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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1962.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될 정도로 몰입감 있다. 개성 있으면서도 전형적인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마치 만나 본 누군가인 것처럼 느껴진다. 장면 장면마다 주된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이 되어 웃고 울게 만든다. 그리고 읽고 난 후에도 진한 여운이 남아 하루가 지나도록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다.

소설은 구한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의 통영이 작품의 배경이다.
주인공 격인 성수는 김약국이라고 불리었다. 그의 생모는 생부에게 정조를 의심 받아 자살하였고, 생부는 이후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성수는 약국을 하던 동네 지주인 큰아버지의 손에 길러졌고, 그 약국도 물려 받아 김약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는 약간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인물처럼 그려진다.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이지만 막상 사업에는 큰 관심은 없었다. 딸만 다섯을 두었고, 당시에 이것은 아내의 큰 흠이 될만한 일이었지만 크게 타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와 애틋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한 평생 아내와는 겸상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단지 후사를 보는 일에도 열정이 없었던 것 같다. 바깥 세상과는 단절하고 아무런 열정도 없고, 어린 시절의 상처만을 안고 그저 조용히 사랑방을 지키는 것이 의무인 사람이었다. 

김약국의 다섯 딸의 운명이 다 제각기 기구하다.

큰 딸 용숙은 시집을 갔으나 일찍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버렸다. 욕심 많은 성격에 이재에 밝은 터라 남편의 재산을 제법 불려 돈 놀이를 하는 재미로 산다.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병약하고 자주 의사를 불렀다. 결국에 유부남인 그 의사와 바람이 나고 동네에 소문이 나면서 당시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모를 겪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불륜으로 생긴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낳자 마자 유기했다는 헛소문까지 퍼지게 되며 경찰서를 들락 거리게 되고 결정적으로 세상과 그리고 친정까지도 담을 쌓게 된다. 더욱 더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탐닉하고 종국에 김약국이 망했을 때 돈을 빌리러 온 친모를 쫓아내기에 이른다.

둘째 용빈은 김약국에게 아들 같은 딸이다. 김약국은 집안의 대소사를 아내와는 상의하는 법이 없었으나, 용빈에게는 의견을 묻고는 했다. 신여성으로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는다. 같은 통영 출신인 친일 지주의 아들 홍섭과 연애를 하고 있었고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약국의 집이 기울자 홍섭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 후 유력한 집안의 딸에게 떠나 버린다. 기독교인이었으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었고, 남자에게 버림 받은 후에 더욱 더 내적 갈등을 겪게 되며 괴로워한다. 능력 있었으나 남자에게 버림 받고 제 뜻을 펼칠 엄두도 못 내고 노처녀로 늙어가고 만다.

셋째 용란은 딸 중에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딸이었다. 김약국의 머슴이었던 한돌이와 눈이 맞아 밤마다 으슥한 곳을 찾아 정을 나누고는 하였다. 김약국으로서는 머슴과 놀아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밤의 행각을 결국에 김약국에게 들키고 한돌은 매를 맞고 쫓겨나고 용란은 실의에 빠지게 된다. 더군다나 한돌과 놀아났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혼사길까지 막히게 된다. 당초에 김약국은 용란을 어장 관리를 맡고 있는 서기주에게 시집 보내려고 했으나 머슴과 바람난 딸자식과 결혼하겠냐고 차마 권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기주는 원래부터 용란에게 마음이 있었으며, 한돌과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은근 김약국이 다시 용란과 혼사를 추진해 주었으면 바랐으나 김약국이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그런데 용란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돈을 맺겠다는 집에 있어 급하게 결혼을 추진하는데, 그 남자는 성 불구에 아편장이였다. 몇 년 후 아편장이 남편에게 매를 맞으며 비참하게 살던 용란을 한돌이 몰래 찾아와 다시 도망쳐 나와 산골에 살림을 차렸으나, 쫓아온 남편에게 한돌은 살해 당하고 그 와중에 한실댁까지 살해 당하고 만다. 이것을 지켜본 용란은 실성을 하고 친정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넷째 용옥은 용빈을 무척 따르던 동생이었으나, 용빈만큼 능력이 있지도 않고 용란처럼 아름답지도 않았다. 다만 매우 성실하게 일을 잘 해서 집안의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는 했다. 김약국은 용란을 그렇게 서둘러 시집 보내 놓고서는 용옥을 서기주에게 시집 보내고자 한다. 용란에게 마음이 있었던 서기주는 한참을 망설였으나 결국에 김약국의 뜻에 따라 용옥과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았으나, 용옥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으며 밖으로만 돌았다. 때마침 김약국의 어장이 몇년째 손해를 보면서 망하게 되자, 서기주는 부산으로 취직해 떠나 버렸으며, 통영에 오더라도 집에는 잘 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용옥의 방으로 괴한이 침입해 용옥을 겁탈하려고 하였는데, 알고 보니 서기주의 아버지가 며느리 방을 찾은 것이었다. 용옥은 이를 억지로 뿌리치고 아이를 안고 도망쳐 부산으로 남편을 찾아 나섰으나, 남편과 길이 엇갈리고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서는 돌아오는 배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하고 만다.

