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사회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미국의 이란 침공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각지를 공습하였다. 이 공습으로 이란의 최고지도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공습으로 최고지도자 뿐만 아니라 이란의 핵심 지도부가 제거되었다. 이란은 주변국에 배치된 미군 기지 뿐만 아니라 주요 민간 시설에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하였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것으로 보복하고 있다.
    미국이 왜 이란을 공격하였는지, 어떤 출구 전략을 갖고 있는지 모호하다. 트럼프 행정부 내 주요 인사들의 발언에 일관성이 부족하다. 충분한 고민 없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인상이 짙다. 아마도 11월에 있을 중간 선거에서 역전의 기회를 노리려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지만, 현재 미국 내 여론으로 봐서는 크게 잘못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이란은 최고 지도자를 잃은 후 적극 저항하고 있으며 항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사상자 수나 피해 규모로 보았을 때 매우 비대칭적인 전쟁이지만, 이란의 지도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산유국들을 괴롭혀 전세계 에너지 공급을 방해하고 전선을 확대하며 전쟁을 장기화함으로써 미국의 전쟁 비용을 늘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아프가니스탄이나 베트남은 생각하기 싫을 것이다. 국방장관의 인터뷰에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이나, 베트남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부분이 역설적으로 미국이 얼마나 전쟁의 장기화를 꺼려하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겉으로는 이란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장기전을 각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란은 (적어도 지도부는) 겉으로는 저항을 외치고 있지만, 매일 쌓여가는 피해가 심각하다.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 지 알 수 없다. 그러한 와중에 유가(CL1 Index)는 100불을 돌파하고 3월 9일 아시아 시간에서 120불까지 터치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특히 미국은, 그렇지 않아도 인플레이션이 위험요소로 부각 되고 있는 와중에 유가 급등은 부담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과 이란 정치 세력의 불투명성으로 인하여 어떻게 전쟁을 마무리 지을지 예측이 어렵다.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이란이란 어떤 나라인가

    어설픈 지식으로 남의 나라 대해서 아는 척하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럽다.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방 국가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란은 제정일치 사회이다. 국제적으로는 이슬람 시아파의 우두머리 국가이며, 국내 정치적으로는 종교 지도자가 최고 지도자의 역할을 한다. 대통령이 존재하고 대통령 선거도 하지만, 종교 지도자의 권한을 넘지 못한다. 실질적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대통령이다.
    AI가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에 제정일치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슬람 ‘혁명’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을 성공한 이후에야 종교 지도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혁명’ 이전까지는 정교 분리의 사회라는 말이다. 도대체 어떤 혁명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몇 백년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혁명 이전의 사회는 어떤 사회였던 것인가?
    혁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란은 ‘샤’가 지배하는 왕정이었다. 이슬람 혁명이라는 것은 이 왕조를 뒤엎고 제사장이 권력을 잡음과 동시 형식적으로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주의로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샤가 지배하던 왕조는 사실은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 자신들의 사리사욕만 채우는 부패한 정권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이 과도한 단순화라는 지적에 가장 취약한 지점이다.) 민심을 잃은 왕조를 종교의 힘으로 뒤엎은 것이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고, 호메이니 사후에 하메네이가 최고 지도자 자리를 넘겨 받으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이란 정권은 이스라엘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세계에서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년 동안 서구권과는 제대로 된 경제 교류를 할 수 없었고, 각종 경제 제재로 경제 활동은 위축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석유가 많이 나는 이란이라고 하지만,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현재 이란 정권의 지지율을 바닥에 가깝다. 미국 등 서방 세력의 경제 제재로 인하여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측면도 있으나 인터넷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지지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금년 초에는 저항하는 세력에 대하여 폭력적으로 탄압하여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바가 있으니, 이란 국민들 입장에서는 혹시나 미국이 해방군으로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일부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정리하면, 이란 정권은 반미 국가이면서 전근대적인 제정 일치의 정치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나라인데, 최근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는 상황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 받아 안팎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란 민중들의 운명

