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아’. 남 자랑하는 거 하나도 부러워할 것 없다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이다. 후렴구는 이렇게 반복이 된다.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하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하고
사실 이 간단한 가사는 두 가지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첫 번째 메세지는 자명하다. 남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픈 것은 한민족을 넘어서 전체 인류가 공유하는, 말하자면 유전자에 적혀 있는 특성이다. 사촌이 땅을 샀다는 사건에 대한 무조건 반사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조건 반사를 (표정은 감추지 못하더라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못난 놈이 된다는 것 또한 중등 교육 이상을 받은 자라면 체득하고 있는 지혜이다. 여기에서 한 발 나아가서 장기하는 스스로 배 아픔의 부질 없음을 깨닫고 아픈 상황과 아프지 않은 상황을 분별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주장하는 가사라고 해석해 본다.
둘째 메세지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면이 있다. 분명히 후렴구는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로 시작을 한다. 자랑이 부러움의 원인이 아니라 부러움이 자랑의 원인이다. 즉, 무언가 부러운 것이 있으니까 자랑을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조금 더 살을 더 붙여서 해석을 해 보면, 자랑을 하는 자는 무언가 결핍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심리적으로 보상 받고자 자랑할 거리가 생기면 달려가서 나불댄다는 뜻이 된다. ‘자랑하는 자’들을 그렇게 매도할 합리적인 근거는 갖고 있지 않지만 서사적으로 말은 된다고 생각한다. (자랑하는 자들 중 이 글을 보시는 분께는, 몇 분이나 되실지 모르겠지만, 사죄한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대놓고 자랑하는 자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은근히 자랑하는 자와 내 자랑거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 정도는 흔하다. 그렇지만, 그들도 막상 추켜세워 주면 부끄러워 손사레를 쳐야만 사회생활의 지혜를 아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대놓고 자랑하는 자는 그 의도와는 달리 부러움을 사는 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왜 인간은 부러워서 자랑하고, 자랑해서 부러워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의아하지만, ‘배 아픔’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입장에서는 발전의 원동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촉매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유행하던 진화심리학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의 번영과 개체의 행복과는 그리 상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다. (더 작은 단위, 그러니까 국가, 민족의 번영과 개체의 행복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부정은 터부처럼 생각된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유전자가 지시하는 대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전자의 압박이 모든 면에서 극복의 대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유대감, 소속감, 측은지심 등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유전자의 압박이다. 이런 감정들은 오히려 유전자가 아닌 두뇌로도 납득을 할 수가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감사하게 써먹으면 될 일이다. 시기심도 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승화 시키는 방법도 잇을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그 감정이 너무나 격렬하고 반응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 어쨌든지 사촌이 땅을 사서 복통에 눈물이 날 때, 마음 한 구석 허전하여 누군가 명치에 자랑을 꽂아 넣고 싶어질 때, 말초신경에게 맡기지 말고 한숨 먼저 크게 한 번 쉬고 나서 생각해 볼 일이다.
내 경우는 그렇게 높은 경지에 오르지는 못해서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꼭 자랑하고 싶어 못참겠으면 해도 돼. 내가 잘 들어 줄게. 그렇지만 안 하는 게 너한테도 좋은 거야.
이 정도가 결론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