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중간 기록

아마 두 달 정도 전 일이었던 것 같다.
중국 주식이 의외로 하락한 날이 있었는데, 우한에서 무슨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게 그 이유라는 것이다. ‘아이고 또 무슨 이유를 그렇게 갖다 대는 것이냐. 시장 움직임에 일일이 소설같은 이유라도 대야한다니 애널리스트도 고달프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에서 일파 만파로 퍼지는 이슈가 됐다. 실제로 통제만 잘 된다면 그 질병 자체의 위험성은 크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계기로 몇 가지 드러나는 바가 있다.
첫째는 ‘신천지’라는 교단이 수면에 드러났다. 그렇고 그런 기독교계에서 이단 취급 받는 종파가 있나보다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의 엽기적인 행태에 대해서 전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더군다나 그들의 규모가 상당히 크더라는 점,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인가 새삼 놀랍다. 내가 접하는 주위의 인간들이 인간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 다시 느낀다.
둘째는 신천지와 맞먹게 막장성을 보여주는, 반문재인 세력의 행태이다. 문재인 정권이 망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연재해라고 볼 수 있는 힘든 시기에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또 놀라운 점은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의 규모다. 심지어 내 또래의 지인들 중에도 관찰되는 바이다.
이들의 전략은 정말 단순한데 아주 효과적인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싫어하는 집단 또는 인물에게 친중국 딱지를 붙이고 반복하는 것이다. 마치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 북한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공격하고 싶은 대상에게 친북 딱지를 붙이는 것과 같다. 이 전략이 효과적인 이유는 애초에 혐오 자체가 비이성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일단 딱지를 붙이고 나면 이성적인 설명으로 그 딱지를 떼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에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이번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잠재되어 있던 행태가 코로나를 계기로 드러났던 것일 뿐 곧 지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 한해서는 그게 맞았던 것 같다.
3월 중순이 된 지금에 와서는 Pandemic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3월 초순만 하더라도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기는 했지만 리스크를 전부 내던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상황은 미국, 유럽으로 전염병이 확대 되고, 그들의 대응이 형편 없음이 드러나면서 패닉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S&P500 지수와 EuroStoxx50 지수는 이틀 동안 10% 등락을 반복했다.
왜 그런지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금융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모두들 손상이 큰 상황이다.
여기서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 예측하는 것은 위험한 것 같다. 어떻게 대응해야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나는 우선 멘탈과 건강을 지키면서 사태가 길어질 것을 대비해야겠다.

트럼프의 의미

크루그먼(Paul Krugman)이 뉴욕타임즈에, 2019년 5월 11일에 기고한 칼럼 내용 요약이다.
현 시점 상황은, 트럼프가 중국과 무역 협상 판을 엎으려는 제스쳐를 해서 (물론 트럼프는 중국이 뒤로 호박씨 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시장을 위험회피 모드로 만들어 버린 다음 다소 소강 상태가 된 상황이다.
원문은 아래 링크.
Killing the Pax Americana


