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20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2020년은 아주 먼 미래의 대명사격이었다. 그러니까 2020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전부 하늘로 다니고 로봇이 서빙을 하고 저마다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등…(응?)
그러나 시간은 단절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문명 세계에서 21세기를 살아 왔기 때문에 저마다 손에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전염병이다. 혁신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깜짝 놀랄 준비를 하고 있던 자들이 가장 원초적인 미생물들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코로나19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크게 뒤흔들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소설은 오랑이라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화롭지만 삭막한 이미지인 이 도시에 페스트가 발병하게 된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페스트의 발병으로 도시 전체는 폐쇄되게 되고, 시민들은 사실상 유배당한 삶을 살게 된다. 전염병은 도시 전체의 삶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꿔 버린다. 특수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대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엿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페스트라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같다.
주인공 격인 의사 리외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행위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또 다른 주인공인 타루는 성자가 되는 것보다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것이 더 어렵다고 답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보다는 질문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결국 내 관심사는 어떻게 성자가 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타루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
“어쩌면요. 그런데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내 생각에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 그래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야심이 덜하죠.”
-본문 인용-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어려운 대답이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알기 쉽다. 인간답지 않은 것, 참혹한 것, 바로 페스트 같은 것들이 인간답지 않은 것 아닐까?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와중에 굳이 작중에 인간의 무지를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2차 대전 즈음하여 나치즘이 등장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결국에 집권을 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윤리의 문제라는 게 복잡한 것이지만 무지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윤리의 많은 문제의 해결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 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

하지만 서술자는 오히려 이런 훌륭한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악에 대해 간접적이고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일 뿐이고, 또 인간의 행동에서 악의와 무관심이 더 흔한 원동력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악하기보다는 선하다. 사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는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며, 바로 이것이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분명 가능한 통찰력 없이는 참된 호의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을 것이다.-본문 인용-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 이후의 나치즘의 광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당시의 페스트였다고 하면 지금의 페스트는 무엇일까?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나치즘의 간균이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갖가지 혐오가 나치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본문 인용-

여혐, 남혐, 지역 혐오, 외국인 혐오 등등 셀 수 없다. 페스트 간균은 끈질기게 인간들 사이에 숨어 인간성을 말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페스트 간균을 살포할 준비가 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이 쯤 되면, 페스트 간균과 인간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 혐오라고 하는 것이 인간성의 한 부분이고, 인간이 인간성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부분만을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인간으로 살기 어렵다. -네루다. 사람되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등등 인간으로 산다는 문제는 쉽지 않는 것이다.

팩트풀니스 Factfulness

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

얼마 전에 타계한 공중보건학자 한스 로슬링의 베스트셀러이다. 인간이 세상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중보건학자로서 그의 이러한 분석의 목적은 인류의 보편적인 후생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점에서 숭고하다고도 여겨진다.
사실 인간이 세상을 오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여기 저기서 많이 들어본 바이고 약간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행동경제학에서도 인간의 편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런 거)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는 구석기 시대에 진화를 멈춘 인간의 뇌에 대해서 설명하고는 한다. 이런 저작들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즐거운 것들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래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한스 로슬링의 목적은 분명하다. 세상을 사실(Fact)에 기반하여 오해 없이 바라봄으로서 인류가 얼마나 어떤 속도를 통해서 나아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더 나은 세상이라는 것은 정확히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다루는 데이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성도 차별 받지 않고 교육을 받고, 적절한 가족 계획을 하고,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음으로써 어린 나이에 죽지 않는 등 그가 분류한 ‘4단계’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우리는 이미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 공중보건의 사례는 우리와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본적인 그의 10가지 법칙은 ‘4단계’ 생활 수준의 우리도 더 나은 삶을 누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메모하는 차원에서 10가지 법칙을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간극 본능 The Gap instinct
인간은 극단의 이야기에 끌리게 돼 있다. 양 극단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 세상을 두 가지로 양분해 버리고서는 그 사이에 수 많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2. 부정 본능 The Negativity instinct
나쁜 소식만 기억에 남는다. 점진적 개선은 인지하지 못하고 아주 먼 옛날을 아련히 그리워하고는 한다.
3. 직선 본능 The Straight Line instinct
섣불리 선형 회귀를 하고는 한다. 내가 보고 있는 추세는 다양한 곡선의 일부일 수도 있다.
4. 공포 본능 The Fear instinct
내 공포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계산해 봐야 한다.
5. 크기 본능 The Size instinct
인상적으로 보이는 숫자 하나, 또는 개별 사례에 집착할 수도 있다. 가능하면 비교 가능한 숫자를 찾아라.
6. 일반화 본능 The Generalization instinct
집단을 범주화하는 오류이다. 집단 내에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집단 간에도 유사점이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대다수라는 말은 과연 51%인가 99%인가?
7. 운명 본능 The Destiny instinct
흔히 문화라는 말로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다라고 낙인 찍는다. 느린 변화라도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 내가 몇 년 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 그 집단은 지금은 전혀 다른 집단일 수 있다.
8. 단일 관점 본능 The Single Perspective instinct
망치를 쥐어 주면 온통 다 못으로 보인다. 내 전문성은 하나의 망치일 뿐이니 겸손해라. 다른 연장들을 갖추려고 노력해라.
9. 비난 본능 The Blame instinct
일이 잘못 되면 범인을 지목하려고 한다. 그러면 마음은 편해지지만 일이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악당을 찾지 말고 원인을 찾아라.
10. 다급함 본능 The Urgency instinct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요구 받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생각을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그렇게 급하게 행동해야 될 일은 드물다.

