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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은 아이를 망친다

그 동안 나는 사교육 열풍, 선행학습 등의 비상식적인 ‘교육’ 행태에 대해서 부모의 불안감으로 인한 헛짓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이의 정상적인 정서 발달과 학교 생활 심지어 학업 성취에 있어서까지 역효과가 더 크리라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대학입시에 조차도 효과가 적다는 게 지론이었다. 할 놈은 다 하게 돼 있고, 학교 공부로 부족한 게 있다고 하면 요즈음은 인강이 그렇게 잘 돼 있다는데 우리 때에 비하면 더 쉬운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주 우연히 아내와 대학 입시 제도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현재 입시 제도에 대해서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흔히 말하는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이 부분은 마치 부동산 정책과 같이 손을 쓰면 쓸수록 의도한 바와 반대로 가게 되는 정책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청년들이 왜 공정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납득을 할 수 있을 거 같고, 무식하게 전부 정시로 가자고 하는 주장 또한 납득이 되는 것이다. 그러더니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고, 이런 현실을 모르고 내가 아이를 망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그 헛짓거리 열풍에 참여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으로 괴로웠고 심지어 아내와 약간의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순간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다. 불안감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아직 ‘커서 꿈이 무어냐?’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수시로 바뀌는 시기인데 대학 입시를 위한 총력 모드로 돌입하고자 했다니 말이다. 마치 대학이 인생의 목표이고, 좋은 대학만 나오면 인생을 성공한 것이라는 식의 태도 아닌가 말이다. 나 스스로 그러한 ‘대학인생결정론’의 피해자이자 반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평소에 생각했던대로, 어느 정도의 좋은 대학을 가고 못 가고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단지 헛짓거리를 이용해서 대학 가는 비중이 높을 뿐이다. 불안할 필요 조차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평생을 되묻고 답하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부질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반대로, 이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은 인생을 버리는 것과 다름 없지 않나 생각한다.
생활이 버거울 때, 사는 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에는 ‘사는 건 하루 하루 충실하게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카르페디엠 모드이다. 간혹 의욕에 넘치고 어렴풋이나마 성취에 대한 희망이 느껴질 때는, ‘내가 가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발휘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달란트 모드라고 부르겠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지만, 내가 겪었던 과정 중에 그나마 긍정적인 상태 두 가지가 카르페디엠하는 상태와 달란트를 추구하는 상태였다.
인생의 시점마다 상황에 따라서 카르페디엠 모드와 달란트 모드를 오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인생의 단계로 봤을 때 어렸을 때는 달란트 모드가 지배적인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도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조언을 해 주는 정도라고 생각해 왔다. 때로 아주 어긋나는 길로 가고 있다면 강하게 막아야겠지만, 어디까지나 부모는 자녀의 인생에 있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어려서 이러한 생각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아이가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지금 시점이야말로 육아가 아닌 인생의 조력자 혹은 멘토로서 부모의 역할이 시작되는 상황이다.
이제서야 느낀다. 역시 현실은 생각과는 다르다. 현실과 가까워지니 아이의 운명을 내가 결정해 주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은연 중에 ‘대학인생결정론’에 기대고 입시에 실패할까 두려워 떠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 없는 행동이다. 깊은 고민 끝에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변호하고 싶겠지만, 사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채 던지지도 않고 자신의 불안감에 휘둘려 행동하는 셈이다.
역시 닥쳐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다.
불안감은 강력한 감정임을 다시 느낀다. 초조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교육 문제