막내 용혜는 아직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으나, 집안이 기울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오고 만다. 용혜는 적막해진 김약국의 집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왕래가 없는 용숙, 타향에 있는 용빈, 살해 당한 어머니, 사고로 죽은 용옥. 한 때 사람으로 북적였을 큰 집에서 아버지 수발을 들며 실성한 용란을 돌보게 된 것이다. 김약국이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뜬 후에야 용빈과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하러 떠난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다양한 인물들 통해 이런 저런 인간들을 만난 보는 재미가 있다. 이래서 소설을 읽는 것 같다. 훌륭한 소설을 읽고 나니 마음의 양식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나온 이유를 알겠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집은 이유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어떤 소설인가 도서관에 빌리러 갔다가 워낙 핫한 소설이라 빌리기가 힘들었던 차에 누군가가 ‘김약국의 딸들은 봤냐?’라고 하여 찾아보게 된 책이다. 소설의 배경 당시, 야만적이었던 시기에 특히 여성에게 야만적이었던 시기에 살았던 딸들과 어머니의 경험을 훌륭한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어찌 그렇게 사셨나 싶은 어머니의 인생과 험난한 딸들의 인생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혹시 우리도 당연하게 여자라면 또는 남자라면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야만적이거나 비상식적이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 페미니즘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굳이 페미니즘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그런 노력이 일상적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여자 일베에게 도둑 맞은 이 난해한 시기에 이 소설의 가치가 훼손될까 두렵다.

루쉰 전집

격동기를 살아온 지식인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나는 소설이다.
봉건제 억압 구도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중국인들에 대해 루쉰이 느끼는 안타까움과 절망이 묻어나고 있다. 나 또한 무언가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악령

악령 –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대해 끄적거리는 것은 서평을 쓰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투박한 감수성을 갖고 있는 나 따위가 문학을 논한다는 것이 부끄러워, 서평 없이 패스하려고 했으나 그래도 무언가 흔적은 남기고 싶어 몇 자 적으려고 한다.
우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60년 언저리의 러시아는, 농노가 해방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귀족들이 막대한 영지를 갖고 부와 권력과 누리는 사회였고 현대의 시각으로, 또는 서구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불평등한 사회였다.
그러한 반대 측면으로 러시아에서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사상, 아마도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꿈틀 대기도 하였으며, 허무주의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소설에서 말하는 악령은 아마도 사람들 머리 속을 휘젓고 어찌 보면 부조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갖가지 저런 사상들을 의미하는 것인 듯하다. 실제로 5인조의 행동(스포일러이므로 무슨 행동인지는 말 안 하겠음.)은 당시 어떤 정치 조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로부터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한다. 사상, 이념, ~ism 들은 내가 지배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일이지 교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또한 종교이고, 소설의 제목과 같은 ‘악령’일 뿐이다. 도선생께서 그런 의도로 작품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의 문체는 굉장히 길고, 사람 이름도 길고, 등장 인물들의 말들도 많다. 스토리만으로 보면, 1, 2권에서는 다분히 인내심이 필요하고 몇번 왔던 길 되돌아가서 다시 읽어야만 했던 경우도 많았으나, 다 3권에서 이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듯 하다. 도선생 특유의 허술한 플롯이라는 평들이 많이 있으나, 내가 눈치챌만큼의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구란데 좀 앞뒤 안 맞으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등장 인물들의 개성이다. 이런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역량이 있었기에 도선생을 위대한 소설가로 부르는 것이다. 아버지 베르호벤스키의 허술한 허세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내가 했던 찌질한 몇 가지 기억들,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스타브로긴은 객관적으로 하는 행동은 악마와도 같다. (원문에서는 삭제 되어 있었다던 마지막 장 찌혼의 암자에서는 꼭 읽어야 된다.) 그러나 악마가 아니라 악동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아마도 전반적으로 희극적인 분위기의 소설이라서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러한 프레임을 걷어 내고 나면 분명히 악마다. 또 ‘악의 진부함’인가. 그 외에도 뾰뚀르 스체파노비치, 끼릴로프, 바르바라 빼뜨로비나, 아아 그리고 가여운 리자 등 등장 인물 하나 하나를 만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독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꼭 다시 읽어 보고 싶고, 도 선생의 다른 작품도 접해 보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

읽을 책은 많고 인생은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