    이란에 살고 있는 민중들은 어떤 생각일까. 역시 외부인의 시선으로 함부로 추측하고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폭압적인 독재 권력에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외세가 들어와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을 마냥 환영할 수 있을까. 만약에 80년 광주 이후에 미군이 청와대를 공습했다면 미군을 환영할 것인가? 미군은 너무 전통적인 우방이라 감정 이입할 수 없으니, 일본이나 소련이 서울을 공습해서 전두환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감정적인 이유에서 ‘왠지’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감정적인 이유에서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발적으로 뒤엎지 않고 외세에 의해 정권이 바뀐다고 한들 그 정권이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고 민주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정권일 가능성은 낮다. 지금 상황에서도 미국은 어떤 정권이든지, 심지어 하메네이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미국의 영향력에 순응할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이란의 정권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나 저러나 이란 민중들은 폭압적인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당분간은 그러하다. 아무리 트럼프가 Regime change를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희망도 없으면서 나라만 파탄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전쟁을 시작할 줄은 알지만 끝낼 줄은 모른다고 한다. (볼만한 기사) 어리석은 지도자를 뽑은 초강대국에 의해 그렇지 않아도 암울한 이란 민중들의 운명은 더욱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

    그러고 보면 전세계적 곳곳에 독재자가 존재한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 정권은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 미국도 민주 정권의 목록에서 빠져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정립하는 것도 어렵고 지키기도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이렇게 민주적인 국가가 된 것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더불어 몇 명의 압제자를 시민의 힘으로 몰아낸 경험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압제자를 몰아낸 자리에는 압제자가 다시 들어선다는 것이 법칙처럼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해낸 나라인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역사를 이야기하면 젊은 세대들에게는 꼰대가 될지도 모르지만, 붙들고 싶은 자부심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오래 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란 영화이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지만 지금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너무 오래된 영화라 어렴풋이 몇 가지 장면과 이미지만 기억이 난다.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짝궁의 노트를 잘못 가져오는 바람에 친구가 숙제를 못해 선생님께 혼나게 될까 걱정하여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친구 집을 찾아 가는 과정에 우여곡절을 겪는 어린 아이의 순진한 마음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목숨 바쳐야 할 신도 없고, 지켜야 할 석유도 없는 영화 속. 지켜주고 싶은 어린아이의 착한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란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겠고, 우리 사는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 마의 산 – 토마스 만

