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1970년대에 쓰여진 책으로써 벌써 50년이나 묵은 책이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으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곱씹어볼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1부인 ‘근대 세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미 제기되고 있다. 나머지 2~4부에서는 각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이 책의 구성이 슈마허의 단편적인 강연들의 내용을 발췌하여 엮은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생산 문제’라고 이름 붙인 1장에서는 생산력 문제는 모두 해결 되었다고 하는 신화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경제 학자 들 용어를 빌자면 이 체계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에 의존 하면서도 이것을 즐겨 소득으로 취급 한다. 필자는 이러한 자본을 화석 연료, 자연의 허용 한도, 인간의 본질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일부 독자들이 세 가지 범주를 모두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필자의 주장은 그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입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풍족하게 소비하고 있는 이면에는 재생 불가능한 무언가 (저자는 재생 가능한 것을 ‘수익’으로 재생 불가능한 것을 ‘자본’이라고 비유하고 있다.)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천연 자원을 소진하고 있으며,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를 초과하여 소비함으로써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소모한다는 것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규모의 거대화와 업무의 분업을 통해 생산성은 증가했으나 일하는 기쁨을 모르고 오로지 여가에서 기쁨을 찾게 된 상황을 말한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분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소비의 양적인 증가가 좋은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와 오류를 짚으면서 불교 경제학을 예로 들면서 경제학에서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메타 경제학 을 공 부 하지 않는다면, 아니 더 나쁘게 말해서 경제적 계산 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에 한계 가 있음 을 알아 채지 못 하다면, 그는 성서 를 인용해서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중세의 몇몇 신학자들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학문이든 고유 영역에서는 유용하지만 , 이 영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악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

주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만 사실 경제학은 혼자 서 있는 학문이 아니다. 프레임이 주어진 한에서만 과학인 것이다. 근대 경제학의 프레임은 시장 가치로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밀한 과학(exact science)인 양 행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논의되고 있는 프레임이 무엇인가이다. 말하자면, 경제학도 절대로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별도의 장에서 불교 경제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교조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종교에 통하는 바가 있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 노동의 역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 중심성을 극복 할 수 있게 하는 것 ,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달리 근대 경제학은 소비를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한다.

책의 부제에는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고 되었다. 부제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이 배제 돼 있다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대규모 집단 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정체성 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소집단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교육을 이야기 할 때도, 형이상학, 가치관 교육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모든 교육의 임무인 것이다.
기술에 대해서느 인간 중심의 기술을 주장한다.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간이 배제된 채로 발전해 내가고 있는데, 그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비용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지만, 간디가 주장한 바 있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이 이상적인 생산 방식이라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유 구조에 대해서느 다소 강한 주장을 하는데, 현대의 사적 소유 구조가 이대로 존재하는 한 비인간적인 경제 및 생산 활동은 벗어나기 어려우며 소유 구조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기업 운영을 위해서는 민간 기업 대신 국영 기업이 확대 되어야 하며, 민간 기업의 경우에도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민간 기업은 이익이 과대 평가 돼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공 부문에서 많은 비용을 대신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의 형태로 공공 부문의 기여에 대해서 분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유 형태를 공공 기업 형태로 전환하여 세금이 아니라 배당의 형태로 분배하는 것을 더 이상적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Scott Bader’라는 회사의 사례가 재미 있다. 이 회사는 1950년대에 설립 되어 꽤나 성공적인 화학 기업으로 성장하였으나 창업주가 별도의 조합을 설립하여 자신의 지분을 모두 그 조합에 양도하는 형태로 소유권을 변화 시켰고 현재까지도 그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유권 변화와 동시에 constitution을 작성하여 몇 가지 중대한 원칙을 수립하였다. 첫 번째로, 회사의 규모의 상한을 명시하여 너무 큰 회사가 되지 않게 하였다. 회사가 커지면 분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보수의 원칙을 최대 최소의 비율을 7:1이 넘지 않도록 하였고(최근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종업원은 모두 동반자이므로 중대한 과오가 없이 해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 되는 고객과의 거래를 금지하였다.
책 전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래 인용이 적절한 듯 한다.

