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선은 예상대로 이재명이 당선 되었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 이미 대선 결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이재명 당선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다. 심지어 대선 다음 날인 오늘 아침까지도 뉴스조차 찾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득표율을 보고서는 참담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국민의힘 후보가 41% 넘는 득표를 얻은 것은 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다. 김문수라는 인물 자체가 어떤 매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의 후보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후보에게 41%라니… 그러니까 순전히 국민의힘이라는 당에 그렇게 표를 준 것이다. 내란이 발생한 지 6개월만에 다들 잊은 것인가?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혐오스러운 것인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 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 정권 바뀐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지인들도 많은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건 이미 정해진 결과였을 뿐이다. 이재명 외의 다른 후보가 나왔다면 달라졌을까? 그랬을 지도 모르겠지만, 또 어떤 하자를 끄집어 냈을지 모를 일이다. 이번 투표 결과는 정치가 논쟁을 통해 서로를 설득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 또한 전형적인 연령대, 성별, 지역의 배경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종교적인 형태로 점지 받았고, 그것을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러한 나에 대한 의심이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함으로 남아 있다가도 금세 짓밟혀버린다. 머릿속에서 나만의 논리를 몇 번 치고 받고 하고 나면 결론은 나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강화일 뿐이다. 찝찝함은 잠시 장판 밑에 쓸어 넣고, 저 무식한 것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한탄하면서 일상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제대로 나의 이 찝찝함을 풀어 버릴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처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을 때 환경이라는 말이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러하다. 내 주변에서는 죄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정치에 대한 나의 종교와 같은 신념이 (만약 진짜로 내가 맹목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강화가 될 가능성만 있을 뿐, 그것에 도전해 줄 상대방은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반드시 내가 끼리끼리 놀고 있기 때문에 도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나와 다른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나와 반대 되는 종교로서의 정치를 믿고 있는 자를 만나게 될 때도 있다. 정확히는 그러한 냄새를 맡을 기회가 있다. 그러면 피차 간에,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게 된다. 이것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한 번씩 정치에 대한 대화로 홍역을 치러 본 사람들의 본능 같은 것이다. 상대방과 앞으로도 사회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면 정치 이야기는 피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는 것을 다들 몸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점점 더 골이 깊어질 뿐이다. 불편하더라도 정치 이야기는 자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정치적인 주제에 흠칫 놀라고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하려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정치 야이기는 하지 맙시다!’라고 사전에 선을 그어버리는 말은 안 했으면 한다. 불편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다른 면을 탐색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Category: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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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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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기억
어머니는 동생을 재우려고 품에 안고 살랑살랑 흔들고 계셨다. 동생은 갓난쟁이는 아니지만 아직 잠투정을 할 나이였으리라. 우리 형제는 두 살 터울이니 내 나이도 많이 봤자 다섯 살 정도였을 것이다.
그 날따라 동생의 잠투정이 심했었나 보다. 단칸방은 어두컴컴하고 14인치 브라운관 TV 불빛만 흔들거리고 있었다. TV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 혼자 레시바로 소리를 듣고 계셨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아기가 잠에서 깰까 봐 그러셨을 테다.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껌껌한 방에서 할 수 잇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소리는 죽여 놓은 채 화면만 껌뻑거리는 TV를 보는 건 고통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머니 혼자 소리를 듣고 계신다는 생각에 어린 마음에도 이건 옳지 않다, 불공평하다, 분하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할 때, 좋은 추억보다는 섭섭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나쁜 어머니였던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식들을 위해 그 이상 헌신하실 수는 없다. 이상하게도 그런 어머니에 대해서 좋은 추억은 잘 떠오르지 않고 섭섭한 기억이 떠오른다는 게 죄스러운 일일 뿐이다.
심리학적으로 부정적 기억이 더 오래 각인 되도록 진화 되었다고 한다. 말은 된다. 안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한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덜 노출 됐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서글픈 일이다. 애초에 인간은 살아 남기 위해 진화한 것이지 행복하도록 진화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
로맨티스트
‘속보, 비상계엄 선포’ 라는 메세지를 받을 때는 당연히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TV 스크린에서 계엄 선포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난 후에야 믿을 수 있었다.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혼자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다가 덜컥 겁이 났다. 절대로 우습지 않은 일이다. 물리력 앞에서 상식이 지켜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굳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상식이 지켜지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정도 상식은 통하는 사회이므로 몇 시간 동안의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어이 없는 일은 어이 없게 일어날 수도 있었다.박근혜 대통령의 표면적인 죄는 국정 농단이었지만, 근본적인 잘못은 시대 인식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가 감옥에 가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이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혼자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비록 남의 나라 대통령이지만, 시대의 자정작용에 대한 회의감으로 좌절을 느꼈었다. 이제 윤대통령이 한미 병신량 일정량 법칙을 지켜주려 하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누구는 아내를 위해서 계엄까지도 불사하는데, 나는 아내를 위해서 어떤 각오가 돼 있는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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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쁜 일이다.한강 노벨상 소식에 주문 폭주…교보문고 · 예스24 한때 마비 출처 : SBS 뉴스
서점 주문이 폭주하고 Yes24는 상한가를 갔다.
나는 이건 코메디라고 본다. -
존엄한 죽음
2023/06/09.
결국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3주만이다. ‘모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사는 것, 죽는 것, 죽어가는 것, 살아내는 것… 혼란스럽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신다. 살아 계셔서 고통 받고 있다. 이송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어머니 고통 받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고통은 실재하지만 느끼시지 못한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고통인 것인가.어머니를 보는 내 고통은 실재하고 느껴진다.
눈 깜박 거리시고 고통스럽다고 눈물 흘리시는 거 같은데, 의식이 없으시다고 한다. 의사들 말이 맞겠지. 만에 하나 착오가 있으면 끔찍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있을까 무섭다. 그 고통을 짧게 해 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 그걸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의식이 없다시지만 어머니도 고통스럽다. 죽음 앞에는 어떤 식으로든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받는 것은 다행인 것인가.
우리 나라에서는 임종과정에 있는 경우에만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된다고 한다. 임종과정이란 것은 회복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임박한 상태라고 정의되고 있던데, 모호하다. 얼마나 가까워야 임박한 것인가. 확실히 우리 어머니는 ‘임박’한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계속 고통 받으셔야 한다.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요양병원에 모신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어머니를 위한 일은 아니다. 가족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다. 가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답지 못한 일이 아닌가. 존엄한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존엄한 것인지 명확하게 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미 그 선을 한참 넘어섰다.
이것은 폭력이다.
다르게 보면 사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버려 두고 와서 나는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