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서평

악령

악령 –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대해 끄적거리는 것은 서평을 쓰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투박한 감수성을 갖고 있는 나 따위가 문학을 논한다는 것이 부끄러워, 서평 없이 패스하려고 했으나 그래도 무언가 흔적은 남기고 싶어 몇 자 적으려고 한다.
우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60년 언저리의 러시아는, 농노가 해방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귀족들이 막대한 영지를 갖고 부와 권력과 누리는 사회였고 현대의 시각으로, 또는 서구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불평등한 사회였다.
그러한 반대 측면으로 러시아에서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사상, 아마도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꿈틀 대기도 하였으며, 허무주의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소설에서 말하는 악령은 아마도 사람들 머리 속을 휘젓고 어찌 보면 부조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갖가지 저런 사상들을 의미하는 것인 듯하다. 실제로 5인조의 행동(스포일러이므로 무슨 행동인지는 말 안 하겠음.)은 당시 어떤 정치 조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로부터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한다. 사상, 이념, ~ism 들은 내가 지배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일이지 교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또한 종교이고, 소설의 제목과 같은 ‘악령’일 뿐이다. 도선생께서 그런 의도로 작품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의 문체는 굉장히 길고, 사람 이름도 길고, 등장 인물들의 말들도 많다. 스토리만으로 보면, 1, 2권에서는 다분히 인내심이 필요하고 몇번 왔던 길 되돌아가서 다시 읽어야만 했던 경우도 많았으나, 다 3권에서 이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듯 하다. 도선생 특유의 허술한 플롯이라는 평들이 많이 있으나, 내가 눈치챌만큼의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구란데 좀 앞뒤 안 맞으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등장 인물들의 개성이다. 이런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역량이 있었기에 도선생을 위대한 소설가로 부르는 것이다. 아버지 베르호벤스키의 허술한 허세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내가 했던 찌질한 몇 가지 기억들,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스타브로긴은 객관적으로 하는 행동은 악마와도 같다. (원문에서는 삭제 되어 있었다던 마지막 장 찌혼의 암자에서는 꼭 읽어야 된다.) 그러나 악마가 아니라 악동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아마도 전반적으로 희극적인 분위기의 소설이라서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러한 프레임을 걷어 내고 나면 분명히 악마다. 또 ‘악의 진부함’인가. 그 외에도 뾰뚀르 스체파노비치, 끼릴로프, 바르바라 빼뜨로비나, 아아 그리고 가여운 리자 등 등장 인물 하나 하나를 만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독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꼭 다시 읽어 보고 싶고, 도 선생의 다른 작품도 접해 보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

읽을 책은 많고 인생은 너무 짧다.

Quiet – Susan Cain

Quiet: The power of introvert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내성적인 것은 외향적인 것과 다른 것일 뿐이며 장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는) 장애처럼 인식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또는 서구처럼 외향성을 숭배하는 문화권에서는 의미 있는 주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다소 상황이 다르다. 내 경험으로는 학교 다닐 때까지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 조용할 것을 강요 받는다. 그러다가 문득 사회에 진출하게 되어 회사라는 곳에 들어 가게 되면 더 이상 조용하다는 것이 장점은 아니게 된다. 점점 서구화 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외향성이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말이 많았다가는 ‘말만 번지르르하다.’라는 평을 받기 십상이다.

내 스스로 내성적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 있을 법한 주제였으나, 결론적으로 지루했다.
더불어 내성/외향의 틀 속에 너무 많은 것을 우겨 넣으려고 시도하는 듯 하여 부자연스럽기도 했다.

실패!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폭격-김태우

아마도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게 한국인은 공산당에 대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보여졌던 것 같다. 현대의 인권 개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들에게 아시아인은 열등한 인간, 목숨 값이 덜 나가는 인간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현대의 이라크 전쟁에서 아파치 헬기 (물론 미군의) 조종사들이 농담 따먹기 하면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물며 60여년 전에는 이보다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전쟁은 1951년 6월까지 약 1년 가까운 공방 기간과, 그 이후 2년 간의 휴전 협상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2년 간의 휴전 협상 기간 동안 남한의 후방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였으나, 북한 지역은 전후방 할 것 없이 수시로 폭격을 견뎌 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2년 동안 토굴에서 지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 봤다면 왜 그렇게 북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미국을 증오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한국전쟁은 그들의 전쟁이었다라고 주장한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고, 김일성이 도발한 전쟁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3년 동안이나 전쟁이 이어진 것은 강대국의 이해 관계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휴전 협상이 시작될 당시, 그러니까 전쟁 발발 후 1년이 되는 시점부터 휴전을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에 의한 피해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했고, 많은 것을 양보하더라도 휴전을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의 반대로 휴전 협상은 2년동안이나 지속 되었고, 미 공군은 휴전이 타결 되는 날까지 북한 지역에 폭격을 계속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는 그들의 전쟁터가 되어, 3년 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연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습하여 수백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있는 현재, 60년 전 한국인에 대해 공감하는 만큼 현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정 이입이 된다. 폭탄 투하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조작과 지상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대비가 인간의 존엄성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이스라엘인들은 공습받는 가자 지구를 지켜 보며 말 그대로 ‘박수’를 보내고 있다. 모군의 말대로 악의 평범함인가? 잊지 않고 계속 되뇌이지 않으면 우리 안의 악마에게 지배 받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족…
‘Israel air strike’로 구글 검색해 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마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인 듯 보여진다. 듣던대로 미국 언론은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듯 하다.