사람들이 무역 전쟁에 대해서 두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서 바로 잡아 주고 싶다. 트럼프는 원래 아무 것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없으니 트럼프가 착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비판자들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한 편으로 사람들은 무역 전쟁의 단기적인 측면의 비용에 대해서 과대 평가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무역 전쟁의 장기적인 영향은 과소 평가하고 있다.
단기적 관점에서, 관세는 세금이다. 그게 끝이다. 역진세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어쨌든 세금이고 그 규모도 아직까지는 GDP의 1%에 불과하다. 아직까지는 무역 전쟁이 전 세계적 경기 침체(global recession)을 야기할 것 같지는 않다. 트럼프가 무역 전쟁을 다른 지역까지 확대 시킨다면 GDP의 2%에 달하는 수축적인 재정정책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가 그렇게 할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그 상태까지 오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보복이 있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보통의 관세 인상보다는 덜 나쁘게 된다. 관세를 부과했는데 상대방이 보복을 안 하면, 미국 수출품 가격 인상을 가져오고, ‘terms of trade’(terms of trade effect)효과로 관세에 의한 경제 왜곡 효과를 역전 시킨다. 만약에 보복한다면 관세는 그저 국내 소비자들에게 세금 부과하는 효과만 남게 된다. (잘 이해 안 되고 혹시 오타가 아닐까 싶지만, 뒤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하니 넘어감.)
그것보다 중요한 점은, 무역이 전세계적이고 경쟁우위라는 개념을 건드린다는 이유로, 그 실제 효과보다 관심을 더 많이 끌게 된다는 것이다. 무역 정책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다른 정책 (재정 정책, 보건 정책)들이 중요한만큼만 중요하다.
무역 정책이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중요성 보다는, 무역 정책이 민주주의와 평화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유럽에서는 자명하다. EU의 유래는 1950년대에 ‘Coal and Steel Community’인데, 이것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협정이었지만 프랑스와 독일 간의 미래 전쟁 예방이라는 진짜 목적을 수반하는 협정이었다.
미국에서 이 효과는 다소 암묵적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자명하다. 전후 무역 체제는 국가 간의 상업적인 연계를 평화 증진의 방안으로 보았던 Cordell Hull(루즈벨트 시절의 국무장관)의 비전으로부터 발전해 왔다. 다자간의 협정을 맺고, 일방적인 행동을 제한하는 이 체제는 애초부터 Pax Americana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은 그러니까 그가 외국 독재자들을 옹호하고, 동맹에 대해 존중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행위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은 동맹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중국의 무역 관행이 여러 측면에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맞다. 만약에 트럼프가 동맹국들을 모아서 중국의 못마땅한 정책에 대항하려 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트럼프는 사실상 거의 모두를 상대로 낮은 수준의 무역 전쟁을 하고 있다. 캐나다 철강에 관세를 물리면서 그들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웃기는 핑계를 대고, 독일 자동차에도 똑같이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중국의 부정에 대항하기 위해 전략적인 동맹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니다. Pax Americana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 지배가 잠식 돼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가난해진 것이 아니고 세계가 부유해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세력들이 연합함으로써 평화적인 국제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를 희망할 만한 이유가 있었었다. 몇 년 전까지 내게는 세계 무역 체제가 그렇게 전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크고 자애로운(? largely benign) 미국 헤게모니에서 비교적 자애로운(comparably benign) 미국과 EU의 공동 정권으로 전환 말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상황이 좋지 않다. 트럼프 문제만이 아니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문제만도 아니다. 유럽인들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Victor Orban 같은 자에 대해서 적절히 다룰 수 없다면, 유럽인들은 세계가 필요로하는 리더십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약한 반면, 트럼프는 유해하다. 그는 세계가 더 위험하고 덜 민주적인 곳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다. 무역 전쟁은 그러한 드라이브의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미국과 전세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관세의 영향에 대한 경제학적 모델링이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재주가 없어 간단히 요약을 못하고 거의 전문 번역하다시피 했다.
마지막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럼프의 무역 전쟁이 중요한 게 아니고, 트럼프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과 그에 동조하는 세계가 위험한 것이다. 혐오할 대상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무리는 경계해야 한다.

Why nations fail?

