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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Mortal

나는 달팽이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딸아이가 10살 남짓 됐을 때, 학교에서 작은 화분을 들고 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주먹만한 화분이었다. 무슨 식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딸아이는 그 화분을 제대로 키워 보고 싶었는지 조금 더 큰 화분으로 옮겨 담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흙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달팽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화분보다 그 달팽이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 달팽이를 제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고 ‘베베’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달팽이와의 만남은 짧게 스쳐 가고 말았다. 달팽이 집이 될만한 상자를 찾고 달팽이를 옮기고 부산스러운 와중에 흙을 쏟고 말았고, 베베는 순식간에 시야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베베가 보이지 않자, 딸아이는 베베가 수채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베베가 죽게 됐다며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훌쩍이는 아이를 달래려, 말하자면 베베의 가묘를 만들어서 위로해 주었다.

신해철이 병아리 얄리를 통해 죽음을 느꼈던 것처럼, 아이는 베베를 통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 것 같다. 그날 밤 아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이를 속일 수가 없어, 죽은 후의 하늘나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 주었을 때, 그러니까 아이에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말했다고 했을 때, 그는 내게 아이에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 말을 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그 때 상처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이른 나이였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이른 나이여서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싶다. 지금은 사춘기가 된 아이에게, 베베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피식 웃고 만다.


Being Mortal, Atul Gawandi, 2014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한다.
아툴 가완디의 이 베스트셀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주제로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떤 형태로 죽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역설적으로,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의 과정은 비인간적이 되어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일은 거의 없어졌다. 대부분 서서히 약해지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의료 기술의 도움으로 회복하기도 하지만, 추세적으로는 약해져 가는 과정을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과정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현대 의료 체계는 우선은 ‘살려’두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고통의 과정이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된다. 분명히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말기암이나 때로 어떤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임종을 맞은 가족이 있는 사람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보내 드려야 한다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 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저 살려 두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신성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죽는 과정을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신성함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가장 급진적인 나라에서는 안락사가 합법이 된 지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마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된다는 쪽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 스스로 죽는 과정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내용은 아니고 현실적인 내용의 책이다.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생각하는 바가 많게 만든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고, 그 명백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죽는 과정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것 같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한하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책의 번역서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뜻으로 이해 된다.

이태원 할로윈 사고

일요일 오전 늦잠 자는 중 걸려 온 엄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카톡방에 보니 동생이 ‘이태원 사고 때문에 전화하셨었어요?’ 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마 동생도 전화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이태원 무슨 사고?’라며 좀 뒤져 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응? 압사? 길거리에서??
할로윈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를 뿐더러 인파가 붐비는 곳을 싫어하니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을 상상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양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첫째로 든 생각은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젊든 늙든 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태원이라는 동네였어야 하는가, 그렇게 좁은 공간에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모르겠다. 짐작하기 어렵지만, 짐작해 보자면, 즐기려고 했다기 보다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순전히 사람이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일까? 여튼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젊은 목숨이 사라졌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런데 더 놀랍다고 느낀 것은 누구 하나 모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측이 따로 없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
여기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책임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은데, 사실 이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행사에 (실제로 어떻게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므로 그것이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것 같다. 그렇지만, 미리 통제를 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선택적인 공감에 대한 거부감이다. 분명히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이 사고는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고 뉴스로서 잘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근거 없이 장례비, 위로금 등을 준다고 하고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과도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므로 선정적인 이슈에 과하게 자원이 몰린다면 어디에선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150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는 매년 1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 중 상당 수가 노인 인구이다. 물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방 조치는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과한 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의 본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졸업 후에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상가집, 결혼식 등에서 스쳐간 적만 있었던 후배였지만, 재학 중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던 사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이태원 사고가 갑자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다니.
그가 개인적으로 느꼈을 고통과 회한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하기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한 아이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고통,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차갑게 원칙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효용과 올바른 정치적인 태도를 따지던 차원에서 한 개인의 못 다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두 차원의 간극은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다. 인간이므로 둘 다 필요한 차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차갑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 또한 큰 의미로 비인간적이다.
나는 분명 이것도 곧 잊고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윤미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고 살면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간디가 말하는 행복 – 어쩌다 보니 일기

Happiness is when what you think, what you say, and what you do are in harmony.

행복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조화로울 때이다.

