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문화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Yuval Noah Harari, 2018.

‘Sapiens’, ‘Homo Deus’등의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이다. 그렇지만 이미 작년.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Sapiens’에서는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영장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됐는지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았고, ‘Homo Deus’에서는 신이 되어 버린 인류의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저자는 ’21 Lessons..’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고 밝히고 있다. 복잡해지고 현혹되기 쉬운 세상에서, 일상 생활에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조차 사치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명료함(clarity)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현재 몇 가지 측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트럼프류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liberalism, 그냥 자유주의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는 19세기 이래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과 경쟁하면서 보완해 나가면서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한 자들도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트럼프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구 온난화는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해 가고 있으며, 이 두 기술을 융합되어 갈 것이다. 이 두 기술의 융합은 인류의 대부분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앞으로 착취(exploitation)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irrelevance)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Homo Deus’의 주된 주제이다.) 먹고는 살겠으나, 의미 있는 일자리는 더욱 없어질 것이고, 일부 데이터를 독점하는 자와 그 외 대다수로 명확히 계급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인 수준에서만 대응이 가능한 것들인데, 오히려 벽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현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트럼프의 MAGA는 먹혀 들고, 영국인은 Brexit가 실업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시진핑은 모택동이 되고 싶어하고, 푸틴은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서는 크림반도를 때림으로서 국수주의를 선동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IS라는 단체가 득세하고 있는데, 테러리즘은 이런 상황에서 더 효과적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암울하다. 사실 암울하다. 해결책이라고 떠오르는 것들은 별로 없다. 이 쯤에서는 애국주의(Nationalism)를 선동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에 가깝다. 종교는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저자는 현대의 종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애국주의의 시녀(Handmaid of Nationalism)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자의 해법은 명확하지 않다. 도입에서 말했듯이 저자의 목적은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위한 논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당황하지 말고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겸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21세기에는 너무 상투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뇌과학이 발달하고 관련하여 경제학 분야에서도 행동경제학이 부각되듯이, 사람들은 편견에 쉽게 노출 된다. 일단 믿는 것은 계속 믿는다. 믿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은 큰 고통이니까… 우리 나라에도 아직 20% 이상의 자유당 지지자들이 심각한 바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때려 놓고 맞은 놈이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견을 주입한는 언행, 혐오를 선동하는 언행은 매우 사악한 것이고 생각보다 폐해가 크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더 절망적이구나. 그렇지만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난다면 편견에서 빠져 나오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가치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해야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Justice)의 정의가 달라져야 될 수도 있다.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Sapiens’에서부터 주장하던 내용인데, 인류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의 상당 수는 단지 믿음일 뿐이다)
결국에 눈에 보이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겁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Keep calm and carry on… 하는데, carry on 할 것은 일상 생활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되새김인 것 같다.

두 번 읽을만한 가치 있고 그 정도의 재미도 있다.

정태춘의 사람들

올해(2019년) 4월 정태춘, 박은옥 데뷔 40주년 앨범이 나왔다.
내가 정태춘선생님(? 뭐라고 지칭해야할지 모르겠다. )을 처음 접한 건 대학에 와서였다. 그 전까지는 그가 어떤 가수인지 전혀 몰랐고 그의 노래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우리편에 서 있는 가수, 즉 민중가요를 부르는 가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편이라는 표현은 나의 당시 단순했던 의식 구조를 정확히 묘사한다.
당시 나는 학교 행사나 집회 현장에서 정태춘님을 직접 볼 기회가 자주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운이 좋은 일이었다.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길 사전 검열 거부 투쟁을 통해 깨어났다고 하셨다. 그 전까지 말랑말랑한 포크송을 부르던 가수였으나, 사전 검열 문제를 생각하면서 깨어났다는 말씀이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전 검열 제도가 없었더라면 나는 정태춘을 아직도 알지 못했을 것 같다.

93년에 나온,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에 수록된 ‘사람들’이란 노래가 있다.