오늘날 가장 절실 하게 요구 되는 것은 이러한 수단, 자원들을 이용하는 목적을 바꾸는 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에 본래의 정당한 지위, 즉 본질적인 지위가 아니라 부차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생활 양식을 발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근대를 지나오면서 형이상학은 무너졌다. 자본주의가 진리가 되었고, 물질만능이 일생 생활 깊숙히 침투한 상황에서 다시 인간을 돌아보자고 외치는 것이 현실적인가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아직 우리가 압축 성장의 그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미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는 한 바탕 지나간 상황이며, 환경, 생태, 인권 등의 가치에 대하여 중요하게 인식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아직 덜 성숙하여 일베와 자유당이 창궐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멸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몇백년 동안 이어왔으나 해결되지 않는 논쟁 거리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는 지구 온나화라는 것조차도 부정하고 있으니, ‘사업가’라면 인간보다 물질을 앞에 두어야 하는 사람인 것인가… 긍정적인 것은 트럼프 류의 인간이 아웃라이어라는 믿음이지만 응? 당선 됐는데? 인간이란 나만 빼고 착하게 살기를 바라기 마련이 아닌가 회의적이 된다. 내세에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 실제로 Scott Bader의 사례는 퀘이커교적인 신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두서 없이 주저렸지만 역시 읽고 생각은 대충하고 행동은 못하는구나.

그린 북 Green Book

Dignity always prevails.

돈 셜리(Don Shirley)라는 실존했던 흑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배경은 1950~60년대 미국으로, 형식적으로 노예 해방이 되었으나 남부에서는 여전히 불합리한 차별 제도(Segregation)가 시행되고 있던 시절이다.
돈 셜리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었다. 품위 있게 행동했으며 교양 있는 말투를 구사하는 등, 흔히 생각하는 흑인의 전형과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없었으며 항상 외로움에 위스키를 끼고 살고 있었다.
한편 토니는 이태리계 미국인이었으며,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요새로 말하면 클럽의 기도로 꽤 ‘성공’하고 있었으며, 이런 저런 험난한 일 가리지 않고 살아 왔었다.
셜리는 남부 일대의 순회 공연을 기획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굳이 신변 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부 일대를 여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흑인으로서 백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차별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위험한 여행의 운전기사 겸 보디 가드로 토니가 채용 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영화 제목인 그린북(Green Book)은 흑인 여행자들이 남부의 주에서 안전하게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에 대한 가이드북이었다. 토니와 돈 셜리는 그린북을 들고 떠나는 여행 길에 우여 곡절을 겪게 되고, 그 사이에 둘 사이의 우정이 싹튼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소위 ‘단일민족’을 자랑하는 우리로서는 인종 문제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 문제였었고 영화에서만 접해 보는 일이었다. 미국이란 참 야만적이고 교양 없는 놈들이로군이라고 생각해 버리던 남의 이야기였지만, 작년(2018년)에 있었던 제주도 난민 문제에 대한 반응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말 할 게 못 된다. 오히려 배척하고 무리짓는 본능에 충실한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영화 하나 보고 정리가 될 얘기들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쪽으로 흘러온 것을 보니 제주도 난민에 대한 반응에서 느낀 좌절이 컸던 모양이다.
많은 부분이 불안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고 해도 광기에 가까운 반응들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자주 소통하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까?

Endurance – Shackleton’s Incredible Voyage

100여년 전 남극을 횡단하려다 좌초된 Endurance라는 배와 그 선원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린 책이다.

당시는 바야흐로 모험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개인과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는 부를 위해서, 국가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탐험가들이 북극점, 남극점을 정복하던 시기였다. 남극점 정복에 참여한 바 있었던 셰클턴은 보다 더 어려운 모험, 그래서 더 명예로운 과제로 남극 대륙의 횡단을 계획했다. 현대에 비하면 부족한 장비로 어마어마하게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음은 자명하였음에도 지원자는 넘쳐났다고 한다. 마치 요새 아이돌이 되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듯이 이 모험에 참여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다고 하니, 현대인과 100년 전 사람들 사이의 정서에는 차이가 작지 않다.

