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문제

문제인 대통령이 어제(10/22) 국회 시정 연설에서 대입 정시 비중 확대를 언급해서 이슈가 되고 있다. 워딩으로 보면 아주 정말 간단히 한 줄, ‘정시 비중 상향’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그만큼 관심들이 많은 사안이다 보니 파장이 작지 않아 보인다. 분명 교육계에서 진행되어 오던 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조율이 제대로 안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진짜로 문재인 대통령이 정시 비중 상향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면, 교육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교육 문제를 이용하여 정치적 실익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육의 선진 사례로 얼마 전까지 핀란드를 많이들 얘기했었다. 아마도 입시 경쟁에 어릴 적부터 치이지 않고 교육의 이상적인 목표, 즉 성인이 되어 충만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준비를 추구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뿐만 아니라, 어떤 기회에서든지 서구에 아이를 보낼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 곳에서는 아이들이 행복해했고 한국 학교에 다시 돌아오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 곳에서는 입시 준비가 아니라 교육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교육 문제의 해법을 논의할 때 제일 먼저 입시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뭔가 좀 이상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상적인 교육인가?
나는 몇 가지 상이한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다 보니 혼란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는 청소년기의 지상 과제라는 전제가 있다. 한국에서 모든 교육은 그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공교육이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공교육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 기관은 목적 자체가 입시이기 때문이다. 목적 자체가 그러하다면, 입시에 대비하는 것은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잘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이런 얘기를 하면, “역시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 “현실을 너무 모른다.” 등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다. 이해는 한다. 다들 한 발자국 앞에서 시작하는데 내 아이만 뒤쳐지는 것 같다는 생각. 공포의 힘은 강력하니까 이해는 한다. (나는 그 안에 탐욕, 선민의식 등 보다 저열한 동기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생부종합전형이라는 제도로 나는 상당 부분 개선이 되어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취지 자체가 학교생활을 충실히 한 자에게 대학을 잘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가장 관심 있는 입시와 연관시켜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그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종 전형의 비율을 유지하고 공정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것이 그 전까지의 기조였는데, 갑자기 정시 비중 확대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 바탕에는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이 포퓰리즘 아닌가?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공정성에 대한 ‘공포’를 조장한 탓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조국 전 장관이었고, 그 이전에는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식 사랑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강력한 감정을 자극 받아 정시 확대 쪽으로 여론은 기울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어떻게 보면 정시 확대 되면 당장 우리 아이들은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순전히 아이들 성향으로 봐서인데, 시험에 잘 적응할 것처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입시 경쟁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다시 없는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팍팍한 것은 모든 국민들이 줄세우기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시나 두서 없지만, 결론적으로 정시 확대는 것은 공교육 정상화로부터 한 발작 멀어지는 길이다. 공정성은 쉽게 확보할 수 있겠지만, 희생하는 대가가 크다. 학원들만 만세 부르겠구나.