노래는 ‘문승현이는 쏘련으로 가고…’로 시작한다. 문승현은 노찾사에서 노래를 만들던 사람인데 당시 모스크바로 음악 공부를 하러 떠났다고 한다. 같이 노래운동하던 동지가 떠나간 아쉬움인지 ‘문승현이는 쏘련에 도착하고’로 노래 말미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인사동 찻집 귀천에는 주인 천상병씨가 나와 있고..’라는데, 천상병 시인은 이 노래가 나온 93년에 타계하였다. 천상병 시인은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호되게 당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민방위 훈련의 초빙 강사는 ‘아주 유익한 말씀도 해주시고 민방위 대원 아저씨들 낄낄’댄다. ‘백태웅이도 잡혀가고…’ 그 밖에 ‘철창 속의’ 사람들이 많은 반면, ‘잠실 야구장은 쾌청’하다. 가수는 ‘아 대한민국’에서와 같은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라는 자조적인 읊조림이다.


40주년 앨범에는 93년의 ‘사람들’과 같은 가락에 가사만 바뀐 ‘사람들2019’가 수록 되어 있다.
93년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주변의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손녀딸 유치원 오가는 모습은 귀엽고, 폐지 줍는 노인들 이야기는 서글프다. 칼가는 아저씨와 굴비 파는 아주머니, 편의점 알바 언니 모두들 피곤하고 블랙리스트는 잊혀지고 있다.

‘사람들’은 93년에도 그렇지만, 2019년에도 마찬가지, 거대 담론에 묻혀 버리기 쉬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대를 느낄 수 있어 뭉클한 노래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1970년대에 쓰여진 책으로써 벌써 50년이나 묵은 책이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으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곱씹어볼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1부인 ‘근대 세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미 제기되고 있다. 나머지 2~4부에서는 각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이 책의 구성이 슈마허의 단편적인 강연들의 내용을 발췌하여 엮은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생산 문제’라고 이름 붙인 1장에서는 생산력 문제는 모두 해결 되었다고 하는 신화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경제 학자 들 용어를 빌자면 이 체계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에 의존 하면서도 이것을 즐겨 소득으로 취급 한다. 필자는 이러한 자본을 화석 연료, 자연의 허용 한도, 인간의 본질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일부 독자들이 세 가지 범주를 모두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필자의 주장은 그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입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풍족하게 소비하고 있는 이면에는 재생 불가능한 무언가 (저자는 재생 가능한 것을 ‘수익’으로 재생 불가능한 것을 ‘자본’이라고 비유하고 있다.)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천연 자원을 소진하고 있으며,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를 초과하여 소비함으로써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소모한다는 것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규모의 거대화와 업무의 분업을 통해 생산성은 증가했으나 일하는 기쁨을 모르고 오로지 여가에서 기쁨을 찾게 된 상황을 말한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분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소비의 양적인 증가가 좋은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와 오류를 짚으면서 불교 경제학을 예로 들면서 경제학에서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메타 경제학 을 공 부 하지 않는다면, 아니 더 나쁘게 말해서 경제적 계산 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에 한계 가 있음 을 알아 채지 못 하다면, 그는 성서 를 인용해서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중세의 몇몇 신학자들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학문이든 고유 영역에서는 유용하지만 , 이 영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악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

주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만 사실 경제학은 혼자 서 있는 학문이 아니다. 프레임이 주어진 한에서만 과학인 것이다. 근대 경제학의 프레임은 시장 가치로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밀한 과학(exact science)인 양 행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논의되고 있는 프레임이 무엇인가이다. 말하자면, 경제학도 절대로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별도의 장에서 불교 경제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교조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종교에 통하는 바가 있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 노동의 역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 중심성을 극복 할 수 있게 하는 것 ,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달리 근대 경제학은 소비를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한다.