Endurance호의 계획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하여 South Georgia 섬에 잠시 정박 한 뒤, Weddell 만으로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남극 횡단은 커녕 남극 대륙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하게 된다. 그들의 배는 웨델만에 들어서서 얼마 있지 않아 유빙에 갇혀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에 배는 얼음과 얼음 사이에 갇혀 그 압력으로 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행은 배를 버리고 유빙 위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해류와 바람이 유빙을 육지 가까운 곳으로 보내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펭귄과 물개를 사냥해서 그 기름으로 연료를 삼고, 식량을 삼아 버티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희망적이었고, 설마 이 사태가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바람과 해류만 바라보다 시간은 가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물이 사라짐으로써 사냥감을 구할 수 없고 비축해둔 식량과 연료로 버틸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됨을 깨닫자 그들은 보트를 끌고 열린 바다를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얼음으로 뒤덮혀 보트를 띄울 수가 없었으므로 열린 바다(Open Sea)를 찾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추운 것은 물론 고통이었다. 남극이니까… 그러나 날씨가 따뜻한 날에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빙이 녹아 위험해지는 경우도 생겼으며, 질척한 눈 때문에 전진에 방해가 되기도 했었다. 보트를 짊어지고 질퍽한 눈 위를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바다를 찾아서 걷는다니 그 참혹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불굴의 의지로 바다를 찾아 보트를 띄울 수 있게 됐으나, 이제부터 새로운 형태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칠다는 바다에서 작은 보트 세 척에 의지해서 육지를 찾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시계와 별자리에 의존해야만 했던 시절인데, 이 시점에 모든 대원을 통틀어서 작동 가능한 시계는 오직 한 개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별자리가 전혀 안 보일 때는 항해사의 직감에 의존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코끼리섬(Elephant island)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세 척의 보트는 드디어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육지에 닿은 안도감으로 그들은 잠시 동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움막도 만들었고, 펭귄을 잡아 식량도 비축해 놓았으나 계속 그렇게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셰클턴은 결단을 내리고 세 척의 보트 중 가장 상태가 좋은 한 척을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South Georgia 섬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한 채 출발하였다. 여전히 방향은 잡기 어려웠고 높은 파도, 추운 날씨로 고생을 하다가 식수마저 떨어진 시점에 기적적으로 South Georgia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South Georgia에서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의 반대편이었다. 보트를 정박할만한 곳도 찾기 힘들 정도였으나 문제는 보트를 정박한 후에도 구조를 요청하러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가야만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등산로가 있을리는 없다. 사람의 발이 한 번도 닿은 적이 없는 산을 넘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산을 넘다가 호수를 발견하고 기뻐하였으나 반대편의 바다로 내려와 버린 것을 알고 다시 올라가기도 했으며, 높은 고도의 추위에서 얼어 죽을 것이 두려워 비탈길을 미끄럼 타듯이 내려오기도 하는 등의 고생 끝에 포경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즈음 코끼리 섬에 갇혀 있던 나머지 대원들은 셰클턴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만간 겨울이 다가올 것이고 얼음으로 길이 막히면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렵다고 자포자기할 시점 셰클턴은 그 얼음을 뚫고 갈 배를 수배하여 결국 대원들을 모두 구조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참혹한 고난의 여정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듯이 흥미진진하다. 이 여정의 결과가 놀라운 것은 단 한 명의 사망, 실종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유일한 부상자는 동상으로 발을 잘린 대원 한 명 뿐이었다. 비록 애초에 목표했던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위기 상황에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셰클턴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참혹한 환경,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구성원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매 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실행하는 능력은 보통 사람이 갖기는 어려운 자질일 것이다.

