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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Mortal

나는 달팽이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딸아이가 10살 남짓 됐을 때, 학교에서 작은 화분을 들고 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주먹만한 화분이었다. 무슨 식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딸아이는 그 화분을 제대로 키워 보고 싶었는지 조금 더 큰 화분으로 옮겨 담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흙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달팽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화분보다 그 달팽이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 달팽이를 제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고 ‘베베’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달팽이와의 만남은 짧게 스쳐 가고 말았다. 달팽이 집이 될만한 상자를 찾고 달팽이를 옮기고 부산스러운 와중에 흙을 쏟고 말았고, 베베는 순식간에 시야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베베가 보이지 않자, 딸아이는 베베가 수채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베베가 죽게 됐다며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아이를 달래려, 말하자면 베베의 가묘를 만들어서 위로해 주었다.

신해철이 병아리 얄리를 통해 죽음을 느꼈던 것처럼, 아이는 베베를 통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그날 밤 아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이를 속일 수가 없어, 죽은 후의 하늘나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 주었을 때, 그러니까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말했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아이에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 말을 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그 때 상처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이른 나이였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른 나이여서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싶다. 지금은 사춘기가 된 아이에게, 베베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피식 웃고 만다.


Being Mortal, Atul Gawandi, 2014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한다.
아툴 가완디의 이 베스트셀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주제로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떤 형태로 죽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역설적으로,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의 과정은 비인간적이 되어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일은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 서서히 약해지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료 기술의 도움으로 회복하기도 하지만, 추세적으로는 약해져 가는 과정을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과정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현대 의료 체계는 우선은 ‘살려’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고통의 과정이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된다. 분명히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말기암이나 때로 어떤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임종을 맞은 가족이 있는 사람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보내 드려야 한다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저 살려 두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신성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죽는 과정을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신성함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가장 급진적인 나라에서는 안락사가 합법이 된 지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마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된다는 쪽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 스스로 죽는 과정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은 아니고 현실적인 내용의 책이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생각하는 바가 많게 만든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그 명백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죽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것 같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한하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책의 번역서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뜻으로 이해 된다.

존엄한 죽음

2023/06/09.
결국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3주만이다. ‘모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사는 것, 죽는 것, 죽어가는 것, 살아내는 것… 혼란스럽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신다. 살아 계셔서 고통 받고 있다. 이송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어머니 고통 받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고통은 실재하지만 느끼시지 못한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고통인 것인가.어머니를 보는 내 고통은 실재하고 느껴진다.

눈 깜박 거리시고 고통스럽다고 눈물 흘리시는 거 같은데, 의식이 없으시다고 한다. 의사들 말이 맞겠지. 만에 하나 착오가 있으면 끔찍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있을까 무섭다. 그 고통을 짧게 해 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 그걸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의식이 없다시지만 어머니도 고통스럽다. 죽음 앞에는 어떤 식으로든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받는 것은 다행인 것인가.

우리 나라에서는 임종과정에 있는 경우에만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된다고 한다. 임종과정이란 것은 회복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임박한 상태라고 정의되고 있던데, 모호하다. 얼마나 가까워야 임박한 것인가. 확실히 우리 어머니는 ‘임박’한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계속 고통 받으셔야 한다.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요양병원에 모신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어머니를 위한 일은 아니다. 가족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다. 가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답지 못한 일이 아닌가. 존엄한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존엄한 것인지 명확하게 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미 그 선을 한참 넘어섰다.

이것은 폭력이다.

다르게 보면 사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버려 두고 와서 나는 잘 살고 있다.

죽음

카톡 메세지로 J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새해 인사려니 했다. 미국에 갈 때 얼굴 한번 보고 간다더니 그냥 훌쩍 떠나서 미안했겠지. 이제라도 안부 물어봐 주니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첫 마디가 너무 슬픈 소식이 있다길래 보통 일은 아니구나 각오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장난을 치더라도 이런 장난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난일 리가 없다.
J와 Y는 입사 동기로 내가 C사에서 막 대리를 달았을 즈음에 입사했었다. 내가 직접 같이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부서로서 꽤나 돈독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C사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고 만났고,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후로는 만나지는 않더라도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Y의 가족 사진을 모 소셜 미디어에서 보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그녀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회사에서 근무 중 쓰러졌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단 한 마디 인사도 못한 이별이다.
살고 죽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일이라니…
언제든 누구나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살아 있는 날들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작별 인사라도 준비할 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잔인한 일이다.
주변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셋 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여성이었고, 아이의 엄마였다. 남은 아이들이 안타깝다. 내가 신이라면 엄마들은 일찍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신이란 걸 믿지 않는다.
몇 년의 작별을 한 사람도 있고, 몇 달을 한 사람도 있었으나 인사를 못하고 떠난 건 처음이다. 부디 남은 아이들과 남편이 상처를 이겨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