팩트풀니스 Factfulness

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

얼마 전에 타계한 공중보건학자 한스 로슬링의 베스트셀러이다. 인간이 세상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중보건학자로서 그의 이러한 분석의 목적은 인류의 보편적인 후생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점에서 숭고하다고도 여겨진다.
사실 인간이 세상을 오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여기 저기서 많이 들어본 바이고 약간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행동경제학에서도 인간의 편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런 거)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는 구석기 시대에 진화를 멈춘 인간의 뇌에 대해서 설명하고는 한다. 이런 저작들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즐거운 것들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래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한스 로슬링의 목적은 분명하다. 세상을 사실(Fact)에 기반하여 오해 없이 바라봄으로서 인류가 얼마나 어떤 속도를 통해서 나아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이라는 것은 정확히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다루는 데이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성도 차별 받지 않고 교육을 받고, 적절한 가족 계획을 하고,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음으로써 어린 나이에 죽지 않는 등 그가 분류한 ‘4단계’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우리는 이미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 공중보건의 사례는 우리와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본적인 그의 10가지 법칙은 ‘4단계’ 생활 수준의 우리도 더 나은 삶을 누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메모하는 차원에서 10가지 법칙을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간극 본능 The Gap instinct
인간은 극단의 이야기에 끌리게 돼 있다. 양 극단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 세상을 두 가지로 양분해 버리고서는 그 사이에 수 많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2. 부정 본능 The Negativity instinct
나쁜 소식만 기억에 남는다. 점진적 개선은 인지하지 못하고 아주 먼 옛날을 아련히 그리워하고는 한다.
3. 직선 본능 The Straight Line instinct
섣불리 선형 회귀를 하고는 한다. 내가 보고 있는 추세는 다양한 곡선의 일부일 수도 있다.
4. 공포 본능 The Fear instinct
내 공포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계산해 봐야 한다.
5. 크기 본능 The Size instinct
인상적으로 보이는 숫자 하나, 또는 개별 사례에 집착할 수도 있다. 가능하면 비교 가능한 숫자를 찾아라.
6. 일반화 본능 The Generalization instinct
집단을 범주화하는 오류이다. 집단 내에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집단 간에도 유사점이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대다수라는 말은 과연 51%인가 99%인가?
7. 운명 본능 The Destiny instinct
흔히 문화라는 말로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다라고 낙인 찍는다. 느린 변화라도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 내가 몇 년 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 그 집단은 지금은 전혀 다른 집단일 수 있다.
8. 단일 관점 본능 The Single Perspective instinct
망치를 쥐어 주면 온통 다 못으로 보인다. 내 전문성은 하나의 망치일 뿐이니 겸손해라. 다른 연장들을 갖추려고 노력해라.
9. 비난 본능 The Blame instinct
일이 잘못 되면 범인을 지목하려고 한다. 그러면 마음은 편해지지만 일이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악당을 찾지 말고 원인을 찾아라.
10. 다급함 본능 The Urgency instinct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요구 받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생각을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그렇게 급하게 행동해야 될 일은 드물다.

간략하게 말하면 겸손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안다는 생각하지 말고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나의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짜 뉴스와 언론의 호들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한스 로슬링의 버블 챠트는 오래 전에 TED를 통해 이미 접해본 적이 있었다. (여기)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에 이 정도의 경지가 있을 수 있다니 놀라워 했던 기억이 있다. 갑자기 이케아가 떠오르면서 이런 게 스웨덴스러움인가 감탄하게 된다.
아래 링크 추천.
Gap Minder.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의 신기원
Dollar Street. 발로 뛰는 통계에 감수성까지..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Yuval Noah Harari, 2018.

‘Sapiens’, ‘Homo Deus’등의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이다. 그렇지만 이미 작년.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Sapiens’에서는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영장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됐는지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았고, ‘Homo Deus’에서는 신이 되어 버린 인류의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저자는 ’21 Lessons..’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고 밝히고 있다. 복잡해지고 현혹되기 쉬운 세상에서, 일상 생활에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조차 사치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명료함(clarity)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현재 몇 가지 측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트럼프류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liberalism, 그냥 자유주의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는 19세기 이래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과 경쟁하면서 보완해 나가면서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한 자들도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트럼프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구 온난화는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해 가고 있으며, 이 두 기술을 융합되어 갈 것이다. 이 두 기술의 융합은 인류의 대부분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앞으로 착취(exploitation)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irrelevance)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Homo Deus’의 주된 주제이다.) 먹고는 살겠으나, 의미 있는 일자리는 더욱 없어질 것이고, 일부 데이터를 독점하는 자와 그 외 대다수로 명확히 계급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인 수준에서만 대응이 가능한 것들인데, 오히려 벽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현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트럼프의 MAGA는 먹혀 들고, 영국인은 Brexit가 실업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시진핑은 모택동이 되고 싶어하고, 푸틴은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서는 크림반도를 때림으로서 국수주의를 선동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IS라는 단체가 득세하고 있는데, 테러리즘은 이런 상황에서 더 효과적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암울하다. 사실 암울하다. 해결책이라고 떠오르는 것들은 별로 없다. 이 쯤에서는 애국주의(Nationalism)를 선동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에 가깝다. 종교는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저자는 현대의 종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애국주의의 시녀(Handmaid of Nationalism)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자의 해법은 명확하지 않다. 도입에서 말했듯이 저자의 목적은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위한 논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당황하지 말고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겸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21세기에는 너무 상투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뇌과학이 발달하고 관련하여 경제학 분야에서도 행동경제학이 부각되듯이, 사람들은 편견에 쉽게 노출 된다. 일단 믿는 것은 계속 믿는다. 믿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은 큰 고통이니까… 우리 나라에도 아직 20% 이상의 자유당 지지자들이 심각한 바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때려 놓고 맞은 놈이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견을 주입한는 언행, 혐오를 선동하는 언행은 매우 사악한 것이고 생각보다 폐해가 크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더 절망적이구나. 그렇지만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난다면 편견에서 빠져 나오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가치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해야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Justice)의 정의가 달라져야 될 수도 있다.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Sapiens’에서부터 주장하던 내용인데, 인류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의 상당 수는 단지 믿음일 뿐이다)
결국에 눈에 보이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겁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Keep calm and carry on… 하는데, carry on 할 것은 일상 생활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되새김인 것 같다.