절대로 셰클턴의 모든 판단이 올바른 것이었고, 천재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 많은 실책을 범했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도 있었다. 그러나 셰클턴은 자신이 내린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인정했으며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본인이 했던 지시와 반대되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번 내뱉은 말을 뒤집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권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내뱉은 말을 아래 사람들이 해석하느라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과정을 많이 목격한다. 권위적이고 경직된 조직에서 높은 분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고 뒤 돌아서서 투덜 거리는 장면도 많이 목격한다. 분명히 셰클턴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지만,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아니었기에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었고, 구성원들도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내뱉은 마오쩌뚱의 한 마디 말에 참새들을 몰살시켰고, 병충해로 인한 기근을 가져왔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마오쩌뚱 주변에는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또는 없어졌고- 마오쩌뚱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에 수 많은 아사자가 나온 후에, ‘참새를 더 잡아야 할까요?’라고 겨우 묻는 말에 (이 사람은 그나마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라고 한 이후에야 참새 사냥은 멈출 수 있었다.

우리 조직은 대약진 운동 시기의 중국에 가까운가, 셰클턴의 남극 횡단 탐험대에 가까운가? 나는 잘못된 판단을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체면을 위해 또는 권위를 위해 침묵하는 자인가 반성해 본다.

셰클턴의 항해에 관한 영문 위키피디아

Why nations fail?

‘Why nations fail?’은 왜 어떤 나라는 풍요롭고 어떤 나라는 가난에 허덕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는 인종, 종교, 지리 등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의 노갈레스라는 지역은 국경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오랜 역사를 공유하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어떤 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장기간에 걸친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져만 갈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아주 간단한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착취적(Extractive)이냐 포괄적(Inclusive)가 빈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포괄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권력이 넓게 분산돼 있지만 동시에 법치(rule of law)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 개인에게 집중 되어 있어 사회 대다수의 계층은 접근하기 힘든 경우이다.
포괄적인 경제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 사유 재산을 보장하며 둘째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는 이와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고 사유 재산에 대하여 약탈, 착취가 빈번하고 이로 인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모험 정신의 등장을 방해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의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단 어떤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낳고, 다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해 더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착취하고자 한다. 또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지배층은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고, 반대로 기득권을 놓았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 개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정치경제 제도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결론이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한은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결코 ‘포괄적이다’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 압축 성장의 경험해 왔었다. 흔히들 적폐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냉전 시대의 기형적인 정체 경제 제도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하는 국가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주제는 중국에 관한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성장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과연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인가?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1962.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될 정도로 몰입감 있다. 개성 있으면서도 전형적인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마치 만나 본 누군가인 것처럼 느껴진다. 장면 장면마다 주된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이 되어 웃고 울게 만든다. 그리고 읽고 난 후에도 진한 여운이 남아 하루가 지나도록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다.

소설은 구한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의 통영이 작품의 배경이다.
주인공 격인 성수는 김약국이라고 불리었다. 그의 생모는 생부에게 정조를 의심 받아 자살하였고, 생부는 이후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성수는 약국을 하던 동네 지주인 큰아버지의 손에 길러졌고, 그 약국도 물려 받아 김약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는 약간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인물처럼 그려진다.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이지만 막상 사업에는 큰 관심은 없었다. 딸만 다섯을 두었고, 당시에 이것은 아내의 큰 흠이 될만한 일이었지만 크게 타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와 애틋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한 평생 아내와는 겸상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단지 후사를 보는 일에도 열정이 없었던 것 같다. 바깥 세상과는 단절하고 아무런 열정도 없고, 어린 시절의 상처만을 안고 그저 조용히 사랑방을 지키는 것이 의무인 사람이었다. 

김약국의 다섯 딸의 운명이 다 제각기 기구하다.

큰 딸 용숙은 시집을 갔으나 일찍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버렸다. 욕심 많은 성격에 이재에 밝은 터라 남편의 재산을 제법 불려 돈 놀이를 하는 재미로 산다.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병약하고 자주 의사를 불렀다. 결국에 유부남인 그 의사와 바람이 나고 동네에 소문이 나면서 당시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모를 겪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불륜으로 생긴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낳자 마자 유기했다는 헛소문까지 퍼지게 되며 경찰서를 들락 거리게 되고 결정적으로 세상과 그리고 친정까지도 담을 쌓게 된다. 더욱 더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탐닉하고 종국에 김약국이 망했을 때 돈을 빌리러 온 친모를 쫓아내기에 이른다.