‘Why nations fail?’은 왜 어떤 나라는 풍요롭고 어떤 나라는 가난에 허덕이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엄청난 경제력 차이는 인종, 종교, 지리 등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의 노갈레스라는 지역은 국경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 오랜 역사를 공유하지만 엄청난 경제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어떤 나라들은 선진국들의 장기간에 걸친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가난해져만 갈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국가 간의 빈부 격차를 아주 간단한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착취적(Extractive)이냐 포괄적(Inclusive)가 빈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한다.
포괄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권력이 넓게 분산돼 있지만 동시에 법치(rule of law)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중앙 집권적인 정치 제도가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 제도의 특징은 그 반대일 것이다. 권력이 특정 집단, 개인에게 집중 되어 있어 사회 대다수의 계층은 접근하기 힘든 경우이다.
포괄적인 경제 제도의 특징은 첫째로 사유 재산을 보장하며 둘째로 공정한 경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착취적 경제 제도는 이와 반대로 경쟁이 불공정하고 사유 재산에 대하여 약탈, 착취가 빈번하고 이로 인하여 부를 창출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모험 정신의 등장을 방해한다.
책에 따르면,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의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단 어떤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를 낳고, 다시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강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정치 권력과 결탁을 통해 더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국민들을 착취하고자 한다. 또한 착취적 정치 제도 하에서 지배층은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너무 크고, 반대로 기득권을 놓았을 때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현재의 착취적 경제 제도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특정 계급, 개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정치경제 제도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떻게 보면 자명한 결론이지만, 남한에 사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남한은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결코 ‘포괄적이다’라고는 보기 어려운 정치 경제 제도 하에서 압축 성장의 경험해 왔었다. 흔히들 적폐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냉전 시대의 기형적인 정체 경제 제도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너무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런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하는 국가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주제는 중국에 관한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례가 드문 성장 패턴을 따르고 있는데, 과연 ‘실패’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인가? 현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인가?

 

The origin of wealth

제목부터가 ‘The origin of species’로부터 빌려왔다. ‘부의 기원 The origin of wealth’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경제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 책이다. 결론적으로 아주 독창적인 ‘originality’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훌륭한 책이다.

저자는 현재의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을 물리학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모델을 세우고, 적절한 가정을 하고 (예를 들면, ‘마찰이 없다면…’과 같은) 그것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며 현실에 적용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방법론이다. 경제학자들은 이 방법론을 차용하여 경제 현상을 분석하려고 시도하였다. 대표적으로 ‘이기적이고, 완벽하게 이성적인 인간이라면…’으로 시작하는 가정을 세우고, 모델에 이 가정으로부터 예측된 인간의 행동을 반영하는 식이다.
그러나 경제학의 방법론은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자연과학에서 ‘마찰이 없다면…’이라는 가정은 그 모델이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을 설명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반면, 경제학에서의 가정은 모델의 본질을 훼손시킨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경제를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에 대하여 가정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과도하여 경제 현상에 대한 분석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이미 주류 경제학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행동경제학에서 비슷하게 다루고 있는 바이다.
분명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나 역시도 이런 저자의 생각에 상당 부분 공감을 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경제학자들을 폄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경제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 그 동안의 경제학의 접근 방식 자체를 매도해 버리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경제학자들이 그 이후의 자연과학의 발전을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자연 과학에서는 ‘평형’상태를 상정하고 방정식을 풀어 대는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이후의 물리학은 혼돈 이론이라는 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반면, 경제학에서는 아직도 평형상태를 논하고 있으니, 18세기 물리학에서 방법론을 차용한 이후로 경제학은 머물러 있고 자연과학은 발전해 온 셈이다.
장황하게 얘기했으나, 어쨌든 책의 전반부는 현재 경제학의 분석 틀의 한계와 진화론의 개념을 적용한 ‘복잡계 경제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진화론의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으니, 그만으로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책 후반에는 각 분야에서 복잡계 경제학의 개념이 의미하는 바와 적용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다. 경제,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약간은 무리하게 본인이 만든 틀에 우겨 넣으려는 시도도 보이고 있고 때로는 다소 학술적으로 진화 매커니즘에 대해서 정리해 두고 있다. 실은 상당히 방대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관통하는 논지는 ‘Exploitation / Exploration’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Exploitation이라는 것은 성공적인 진화의 상태 (비즈니스에서 보면 현재 잘 팔리는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는 것이다. Exploration이라는 것은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기회를 탐색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돌연변이로부터 비롯될 것이고,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회사들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존재하는 ‘신사업’ 부서들에서 인간에 의해 의도된 변화로부터 비롯된다. 자연상태에서 돌연변이 중 대부분은 살아 남지 못하는 것처럼, 신사업들 중 상당 수는 사장될 것이 분명하다. 다만, 살아 남는 비율은 자연 상태의 돌연변이보다는 훨씬 높을 것이다.
Exploitation과 Exploration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아이디어이다. Exploitation에만 집중하는 생물체, 또는 회사들은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환경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환경은 자연 환경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Exploration에만 집중하다 보면 현재 사업에서 효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즉, 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아이디어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Exploitation’에 몰빵해서 살아 왔다. Exploration이 필요 없던 이유는 앞에 길이 뻔히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것은 우리는 아직까지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 도태되거나 의미 없는 세력이 될 게 뻔했던 분파를 없애기 위해서 정당을 없애 버린 것이다. 이것은 정당 자체의 해산이 옳으나, 그르냐의 개별 사안으로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다양성에 대해서 더 받아 들이기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경제, 정치 모든 면에서 마찬 가지가 아닌가 싶다. 결국에는 굳어서 사회 전체가 도태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 하나는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의견들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 마지막 챕터에서 인용했다.