간략하게 말하면 겸손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안다는 생각하지 말고 회의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나의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짜 뉴스와 언론의 호들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한스 로슬링의 버블 챠트는 오래 전에 TED를 통해 이미 접해본 적이 있었다. (여기)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에 이 정도의 경지가 있을 수 있다니 놀라워 했던 기억이 있다. 갑자기 이케아가 떠오르면서 이런 게 스웨덴스러움인가 감탄하게 된다.
아래 링크 추천.
Gap Minder.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의 신기원
Dollar Street. 발로 뛰는 통계에 감수성까지..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Yuval Noah Harari, 2018.

‘Sapiens’, ‘Homo Deus’등의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최신작이다. 그렇지만 이미 작년.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Sapiens’에서는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영장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됐는지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았고, ‘Homo Deus’에서는 신이 되어 버린 인류의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저자는 ’21 Lessons..’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의 영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고 밝히고 있다. 복잡해지고 현혹되기 쉬운 세상에서, 일상 생활에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조차 사치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명료함(clarity)를 제공함으로써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인류는 현재 몇 가지 측면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트럼프류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liberalism, 그냥 자유주의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많이 다르다)는 19세기 이래로 제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과 경쟁하면서 보완해 나가면서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그래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선언한 자들도 있었으나, 지금 우리는 트럼프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구 온난화는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지구 온난화 자체를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생명과학과 정보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해 가고 있으며, 이 두 기술을 융합되어 갈 것이다. 이 두 기술의 융합은 인류의 대부분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앞으로 착취(exploitation)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irrelevance)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부분은 ‘Homo Deus’의 주된 주제이다.) 먹고는 살겠으나, 의미 있는 일자리는 더욱 없어질 것이고, 일부 데이터를 독점하는 자와 그 외 대다수로 명확히 계급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인 수준에서만 대응이 가능한 것들인데, 오히려 벽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현대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트럼프의 MAGA는 먹혀 들고, 영국인은 Brexit가 실업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시진핑은 모택동이 되고 싶어하고, 푸틴은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서는 크림반도를 때림으로서 국수주의를 선동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IS라는 단체가 득세하고 있는데, 테러리즘은 이런 상황에서 더 효과적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암울하다. 사실 암울하다. 해결책이라고 떠오르는 것들은 별로 없다. 이 쯤에서는 애국주의(Nationalism)를 선동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에 가깝다. 종교는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저자는 현대의 종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애국주의의 시녀(Handmaid of Nationalism)이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자의 해법은 명확하지 않다. 도입에서 말했듯이 저자의 목적은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위한 논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당황하지 말고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겸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21세기에는 너무 상투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뇌과학이 발달하고 관련하여 경제학 분야에서도 행동경제학이 부각되듯이, 사람들은 편견에 쉽게 노출 된다. 일단 믿는 것은 계속 믿는다. 믿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은 큰 고통이니까… 우리 나라에도 아직 20% 이상의 자유당 지지자들이 심각한 바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때려 놓고 맞은 놈이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적인 폭력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견을 주입한는 언행, 혐오를 선동하는 언행은 매우 사악한 것이고 생각보다 폐해가 크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더 절망적이구나. 그렇지만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난다면 편견에서 빠져 나오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가치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해야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Justice)의 정의가 달라져야 될 수도 있다.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Sapiens’에서부터 주장하던 내용인데, 인류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의 상당 수는 단지 믿음일 뿐이다)
결국에 눈에 보이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겁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Keep calm and carry on… 하는데, carry on 할 것은 일상 생활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되새김인 것 같다.

