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문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그간 전혀 안 읽은 건 아니지만 쓰지 않으니 남는 것이 없어, 한 글자라도 적어 보려고 한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lecture

‘강의’는 얼마 전에 타계하신 신영복 선생께서 성공회대에서 강의한 동양 고전 수업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빠듯한 사람들에게 동양 고전을 얘기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터미네이터의 무대가 먼 미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점에, 수천년 전 세상을 들여다 보자니 한가해 보일 것이다. 방대한 내용을 책 한 권으로 다루려다 보니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 다룰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고전 좀 아는 지성인이라고 뽐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왜 동양 고전을 읽고 가르치고자 했는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관계’ 또는 ‘관계론’이 될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존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사고 방식의 근본은 존재론적 세계 인식이라고 보고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스스로에게 실체성을 부여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야 하고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증식을 위한 경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서양식 사고 방식의 기저라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자본주의는 승리하였고, 그 승리의 엔진은 자본의 자기 증식 욕구였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는 세계화를 통해 20세기의 패러다임 유지해 가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가 말했다. 나 잡아가지 말아 주세요.)
동양의 사고 방식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를 강화하여 지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모순과 갈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가 동양의 ‘관계론’이며, 이 지점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장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군자는 화(和)하고자 하지만 同하려고 하지 않고, 소인은 同하려고 하고 和하지 못한다.)

和한다고 하는 것이 조화롭고자 한다는 뜻이고 同한다는 것은 같고자 한다는 뜻인데, 같고자 한다는 것이 곧 지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많이 이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판단 없는 양비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도 역시 논어의 구절인데, 한번 새겨볼만 하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不如鄉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착한 마을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마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만 못하다.)

조화라는 것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의견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애매하게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보신주의가 팽배한 세상에 다시 되새겨야할 말이다. 중립은 기회주의의 다른 말이다. 당파성 없이 모순을 피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되겠다. 그런데 사는 게 피곤해.
앞서도 말했듯이 바쁜 세상에 동양 고전을 읽는 것이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흔한 상투적인 구절이지만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을 반드시 진보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옛 것을 읽히자는 것이 옛 것을 유지하자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옛 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이고 옛 것의 위에 비판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야 말로 스승의 할 바라고 한다.
최근에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를 읽고 있는데, 놀랍게도 신영복 선생과 통하는 면이 많다. 근대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을테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책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옛 것에서 일종의 힌트를 얻고자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알파고가 관심을 끌면서 앞으로 살아 남게 될 직업군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었다. 기계가 생산성을 극단으로 끌어 올리고 대부분의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게 될 시점에서, 인간의 경쟁력은 인간다움이 될 것이다. 그 중 가장 인간다움의 영역은 윤리와 철학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가치의 판단은 먼 미래까지도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뭐 먹고 사느냐에 관심 갖고 자기 개발서 읽는 것보다 인간다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에서도 나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또 먹고 사는 문제로 연결 시키는 것도 우습긴 하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을 핑계로 앞만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앞이 바로 한 치도 안 되는 코앞이라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잠시 숨 돌려 옛 것을 익히고 먼 곳을 바라 보고, 인간 다움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2014년 독서일기

늦었지만 2014년 독서 정리.

<사회,역사>
Quiet ★★☆☆☆
– Susan Cain
– 내가 이걸 원서로 읽었어. 젠장.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
– 김태우
– 한국 전쟁에 대한 기록물.

이슬람 ★★★☆☆
– 이희수
– 이슬람에대한 서구 편향된 시각을 바로 잡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역사란 무엇인가 ★★★★★
– E.H. Carr
– 이것은 아마 불온 서적이었다지?

Trauma and Recovery ★★★★☆
– Judith Herman
– 집단 트라우마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문제를 모르고서는 해결할 수가 없잖은가?

대화 ★★★★☆
– 리영희
– 리영희 교수를 통해 읽는 한국 현대사.

근대를 말하다 ★★★☆☆
– 이덕일
– 학교에서 잘 안 가르쳐 줬던 한국 근대사. 쉽게 읽힘.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 실록 상, 하 ★☆☆☆☆
– 백지원
– 쓰레기. 제목에 속았다. 내가 이걸 끝까지 읽다니.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 임승수
– 얘 NL이다.

<경영, 경제>
The origin of Wealth ★★★☆☆
– Eric D. Beinhocker
– 진화에 대한 개념 정리와 진화를 통해 경제학 및 경제 현상에 접근. 새로운 관점을 제시.