    1차 대전이 발발할 즈음에 발간된 토마스 만의 소설이다. 토마스 만의 대표작이며 독일 문학의 정수이다. (라고 한다.) 20세기 초반 유럽을 배경으로 한 번역 소설이다. 배경이 낯설고,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읽히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소설의 초반에는 시간이 매우 더디게 흘러가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다 읽고 나면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함부르크 출신의 엔지니어로서 이제 막 조선 회사에 취업을 앞두고 있는 새파란 젊은이다. 그는 사촌 요하임의 병문안을 목적으로 3주 계획으로 하여 스위스의 외딴 요양원을 방문한다. 요양원은 해발 3,000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위치한 고립된 세계이다. 접근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주변의 시내로 쇼핑을 나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묘사 되지만, 심리적으로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묘사 된다. ‘평지’와는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인 것이다.
    병문안을 목적으로 왔지만, 한스 자신도 폐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것을 핑계로 정식으로 산의 사람이 되어 요양원에 머물게 되며 산속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산 위의 일상 생활은 하루 5 번의 화려한 식사와 그 사이 사이 침낭 안에서 누워 지내는 안정 요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 방탕한 환자들은 규율을 어기고 시내로 외출을 하거나 소풍을 하기도 하고, 도박을 하거나 밤 늦게 까지 연회를 즐기기도 한다. 또한 환자들 사이에 남녀 관계가 미묘해지면서 불륜과 같은 연애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 산 위에서의 요양 생활은 사람의 정신을 흐릿하게 하여 평지의 삶을 잊고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배회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의 흐름은 점점 빨라진다. 3주를 계획하고 산 위에 올라왔지만, 어느덧 계절이 휙휙 지나가고 우리 주인공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무감각해지고 만다.
    사실 병을 핑계로 한스가 요양생활에 들어가게 됐지만, 그는 쇼샤 부인이라는 러시아 출신의 여인에게 연정을 느껴 그곳에 머물고자 한 것이었다. 쇼샤 부인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부인이다. 병을 핑계로 남편에게서 벗어나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중이며, 행동거지가 정숙하지 못하다. 한스는 그녀의 행동거지에 언짢은 첫인상을 가졌었으나 어느 순간에 그것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였고, 사육제의 밤에 그녀와 특별한 밤을 맞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날 쇼샤 부인은 요양원을 퇴원하여 평지로 떠나 버리고 만다. 쇼샤 부인은 그렇게 하룻밤만 남기고 떠나 버렸지만, 돌아오리라는 암시를 남기고 떠났으므로 한스는 불확실한 희망을 품고 요양 생활을 지속한다.
    한스가 요양원의 마성에 물들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그의 사촌 요하임, 애초에 한스의 방문 목적이어던 요하임은 산속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지로 향한다. 요하임은 원래 장교 지망생이었으나 병에 걸려 꿈을 잠시 유보한 상태였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평지로 내려가 소위로 임관한 그는 결국 의사의 예언대로 얼마 가지 못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세가 악화되어 이른 나이에 그러나 근엄한 모습으로 죽고 만다. 사촌의 요양을 방문하러 산에 올라왔던 한스는 산에서 만난 연인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중, 사촌을 불의에 떠나보낸 후 더욱 우울감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로 산에 머물게 된다.
    요양 생활 동지들 중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세템브리니라는 인문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자칭 교육자이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그는 한스에게 이 산중에서 어서 벗어나 평지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촉구하지만 한스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로 나프티라는 예수회 출신 사제가 등장한다. 그와 세템브리니는 사사건건 관념적인 논쟁을 벌인다. 진보적인 인문주의자와 보수적인 종교인이므로 당연히 의견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논쟁의 목적은 상대방을 논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스의 머릿속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스의 머리는 요양원의 마성에 질식 되어 가고 있는 한편 두 논쟁적인 교육자의 정복 대상이었던 것이다. 두 교육자의 논쟁은 너무나도 첨예하여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치닫게 되고,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느낀 나프티는 세템브리니에게 권총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결투 당일, 세템브리니는 결투를 포기하는 뜻으로 하늘로 권총을 쏘고, 이에 분노한 나프티는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결국 한스가 기다리던 쇼샤 부인은 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쇼샤 부인은 병을 핑계로 남편에게서 벗어나 여기저기를 여행하던 중 페퍼코튼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은퇴한 사업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었고, 그와 함께 요양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한스의 두 교육자와는 달리 페퍼코튼은 제대로 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말을 제대로 끝맺는 법이 없었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말들만 내뱉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리스마적인 위압감이 있었다. 마치 왕과 같은 위엄을 갖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이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비록 연적이기는 하지만 한스도 그에게 깊이 빠져들고 만다. 사실 작품 전반에 걸쳐 한스는 동성애적인 성향을 보인다. 어린 시절 히페라는 친구와의 회상 장면에서는 직접적으로 동성애적인 감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쇼사 부인에게 끌리는 것도 사실은 그녀의 행동거지, 사고방식이 남성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스가 호감을 느끼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은 남성적인 매력을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한스가 페퍼코른에게 빠져버림으로써 쇼샤가 산으로 돌아왔지만, 한스와 쇼샤와 페퍼코튼은 실로 이상스러운 삼각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요양 생활 중, 페퍼코튼은 병세가 악화되어 가자 병에게 굴복하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한다. 그의 자살은 한스와 쇼샤 모두를 실의에 빠지게 만들고, 쇼샤는 다시 평지로 내려가 버린다.
    그 후로도 마성의 산에 갇혀 한스는 7년의 시간을 보낸다. 3주의 계획이 7년으로 늘어나 버렸지만 한스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산속의 마법이 풀리게 된 것은 평지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때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점으로 유럽은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요양원의 사람들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각자의 고향으로 서둘러 돌아가고, 한스 또한 고향인 독일로 돌아간다. 소설은 고향으로 돌아간 한스가 군에 입대하여 처참한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암시하면서 끝난다.
    소설에서 깊은 산중의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악마적인 공간이다. 총명한 젊은이의 영혼을 타락 시켜 7년을 방황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용기를 내어 도망친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결국에 다시 돌아오는 자도 많고 도망칠 생각을 못하는 자들도 많다. 누구도 구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우리에게 악마의 산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소리 없이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환경은 무엇인가. 루틴이 있다는 것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요양원의 하루 5끼의 화려한 식사와 사이사이의 안정요양은 사람을 안정시킨다. 당장 할 일이 있다는 것에서 자존을 느끼는 것이다. 직장 생활도 ‘마의 산’이 될 수 있다. 가방 들고 왔다 갔다 하는 학교 생활도 ‘마의 산’이 될 수 있다. 용기 내어 도망치는 것은 말 그대로 용기가 필요하다. 섣불리 도망쳤다가는 불쌍한 요하임과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에 언젠가는 그런 운명에, 즉 죽을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인생 자체가 ‘마의 산’이 될 수도 있다. 소설의 초반의 느린 시간의 흐름처럼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은 시간이 더디게만 가다가 언젠가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라며 허탈해 하는 것이다. 인생 자체가 ‘마의 산’이다. 깨어 있지 않고 요양원의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만족하며 생각 없이 산다면 그렇게 된다. 깨어 있기 쉽지 않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 부럽지가 않아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아’. 남 자랑하는 거 하나도 부러워할 것 없다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이다. 후렴구는 이렇게 반복이 된다.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하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하고

