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는 부서원들과 점심 회식을 하였다. 이틀 전에 입사한 새파란 신입사원의 환영회를 겸한 회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보통의 신입사원이라면 술자리를 겸해서 저녁식사를 하였을 것이지만, 이번 신입사원은 특별하였다. 구보씨 부서에서 없던 고졸 신입사원이었던 것이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술자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고등학생쯤 되면 저희들끼리 몰래 술 한 잔씩 했겠지만, 직장에서는 오히려 더 조심해야만 하는 사정인 것이다. 점심 시간이 되어 구보씨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눈치 보고 있던 부서원들도 스르륵 일어났다. 이미 예약된 장소는 다들 알고 있었고 점심시간이야 뻔하므로 한 마디 말 필요 없었다. 눈빛도 필요 없고, 기척으로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한 셈이다.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는 다른 부서에 굳이 회식한다는 티를 낼 필요도 없으므로 기척 의사소통은 더욱 적절한 수단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스페인 식당에는 모두 여덟명이 자리했다.마침 4인분의 세트메뉴가 추천메뉴로 돼 있어 2세트를 시켰다. 그런데 착석하고 보니 소식가 4명이 한 테이블이고 대식가 4명이 다른 한 테이블에 모여 있는 것이다. 구보씨는 그 중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특히 적게 먹는 직원 1명과 특히 많이 먹는 직원 1명 자리 바꾸는 것을 제안하였다. 특히 적게 먹는 직원은 김다율이었고, 특히 많이 먹는 직원은 강현우였다. 구보씨가 생각 못했던 부분은 음식의 양이 점심식사 자리의 행복의 유일한 결정 요소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식사자리에서 음식만큼 중요한 것은 자리배치였다. 연장자이자 부서장이 제안하니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다율은 그러마하는 대답도 안 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는 것이었다. 구보씨는 깨달았다. ‘아 이 친구가 나와 겸상하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직장 생활 20년 넘게 해 온 구보씨는 타고난 성정과 상관 없이 눈치는 빨라졌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 다율과는 업무적으로 불편한 말을 주고 받은 기억이 있었다. 눈치만 채고 잠자코 있었다면 좋은 꼰대가 될 수도 있었는데, 속 좁은 구보씨는 입 밖으로 말을 꼭 내고야 만다.
“다율씨가 나랑 같이 먹기 싫구나. 그냥 이대로 먹지 뭐.”
구보씨는 안 해도 될 말을 또 했다고 생각하며 남 몰래 얼굴을 붉혔다.
그저께는 야단을 쳐 놓고 지금은 동석을 피한다고 토라지는 거냐? 자존감 한 단계 내려감. 역시 그릇 작은 놈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약한 사람은 쉽게 대하면서 미움은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냐.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거고, 그렇다고 가운데라는 것도 애매모호하단 말이다. 자존감 두 단계 내려감.
그래도 음식이 나오고 먹을 것 뱃속에 들어가고 나니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시덥잖은 취미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 여행 다녀온 잡설들을 나누면서 시끌시끌 점심을 먹었다. 서로 간에 적절한 거리 유지하면서, 우리 친한 사이라고 확인하는 정도의 시끌시끌함이다. 이것이 사회생활. 오늘도 직장생활이라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오후에는 스터디 모임 시간이 있었다. 구보씨는 평소 부서 직원들의 전문성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특히 강현우는 연차에 비하여 아는 것이 부족하여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늘상 생각해 왔고, 이번에 책 한권을 정해 주고서 발표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구보씨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첫인상으로 선입견을 갖는 경우는 별로 없으나, 한 번 정한 평가를 쉽게 바꾸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머리가 둔하다고 일단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고 삐딱하게 보는 것이었다. 현우는 이미 그 단계에 접어 들어 있는 상태였다. 비록 그 둔한 머리를 개발해 주고자 좋은 의도에서 공부를 시킨 것이지만, 시킬 때마다 실망하고는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의 텍스트만 읽었을 뿐 행간을 읽지 못하고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번역을 잘못한 것까지 있었다. (정해준 책은 영어로 된 책이었다.)
“이거 번역이 맞나? hard enough that ~~ 이라고 하면 ~~하도록 충분히 어렵다는 뜻 아냐? ~하기 어렵다는 뜻이야?”
현우도 안 좋은 버릇이 있었는데, 바로 머리는 둔한데 지는 것을 싫어해서 우기기를 잘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같은 뜻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그게 같은 뜻이야? that 이하가 어려운 거야? 지금이 영문법 시간도 아니고, 내가 번역까지 바로 잡아줘야 돼?”
당신 평소에 유학파라고 영어 잘한다고 티내고 다니지 않았어?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점심시간의 섣부른 혓바닥의 실수가 약이 됐던 모양이다.
“제 뜻은 같은 뜻으로 말한 거였는데… 그럼 제가 잘못 쓴 거 같습니다.”
“번역 잘못했다고 하면 되지 왜 우기길 우기나?”
역시 작은 그릇은 어쩔 수가 없다. 이렇게 비아냥거리면서 얘기할 거리는 아니었는데 또 이런다. 이러면서 또 미움은 받고 싶지 않겠지. 구보씨는 그 뒤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화제가 전환되면서 영어 번역 문제는 금세 잊혀졌지만 구보씨 자존감은 또 한 단계 하락.
퇴근이나 해야겠다. 아내에게 말을 거니 아내가 선수를 쳤다. 중년의 우울감을 먼저 토로하는 것이다. 여자의 갱년기가 무섭다고들 하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게다가 구보씨도 아내의 갱년기에 대하여 짐작은 하고 있었던 터라, 신중하게 대꾸했다. 나도 오늘 별로 유쾌하지 않단다. 네 우울감 들어줄 여유가 없단다.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구보씨는 사려 깊고 진지한 말투로 아내를 위로하였다. 구보씨 자존감 한 단계 상승. 이렇게 속 넓은 사람이었다니. 스스로 대견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