Thinking, Fast and Slow ★★★★★
– Daniel Kahnemen
– 행동 경제학의 창시자가 자신의 연구를 대중을 위해 집대성한 책. 이것은 고전이 될 것이다.

경제학의 향연 ★★★☆☆
– 폴 크루그먼
– 왜 경제 분야에 유독 잘난체 하는 전문가가 이리 많은 걸까? 크루그먼이 하나씩 까주신다.

<소설>
루쉰전집 ★★★★☆
– 루쉰
–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소설.

악령 ★★★★★
– 도스토예프스키
– 명작은 명작.

<인문>
게으름에 대한 찬양 ★★★★★
– 버틀란트 러셀
– 짧지만 묵직함.

The World until Yesterday ★★★☆☆
– Jared Diamond
– 흥미로운 인류학의 세계. 전작에 비해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루쉰 전집

격동기를 살아온 지식인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나는 소설이다.
봉건제 억압 구도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중국인들에 대해 루쉰이 느끼는 안타까움과 절망이 묻어나고 있다. 나 또한 무언가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The origin of wealth

제목부터가 ‘The origin of species’로부터 빌려왔다. ‘부의 기원 The origin of wealth’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경제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 책이다. 결론적으로 아주 독창적인 ‘originality’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훌륭한 책이다.

저자는 현재의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을 물리학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모델을 세우고, 적절한 가정을 하고 (예를 들면, ‘마찰이 없다면…’과 같은) 그것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며 현실에 적용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방법론이다. 경제학자들은 이 방법론을 차용하여 경제 현상을 분석하려고 시도하였다. 대표적으로 ‘이기적이고, 완벽하게 이성적인 인간이라면…’으로 시작하는 가정을 세우고, 모델에 이 가정으로부터 예측된 인간의 행동을 반영하는 식이다.
그러나 경제학의 방법론은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자연과학에서 ‘마찰이 없다면…’이라는 가정은 그 모델이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을 설명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반면, 경제학에서의 가정은 모델의 본질을 훼손시킨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경제를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에 대하여 가정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과도하여 경제 현상에 대한 분석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이미 주류 경제학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행동경제학에서 비슷하게 다루고 있는 바이다.
분명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나 역시도 이런 저자의 생각에 상당 부분 공감을 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경제학자들을 폄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경제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 그 동안의 경제학의 접근 방식 자체를 매도해 버리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경제학자들이 그 이후의 자연과학의 발전을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자연 과학에서는 ‘평형’상태를 상정하고 방정식을 풀어 대는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이후의 물리학은 혼돈 이론이라는 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반면, 경제학에서는 아직도 평형상태를 논하고 있으니, 18세기 물리학에서 방법론을 차용한 이후로 경제학은 머물러 있고 자연과학은 발전해 온 셈이다.
장황하게 얘기했으나, 어쨌든 책의 전반부는 현재 경제학의 분석 틀의 한계와 진화론의 개념을 적용한 ‘복잡계 경제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진화론의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으니, 그만으로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책 후반에는 각 분야에서 복잡계 경제학의 개념이 의미하는 바와 적용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다. 경제,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약간은 무리하게 본인이 만든 틀에 우겨 넣으려는 시도도 보이고 있고 때로는 다소 학술적으로 진화 매커니즘에 대해서 정리해 두고 있다. 실은 상당히 방대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관통하는 논지는 ‘Exploitation / Exploration’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Exploitation이라는 것은 성공적인 진화의 상태 (비즈니스에서 보면 현재 잘 팔리는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는 것이다. Exploration이라는 것은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기회를 탐색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돌연변이로부터 비롯될 것이고,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회사들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존재하는 ‘신사업’ 부서들에서 인간에 의해 의도된 변화로부터 비롯된다. 자연상태에서 돌연변이 중 대부분은 살아 남지 못하는 것처럼, 신사업들 중 상당 수는 사장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살아 남는 비율은 자연 상태의 돌연변이보다는 훨씬 높을 것이다.
Exploitation과 Exploration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아이디어이다. Exploitation에만 집중하는 생물체, 또는 회사들은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환경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환경은 자연 환경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Exploration에만 집중하다 보면 현재 사업에서 효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즉, 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아이디어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Exploitation’에 몰빵해서 살아 왔다. Exploration이 필요 없던 이유는 앞에 길이 뻔히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것은 우리는 아직까지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 도태되거나 의미 없는 세력이 될 게 뻔했던 분파를 없애기 위해서 정당을 없애 버린 것이다. 이것은 정당 자체의 해산이 옳으나, 그르냐의 개별 사안으로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다양성에 대해서 더 받아 들이기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경제, 정치 모든 면에서 마찬 가지가 아닌가 싶다. 결국에는 굳어서 사회 전체가 도태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 하나는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의견들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 마지막 챕터에서 인용했다.