책의 부제에는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고 되었다. 부제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이 배제 돼 있다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대규모 집단 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정체성 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소집단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교육을 이야기 할 때도, 형이상학, 가치관 교육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모든 교육의 임무인 것이다.
기술에 대해서느 인간 중심의 기술을 주장한다.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간이 배제된 채로 발전해 내가고 있는데, 그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비용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지만, 간디가 주장한 바 있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이 이상적인 생산 방식이라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유 구조에 대해서느 다소 강한 주장을 하는데, 현대의 사적 소유 구조가 이대로 존재하는 한 비인간적인 경제 및 생산 활동은 벗어나기 어려우며 소유 구조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기업 운영을 위해서는 민간 기업 대신 국영 기업이 확대 되어야 하며, 민간 기업의 경우에도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민간 기업은 이익이 과대 평가 돼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공 부문에서 많은 비용을 대신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의 형태로 공공 부문의 기여에 대해서 분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유 형태를 공공 기업 형태로 전환하여 세금이 아니라 배당의 형태로 분배하는 것을 더 이상적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Scott Bader’라는 회사의 사례가 재미 있다. 이 회사는 1950년대에 설립 되어 꽤나 성공적인 화학 기업으로 성장하였으나 창업주가 별도의 조합을 설립하여 자신의 지분을 모두 그 조합에 양도하는 형태로 소유권을 변화 시켰고 현재까지도 그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유권 변화와 동시에 constitution을 작성하여 몇 가지 중대한 원칙을 수립하였다. 첫 번째로, 회사의 규모의 상한을 명시하여 너무 큰 회사가 되지 않게 하였다. 회사가 커지면 분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보수의 원칙을 최대 최소의 비율을 7:1이 넘지 않도록 하였고(최근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종업원은 모두 동반자이므로 중대한 과오가 없이 해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 되는 고객과의 거래를 금지하였다.
책 전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래 인용이 적절한 듯 한다.

오늘날 가장 절실 하게 요구 되는 것은 이러한 수단, 자원들을 이용하는 목적을 바꾸는 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에 본래의 정당한 지위, 즉 본질적인 지위가 아니라 부차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생활 양식을 발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근대를 지나오면서 형이상학은 무너졌다. 자본주의가 진리가 되었고, 물질만능이 일생 생활 깊숙히 침투한 상황에서 다시 인간을 돌아보자고 외치는 것이 현실적인가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아직 우리가 압축 성장의 그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미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는 한 바탕 지나간 상황이며, 환경, 생태, 인권 등의 가치에 대하여 중요하게 인식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아직 덜 성숙하여 일베와 자유당이 창궐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멸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몇백년 동안 이어왔으나 해결되지 않는 논쟁 거리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는 지구 온나화라는 것조차도 부정하고 있으니, ‘사업가’라면 인간보다 물질을 앞에 두어야 하는 사람인 것인가… 긍정적인 것은 트럼프 류의 인간이 아웃라이어라는 믿음이지만 응? 당선 됐는데? 인간이란 나만 빼고 착하게 살기를 바라기 마련이 아닌가 회의적이 된다. 내세에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 실제로 Scott Bader의 사례는 퀘이커교적인 신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두서 없이 주저렸지만 역시 읽고 생각은 대충하고 행동은 못하는구나.

그린 북 Green Book

Dignity always prevails.

돈 셜리(Don Shirley)라는 실존했던 흑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배경은 1950~60년대 미국으로, 형식적으로 노예 해방이 되었으나 남부에서는 여전히 불합리한 차별 제도(Segregation)가 시행되고 있던 시절이다.
돈 셜리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품위 있게 행동했으며 교양 있는 말투를 구사하는 등, 흔히 생각하는 흑인의 전형과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없었으며 항상 외로움에 위스키를 끼고 살고 있었다.
한편 토니는 이태리계 미국인이었으며,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요새로 말하면 클럽의 기도로 꽤 ‘성공’하고 있었으며, 이런 저런 험난한 일 가리지 않고 살아 왔었다.
셜리는 남부 일대의 순회 공연을 기획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굳이 신변 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부 일대를 여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흑인으로서 백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차별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위험한 여행의 운전기사 겸 보디 가드로 토니가 채용 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영화 제목인 그린북(Green Book)은 흑인 여행자들이 남부의 주에서 안전하게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에 대한 가이드북이었다. 토니와 돈 셜리는 그린북을 들고 떠나는 여행 길에 우여 곡절을 겪게 되고, 그 사이에 둘 사이의 우정이 싹튼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소위 ‘단일민족’을 자랑하는 우리로서는 인종 문제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 문제였었고 영화에서만 접해 보는 일이었다. 미국이란 참 야만적이고 교양 없는 놈들이로군이라고 생각해 버리던 남의 이야기였지만, 작년(2018년)에 있었던 제주도 난민 문제에 대한 반응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말 할 게 못 된다. 오히려 배척하고 무리짓는 본능에 충실한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영화 하나 보고 정리가 될 얘기들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쪽으로 흘러온 것을 보니 제주도 난민에 대한 반응에서 느낀 좌절이 컸던 모양이다.
많은 부분이 불안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고 해도 광기에 가까운 반응들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자주 소통하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까?