두 번 읽을만한 가치 있고 그 정도의 재미도 있다.

트럼프의 의미

크루그먼(Paul Krugman)이 뉴욕타임즈에, 2019년 5월 11일에 기고한 칼럼 내용 요약이다.
현 시점 상황은, 트럼프가 중국과 무역 협상 판을 엎으려는 제스쳐를 해서 (물론 트럼프는 중국이 뒤로 호박씨 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시장을 위험회피 모드로 만들어 버린 다음 다소 소강 상태가 된 상황이다.
원문은 아래 링크.
Killing the Pax Americana


사람들이 무역 전쟁에 대해서 두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서 바로 잡아 주고 싶다. 트럼프는 원래 아무 것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없으니 트럼프가 착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비판자들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한 편으로 사람들은 무역 전쟁의 단기적인 측면의 비용에 대해서 과대 평가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무역 전쟁의 장기적인 영향은 과소 평가하고 있다.
단기적 관점에서, 관세는 세금이다. 그게 끝이다. 역진세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어쨌든 세금이고 그 규모도 아직까지는 GDP의 1%에 불과하다. 아직까지는 무역 전쟁이 전 세계적 경기 침체(global recession)을 야기할 것 같지는 않다. 트럼프가 무역 전쟁을 다른 지역까지 확대 시킨다면 GDP의 2%에 달하는 수축적인 재정정책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가 그렇게 할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그 상태까지 오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보복이 있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보통의 관세 인상보다는 덜 나쁘게 된다. 관세를 부과했는데 상대방이 보복을 안 하면, 미국 수출품 가격 인상을 가져오고, ‘terms of trade’(terms of trade effect)효과로 관세에 의한 경제 왜곡 효과를 역전 시킨다. 만약에 보복한다면 관세는 그저 국내 소비자들에게 세금 부과하는 효과만 남게 된다. (잘 이해 안 되고 혹시 오타가 아닐까 싶지만, 뒤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하니 넘어감.)
그것보다 중요한 점은, 무역이 전세계적이고 경쟁우위라는 개념을 건드린다는 이유로, 그 실제 효과보다 관심을 더 많이 끌게 된다는 것이다. 무역 정책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다른 정책 (재정 정책, 보건 정책)들이 중요한만큼만 중요하다.
무역 정책이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중요성 보다는, 무역 정책이 민주주의와 평화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유럽에서는 자명하다. EU의 유래는 1950년대에 ‘Coal and Steel Community’인데, 이것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협정이었지만 프랑스와 독일 간의 미래 전쟁 예방이라는 진짜 목적을 수반하는 협정이었다.
미국에서 이 효과는 다소 암묵적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자명하다. 전후 무역 체제는 국가 간의 상업적인 연계를 평화 증진의 방안으로 보았던 Cordell Hull(루즈벨트 시절의 국무장관)의 비전으로부터 발전해 왔다. 다자간의 협정을 맺고, 일방적인 행동을 제한하는 이 체제는 애초부터 Pax Americana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은 그러니까 그가 외국 독재자들을 옹호하고, 동맹에 대해 존중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행위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은 동맹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중국의 무역 관행이 여러 측면에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맞다. 만약에 트럼프가 동맹국들을 모아서 중국의 못마땅한 정책에 대항하려 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트럼프는 사실상 거의 모두를 상대로 낮은 수준의 무역 전쟁을 하고 있다. 캐나다 철강에 관세를 물리면서 그들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웃기는 핑계를 대고, 독일 자동차에도 똑같이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중국의 부정에 대항하기 위해 전략적인 동맹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니다. Pax Americana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 지배가 잠식 돼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가난해진 것이 아니고 세계가 부유해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세력들이 연합함으로써 평화적인 국제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를 희망할 만한 이유가 있었었다. 몇 년 전까지 내게는 세계 무역 체제가 그렇게 전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크고 자애로운(? largely benign) 미국 헤게모니에서 비교적 자애로운(comparably benign) 미국과 EU의 공동 정권으로 전환 말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상황이 좋지 않다. 트럼프 문제만이 아니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문제만도 아니다. 유럽인들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Victor Orban 같은 자에 대해서 적절히 다룰 수 없다면, 유럽인들은 세계가 필요로하는 리더십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약한 반면, 트럼프는 유해하다. 그는 세계가 더 위험하고 덜 민주적인 곳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다. 무역 전쟁은 그러한 드라이브의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미국과 전세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관세의 영향에 대한 경제학적 모델링이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재주가 없어 간단히 요약을 못하고 거의 전문 번역하다시피 했다.