악령

악령 –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대해 끄적거리는 것은 서평을 쓰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투박한 감수성을 갖고 있는 나 따위가 문학을 논한다는 것이 부끄러워, 서평 없이 패스하려고 했으나 그래도 무언가 흔적은 남기고 싶어 몇 자 적으려고 한다.
우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60년 언저리의 러시아는, 농노가 해방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귀족들이 막대한 영지를 갖고 부와 권력과 누리는 사회였고 현대의 시각으로, 또는 서구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불평등한 사회였다.
그러한 반대 측면으로 러시아에서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사상, 아마도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꿈틀 대기도 하였으며, 허무주의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소설에서 말하는 악령은 아마도 사람들 머리 속을 휘젓고 어찌 보면 부조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갖가지 저런 사상들을 의미하는 것인 듯하다. 실제로 5인조의 행동(스포일러이므로 무슨 행동인지는 말 안 하겠음.)은 당시 어떤 정치 조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로부터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한다. 사상, 이념, ~ism 들은 내가 지배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일이지 교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또한 종교이고, 소설의 제목과 같은 ‘악령’일 뿐이다. 도선생께서 그런 의도로 작품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의 문체는 굉장히 길고, 사람 이름도 길고, 등장 인물들의 말들도 많다. 스토리만으로 보면, 1, 2권에서는 다분히 인내심이 필요하고 몇번 왔던 길 되돌아가서 다시 읽어야만 했던 경우도 많았으나, 다 3권에서 이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듯 하다. 도선생 특유의 허술한 플롯이라는 평들이 많이 있으나, 내가 눈치챌만큼의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구란데 좀 앞뒤 안 맞으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등장 인물들의 개성이다. 이런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역량이 있었기에 도선생을 위대한 소설가로 부르는 것이다. 아버지 베르호벤스키의 허술한 허세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내가 했던 찌질한 몇 가지 기억들,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스타브로긴은 객관적으로 하는 행동은 악마와도 같다. (원문에서는 삭제 되어 있었다던 마지막 장 찌혼의 암자에서는 꼭 읽어야 된다.) 그러나 악마가 아니라 악동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아마도 전반적으로 희극적인 분위기의 소설이라서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러한 프레임을 걷어 내고 나면 분명히 악마다. 또 ‘악의 진부함’인가. 그 외에도 뾰뚀르 스체파노비치, 끼릴로프, 바르바라 빼뜨로비나, 아아 그리고 가여운 리자 등 등장 인물 하나 하나를 만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독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꼭 다시 읽어 보고 싶고, 도 선생의 다른 작품도 접해 보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

읽을 책은 많고 인생은 너무 짧다.

Quiet – Susan Cain

Quiet: The power of introvert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내성적인 것은 외향적인 것과 다른 것일 뿐이며 장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서는) 장애처럼 인식 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또는 서구처럼 외향성을 숭배하는 문화권에서는 의미 있는 주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다소 상황이 다르다. 내 경험으로는 학교 다닐 때까지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 조용할 것을 강요 받는다. 그러다가 문득 사회에 진출하게 되어 회사라는 곳에 들어 가게 되면 더 이상 조용하다는 것이 장점은 아니게 된다. 점점 서구화 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외향성이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말이 많았다가는 ‘말만 번지르르하다.’라는 평을 받기 십상이다.

내 스스로 내성적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 있을 법한 주제였으나, 결론적으로 지루했다.
더불어 내성/외향의 틀 속에 너무 많은 것을 우겨 넣으려고 시도하는 듯 하여 부자연스럽기도 했다.