Endurance – Shackleton’s Incredible Voyage

100여년 전 남극을 횡단하려다 좌초된 Endurance라는 배와 그 선원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린 책이다.

당시는 바야흐로 모험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개인과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는 부를 위해서, 국가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탐험가들이 북극점, 남극점을 정복하던 시기였다. 남극점 정복에 참여한 바 있었던 셰클턴은 보다 더 어려운 모험, 그래서 더 명예로운 과제로 남극 대륙의 횡단을 계획했다. 현대에 비하면 부족한 장비로 어마어마하게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음은 자명하였음에도 지원자는 넘쳐났다고 한다. 마치 요새 아이돌이 되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듯이 이 모험에 참여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다고 하니, 현대인과 100년 전 사람들 사이의 정서에는 차이가 작지 않다.

Endurance호의 계획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하여 South Georgia 섬에 잠시 정박 한 뒤, Weddell 만으로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남극 횡단은 커녕 남극 대륙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하게 된다. 그들의 배는 웨델만에 들어서서 얼마 있지 않아 유빙에 갇혀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에 배는 얼음과 얼음 사이에 갇혀 그 압력으로 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행은 배를 버리고 유빙 위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해류와 바람이 유빙을 육지 가까운 곳으로 보내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펭귄과 물개를 사냥해서 그 기름으로 연료를 삼고, 식량을 삼아 버티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희망적이었고, 설마 이 사태가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바람과 해류만 바라보다 시간은 가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물이 사라짐으로써 사냥감을 구할 수 없고 비축해둔 식량과 연료로 버틸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됨을 깨닫자 그들은 보트를 끌고 열린 바다를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얼음으로 뒤덮혀 보트를 띄울 수가 없었으므로 열린 바다(Open Sea)를 찾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추운 것은 물론 고통이었다. 남극이니까… 그러나 날씨가 따뜻한 날에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빙이 녹아 위험해지는 경우도 생겼으며, 질척한 눈 때문에 전진에 방해가 되기도 했었다. 보트를 짊어지고 질퍽한 눈 위를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바다를 찾아서 걷는다니 그 참혹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불굴의 의지로 바다를 찾아 보트를 띄울 수 있게 됐으나, 이제부터 새로운 형태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칠다는 바다에서 작은 보트 세 척에 의지해서 육지를 찾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시계와 별자리에 의존해야만 했던 시절인데, 이 시점에 모든 대원을 통틀어서 작동 가능한 시계는 오직 한 개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별자리가 전혀 안 보일 때는 항해사의 직감에 의존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코끼리섬(Elephant island)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세 척의 보트는 드디어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육지에 닿은 안도감으로 그들은 잠시 동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움막도 만들었고, 펭귄을 잡아 식량도 비축해 놓았으나 계속 그렇게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셰클턴은 결단을 내리고 세 척의 보트 중 가장 상태가 좋은 한 척을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South Georgia 섬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한 채 출발하였다. 여전히 방향은 잡기 어려웠고 높은 파도, 추운 날씨로 고생을 하다가 식수마저 떨어진 시점에 기적적으로 South Georgia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South Georgia에서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의 반대편이었다. 보트를 정박할만한 곳도 찾기 힘들 정도였으나 문제는 보트를 정박한 후에도 구조를 요청하러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가야만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등산로가 있을리는 없다. 사람의 발이 한 번도 닿은 적이 없는 산을 넘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산을 넘다가 호수를 발견하고 기뻐하였으나 반대편의 바다로 내려와 버린 것을 알고 다시 올라가기도 했으며, 높은 고도의 추위에서 얼어 죽을 것이 두려워 비탈길을 미끄럼 타듯이 내려오기도 하는 등의 고생 끝에 포경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즈음 코끼리 섬에 갇혀 있던 나머지 대원들은 셰클턴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만간 겨울이 다가올 것이고 얼음으로 길이 막히면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렵다고 자포자기할 시점 셰클턴은 그 얼음을 뚫고 갈 배를 수배하여 결국 대원들을 모두 구조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참혹한 고난의 여정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듯이 흥미진진하다. 이 여정의 결과가 놀라운 것은 단 한 명의 사망, 실종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유일한 부상자는 동상으로 발을 잘린 대원 한 명 뿐이었다. 비록 애초에 목표했던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위기 상황에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셰클턴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참혹한 환경,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구성원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매 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실행하는 능력은 보통 사람이 갖기는 어려운 자질일 것이다.