둘째 용빈은 김약국에게 아들 같은 딸이다. 김약국은 집안의 대소사를 아내와는 상의하는 법이 없었으나, 용빈에게는 의견을 묻고는 했다. 신여성으로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는다. 같은 통영 출신인 친일 지주의 아들 홍섭과 연애를 하고 있었고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약국의 집이 기울자 홍섭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 후 유력한 집안의 딸에게 떠나 버린다. 기독교인이었으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었고, 남자에게 버림 받은 후에 더욱 더 내적 갈등을 겪게 되며 괴로워한다. 능력 있었으나 남자에게 버림 받고 제 뜻을 펼칠 엄두도 못 내고 노처녀로 늙어가고 만다.

셋째 용란은 딸 중에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딸이었다. 김약국의 머슴이었던 한돌이와 눈이 맞아 밤마다 으슥한 곳을 찾아 정을 나누고는 하였다. 김약국으로서는 머슴과 놀아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밤의 행각을 결국에 김약국에게 들키고 한돌은 매를 맞고 쫓겨나고 용란은 실의에 빠지게 된다. 더군다나 한돌과 놀아났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혼사길까지 막히게 된다. 당초에 김약국은 용란을 어장 관리를 맡고 있는 서기주에게 시집 보내려고 했으나 머슴과 바람난 딸자식과 결혼하겠냐고 차마 권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기주는 원래부터 용란에게 마음이 있었으며, 한돌과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은근 김약국이 다시 용란과 혼사를 추진해 주었으면 바랐으나 김약국이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그런데 용란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돈을 맺겠다는 집에 있어 급하게 결혼을 추진하는데, 그 남자는 성 불구에 아편장이였다. 몇 년 후 아편장이 남편에게 매를 맞으며 비참하게 살던 용란을 한돌이 몰래 찾아와 다시 도망쳐 나와 산골에 살림을 차렸으나, 쫓아온 남편에게 한돌은 살해 당하고 그 와중에 한실댁까지 살해 당하고 만다. 이것을 지켜본 용란은 실성을 하고 친정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넷째 용옥은 용빈을 무척 따르던 동생이었으나, 용빈만큼 능력이 있지도 않고 용란처럼 아름답지도 않았다. 다만 매우 성실하게 일을 잘 해서 집안의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는 했다. 김약국은 용란을 그렇게 서둘러 시집 보내 놓고서는 용옥을 서기주에게 시집 보내고자 한다. 용란에게 마음이 있었던 서기주는 한참을 망설였으나 결국에 김약국의 뜻에 따라 용옥과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았으나, 용옥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으며 밖으로만 돌았다. 때마침 김약국의 어장이 몇년째 손해를 보면서 망하게 되자, 서기주는 부산으로 취직해 떠나 버렸으며, 통영에 오더라도 집에는 잘 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용옥의 방으로 괴한이 침입해 용옥을 겁탈하려고 하였는데, 알고 보니 서기주의 아버지가 며느리 방을 찾은 것이었다. 용옥은 이를 억지로 뿌리치고 아이를 안고 도망쳐 부산으로 남편을 찾아 나섰으나, 남편과 길이 엇갈리고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서는 돌아오는 배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하고 만다.