마지막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이 중요한 게 아니고, 트럼프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과 그에 동조하는 세계가 위험한 것이다. 혐오할 대상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무리는 경계해야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1970년대에 쓰여진 책으로써 벌써 50년이나 묵은 책이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으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곱씹어볼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1부인 ‘근대 세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미 제기되고 있다. 나머지 2~4부에서는 각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이 책의 구성이 슈마허의 단편적인 강연들의 내용을 발췌하여 엮은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생산 문제’라고 이름 붙인 1장에서는 생산력 문제는 모두 해결 되었다고 하는 신화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경제 학자 들 용어를 빌자면 이 체계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에 의존 하면서도 이것을 즐겨 소득으로 취급 한다. 필자는 이러한 자본을 화석 연료, 자연의 허용 한도, 인간의 본질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일부 독자들이 세 가지 범주를 모두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필자의 주장은 그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입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풍족하게 소비하고 있는 이면에는 재생 불가능한 무언가 (저자는 재생 가능한 것을 ‘수익’으로 재생 불가능한 것을 ‘자본’이라고 비유하고 있다.)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천연 자원을 소진하고 있으며,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를 초과하여 소비함으로써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소모한다는 것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규모의 거대화와 업무의 분업을 통해 생산성은 증가했으나 일하는 기쁨을 모르고 오로지 여가에서 기쁨을 찾게 된 상황을 말한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분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소비의 양적인 증가가 좋은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와 오류를 짚으면서 불교 경제학을 예로 들면서 경제학에서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메타 경제학 을 공 부 하지 않는다면, 아니 더 나쁘게 말해서 경제적 계산 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에 한계 가 있음 을 알아 채지 못 하다면, 그는 성서 를 인용해서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중세의 몇몇 신학자들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학문이든 고유 영역에서는 유용하지만 , 이 영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악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

주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만 사실 경제학은 혼자 서 있는 학문이 아니다. 프레임이 주어진 한에서만 과학인 것이다. 근대 경제학의 프레임은 시장 가치로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밀한 과학(exact science)인 양 행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논의되고 있는 프레임이 무엇인가이다. 말하자면, 경제학도 절대로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별도의 장에서 불교 경제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교조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종교에 통하는 바가 있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 노동의 역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 중심성을 극복 할 수 있게 하는 것 ,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달리 근대 경제학은 소비를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한다.

