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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자

한 신용정보회사의 직원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우리와는 아주 다른 종자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빚이란 원래 갚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 같은 사람(아마도 일반적으로 누구나)은 혹여나 빚을 못 갚아서 폐를 끼치게 될지 않을까 걱정한다. 물론 실수로 깜빡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안 갚으면 마음이 찝찝하다. 그런데 이 ‘다른 종자’의 사람들은 계산을 잘 따져 봐서, 빚을 갚는 것이 이익일 경우에만 갚는다. 도리이니까 당연히 갚는다는 것이 아니라, 안 갚았을 때의 제약, 처벌 등을 따져 보고 갚는다는 것이다. 줄 돈은 가능한 늦게 주고 받을 돈은 가능한 빨리 받아낸다는 것이 부자들의 철학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 ‘다른 종자’들은 별다른 알아서 척척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을 바보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조금 더 충격적인 사례는 해외 이민자들이었다. 이민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이 국내 금융기관에서 최대한 대출을 받은 후 해외에서 잠적해 버린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어질어질하다. 이렇게까지 돈이 좋은 걸까? 나도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게 될까? 이런 내가 위선적인 것일까?

일부가 그렇겠지.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몇 사람이 생각났다. 대학생 시절 내 주변에 아르바이트하고 돈을 못 받은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소규모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가 학원 수강생이 줄어든다고 돈을 안 주는 경우도 있었고, 출판사에서 문제집 교정 보는 일을 했다가 문제집이 안 팔린다고 돈을 못 받은 친구도 있었다. 사업의 성패와 상관 없이 급여는 때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서 줘야 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미루고 핑계 대고 어떻게 해서라도 주지 않더라. 상대방은 사회 경험이 적은 만만한 학생이었으니까, 아마도 더 급한 돈을 막다 보면 알바비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 급한 돈이란, 더 많이 귀찮게 하는 사람, 또는 다른 조치를 취하는 사람에게 가야 할 돈이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우선순위의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돈으로 따져도 백만원 정도 될까 말까 하는 돈이 없어서 안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사업이 잘 됐더라면, 또는 적어도 어느 정도 손익 분기 근처만 갔다면 알바비 정도는 안 떼먹지는 않았을까? 그것도 모를 일이다. 안 줘도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안 줬을 것도 같다. 우선순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면 그렇다. 남에게 갚아야 할 돈보다, 자신과 가족에게 써야 할 사치품이 우선순위가 높은 인간도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에 가치관이라는 것은 우선순위로 표현된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가친관은 ‘도리’, ‘생존’, ‘사치’ 사이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배열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라고 도식화 시켜볼 수 있겠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생존, 도리, 사치가 유일한 가치라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은 생존, 도리, 사치 순서로 우선순위를 매길 것 같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반영하는 가치관이다. 간혹 도리, 생존, 사치의 우선순위로 매기는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들은 밥을 굶고 길거리에 나앉아도 빚은 갚아야 속이 편한 사람들이다. 반대로 샤넬 백 살 돈은 있어도 빚은 안 갚는 사람은 생존, 사치, 도리의 순서로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사치, 생존, 도리의 순서를 매기는 사람도 간혹 보인다.)

그런데, 약간 찝찝하고 씁쓸한 면이 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소비한다.”라는 아름다운 명제가 현실 세계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이 명제는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이상적인 문구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게 ‘도리’의 우선순위는 매우 낮다는 것이다. 가족 단위를 벗어나서는 다른 통제 장치가 없다면 물질적인 이익 앞에서 다른 가치들의 우선순위는 아주 멀리 밀려나는 것 같다. 단지 한국 사회 또는 미개한 사회가 추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공산주의는 우리 나라에서는 시도도 한 적도 없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호모 사피엔스의 보편적인 가치관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폭주하는 사고일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그보다 나은 종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글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해 온 역사가 있으니까 조금 전 나의 사고는 폭주가 맞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종자’에 대해서 혐오하게 되는 것 같다. 본능일까 교육일까 모르겠다. 다만 좋은 세상에 대한 고민과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 냉소와 조롱이 설 자리는 없었으면 좋겠다. 똥 묻은 개들이 겨 묻은 개를 보고 겨 묻은 주제에 깨끗한 척한다며 위선적이라고들 하더라. 사악한 것보다 위선이 더 나쁜 것일까? 이것도 답은 없는 것 같다. 공자께서는 사이비를 싫어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역시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없고, 질문만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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