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1970년대에 쓰여진 책으로써 벌써 50년이나 묵은 책이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으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곱씹어볼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1부인 ‘근대 세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미 제기되고 있다. 나머지 2~4부에서는 각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이 책의 구성이 슈마허의 단편적인 강연들의 내용을 발췌하여 엮은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생산 문제’라고 이름 붙인 1장에서는 생산력 문제는 모두 해결 되었다고 하는 신화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경제 학자 들 용어를 빌자면 이 체계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에 의존 하면서도 이것을 즐겨 소득으로 취급 한다. 필자는 이러한 자본을 화석 연료, 자연의 허용 한도, 인간의 본질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일부 독자들이 세 가지 범주를 모두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필자의 주장은 그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입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풍족하게 소비하고 있는 이면에는 재생 불가능한 무언가 (저자는 재생 가능한 것을 ‘수익’으로 재생 불가능한 것을 ‘자본’이라고 비유하고 있다.)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천연 자원을 소진하고 있으며,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를 초과하여 소비함으로써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소모한다는 것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규모의 거대화와 업무의 분업을 통해 생산성은 증가했으나 일하는 기쁨을 모르고 오로지 여가에서 기쁨을 찾게 된 상황을 말한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분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소비의 양적인 증가가 좋은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와 오류를 짚으면서 불교 경제학을 예로 들면서 경제학에서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메타 경제학 을 공 부 하지 않는다면, 아니 더 나쁘게 말해서 경제적 계산 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에 한계 가 있음 을 알아 채지 못 하다면, 그는 성서 를 인용해서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중세의 몇몇 신학자들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학문이든 고유 영역에서는 유용하지만 , 이 영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악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
주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만 사실 경제학은 혼자 서 있는 학문이 아니다. 프레임이 주어진 한에서만 과학인 것이다. 근대 경제학의 프레임은 시장 가치로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밀한 과학(exact science)인 양 행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논의되고 있는 프레임이 무엇인가이다. 말하자면, 경제학도 절대로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별도의 장에서 불교 경제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교조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종교에 통하는 바가 있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 노동의 역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 중심성을 극복 할 수 있게 하는 것 ,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달리 근대 경제학은 소비를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한다.
책의 부제에는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고 되었다. 부제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이 배제 돼 있다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대규모 집단 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정체성 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소집단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교육을 이야기 할 때도, 형이상학, 가치관 교육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모든 교육의 임무인 것이다.
기술에 대해서느 인간 중심의 기술을 주장한다.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간이 배제된 채로 발전해 내가고 있는데, 그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비용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지만, 간디가 주장한 바 있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이 이상적인 생산 방식이라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유 구조에 대해서느 다소 강한 주장을 하는데, 현대의 사적 소유 구조가 이대로 존재하는 한 비인간적인 경제 및 생산 활동은 벗어나기 어려우며 소유 구조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기업 운영을 위해서는 민간 기업 대신 국영 기업이 확대 되어야 하며, 민간 기업의 경우에도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민간 기업은 이익이 과대 평가 돼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공 부문에서 많은 비용을 대신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의 형태로 공공 부문의 기여에 대해서 분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유 형태를 공공 기업 형태로 전환하여 세금이 아니라 배당의 형태로 분배하는 것을 더 이상적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Scott Bader’라는 회사의 사례가 재미 있다. 이 회사는 1950년대에 설립 되어 꽤나 성공적인 화학 기업으로 성장하였으나 창업주가 별도의 조합을 설립하여 자신의 지분을 모두 그 조합에 양도하는 형태로 소유권을 변화 시켰고 현재까지도 그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유권 변화와 동시에 constitution을 작성하여 몇 가지 중대한 원칙을 수립하였다. 첫 번째로, 회사의 규모의 상한을 명시하여 너무 큰 회사가 되지 않게 하였다. 회사가 커지면 분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보수의 원칙을 최대 최소의 비율을 7:1이 넘지 않도록 하였고(최근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종업원은 모두 동반자이므로 중대한 과오가 없이 해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 되는 고객과의 거래를 금지하였다.
책 전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래 인용이 적절한 듯 한다.
오늘날 가장 절실 하게 요구 되는 것은 이러한 수단, 자원들을 이용하는 목적을 바꾸는 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에 본래의 정당한 지위, 즉 본질적인 지위가 아니라 부차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생활 양식을 발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근대를 지나오면서 형이상학은 무너졌다. 자본주의가 진리가 되었고, 물질만능이 일생 생활 깊숙히 침투한 상황에서 다시 인간을 돌아보자고 외치는 것이 현실적인가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아직 우리가 압축 성장의 그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미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는 한 바탕 지나간 상황이며, 환경, 생태, 인권 등의 가치에 대하여 중요하게 인식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아직 덜 성숙하여 일베와 자유당이 창궐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멸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몇백년 동안 이어왔으나 해결되지 않는 논쟁 거리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는 지구 온나화라는 것조차도 부정하고 있으니, ‘사업가’라면 인간보다 물질을 앞에 두어야 하는 사람인 것인가… 긍정적인 것은 트럼프 류의 인간이 아웃라이어라는 믿음이지만 응? 당선 됐는데? 인간이란 나만 빼고 착하게 살기를 바라기 마련이 아닌가 회의적이 된다. 내세에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 실제로 Scott Bader의 사례는 퀘이커교적인 신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두서 없이 주저렸지만 역시 읽고 생각은 대충하고 행동은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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