두 번 읽을만한 가치 있고 그 정도의 재미도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1970년대에 쓰여진 책으로써 벌써 50년이나 묵은 책이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봤을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으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곱씹어볼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1부인 ‘근대 세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미 제기되고 있다. 나머지 2~4부에서는 각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이 책의 구성이 슈마허의 단편적인 강연들의 내용을 발췌하여 엮은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생산 문제’라고 이름 붙인 1장에서는 생산력 문제는 모두 해결 되었다고 하는 신화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경제 학자 들 용어를 빌자면 이 체계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에 의존 하면서도 이것을 즐겨 소득으로 취급 한다. 필자는 이러한 자본을 화석 연료, 자연의 허용 한도, 인간의 본질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일부 독자들이 세 가지 범주를 모두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필자의 주장은 그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입증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풍족하게 소비하고 있는 이면에는 재생 불가능한 무언가 (저자는 재생 가능한 것을 ‘수익’으로 재생 불가능한 것을 ‘자본’이라고 비유하고 있다.)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천연 자원을 소진하고 있으며, 자연이 허용하는 범위를 초과하여 소비함으로써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소모한다는 것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규모의 거대화와 업무의 분업을 통해 생산성은 증가했으나 일하는 기쁨을 모르고 오로지 여가에서 기쁨을 찾게 된 상황을 말한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분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소비의 양적인 증가가 좋은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와 오류를 짚으면서 불교 경제학을 예로 들면서 경제학에서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메타 경제학 을 공 부 하지 않는다면, 아니 더 나쁘게 말해서 경제적 계산 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에 한계 가 있음 을 알아 채지 못 하다면, 그는 성서 를 인용해서 물리학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중세의 몇몇 신학자들과 비슷한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학문이든 고유 영역에서는 유용하지만 , 이 영역을 벗어나면 곧바로 악이 되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

주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만 사실 경제학은 혼자 서 있는 학문이 아니다. 프레임이 주어진 한에서만 과학인 것이다. 근대 경제학의 프레임은 시장 가치로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밀한 과학(exact science)인 양 행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논의되고 있는 프레임이 무엇인가이다. 말하자면, 경제학도 절대로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별도의 장에서 불교 경제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종교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교조적이지 않고 서로 다른 종교에 통하는 바가 있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 노동의 역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 중심성을 극복 할 수 있게 하는 것 ,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달리 근대 경제학은 소비를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한다.

책의 부제에는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고 되었다. 부제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이 배제 돼 있다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대규모 집단 내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정체성 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소집단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교육을 이야기 할 때도, 형이상학, 가치관 교육이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모든 교육의 임무인 것이다.
기술에 대해서느 인간 중심의 기술을 주장한다.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간이 배제된 채로 발전해 내가고 있는데, 그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비용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지만, 간디가 주장한 바 있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이 이상적인 생산 방식이라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유 구조에 대해서느 다소 강한 주장을 하는데, 현대의 사적 소유 구조가 이대로 존재하는 한 비인간적인 경제 및 생산 활동은 벗어나기 어려우며 소유 구조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기업 운영을 위해서는 민간 기업 대신 국영 기업이 확대 되어야 하며, 민간 기업의 경우에도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민간 기업은 이익이 과대 평가 돼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공 부문에서 많은 비용을 대신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의 형태로 공공 부문의 기여에 대해서 분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소유 형태를 공공 기업 형태로 전환하여 세금이 아니라 배당의 형태로 분배하는 것을 더 이상적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Scott Bader’라는 회사의 사례가 재미 있다. 이 회사는 1950년대에 설립 되어 꽤나 성공적인 화학 기업으로 성장하였으나 창업주가 별도의 조합을 설립하여 자신의 지분을 모두 그 조합에 양도하는 형태로 소유권을 변화 시켰고 현재까지도 그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소유권 변화와 동시에 constitution을 작성하여 몇 가지 중대한 원칙을 수립하였다. 첫 번째로, 회사의 규모의 상한을 명시하여 너무 큰 회사가 되지 않게 하였다. 회사가 커지면 분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보수의 원칙을 최대 최소의 비율을 7:1이 넘지 않도록 하였고(최근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종업원은 모두 동반자이므로 중대한 과오가 없이 해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전쟁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 되는 고객과의 거래를 금지하였다.
책 전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래 인용이 적절한 듯 한다.