Please, be more human…

이슬람 – 이희수

이슬람 – 이희수
2014-07-08

이슬람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알제리 선수들이 자신들의 상금을 팔레스타인에 기부하기로 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기 이슬람 세계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한편, 이라크에서는 스스로 마호메트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슬람 세계 나아가 전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미친 소리를 하는 세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슬람이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세계이다.

대부분 근대 이후 세계가 그렇겠지만, 우리도 서구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에게는 테러리스트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전라도 사람 하면 조폭이 떠오르는 것과 다를 것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 사람들을 일반화 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서구 문명, 역사에 대해서는 상식 선에서 알고 있는 내용만큼을 이슬람에 대해서 알려 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읽어볼 만한 책이고, 우리 문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19세기 이후 정치, 경제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인 2011년 경의 자스민 혁명이 지금으로서는 대부분 실패했다고, 더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민중들이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 되고 있다. 앞으로 그들의 미래가 밝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보인다.
(때마침 이런 기사도 봤다.)
분명한 것은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 미국의 이스라엘 편들기가 현재 이슬람 세계의 비루한 삶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종교가 원인이라는 다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는 주장을 한다. 근대를 지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종교의 역할은 이미 퇴색해 가고 있다. 개개인이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중세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서구의 자본주의가 무조건 답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최소한 유일신교의 편협한 종교관, 불관용이 분쟁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 이면의 세력들이 그들 민중을 탄압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 성찰을 통해 사는 의미를 찾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권력화된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류의 진보의 방향이라고 믿는다.

‘Imagine no religion…’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 E.H.카

whatishistory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에 쓰여져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이미 이책이 자유롭게 번역 되어 읽히던 시절이었지만 아쉽게도 20년이 지난 2014년에 처음 읽게 되었다. 쓰여진 지 50년이 지난 책이니만큼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도 당시로서는 논쟁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객관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연과학에서조차 절대 진리라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에는 역사적 사실의 바탕에는 절대 진리가 있다는 생각도 유행했었던 것 같다. 상대성(?) 상대주의(?)가 일반화된 것도 이 책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일부분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책의 키워드는 ‘변증법’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미래에 비추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문제인데, 나로서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역사의 진보의 방향을 탐색하는 변증법적 과정이 역사다.’ 정도로 요약하는 것이 최선이다.

저자는 역사는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 즉,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라며 역사의 방향을 초이성적인 힘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문학도 아니라고 한다. 아무 가치 판단도 없는 옛날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느냐를 통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찾는 행위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역사에는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갈 길에 대한 모색이 목적일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 사회에 있어서,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진리에 가깝다.

Trauma and Recovery

Trauma and Recovery – Judith Herman

2014-06-18

traumaandrecovery

처음 이 책을 집었을 때는, 요새 유행하는 말로 ‘힐링’이 되는 책이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트라우마라는 개념도 직장 생활에서 만나는 또라이들로부터 겪는 스트레스 정도를 생각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읽을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환경-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에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의 논문과 사례를 인용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등 다분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차갑게 객관적으로 트라우마와 그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는, 억압 받은 자들에 대한 관심이므로,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후학들 중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경계하는 말까지 하고 있다.
책 전반부는 PTSD의 공통적인 현상들과 사례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고 후반부는 그들이 회복하는 과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상세한 내용은 실제로 심리 상담사들을 위한 조언이라고 보여질만큼 전문적인 듯 하여 어렵고 너무 먼 얘기로 들려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다.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후기(Afterword)의 내용이었다. 후기에서 저자는 PTSD는 사회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 하며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나는 그 내용 대부분이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다양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회가 아닐까 한다. 70년이 지났지만, 최근 총리 지명에서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일제 치하의 경험들, 친일파들, 전쟁, 그리고 이후 군사 독재의 암울했던 시기들이 모두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적 경험일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는 사회 전체가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인 트라우마를 겪은 것이다.
개인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계를 저자는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가 안전의 확보 둘째가 기억과 애도, 세번째가 연결이다. 똑같은 단계가 트라우마 사회의 치유를 위해서도 필요한데, 우리는 아직 두번째 단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있다. 즉, 범죄 행위를 기억하고 진실을 밝히며 단죄하는 작업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허먼의 표현이 꼭 한국 사회를 두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형태로든 (범죄 또는 범죄에 대한 묵인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참회를 하지 않고서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과거에 대한) 부인과 은밀함이라는 부패한 역학 관계로 오염된 채로 남아 있다.’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지 않은가?
폭력의 가해자는 진실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한다.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데, 대표적인 예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서을 훼손 시키는 것이다.그리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공격하고는 한다. 우리 사회적으로는 아직도 너무나 잘 먹히고 있는 ‘색깔론’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겠다.
과거에 대한 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미래에 대한 설계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지금 과거사를 청산해야 된다고, 이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한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지… 이대로 시간이 지나 방관자로서의 민족성이 체화 되어 갈 것만 같다.
나는 우리 역사에 피해자는 아닌 것 같다. 나 또는 친척 중에 직접적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도 없고, 딱히 먹고 살기 힘들지도 않다. 허먼의 구분에 따르면 방관자(bystander) 정도가 되겠다. ‘ 우리, 방관자들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매일 짜내야만하는 용기의 일부분이라도 우리 안에서 찾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살펴 봐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하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소시민으로서는 이 책에서 읽은 구체적인 내용들을 내가 다시 찾아 보며 실행해야 되는 상황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대화