    사실 이 간단한 가사는 두 가지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첫 번째 메세지는 자명하다. 남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픈 것은 한민족을 넘어서 전체 인류가 공유하는, 말하자면 유전자에 적혀 있는 특성이다. 사촌이 땅을 샀다는 사건에 대한 무조건 반사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조건 반사를 (표정은 감추지 못하더라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못난 놈이 된다는 것 또한 중등 교육 이상을 받은 자라면 체득하고 있는 지혜이다. 여기에서 한 발 나아가서 장기하는 스스로 배 아픔의 부질 없음을 깨닫고 아픈 상황과 아프지 않은 상황을 분별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주장하는 가사라고 해석해 본다.
    둘째 메세지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면이 있다. 분명히 후렴구는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로 시작을 한다. 자랑이 부러움의 원인이 아니라 부러움이 자랑의 원인이다. 즉, 무언가 부러운 것이 있으니까 자랑을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조금 더 살을 더 붙여서 해석을 해 보면, 자랑을 하는 자는 무언가 결핍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심리적으로 보상 받고자 자랑할 거리가 생기면 달려가서 나불댄다는 뜻이 된다. ‘자랑하는 자’들을 그렇게 매도할 합리적인 근거는 갖고 있지 않지만 서사적으로 말은 된다고 생각한다. (자랑하는 자들 중 이 글을 보시는 분께는, 몇 분이나 되실지 모르겠지만, 사죄한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대놓고 자랑하는 자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은근히 자랑하는 자와 내 자랑거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 정도는 흔하다. 그렇지만, 그들도 막상 추켜세워 주면 부끄러워 손사레를 쳐야만 사회생활의 지혜를 아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대놓고 자랑하는 자는 그 의도와는 달리 부러움을 사는 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왜 인간은 부러워서 자랑하고, 자랑해서 부러워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의아하지만, ‘배 아픔’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입장에서는 발전의 원동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촉매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유행하던 진화심리학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의 번영과 개체의 행복과는 그리 상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다. (더 작은 단위, 그러니까 국가, 민족의 번영과 개체의 행복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부정은 터부처럼 생각된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유전자가 지시하는 대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전자의 압박이 모든 면에서 극복의 대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유대감, 소속감, 측은지심 등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유전자의 압박이다. 이런 감정들은 오히려 유전자가 아닌 두뇌로도 납득을 할 수가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감사하게 써먹으면 될 일이다. 시기심도 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승화 시키는 방법도 잇을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그 감정이 너무나 격렬하고 반응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 어쨌든지 사촌이 땅을 사서 복통에 눈물이 날 때, 마음 한 구석 허전하여 누군가 명치에 자랑을 꽂아 넣고 싶어질 때, 말초신경에게 맡기지 말고 한숨 먼저 크게 한 번 쉬고 나서 생각해 볼 일이다.
    내 경우는 그렇게 높은 경지에 오르지는 못해서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꼭 자랑하고 싶어 못참겠으면 해도 돼. 내가 잘 들어 줄게. 그렇지만 안 하는 게 너한테도 좋은 거야.