절대로 셰클턴의 모든 판단이 올바른 것이었고, 천재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 많은 실책을 범했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도 있었다. 그러나 셰클턴은 자신이 내린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인정했으며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본인이 했던 지시와 반대되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번 내뱉은 말을 뒤집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권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내뱉은 말을 아래 사람들이 해석하느라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과정을 많이 목격한다. 권위적이고 경직된 조직에서 높은 분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고 뒤 돌아서서 투덜 거리는 장면도 많이 목격한다. 분명히 셰클턴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지만,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아니었기에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었고, 구성원들도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내뱉은 마오쩌뚱의 한 마디 말에 참새들을 몰살시켰고, 병충해로 인한 기근을 가져왔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마오쩌뚱 주변에는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또는 없어졌고- 마오쩌뚱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에 수 많은 아사자가 나온 후에, ‘참새를 더 잡아야 할까요?’라고 겨우 묻는 말에 (이 사람은 그나마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라고 한 이후에야 참새 사냥은 멈출 수 있었다.

우리 조직은 대약진 운동 시기의 중국에 가까운가, 셰클턴의 남극 횡단 탐험대에 가까운가? 나는 잘못된 판단을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체면을 위해 또는 권위를 위해 침묵하는 자인가 반성해 본다.

셰클턴의 항해에 관한 영문 위키피디아

Why nations fail?

‘Why nations fail?’은 왜 어떤 나라는 풍요롭고 어떤 나라는 가난에 허덕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는 인종, 종교, 지리 등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의 노갈레스라는 지역은 국경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오랜 역사를 공유하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어떤 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장기간에 걸친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져만 갈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아주 간단한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착취적(Extractive)이냐 포괄적(Inclusive)가 빈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포괄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권력이 넓게 분산돼 있지만 동시에 법치(rule of law)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 개인에게 집중 되어 있어 사회 대다수의 계층은 접근하기 힘든 경우이다.
포괄적인 경제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 사유 재산을 보장하며 둘째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는 이와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고 사유 재산에 대하여 약탈, 착취가 빈번하고 이로 인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모험 정신의 등장을 방해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의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단 어떤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낳고, 다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해 더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착취하고자 한다. 또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지배층은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고, 반대로 기득권을 놓았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 개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정치경제 제도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결론이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한은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결코 ‘포괄적이다’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 압축 성장의 경험해 왔었다. 흔히들 적폐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냉전 시대의 기형적인 정체 경제 제도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하는 국가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주제는 중국에 관한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성장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과연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인가?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가리봉 시장 – 언니네 이발관

가리봉 시장. 박노해 시에 언니네 이발관이 곡을 붙이고 노래했다.
박노해 시인의 유명한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앨범에 수록돼 있는 곡이다.
여러 음악가들이 참여한 이 앨범의 대부분의 곡은 명곡이라 부를만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해질녘의 가리봉시장의 분위기를 묘사한 가사와 베이스음이 매력적인 곡 분위기가 훌륭하게 어우러진다. 마치 가리봉시장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풍경 속의 등장 인물들이 느끼는 어떤 애환이랄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 것 같지만 낭만인 것도 같고, 함께 느끼게 만든다. 속해 있는 앨범의 다른 곡처럼 치열하지 않으며 잔잔하게 읊조림으로써 더 깊게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