오늘날 가장 절실 하게 요구 되는 것은 이러한 수단, 자원들을 이용하는 목적을 바꾸는 일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에 본래의 정당한 지위, 즉 본질적인 지위가 아니라 부차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생활 양식을 발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근대를 지나오면서 형이상학은 무너졌다. 자본주의가 진리가 되었고, 물질만능이 일생 생활 깊숙히 침투한 상황에서 다시 인간을 돌아보자고 외치는 것이 현실적인가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아직 우리가 압축 성장의 그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미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는 한 바탕 지나간 상황이며, 환경, 생태, 인권 등의 가치에 대하여 중요하게 인식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우리는 아직 덜 성숙하여 일베와 자유당이 창궐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멸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몇백년 동안 이어왔으나 해결되지 않는 논쟁 거리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는 지구 온나화라는 것조차도 부정하고 있으니, ‘사업가’라면 인간보다 물질을 앞에 두어야 하는 사람인 것인가… 긍정적인 것은 트럼프 류의 인간이 아웃라이어라는 믿음이지만 응? 당선 됐는데? 인간이란 나만 빼고 착하게 살기를 바라기 마련이 아닌가 회의적이 된다. 내세에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되는 일이 아닐까… 실제로 Scott Bader의 사례는 퀘이커교적인 신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두서 없이 주저렸지만 역시 읽고 생각은 대충하고 행동은 못하는구나.

Endurance – Shackleton’s Incredible Voyage

100여년 전 남극을 횡단하려다 좌초된 Endurance라는 배와 그 선원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린 책이다.

당시는 바야흐로 모험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개인과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는 부를 위해서, 국가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탐험가들이 북극점, 남극점을 정복하던 시기였다. 남극점 정복에 참여한 바 있었던 셰클턴은 보다 더 어려운 모험, 그래서 더 명예로운 과제로 남극 대륙의 횡단을 계획했다. 현대에 비하면 부족한 장비로 어마어마하게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음은 자명하였음에도 지원자는 넘쳐났다고 한다. 마치 요새 아이돌이 되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듯이 이 모험에 참여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다고 하니, 현대인과 100년 전 사람들 사이의 정서에는 차이가 작지 않다.