Mohandas Karamchand Gandhi

오늘(2022/07/26) 아침 블룸버그 단말기에서 만난 격언이다.

간디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거짓 없이 말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내면의 평화를 이야기를 한 것일까?

나는 내면의 평화를 말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한다면 적어도 내 안의  모순에 의한 갈등, 번민 등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의 모토 중 하나인 ‘담백하게 살자’와 상통하는 말이다. 내가 아닌 나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부풀리는 일에서 인생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내 생각이 말할 수 있는 생각이어야 한다. 부끄러운 생각, 나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생각과 말이 조화롭게 하는 것은 결국 내 가치관을 올바르게 세우라는 뜻으로 이해 된다.

말이 행동과 조화롭게 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게을러지기 십상이다. 게을러지는 것은 유전자에 박혀 있는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은 정도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의 동물의 뇌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부끄럽지 않은 가치관을 갖고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행동하려면, 깊이 읽고 생각하고, 취하지 않고 (그것이 술이든, 약이든, 허튼 사상이든) 찬 물에 세수한 듯 깨어 있는 채로 살아야 될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실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읽고 생각하고 끄적이는 짓을 반복해서 생각나는 대로 살지는 않도록 하자.

우리 사람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불안감은 아이를 망친다

그 동안 나는 사교육 열풍, 선행학습 등의 비상식적인 ‘교육’ 행태에 대해서 부모의 불안감으로 인한 헛짓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이의 정상적인 정서 발달과 학교 생활 심지어 학업 성취에 있어서까지 역효과가 더 크리라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대학입시에 조차도 효과가 적다는 게 지론이었다. 할 놈은 다 하게 돼 있고, 학교 공부로 부족한 게 있다고 하면 요즈음은 인강이 그렇게 잘 돼 있다는데 우리 때에 비하면 더 쉬운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주 우연히 아내와 대학 입시 제도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현재 입시 제도에 대해서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흔히 말하는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이 부분은 마치 부동산 정책과 같이 손을 쓰면 쓸수록 의도한 바와 반대로 가게 되는 정책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청년들이 왜 공정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납득을 할 수 있을 거 같고, 무식하게 전부 정시로 가자고 하는 주장 또한 납득이 되는 것이다. 그러더니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고, 이런 현실을 모르고 내가 아이를 망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그 헛짓거리 열풍에 참여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으로 괴로웠고 심지어 아내와 약간의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순간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다. 불안감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아직 ‘커서 꿈이 무어냐?’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수시로 바뀌는 시기인데 대학 입시를 위한 총력 모드로 돌입하고자 했다니 말이다. 마치 대학이 인생의 목표이고, 좋은 대학만 나오면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는 식의 태도 아닌가 말이다. 나 스스로 그러한 ‘대학인생결정론’의 피해자이자 반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평소에 생각했던대로, 어느 정도의 좋은 대학을 가고 못 가고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단지 헛짓거리를 이용해서 대학 가는 비중이 높을 뿐이다. 불안할 필요 조차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평생을 되묻고 답하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부질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반대로, 이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은 인생을 버리는 것과 다름 없지 않나 생각한다.
생활이 버거울 때, 사는 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에는 ‘사는 건 하루 하루 충실하게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카르페디엠 모드이다. 간혹 의욕에 넘치고 어렴풋이나마 성취에 대한 희망이 느껴질 때는, ‘내가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달란트 모드라고 부르겠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지만, 내가 겪었던 과정 중에 그나마 긍정적인 상태 두 가지가 카르페디엠하는 상태와 달란트를 추구하는 상태였다.
인생의 시점마다 상황에 따라서 카르페디엠 모드와 달란트 모드를 오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인생의 단계로 봤을 때 어렸을 때는 달란트 모드가 지배적인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도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조언을 해 주는 정도라고 생각해 왔다. 때로 아주 어긋나는 길로 가고 있다면 강하게 막아야겠지만, 어디까지나 부모는 자녀의 인생에 있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러한 생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아이가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지금 시점이야말로 육아가 아닌 인생의 조력자 혹은 멘토로서 부모의 역할이 시작되는 상황이다.
이제서야 느낀다. 역시 현실은 생각과는 다르다. 현실과 가까워지니 아이의 운명을 내가 결정해 주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은연 중에 ‘대학인생결정론’에 기대고 입시에 실패할까 두려워 떠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 없는 행동이다. 깊은 고민 끝에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변호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채 던지지도 않고 자신의 불안감에 휘둘려 행동하는 셈이다.
역시 닥쳐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다.
불안감은 강력한 감정임을 다시 느낀다. 초조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죽음