실패!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폭격-김태우

아마도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게 한국인은 공산당에 대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보여졌던 것 같다. 현대의 인권 개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들에게 아시아인은 열등한 인간, 목숨 값이 덜 나가는 인간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현대의 이라크 전쟁에서 아파치 헬기 (물론 미군의) 조종사들이 농담 따먹기 하면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물며 60여년 전에는 이보다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전쟁은 1951년 6월까지 약 1년 가까운 공방 기간과, 그 이후 2년 간의 휴전 협상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2년 간의 휴전 협상 기간 동안 남한의 후방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였으나, 북한 지역은 전후방 할 것 없이 수시로 폭격을 견뎌 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2년 동안 토굴에서 지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 봤다면 왜 그렇게 북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미국을 증오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한국전쟁은 그들의 전쟁이었다라고 주장한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고, 김일성이 도발한 전쟁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3년 동안이나 전쟁이 이어진 것은 강대국의 이해 관계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휴전 협상이 시작될 당시, 그러니까 전쟁 발발 후 1년이 되는 시점부터 휴전을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에 의한 피해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했고, 많은 것을 양보하더라도 휴전을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의 반대로 휴전 협상은 2년동안이나 지속 되었고, 미 공군은 휴전이 타결 되는 날까지 북한 지역에 폭격을 계속했다. 결론적으로 한반도는 그들의 전쟁터가 되어, 3년 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연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습하여 수백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있는 현재, 60년 전 한국인에 대해 공감하는 만큼 현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정 이입이 된다. 폭탄 투하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조작과 지상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대비가 인간의 존엄성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이스라엘인들은 공습받는 가자 지구를 지켜 보며 말 그대로 ‘박수’를 보내고 있다. 모군의 말대로 악의 평범함인가? 잊지 않고 계속 되뇌이지 않으면 우리 안의 악마에게 지배 받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족…
‘Israel air strike’로 구글 검색해 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마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인 듯 보여진다. 듣던대로 미국 언론은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듯 하다.

Please, be more human…

이슬람 – 이희수

이슬람 – 이희수
2014-07-08

이슬람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알제리 선수들이 자신들의 상금을 팔레스타인에 기부하기로 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기 이슬람 세계의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한편, 이라크에서는 스스로 마호메트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슬람 세계 나아가 전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미친 소리를 하는 세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슬람이란 우리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세계이다.

대부분 근대 이후 세계가 그렇겠지만, 우리도 서구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에게는 테러리스트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전라도 사람 하면 조폭이 떠오르는 것과 다를 것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 사람들을 일반화 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서구 문명, 역사에 대해서는 상식 선에서 알고 있는 내용만큼을 이슬람에 대해서 알려 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읽어볼 만한 책이고, 우리 문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19세기 이후 정치, 경제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이 책이 쓰여진 시점인 2011년 경의 자스민 혁명이 지금으로서는 대부분 실패했다고, 더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민중들이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 되고 있다. 앞으로 그들의 미래가 밝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보인다.
(때마침 이런 기사도 봤다.)
분명한 것은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 미국의 이스라엘 편들기가 현재 이슬람 세계의 비루한 삶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종교가 원인이라는 다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 있는 주장을 한다. 근대를 지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종교의 역할은 이미 퇴색해 가고 있다. 개개인이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중세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서구의 자본주의가 무조건 답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최소한 유일신교의 편협한 종교관, 불관용이 분쟁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 이면의 세력들이 그들 민중을 탄압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 성찰을 통해 사는 의미를 찾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권력화된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류의 진보의 방향이라고 믿는다.

‘Imagine no religion…’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 E.H.카

whatishistory

 

‘역사란 무엇인가.’는 1961년에 쓰여져 이제는 고전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이미 이책이 자유롭게 번역 되어 읽히던 시절이었지만 아쉽게도 20년이 지난 2014년에 처음 읽게 되었다. 쓰여진 지 50년이 지난 책이니만큼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상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도 당시로서는 논쟁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객관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연과학에서조차 절대 진리라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에는 역사적 사실의 바탕에는 절대 진리가 있다는 생각도 유행했었던 것 같다. 상대성(?) 상대주의(?)가 일반화된 것도 이 책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일부분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책의 키워드는 ‘변증법’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미래에 비추어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난해한 문제인데, 나로서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역사의 진보의 방향을 탐색하는 변증법적 과정이 역사다.’ 정도로 요약하는 것이 최선이다.

저자는 역사는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 즉,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라며 역사의 방향을 초이성적인 힘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문학도 아니라고 한다. 아무 가치 판단도 없는 옛날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느냐를 통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찾는 행위이다.

역사는 과학이고 역사에는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갈 길에 대한 모색이 목적일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 사회에 있어서,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진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