Endurance호의 계획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하여 South Georgia 섬에 잠시 정박 한 뒤, Weddell 만으로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남극 횡단은 커녕 남극 대륙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하게 된다. 그들의 배는 웨델만에 들어서서 얼마 있지 않아 유빙에 갇혀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에 배는 얼음과 얼음 사이에 갇혀 그 압력으로 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행은 배를 버리고 유빙 위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해류와 바람이 유빙을 육지 가까운 곳으로 보내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펭귄과 물개를 사냥해서 그 기름으로 연료를 삼고, 식량을 삼아 버티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희망적이었고, 설마 이 사태가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바람과 해류만 바라보다 시간은 가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물이 사라짐으로써 사냥감을 구할 수 없고 비축해둔 식량과 연료로 버틸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됨을 깨닫자 그들은 보트를 끌고 열린 바다를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얼음으로 뒤덮혀 보트를 띄울 수가 없었으므로 열린 바다(Open Sea)를 찾아 걸어야 했던 것이다. 추운 것은 물론 고통이었다. 남극이니까… 그러나 날씨가 따뜻한 날에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빙이 녹아 위험해지는 경우도 생겼으며, 질척한 눈 때문에 전진에 방해가 되기도 했었다. 보트를 짊어지고 질퍽한 눈 위를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바다를 찾아서 걷는다니 그 참혹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불굴의 의지로 바다를 찾아 보트를 띄울 수 있게 됐으나, 이제부터 새로운 형태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칠다는 바다에서 작은 보트 세 척에 의지해서 육지를 찾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시계와 별자리에 의존해야만 했던 시절인데, 이 시점에 모든 대원을 통틀어서 작동 가능한 시계는 오직 한 개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별자리가 전혀 안 보일 때는 항해사의 직감에 의존해야 했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코끼리섬(Elephant island)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세 척의 보트는 드디어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육지에 닿은 안도감으로 그들은 잠시 동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움막도 만들었고, 펭귄을 잡아 식량도 비축해 놓았으나 계속 그렇게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셰클턴은 결단을 내리고 세 척의 보트 중 가장 상태가 좋은 한 척을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South Georgia 섬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한 채 출발하였다. 여전히 방향은 잡기 어려웠고 높은 파도, 추운 날씨로 고생을 하다가 식수마저 떨어진 시점에 기적적으로 South Georgia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South Georgia에서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의 반대편이었다. 보트를 정박할만한 곳도 찾기 힘들 정도였으나 문제는 보트를 정박한 후에도 구조를 요청하러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가야만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등산로가 있을리는 없다. 사람의 발이 한 번도 닿은 적이 없는 산을 넘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산을 넘다가 호수를 발견하고 기뻐하였으나 반대편의 바다로 내려와 버린 것을 알고 다시 올라가기도 했으며, 높은 고도의 추위에서 얼어 죽을 것이 두려워 비탈길을 미끄럼 타듯이 내려오기도 하는 등의 고생 끝에 포경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즈음 코끼리 섬에 갇혀 있던 나머지 대원들은 셰클턴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만간 겨울이 다가올 것이고 얼음으로 길이 막히면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렵다고 자포자기할 시점 셰클턴은 그 얼음을 뚫고 갈 배를 수배하여 결국 대원들을 모두 구조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참혹한 고난의 여정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듯이 흥미진진하다. 이 여정의 결과가 놀라운 것은 단 한 명의 사망, 실종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유일한 부상자는 동상으로 발을 잘린 대원 한 명 뿐이었다. 비록 애초에 목표했던 남극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위기 상황에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셰클턴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참혹한 환경,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구성원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매 순간마다 결단을 내리고 실행하는 능력은 보통 사람이 갖기는 어려운 자질일 것이다.

절대로 셰클턴의 모든 판단이 올바른 것이었고, 천재적인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 많은 실책을 범했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도 있었다. 그러나 셰클턴은 자신이 내린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인정했으며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본인이 했던 지시와 반대되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번 내뱉은 말을 뒤집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권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내뱉은 말을 아래 사람들이 해석하느라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과정을 많이 목격한다. 권위적이고 경직된 조직에서 높은 분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고 뒤 돌아서서 투덜 거리는 장면도 많이 목격한다. 분명히 셰클턴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지만,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권위주의적인 사람은 아니었기에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었고, 구성원들도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내뱉은 마오쩌뚱의 한 마디 말에 참새들을 몰살시켰고, 병충해로 인한 기근을 가져왔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마오쩌뚱 주변에는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또는 없어졌고- 마오쩌뚱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에 수 많은 아사자가 나온 후에, ‘참새를 더 잡아야 할까요?’라고 겨우 묻는 말에 (이 사람은 그나마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라고 한 이후에야 참새 사냥은 멈출 수 있었다.

우리 조직은 대약진 운동 시기의 중국에 가까운가, 셰클턴의 남극 횡단 탐험대에 가까운가? 나는 잘못된 판단을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아니면 체면을 위해 또는 권위를 위해 침묵하는 자인가 반성해 본다.

셰클턴의 항해에 관한 영문 위키피디아

Why nations fail?