대화 – 리영희

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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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그들의 언어로는 의식화의 원흉. 우리 언어로는 시대를 앞서 간 지식인.

자서전이면서 대담의 기록이라는 형태로 기술 되어 있어서, 오히려 더 공감이 가능 면도 많았고, 솔직한 술회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남이 쓴 전기에서는 오히려 단점을 못 드러내는 면도 있지 않나 싶다.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가신 분. 때로는 약한 모습도 보이고, 폭력에 주눅들었던 경험도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기회주의자들만이 승리해온 암울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지금 시점에서 더욱 더 필요한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번도 청산하지 못하였는가. 내가 최근 들어 느끼고 있는 좌절감을 (나는 그저 생활인일 뿐이지만) 리영희 선생이 먼저 느꼈었다니, 내 좌절감에 근거가 더해지는 듯 하여 안타깝다.
결국에 우리는 뭉치지 못하는 우매한 민족성 때문에 큰 일을 못해낼 것이 분명하고, 뿌리 깊은 기회주의는 영영 청산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어릴 적 보았던 현학적인 언어를 남발하며 겉멋에 들어 활동했던 대학생 운동권들이 떠오른다.

자본주의 최첨단에서 일하고 있는 변절자이자만 아직도 ‘인간에 대한 존중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귀결된다.’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트 러셀

2014-04-23

inpaiseofidleness

에세이 모음이라 관통하는 주제를 찾기 어려운 듯도 보이나, 한 마디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류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러셀의 고민이다.
러셀의 30년대 고민과 제안이 우리 세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듯 하다. 그의 통찰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적어도 한국 사회는 러셀 생존 시기보다 풍요로워진 것 같지 않아 안타깝고 세월호 참사와 맞물려 참담하기도 하다.

근대를 말하다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201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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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매우 못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재미 없었다는 점은 다들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특히 못했던 이유는 반골 기질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노예 근성 흘러 넘치는 지금의 내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나는 국사와 국민윤리에서 양을 받음으로써 국정 교과서에 대해 저항한 셈이다.

저자는 우리 국사 교육에서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망국의 과정과 식민지배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 비교적 쉽고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되는 수준에 도달한 것 같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얼마나 대책이 없었으며 독립 운동 세력들은 그 얼마 되지 않는 힘들을 통합하지 못해서 기력을 낭비했던지 하는 안타까움들이다.
잡생각 중 한 가지. 우리 선배 세대의 학생 운동의 노선 투쟁과 근대의 독립운동이 사뭇 비슷하다는 점이다. 막강한 적을 앞에 두고 실체도 불확실한 내부 권력 다툼, 노선 다툼 때문에 자멸하는 모습 말이다. 이거 혹시 우리 국민성 아닌가 문득 기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설명이 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대의를 중요시하는 부류와 내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류로 사람을 나눌 수 있다면, 대의를 중요시하는 부류는 독립 운동에 힘썼을 것이고 그 안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리라. 반면 반대 부류의 인간들은 친일을 했을 것이고 오직 한 가지 목적, 같은 세력의 영달을 위해 단결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 선배 세대의 모습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부족했던 것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진짜로 국민성이 그래 먹은 것일까.
우리가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재를 용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친일 줄기 집단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에게 지배 받고 있는 답답한 현대를 살고 있는 것은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덤으로 얻은 독립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 운동 세력의 답답한 내부 분열을 보면서 착잡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디테일에 대해서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왈가 왈부 말이 많고, 같은 뉴스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180도 달라지기도 하고,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니, 역사적 사실이야 얼마나 더하겠는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왜곡도 밥 먹듯 일어나니, 역사 왜곡은 얼마나 또 쉬운 일이겠는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들의 사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인데, 인문학은 천대 받고 있고 우리 고등학생들에게 국사가 필수 과목이 아니라 하니, 착잡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