    이 정도가 결론이려나.

  • 정치는 이야기하자

    21대 대선은 예상대로 이재명이 당선 되었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 이미 대선 결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이재명 당선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다. 심지어 대선 다음 날인 오늘 아침까지도 뉴스조차 찾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득표율을 보고서는 참담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국민의힘 후보가 41% 넘는 득표를 얻은 것은 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다. 김문수라는 인물 자체가 어떤 매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의 후보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후보에게 41%라니… 그러니까 순전히 국민의힘이라는 당에 그렇게 표를 준 것이다. 내란이 발생한 지 6개월만에 다들 잊은 것인가?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혐오스러운 것인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 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 정권 바뀐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지인들도 많은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건 이미 정해진 결과였을 뿐이다. 이재명 외의 다른 후보가 나왔다면 달라졌을까? 그랬을 지도 모르겠지만, 또 어떤 하자를 끄집어 냈을지 모를 일이다. 이번 투표 결과는 정치가 논쟁을 통해 서로를 설득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 또한 전형적인 연령대, 성별, 지역의 배경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종교적인 형태로 점지 받았고, 그것을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러한 나에 대한 의심이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함으로 남아 있다가도 금세 짓밟혀버린다. 머릿속에서 나만의 논리를 몇 번 치고 받고 하고 나면 결론은 나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강화일 뿐이다. 찝찝함은 잠시 장판 밑에 쓸어 넣고, 저 무식한 것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한탄하면서 일상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제대로 나의 이 찝찝함을 풀어 버릴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처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을 때 환경이라는 말이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러하다. 내 주변에서는 죄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정치에 대한 나의 종교와 같은 신념이 (만약 진짜로 내가 맹목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강화가 될 가능성만 있을 뿐, 그것에 도전해 줄 상대방은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반드시 내가 끼리끼리 놀고 있기 때문에 도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나와 다른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나와 반대 되는 종교로서의 정치를 믿고 있는 자를 만나게 될 때도 있다. 정확히는 그러한 냄새를 맡을 기회가 있다. 그러면 피차 간에,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게 된다. 이것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한 번씩 정치에 대한 대화로 홍역을 치러 본 사람들의 본능 같은 것이다. 상대방과 앞으로도 사회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면 정치 이야기는 피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는 것을 다들 몸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점점 더 골이 깊어질 뿐이다. 불편하더라도 정치 이야기는 자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정치적인 주제에 흠칫 놀라고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하려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정치 야이기는 하지 맙시다!’라고 사전에 선을 그어버리는 말은 안 했으면 한다. 불편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다른 면을 탐색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 로맨티스트

    ‘속보, 비상계엄 선포’ 라는 메세지를 받을 때는 당연히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TV 스크린에서 계엄 선포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난 후에야 믿을 수 있었다.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혼자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다가 덜컥 겁이 났다. 절대로 우습지 않은 일이다. 물리력 앞에서 상식이 지켜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굳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상식이 지켜지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정도 상식은 통하는 사회이므로 몇 시간 동안의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어이 없는 일은 어이 없게 일어날 수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표면적인 죄는 국정 농단이었지만, 근본적인 잘못은 시대 인식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가 감옥에 가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이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혼자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비록 남의 나라 대통령이지만, 시대의 자정작용에 대한 회의감으로 좌절을 느꼈었다. 이제 윤대통령이 한미 병신량 일정량 법칙을 지켜주려 하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누구는 아내를 위해서 계엄까지도 불사하는데, 나는 아내를 위해서 어떤 각오가 돼 있는가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