‘Why nations fail?’은 왜 어떤 나라는 풍요롭고 어떤 나라는 가난에 허덕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는 인종, 종교, 지리 등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의 노갈레스라는 지역은 국경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오랜 역사를 공유하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어떤 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장기간에 걸친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져만 갈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아주 간단한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착취적(Extractive)이냐 포괄적(Inclusive)가 빈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포괄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권력이 넓게 분산돼 있지만 동시에 법치(rule of law)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 개인에게 집중 되어 있어 사회 대다수의 계층은 접근하기 힘든 경우이다.
포괄적인 경제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 사유 재산을 보장하며 둘째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는 이와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고 사유 재산에 대하여 약탈, 착취가 빈번하고 이로 인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모험 정신의 등장을 방해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의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단 어떤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낳고, 다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해 더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착취하고자 한다. 또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지배층은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고, 반대로 기득권을 놓았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 개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정치경제 제도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결론이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한은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결코 ‘포괄적이다’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 압축 성장의 경험해 왔었다. 흔히들 적폐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냉전 시대의 기형적인 정체 경제 제도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하는 국가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주제는 중국에 관한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성장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과연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인가?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1962.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될 정도로 몰입감 있다. 개성 있으면서도 전형적인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마치 만나 본 누군가인 것처럼 느껴진다. 장면 장면마다 주된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이 되어 웃고 울게 만든다. 그리고 읽고 난 후에도 진한 여운이 남아 하루가 지나도록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다.

소설은 구한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의 통영이 작품의 배경이다.
주인공 격인 성수는 김약국이라고 불리었다. 그의 생모는 생부에게 정조를 의심 받아 자살하였고, 생부는 이후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성수는 약국을 하던 동네 지주인 큰아버지의 손에 길러졌고, 그 약국도 물려 받아 김약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는 약간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인물처럼 그려진다.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이지만 막상 사업에는 큰 관심은 없었다. 딸만 다섯을 두었고, 당시에 이것은 아내의 큰 흠이 될만한 일이었지만 크게 타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와 애틋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한 평생 아내와는 겸상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단지 후사를 보는 일에도 열정이 없었던 것 같다. 바깥 세상과는 단절하고 아무런 열정도 없고, 어린 시절의 상처만을 안고 그저 조용히 사랑방을 지키는 것이 의무인 사람이었다. 

김약국의 다섯 딸의 운명이 다 제각기 기구하다.

큰 딸 용숙은 시집을 갔으나 일찍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버렸다. 욕심 많은 성격에 이재에 밝은 터라 남편의 재산을 제법 불려 돈 놀이를 하는 재미로 산다.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병약하고 자주 의사를 불렀다. 결국에 유부남인 그 의사와 바람이 나고 동네에 소문이 나면서 당시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모를 겪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불륜으로 생긴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낳자 마자 유기했다는 헛소문까지 퍼지게 되며 경찰서를 들락 거리게 되고 결정적으로 세상과 그리고 친정까지도 담을 쌓게 된다. 더욱 더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탐닉하고 종국에 김약국이 망했을 때 돈을 빌리러 온 친모를 쫓아내기에 이른다.

둘째 용빈은 김약국에게 아들 같은 딸이다. 김약국은 집안의 대소사를 아내와는 상의하는 법이 없었으나, 용빈에게는 의견을 묻고는 했다. 신여성으로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편을 잡는다. 같은 통영 출신인 친일 지주의 아들 홍섭과 연애를 하고 있었고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약국의 집이 기울자 홍섭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 후 유력한 집안의 딸에게 떠나 버린다. 기독교인이었으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었고, 남자에게 버림 받은 후에 더욱 더 내적 갈등을 겪게 되며 괴로워한다. 능력 있었으나 남자에게 버림 받고 제 뜻을 펼칠 엄두도 못 내고 노처녀로 늙어가고 만다.