카톡 메세지로 J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새해 인사려니 했다. 미국에 갈 때 얼굴 한번 보고 간다더니 그냥 훌쩍 떠나서 미안했겠지. 이제라도 안부 물어봐 주니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첫 마디가 너무 슬픈 소식이 있다길래 보통 일은 아니구나 각오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장난을 치더라도 이런 장난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난일 리가 없다.
J와 Y는 입사 동기로 내가 C사에서 막 대리를 달았을 즈음에 입사했었다. 내가 직접 같이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부서로서 꽤나 돈독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C사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고 만났고,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후로는 만나지는 않더라도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Y의 가족 사진을 모 소셜 미디어에서 보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그녀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회사에서 근무 중 쓰러졌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단 한 마디 인사도 못한 이별이다.
살고 죽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일이라니…
언제든 누구나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살아 있는 날들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작별 인사라도 준비할 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잔인한 일이다.
주변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셋 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여성이었고, 아이의 엄마였다. 남은 아이들이 안타깝다. 내가 신이라면 엄마들은 일찍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신이란 걸 믿지 않는다.
몇 년의 작별을 한 사람도 있고, 몇 달을 한 사람도 있었으나 인사를 못하고 떠난 건 처음이다. 부디 남은 아이들과 남편이 상처를 이겨내길 바란다.

도덕적 감수성

프X킷이라는 직구 사이트가 있다.
주로 자덕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인데, 가격은 합리적이지만 배송이 무지 느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아마도 1개월 안에 배송 되리라고 기대하면서 주문하는 자덕은 없을 것이다.
한 번은 간단한 소품 몇 가지를 주문한 적이 있다. 단가는 다 합쳐서 10만원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5만원은 넘었을 듯.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다 돼 가는데도 배송이 되지 않자 몇 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주문을 했었다. 몇 번 이메일이 오간 끝에, 이 상품은 배송 중 잃어버린 것 같다며 환불 처리를 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2개월 가까운 기다림이 쓸데 없는 일이 돼 버렸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살짝 화가 나기까지 했으나, 그래도 큰 회사라고 환불을 쿨하게 해 주는 것이 기특하다고나 할까 그런 묘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 후, 정말로 2개월이 넘어가려는 시점에 물건이 떡 하니 배송이 돼 온 것 아닌가.
물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패키지는 다 뜯어지고 결정적으로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겉표지에는 아마도 우체국이 붙였을 것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물건 상태가 이렇게 된 건 자기네 책임이 아니네 어쩌네 하는 글귀였다.
일단 물건 값은 다 환불을 받았으니 상품의 상태가 엉망이건 말건 별 관심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작동을 시켜 보니 제대로 작동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배터리 들어가는 작은 전자제품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너네가 늦게 보내 주고 상태까지 이런 물건이니 그냥 써 주겠다라고 생각하고 꿀꺽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고서 거의 1년 가까이 흘렀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도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을 훑다가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질문을 올린 것을 보았다.
프x킷에서 배송이 지연 돼 컴플레인해서 환불을 받았는데, 상품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상품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답변들이 한결 같이 돈을 다시 입금해 줘야 된다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비양심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제품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모양으로 도착하긴 했으나, 판매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물에 젖었던 제품일지라도 작동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간혹 작은 이익에 움직였던 기억들이 몇 번 있다.
소탐대실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 약간의 성격 장애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도벽하고 비슷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도덕적인 감수성이 무뎌졌다고 설명해야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닳고 닳은 것인가 때 묻은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아무리 고민해 보면 뭐하나… 생활과 동떨어진 그런 고민들은 허영심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다.) 부끄럽다. 담백하고 단순하고 솔직하게 살자는 게 이리 어렵다.

멘탈관리 팁

소장용

그 중에서도…

학교나 회사에서 눈물날 것 같을 땐 발바닥 귀에 대고 여보세요?하는 상상해 보라.
그래도 눈물 날 거 같으면 반대편 발바닥으로 네 전화 바꿨습니다 하는 상상해 보라.

