 아니라 하니, 착잡해 진다.
The World until Yesterday
The World until Yesterday – Jared Diamond
‘총, 균, 쇠’가 현대 사회를 왜 서유럽이 지배하게 되는가에 대하여 큰 줄기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반면 ‘어제까지의 세계’는 현대화된 세계와 어제까지의 세계를 다양한 방면에서 비교하고 있다. 결론은 간단하다. 전통사회를 과하게 로맨틱하게 볼 필요는 없으나 그들의 생활방식과 문화에서 배울 점이 분명 있으니 잘 해보자는 것이다. 다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진부해지는 측면도 있고, 뻔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 같기도 해서, 전작에 비해 완성도는 떨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어제까지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우리 유전자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환경 변화의 속도를 따라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로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진보를 이루어 내고 우리는 우리 유전자가 기억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조금 더 멀어져 가고 있다. 인류학이 주는 교훈은 우리 유전자가 기억하고 있는 어제까지의 세계를 잊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아닐까.
매주 수요일이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의식을 행하는데, 그 때마다 일종의 좌책감을 느낀다. 내가 살기 위해 소비했던 것들을 보면서 이건 좀 아니다, 이건 좀 과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보에 진보를 거듭하여 살아온 인간이지만, 물질적 풍요에 풍요를 거듭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이지만, 다음 진보의 방향은 절제를 알아가는 인간이 되는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약간의 자괴감을 어쩔 수 없는 것은, 나는 증권회사 직원이라는 점.
Thinking, Fast and Slow
Thinking, Fast and Slow – Daniel Kahnemen
2014-03-29
서평을 쓰기 어려웠다. 읽고 복잡한 생각들이 오고 갔지만, 정리 되는 느낌을 갖지는 못했다. 텍스트를 읽었으나, 나를 읽지는 못한 것 같다. 이 책은 팩트를 전달하는 책이고 시작부터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대했으니, 내용을 하나씩 되짚어 보는 것으로 의미를 찾도록 하겠다.
Two systems
머리 속에 시스템1과 시스템2가 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쉬운 대답만 찾고, 내 마음대로 끄지도 못하는 시스템 1과, 논리적 사고를 하지만 속기 쉬우며 게으르는 시스템2가 있다. 그래서 뭐? 네가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네가 혹시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하라는 것이다. 시각적인 착시 효과의 흔한 예인 안으로 꺾인 화살표와 밖으로 꺾인 화살표의 길이 차이는 저것이 대표적인 착시 효과의 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속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속기 쉬운 다양한 환경을 알고 있다면 조금 더 조심할 수 는 있을 것이다.
저자는 몇 번 강조한다. 이것은 비유이다. 내 머리 속에 두 개의 시스템이 명확히 구분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구분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쉽게 이해 되고 서로 얘기가 편하다는 것 뿐이다.
어쨌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라고 후회하는 것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쟤는 왜 저럴까?’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고, 최소한 화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한 가지 더 생겼다.
Prospect Theory
다양한 Illusion의 사례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Prospect Theory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이 느끼는 효용은 기준점으로부터 변화에 비례하는데, 한계 효용 체감과 같이 민감도는 점점 감소하지만, 손실 방향으로 민감도가 더 급하다는 것이다. (위로 숏감마, 아래로 롱감마인데, 현재는 약간 숏감마) 이와 더불어 Decision Weight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Possibility Effect와 Certainty Effect로 인해서 어떤 확률의 증감과 그것이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완벽하게 선형을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다양한 의사 결정의 비이성적인 측면들을 설명할 수 있다. 손절 못 치는 사람들, 오르는 주식만 골라 파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Think like a trader!’ 이것이 이 단원이 핵심 문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Trader 분들은 Trader처럼 생각하고 계시겠지? 어떠신가?
Two Selves
이 부분은 철학적이다. 카르페 디엠인가 마시멜로 이야기인가? 열심히 사는 것이 미덕이고, 근무 시간만큼은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진짜로 다 일하는데 쓰이고 능률적으로 사용되는 시간인지 확실치 않으나) 일하고 있으니, 우리는 마시멜로 이야기에 끄덕이곤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카르페 디엠이라고 외칠 때, 감정이입이 되면서도 약간은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하진 않았었나? 내일의 더 큰 행복을 위해 오늘은 열심히 살라는 말을 듣고 살았고, 그게 좀 이상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겠지만, 게으른 내 안에 사탄이 하는 말이라고 반성하고 다시 마음 다잡고 열심히 살았던 적도 있었다. (물론 확 놓고 놀았던 적도 있지만…) 아직도 노예 근성에 사로잡힌 내 시스템1은 지금 내 고통은 미래의 더 큰 행복을 위한 자양분이라고 생각하며 고통 받을 때 동시에 위로도 받는 듯 하다.
그렇다고, Experiencing Self의 만족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답인 것도 아니다. 누가 나인가? Remembering Self를 만족시키는 것이 마지막 날에 위안이 되는 것 아닌가? 어느 날엔가는 내일 죽는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너무 선명하게 실감이 나서 잠 못 이룬 적이 있다. 그 날이 진정 내일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면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그 고통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모르고 살았던 것을 알게 해준 것만큼 더 많은 궁금증 또는 고민 거리들을 안겨 준 책이 아닌가 한다.
일상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사는 것이 무의미해질 때도 있다. 그런 느낌들이 시스템1이 내게 좀 쉬라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불행히도 일상의 고통과 삶에 대한 회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가 진화해온 두뇌가 적응하기 힘들게 빠르게 변해버린 세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이것 참… 옛날이 참 좋았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많은데, 돌아갈 수가 없지 않은가?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