셋째 용란은 딸 중에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딸이었다. 김약국의 머슴이었던 한돌이와 눈이 맞아 밤마다 으슥한 곳을 찾아 정을 나누고는 하였다. 김약국으로서는 머슴과 놀아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밤의 행각을 결국에 김약국에게 들키고 한돌은 매를 맞고 쫓겨나고 용란은 실의에 빠지게 된다. 더군다나 한돌과 놀아났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혼사길까지 막히게 된다. 당초에 김약국은 용란을 어장 관리를 맡고 있는 서기주에게 시집 보내려고 했으나 머슴과 바람난 딸자식과 결혼하겠냐고 차마 권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기주는 원래부터 용란에게 마음이 있었으며, 한돌과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은근 김약국이 다시 용란과 혼사를 추진해 주었으면 바랐으나 김약국이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그런데 용란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돈을 맺겠다는 집에 있어 급하게 결혼을 추진하는데, 그 남자는 성 불구에 아편장이였다. 몇 년 후 아편장이 남편에게 매를 맞으며 비참하게 살던 용란을 한돌이 몰래 찾아와 다시 도망쳐 나와 산골에 살림을 차렸으나, 쫓아온 남편에게 한돌은 살해 당하고 그 와중에 한실댁까지 살해 당하고 만다. 이것을 지켜본 용란은 실성을 하고 친정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넷째 용옥은 용빈을 무척 따르던 동생이었으나, 용빈만큼 능력이 있지도 않고 용란처럼 아름답지도 않았다. 다만 매우 성실하게 일을 잘 해서 집안의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는 했다. 김약국은 용란을 그렇게 서둘러 시집 보내 놓고서는 용옥을 서기주에게 시집 보내고자 한다. 용란에게 마음이 있었던 서기주는 한참을 망설였으나 결국에 김약국의 뜻에 따라 용옥과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았으나, 용옥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으며 밖으로만 돌았다. 때마침 김약국의 어장이 몇년째 손해를 보면서 망하게 되자, 서기주는 부산으로 취직해 떠나 버렸으며, 통영에 오더라도 집에는 잘 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용옥의 방으로 괴한이 침입해 용옥을 겁탈하려고 하였는데, 알고 보니 서기주의 아버지가 며느리 방을 찾은 것이었다. 용옥은 이를 억지로 뿌리치고 아이를 안고 도망쳐 부산으로 남편을 찾아 나섰으나, 남편과 길이 엇갈리고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서는 돌아오는 배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하고 만다.

막내 용혜는 아직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으나, 집안이 기울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오고 만다. 용혜는 적막해진 김약국의 집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왕래가 없는 용숙, 타향에 있는 용빈, 살해 당한 어머니, 사고로 죽은 용옥. 한 때 사람으로 북적였을 큰 집에서 아버지 수발을 들며 실성한 용란을 돌보게 된 것이다. 김약국이 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뜬 후에야 용빈과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하러 떠난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다양한 인물들 통해 이런 저런 인간들을 만난 보는 재미가 있다. 이래서 소설을 읽는 것 같다. 훌륭한 소설을 읽고 나니 마음의 양식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나온 이유를 알겠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집은 이유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어떤 소설인가 도서관에 빌리러 갔다가 워낙 핫한 소설이라 빌리기가 힘들었던 차에 누군가가 ‘김약국의 딸들은 봤냐?’라고 하여 찾아보게 된 책이다. 소설의 배경 당시, 야만적이었던 시기에 특히 여성에게 야만적이었던 시기에 살았던 딸들과 어머니의 경험을 훌륭한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어찌 그렇게 사셨나 싶은 어머니의 인생과 험난한 딸들의 인생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혹시 우리도 당연하게 여자라면 또는 남자라면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야만적이거나 비상식적이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 페미니즘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굳이 페미니즘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그런 노력이 일상적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여자 일베에게 도둑 맞은 이 난해한 시기에 이 소설의 가치가 훼손될까 두렵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남자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인 선생님이 쓴 페미니즘 입문서 쯤 되겠다. 작은 판형에 두껍지 않은 책이고, 글도 쉽게 쓴 편이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꼰대와 예비 꼰대들에게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저자의 후배가 저자에게 한 말이고, 저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말이다.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지만 혹은 대충 알긴 알지만, 메갈과 김치녀들에게 증오심을 느끼는 한국 남자들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봐야 되는 이유이다. 적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적어도 개저씨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혹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반페미니즘에 확신을 줄 수도 있겠다만…

악의가 없어도 때로 무지 만으로 나쁜 결과를 낳는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지향점으로 삼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부장제로부터 어떤 억압을 받고 있는지, 그 프레임에 갇혀서는 인지하기 어렵다.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태로는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언행을 하면서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기 쉽다.
사실 많은 남성들이 스스로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차별과 억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복무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잘은 모르지만, 페미니즘의 출발점은 내가 무심코 하는 언행이 오랜 기간 축적 되어 온 억압의 기제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주 반추해 보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인류가 계속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는 방향으로 진보하여 오고 있지만, 가부장제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억압 장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배우고 반성해 봐야한다.
악의가 없이 무지 만으로 해를 끼쳤을 때, 이를 비난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지를 벗어날 기회가 있음에도 귀와 눈을 가리고 무지한 채로 남아 나쁜 결과를 낳는다면 비난받을 만 하다. 공부하자.