막내 용혜는 아직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으나, 집안이 기울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오고 만다. 용혜는 적막해진 김약국의 집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왕래가 없는 용숙, 타향에 있는 용빈, 살해 당한 어머니, 사고로 죽은 용옥. 한 때 사람으로 북적였을 큰 집에서 아버지 수발을 들며 실성한 용란을 돌보게 된 것이다. 김약국이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뜬 후에야 용빈과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하러 떠난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다양한 인물들 통해 이런 저런 인간들을 만난 보는 재미가 있다. 이래서 소설을 읽는 것 같다. 훌륭한 소설을 읽고 나니 마음의 양식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나온 이유를 알겠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집은 이유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어떤 소설인가 도서관에 빌리러 갔다가 워낙 핫한 소설이라 빌리기가 힘들었던 차에 누군가가 ‘김약국의 딸들은 봤냐?’라고 하여 찾아보게 된 책이다. 소설의 배경 당시, 야만적이었던 시기에 특히 여성에게 야만적이었던 시기에 살았던 딸들과 어머니의 경험을 훌륭한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어찌 그렇게 사셨나 싶은 어머니의 인생과 험난한 딸들의 인생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혹시 우리도 당연하게 여자라면 또는 남자라면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야만적이거나 비상식적이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 페미니즘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굳이 페미니즘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그런 노력이 일상적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여자 일베에게 도둑 맞은 이 난해한 시기에 이 소설의 가치가 훼손될까 두렵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남자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인 선생님이 쓴 페미니즘 입문서 쯤 되겠다. 작은 판형에 두껍지 않은 책이고, 글도 쉽게 쓴 편이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꼰대와 예비 꼰대들에게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저자의 후배가 저자에게 한 말이고, 저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말이다.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지만 혹은 대충 알긴 알지만, 메갈과 김치녀들에게 증오심을 느끼는 한국 남자들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봐야 되는 이유이다. 적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적어도 개저씨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혹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반페미니즘에 확신을 줄 수도 있겠다만…

악의가 없어도 때로 무지 만으로 나쁜 결과를 낳는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지향점으로 삼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부장제로부터 어떤 억압을 받고 있는지, 그 프레임에 갇혀서는 인지하기 어렵다.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태로는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언행을 하면서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기 쉽다.
사실 많은 남성들이 스스로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차별과 억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복무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잘은 모르지만, 페미니즘의 출발점은 내가 무심코 하는 언행이 오랜 기간 축적 되어 온 억압의 기제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주 반추해 보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인류가 계속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는 방향으로 진보하여 오고 있지만, 가부장제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억압 장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배우고 반성해 봐야한다.
악의가 없이 무지 만으로 해를 끼쳤을 때, 이를 비난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지를 벗어날 기회가 있음에도 귀와 눈을 가리고 무지한 채로 남아 나쁜 결과를 낳는다면 비난받을 만 하다. 공부하자.

건강한 사회는 남의 아픔을 들여다 보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다.

여자라서 겪는 아픔을 들여다 보는 남성이 많아야 건강한 사회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서로의 아픔에 공감고 억압과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는 점에서 페미니즘만이 다른 진보 운동과 다른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 났다고 화를 내면 기분은 좋아지지만 문제는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궁금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여성들도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공부하자.

이 아이가 여자라서 꿈을 꺾지 않고, 여자라서 참지 않으며, 여자라서 자기를 단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딸들의 아빠가 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좀 비겁해 보이기도 하지만, 솔직한 바램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던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므로 관심 있는 척은 했던 것 같다. ‘알았다. 너희 핍박 받는 여성들이여, 내가 연대해 주마.’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 상대적으로 억압하는 자의 위치이므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게 만든 것은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워마드 일당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집회에서 나왔다는 폐륜적인 언행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책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하자는 구호 자체도 납득하기 어렵다. 불법촬영을 규탄하는 게 아니고, 불법촬영 수사를 ‘편파적으로’ 너무 잘한다는 걸 규탄하다니, 서로 공평하게 남성 피해자 사례도 대충 수사하라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가?)
페미니즘에 계보가 당연히 많을테고, 스펙트럼이 넓을 것인데, 어떤 맥락과 역사에서 저런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언행이 용납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남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에 처음 잡은 책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 책은 입문서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 페미니즘의 간략한 역사와 주요 이슈를 짚어 주는 정도의 소책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지 남성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히 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는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또한 억압과 착취 당하고 있으며, 여성과 남성의 행복을 위해 페미니즘에 동참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워마드로 대표되는 혐오주의자들이 절대로 페미니즘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 시켜 주었다. 나의 혼돈은 해결 되었다. 이번 기회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더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워마드에 감사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여담으로, 이 책의 번역은 거의 직역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