문제인 대통령이 어제(10/22) 국회 시정 연설에서 대입 정시 비중 확대를 언급해서 이슈가 되고 있다. 워딩으로 보면 아주 정말 간단히 한 줄, ‘정시 비중 상향’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그만큼 관심들이 많은 사안이다 보니 파장이 작지 않아 보인다. 분명 교육계에서 진행되어 오던 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조율이 제대로 안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진짜로 문재인 대통령이 정시 비중 상향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면, 교육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교육 문제를 이용하여 정치적 실익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육의 선진 사례로 얼마 전까지 핀란드를 많이들 얘기했었다. 아마도 입시 경쟁에 어릴 적부터 치이지 않고 교육의 이상적인 목표, 즉 성인이 되어 충만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준비를 추구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뿐만 아니라, 어떤 기회에서든지 서구에 아이를 보낼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 곳에서는 아이들이 행복해했고 한국 학교에 다시 돌아오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 곳에서는 입시 준비가 아니라 교육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교육 문제의 해법을 논의할 때 제일 먼저 입시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뭔가 좀 이상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상적인 교육인가?
나는 몇 가지 상이한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다 보니 혼란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는 청소년기의 지상 과제라는 전제가 있다. 한국에서 모든 교육은 그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공교육이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공교육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 기관은 목적 자체가 입시이기 때문이다. 목적 자체가 그러하다면, 입시에 대비하는 것은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잘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이런 얘기를 하면, “역시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 “현실을 너무 모른다.” 등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다. 이해는 한다. 다들 한 발자국 앞에서 시작하는데 내 아이만 뒤쳐지는 것 같다는 생각. 공포의 힘은 강력하니까 이해는 한다. (나는 그 안에 탐욕, 선민의식 등 보다 저열한 동기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생부종합전형이라는 제도로 나는 상당 부분 개선이 되어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취지 자체가 학교생활을 충실히 한 자에게 대학을 잘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가장 관심 있는 입시와 연관시켜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그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종 전형의 비율을 유지하고 공정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것이 그 전까지의 기조였는데, 갑자기 정시 비중 확대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 바탕에는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이 포퓰리즘 아닌가?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공정성에 대한 ‘공포’를 조장한 탓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조국 전 장관이었고, 그 이전에는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식 사랑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강력한 감정을 자극 받아 정시 확대 쪽으로 여론은 기울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어떻게 보면 정시 확대 되면 당장 우리 아이들은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순전히 아이들 성향으로 봐서인데, 시험에 잘 적응할 것처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입시 경쟁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다시 없는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팍팍한 것은 모든 국민들이 줄세우기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시나 두서 없지만, 결론적으로 정시 확대는 것은 공교육 정상화로부터 한 발작 멀어지는 길이다. 공정성은 쉽게 확보할 수 있겠지만, 희생하는 대가가 크다. 학원들만 만세 부르겠구나.

나는 1학년 담임입니다.


송주현, 2016.

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지 1년이 되어 간다. 그러니까 교육의 세계를 (육아가 아닌) 맛본 지 1년이 되었다. 갓난이일 때부터 아이들에게 큰 욕심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것 뿐이었지만, 그 내포하는 의미는 계속 변해가고 있다.
어떤 몸이 건강한 몸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별로 없는데, 어떤 마음이 건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시점에서 학교에서 일도 있고 해서 더욱 혼란스러워지기만 하였다. 그러던 중, 발견한 블로그 (여기)그리고 그 주인께서 몇 년 전에 출판한 책까지 집어 들게 됐다.
저자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이다. 지금은 시골에서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아마도 나보다 10년 이상 연배가 높은 것으로 생각 되지만, 여전히 평교사로서 조그만 아이들과 부대끼고 있다.

책은 짤막한 에피소드들로 구성 되어 있다. 하나 하나가 정감이 있고,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시골 학교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의 학교 모습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년 전체가 10명이 안 되는 학교와 30명씩 6반이 있는 학교는 전혀 다른 사회일 것이다. (물론 우리 자랄 때에 비해서는 학생 수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저자는 폭력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한다. 학급 수가 줄고 학급당 인원수가 줄어들면 폭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동의하는 바이다. 폭력은 아마도 하나의 지표일 뿐일 것이다. 다른 정서적인 측면에서 작은 학교에서 공동체 생활을 경험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학급 당 인원수를 줄이고 작은 학교를 많이 짓는 것은 비용 측면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교육만큼 중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싶다.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이런 학교에서 보내면 좀 더 건강한 아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그렇지만 아마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덜 벌고 덜 쓰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아마도 블로그를 통해 처음 세상에 내보낸 글들이기 때문에 가벼운 느낌도 있다. 그리고, 내가 책을 정감 있다고 느끼고 만족스럽게 책을 읽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내 아이의 이야기와 대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책 속에서 내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