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가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실제로 부쳐지지는 않았고, 카프카의 아버지는 이 편지를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글은 카프카 사후에 발견 되어 출판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 100주기라고 하기에 카프카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읽게 되었다. 부자간의 각별한 정을 담은 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글이 출판할 만큼 이목을 끌지는 못했을 것 같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혈기 왕성하고 호전적이며 의욕적인 사람이었는데, 카프카는 그렇지 못하였고 오히려 반대였다고 한다. 그는 그런 아버지에게 주눅 들어 점점 아버지를 두려워하게 됐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지는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전에 언젠가 제게 물어보셨지요. 어째서 제가 아버지한테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느냐구요.
왜 자신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이 되었고, 그 와중에 부자지간이 소원해졌는지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결과의 책임이 아버지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아버지께 항의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린 시절의 사건들까지 들춰 내면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이 자신을 어떻게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항의하고 있으며, 급기야 입을 닫아 버리게 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리고 이런 가족 관계가 자신의 글에 투영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과 같은 소설에서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힐 듯 다가갈 수 없는 성이라는 존재가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유래하게 된 것이지 싶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예상되는 반박을 정리하고 그것에 대해 재반박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했다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더욱 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고자 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상기 시키면서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삶과 죽음이 보다 가벼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결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약간은 당혹스럽게 한다.
100년 전 일이지만, 지금 한국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 주기 쉬운 존재이다. 아들은 조금씩이라도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100여년 전, 체코에 사는 유대인 카프카는 그것을 30 넘어서까지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나의 관점으로 봐서도, 평생을 걸쳐 아버지로부터 해방 되고 싶어했다고 하지만 30세가 넘어서까지 해방 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투정 부리는 것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역설적으로 그런 상처 덕분에 그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런 소설가로서의 감수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고 볼 수도 있다.
카프카의 주장을 옹호해 주기는 힘들었고, 오히려 그의 ‘찌질함’에 웃음이 나올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운이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의 특수성에 대해서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소설가가 쓴 에세이로서 소설가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 놓는 글이기 때문에 진솔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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