불평등의 영향

TED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상태에서는 절대적인 부보다 상대적인 평등이 구성원의 웰빙에 지배적인 영향을 준다.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들력 있는 주장을 펼침.

경제학의 향연

경제학의 향연 – 폴 크루그먼

content

2014-01-13

반성하고 연마하자.
제목으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라고 말한 것은 클린턴이 말한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거시 경제에 대해서 기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장을 본다며 했던 무의미한 행동들에 대한 반성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시 경제가 정치가들에게 어떻게 받아 들여지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성하는 것이 옳겠다.

좀 알고 얘기해라.
책의 핵심을 몇 줄로 줄일 수 있을 듯 하다. 레이건에서부터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사이비 경제학이 대중에게 잘 먹힐 단순한 논리를 들고 나와 정치에 활용 되고 정책을 좌지우지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사이비 경제학에 기반한 경제 정책이 미국 경제에 치명타를 주지는 않았지만, 올바른 경제 정책을 펼치는 데 장애가 됐던 것은 분명하니, 좀 경제 좀 제대로 알고 경제를 얘기하라는 것 쯤 되겠다.

경쟁력?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정부를 겪은 우리 입장에서는, 전략적 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에 감정이입이 될 수 밖에 없다. 비유라는 것은 설득력 있지만 위험하다. 국가는 기업이 아니고, 무역은 에이매치가 아니다.
전략적 무역론자들이 보호 무역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은 자연스럽게 자유 무역 쪽으로 손을 들게 될 수 밖에 없으나, 그렇게 전개 되는 이야기에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 단순화된 사례에서 한 나라의 번영은 국가 간의 상대적인 경쟁력에 상관 없이 그 나라의 생산성에만 좌우된다고 했다. 이런 논리의 핵심은 비교 우위에 의한 무역을 통해 수입국의 복리는 증진될 것이다라는 것이데, 현실에서는 무역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산업 간의 마찰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개인적으로 보면 일자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현실은 조금 더 미묘하다.

쓰레기 경제학
오히려 공급중시론이라는 경제학은 쓰레기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에 간단하다.

QWERTY 경제학
인간은 모두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한다는 가정에서부터 경제학을 바라 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더구나 이러한 가정이 자유 방임 주의의 근거가 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QWERTY 경제학은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알아 보고 싶은 주제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연에 의해 형성된 조건이 이후 운명을 결정 짓는 경우가 있다는 정도일테다. 나비 효과를 연상하게도 하고, 행동 경제학을 연상하게도 하는 측면도 있고, 흥미를 갖고 읽어볼 만한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