건강한 사회는 남의 아픔을 들여다 보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다.

여자라서 겪는 아픔을 들여다 보는 남성이 많아야 건강한 사회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서로의 아픔에 공감고 억압과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는 점에서 페미니즘만이 다른 진보 운동과 다른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 났다고 화를 내면 기분은 좋아지지만 문제는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궁금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여성들도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공부하자.

이 아이가 여자라서 꿈을 꺾지 않고, 여자라서 참지 않으며, 여자라서 자기를 단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딸들의 아빠가 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좀 비겁해 보이기도 하지만, 솔직한 바램이다.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1996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역사에서 배워야합니다.

무감어수(無鑑於水) 감어인(鑑於人)

평등은 단지 ‘차별의 철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이야말로 ‘자유의 최고치(最高値)’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여행기를 1996년에 책으로 묶은 것이다.
선생 특유의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말투로 여행지에 얽혀 있는 사연과 의미를 풀어내고 있다.
그간의 선생의 저작에서 효율보다는 관계 발전보다는 인간을 강조하는 선생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한가해 보인다.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보면 (비록 온화한 말투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급진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회주의/자본주의 패러다임 자체를 보고 구시대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 보수의 패러다임을 떠난 성찰의 말씀들이다. 쉴새 없이 돌아가며 풍족한 가운데 불안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되돌아 보는 시간이다.
이미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경계해야하는지…
선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몽롱한 가운데 찬물로 낯을 씻는 기분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문제는 프레임이다.

나는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보수주의자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도 갖고 있다. 그들은 깊이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거나, 공감 능력이 떨어질 거다라는 편견이다. 사실은 남들이 편견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거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저자 레이코프는 스스로 진보주의자임을 명확히 하고, 진보주의자 입장에서 어떻게 보수를 이해해야 하고, 보수가 왜 이기고 있는지를 인지언어학,이게 무엇인지는 말 모르겠지만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두 가지 메세지가 있다.
첫째로 사람은 프레임을 통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행동경제학자들의 입장과 맞닿아 있다. 즉, 사람들은 생각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문제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실질은 전혀 변화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코프가 여기에 조금 더 보탠 것은 프레임이라는 개념인데, 그가 말하는 프레임은 문제를 제시하는 방식을 조금 뒤틀기만 해서(아마도 넛지) 다른 판단을 유도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머리 속에 각인된 생각의 방식이 프레임이기 때문에 쉽게 짧은 시간에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진보와 보수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된 프레임이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인지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가치 판단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장기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가끔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하면,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답답함을 느끼고, 저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개종 시키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만큼 깊게 보수의 프레임이 각인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번째 메세지는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의 내용이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진보는 보살피는 부모에 해당하고 보수는 엄격한 아버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진보가 보살피는 부모(지금 옆에 책이 없어서 정확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라는 비유를 통해 진보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공감하고 애착을 갖고 지원을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진보적인 경제 정책이란 누구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기본적인 복지를 보장할 것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누진적 세금 정책을 뜻한다. 동성 결혼의 허용 여부에 대한 진보적인 입장은 동성 커플의 입장에 공감을 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엄격한 아버지에 비유되는 보수주의자들은 규율과 위계를 중요시 한다. 세상은 험한 것이니 적절한 규율을 통해 훈련 시킴으로써 너를 강하게 해 주겠다. 너는 이를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살아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보수적인 경제 정책은 복지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세상에 필요한 규율을 무너뜨리고 강해지기 위한 동기를 꺾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동성 결혼을 반대한다.

나는 여전히, 전혀 보수의 가치에 대해서 납득할 수가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그들을 그저 수구 꼴통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프레임으로는 보수의 가치가 올바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신념을 갖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런 점을 기억하고 있으면, 혹여나 박사모 어르신과 얘기할 일이 있을 때 좀 덜 흥분하고, 좀 덜 얼굴 붉히게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내 편견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