책의 부제에는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고 되었다. 부제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이 배제 돼 있다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대규모 집단 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정체성 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소집단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교육을 이야기 할 때도, 형이상학, 가치관 교육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모든 교육의 임무인 것이다.
기술에 대해서느 인간 중심의 기술을 주장한다.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간이 배제된 채로 발전해 내가고 있는데, 그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비용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지만, 간디가 주장한 바 있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이 이상적인 생산 방식이라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유 구조에 대해서느 다소 강한 주장을 하는데, 현대의 사적 소유 구조가 이대로 존재하는 한 비인간적인 경제 및 생산 활동은 벗어나기 어려우며 소유 구조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기업 운영을 위해서는 민간 기업 대신 국영 기업이 확대 되어야 하며, 민간 기업의 경우에도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민간 기업은 이익이 과대 평가 돼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공 부문에서 많은 비용을 대신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의 형태로 공공 부문의 기여에 대해서 분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유 형태를 공공 기업 형태로 전환하여 세금이 아니라 배당의 형태로 분배하는 것을 더 이상적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Scott Bader’라는 회사의 사례가 재미 있다. 이 회사는 1950년대에 설립 되어 꽤나 성공적인 화학 기업으로 성장하였으나 창업주가 별도의 조합을 설립하여 자신의 지분을 모두 그 조합에 양도하는 형태로 소유권을 변화 시켰고 현재까지도 그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유권 변화와 동시에 constitution을 작성하여 몇 가지 중대한 원칙을 수립하였다. 첫 번째로, 회사의 규모의 상한을 명시하여 너무 큰 회사가 되지 않게 하였다. 회사가 커지면 분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보수의 원칙을 최대 최소의 비율을 7:1이 넘지 않도록 하였고(최근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종업원은 모두 동반자이므로 중대한 과오가 없이 해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 되는 고객과의 거래를 금지하였다.
책 전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래 인용이 적절한 듯 한다.

오늘날 가장 절실 하게 요구 되는 것은 이러한 수단, 자원들을 이용하는 목적을 바꾸는 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에 본래의 정당한 지위, 즉 본질적인 지위가 아니라 부차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생활 양식을 발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근대를 지나오면서 형이상학은 무너졌다. 자본주의가 진리가 되었고, 물질만능이 일생 생활 깊숙히 침투한 상황에서 다시 인간을 돌아보자고 외치는 것이 현실적인가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아직 우리가 압축 성장의 그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미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는 한 바탕 지나간 상황이며, 환경, 생태, 인권 등의 가치에 대하여 중요하게 인식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아직 덜 성숙하여 일베와 자유당이 창궐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멸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몇백년 동안 이어왔으나 해결되지 않는 논쟁 거리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는 지구 온나화라는 것조차도 부정하고 있으니, ‘사업가’라면 인간보다 물질을 앞에 두어야 하는 사람인 것인가… 긍정적인 것은 트럼프 류의 인간이 아웃라이어라는 믿음이지만 응? 당선 됐는데? 인간이란 나만 빼고 착하게 살기를 바라기 마련이 아닌가 회의적이 된다. 내세에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 실제로 Scott Bader의 사례는 퀘이커교적인 신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두서 없이 주저렸지만 역시 읽고 생각은 대충하고 행동은 못하는구나.

Why nations fail?

‘Why nations fail?’은 왜 어떤 나라는 풍요롭고 어떤 나라는 가난에 허덕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는 인종, 종교, 지리 등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의 노갈레스라는 지역은 국경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오랜 역사를 공유하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어떤 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장기간에 걸친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져만 갈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아주 간단한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착취적(Extractive)이냐 포괄적(Inclusive)가 빈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포괄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권력이 넓게 분산돼 있지만 동시에 법치(rule of law)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 개인에게 집중 되어 있어 사회 대다수의 계층은 접근하기 힘든 경우이다.
포괄적인 경제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 사유 재산을 보장하며 둘째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는 이와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고 사유 재산에 대하여 약탈, 착취가 빈번하고 이로 인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모험 정신의 등장을 방해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의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단 어떤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낳고, 다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해 더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착취하고자 한다. 또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지배층은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고, 반대로 기득권을 놓았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 개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정치경제 제도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결론이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한은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결코 ‘포괄적이다’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 압축 성장의 경험해 왔었다. 흔히들 적폐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냉전 시대의 기형적인 정체 경제 제도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하는 국가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주제는 중국에 관한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성장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과연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인가?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불평등의 영향

TED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상태에서는 절대적인 부보다 상대적인 평등이 구성원의 웰빙에 지배적인 영향을 준다.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들력 있는 주장을 펼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