중2병 라이더의 잡생각

바람은 로드 바이크 속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자출러는 같은 길을 왕복하기 때문에 특히 바람의 영향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앞바람의 고통은 선명한 반면 뒷바람은 인지조차 못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린이 시절에는 뒷바람이 불다가 바람이 잠시 멈췄는데, 갑자기 앞바람이 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인지상정일 수도 있겠다.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오로지 자신의 허벅지 힘만으로 페달질해서 달려오고 있다고 생각하고들 있는 것 아닌가. 아무 소리 없이 밀어 주고 있는 바람 따위는 당연한 일이 돼 버리는 것이다.
바람… 참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나는 라이더이고 내가 의지하고 있는 환경, 사람들은 그저 바람 따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본다. 특히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받고 누려온 사람들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내 이야기가 아닌가 되돌아 본다.

페스트

20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2020년은 아주 먼 미래의 대명사격이었다. 그러니까 2020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전부 하늘로 다니고 로봇이 서빙을 하고 저마다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등…(응?)
그러나 시간은 단절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나 또한 문명 세계에서 21세기를 살아 왔기 때문에 저마다 손에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전염병이다. 혁신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깜짝 놀랄 준비를 하고 있던 자들이 가장 원초적인 미생물들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코로나19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크게 뒤흔들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소설은 오랑이라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화롭지만 삭막한 이미지인 이 도시에 페스트가 발병하게 된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페스트의 발병으로 도시 전체는 폐쇄되게 되고, 시민들은 사실상 유배당한 삶을 살게 된다. 전염병은 도시 전체의 삶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꿔 버린다. 특수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대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엿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페스트라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 같다.
주인공 격인 의사 리외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행위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에게 또 다른 주인공인 타루는 성자가 되는 것보다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것이 더 어렵다고 답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대답보다는 질문을 던져주는 부분이다.

“결국 내 관심사는 어떻게 성자가 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타루가 솔직한 어조로 말했다.
….
“어쩌면요. 그런데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내 생각에 나는 영웅주의와 성스러움에 취미가 없습니다. 내 관심사는 한 명의 인간으로 있는 겁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 그래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야심이 덜하죠.”
-본문 인용-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어려운 대답이다. 인간답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알기 쉽다. 인간답지 않은 것, 참혹한 것, 바로 페스트 같은 것들이 인간답지 않은 것 아닐까?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 와중에 굳이 작중에 인간의 무지를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살던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2차 대전 즈음하여 나치즘이 등장하고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결국에 집권을 하게 되는 과정은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윤리의 문제라는 게 복잡한 것이지만 무지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윤리의 많은 문제의 해결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 안 갈 거야. 너무 어리석은 짓이잖아.’ 그리고 분명 전쟁은 너무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

하지만 서술자는 오히려 이런 훌륭한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악에 대해 간접적이고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일 뿐이고, 또 인간의 행동에서 악의와 무관심이 더 흔한 원동력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술자는 이런 생각에 공감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악은 거의 항상 무지에서 비롯되고, 또 무식한 선의는 악의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입힐 수가 있다. 사람들은 악하기보다는 선하다. 사실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는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며, 바로 이것이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서 누군가를 죽일 권리를 자신에게 인정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분명 가능한 통찰력 없이는 참된 호의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을 것이다.-본문 인용-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 이후의 나치즘의 광기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당시의 페스트였다고 하면 지금의 페스트는 무엇일까?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은 나치즘의 간균이 사회 곳곳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갖가지 혐오가 나치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본문 인용-

여혐, 남혐, 지역 혐오, 외국인 혐오 등등 셀 수 없다. 페스트 간균은 끈질기게 인간들 사이에 숨어 인간성을 말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목적에 부합한다면 페스트 간균을 살포할 준비가 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매우 낙관적인 것이다.
이 쯤 되면, 페스트 간균과 인간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 혐오라고 하는 것이 인간성의 한 부분이고, 인간이 인간성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부분만을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인간으로 살기 어렵다. -네루다. 사람되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등등 인간으로 산다는 문제는 쉽지 않는 것이다.

참혹함의 상대성, 상대성의 참혹함

누군가의 좌절이 내게는 배부른 고민이듯이, 나의 좌절이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고민이겠지.
좌절도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