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남자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인 선생님이 쓴 페미니즘 입문서 쯤 되겠다. 작은 판형에 두껍지 않은 책이고, 글도 쉽게 쓴 편이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다. 모든 꼰대와 예비 꼰대들에게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저자의 후배가 저자에게 한 말이고, 저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말이다.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지만 혹은 대충 알긴 알지만, 메갈과 김치녀들에게 증오심을 느끼는 한국 남자들이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봐야 되는 이유이다. 적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적어도 개저씨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혹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반페미니즘에 확신을 줄 수도 있겠다만…

악의가 없어도 때로 무지 만으로 나쁜 결과를 낳는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지향점으로 삼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부장제로부터 어떤 억압을 받고 있는지, 그 프레임에 갇혀서는 인지하기 어렵다.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태로는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언행을 하면서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기 쉽다.
사실 많은 남성들이 스스로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차별과 억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복무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잘은 모르지만, 페미니즘의 출발점은 내가 무심코 하는 언행이 오랜 기간 축적 되어 온 억압의 기제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주 반추해 보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인류가 계속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는 방향으로 진보하여 오고 있지만, 가부장제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억압 장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배우고 반성해 봐야한다.
악의가 없이 무지 만으로 해를 끼쳤을 때, 이를 비난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지를 벗어날 기회가 있음에도 귀와 눈을 가리고 무지한 채로 남아 나쁜 결과를 낳는다면 비난받을 만 하다. 공부하자.

건강한 사회는 남의 아픔을 들여다 보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다.

여자라서 겪는 아픔을 들여다 보는 남성이 많아야 건강한 사회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서로의 아픔에 공감고 억압과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는 점에서 페미니즘만이 다른 진보 운동과 다른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 났다고 화를 내면 기분은 좋아지지만 문제는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궁금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여성들도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공부하자.

이 아이가 여자라서 꿈을 꺾지 않고, 여자라서 참지 않으며, 여자라서 자기를 단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딸들의 아빠가 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좀 비겁해 보이기도 하지만, 솔직한 바램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던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므로 관심 있는 척은 했던 것 같다. ‘알았다. 너희 핍박 받는 여성들이여, 내가 연대해 주마.’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 상대적으로 억압하는 자의 위치이므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게 만든 것은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워마드 일당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집회에서 나왔다는 폐륜적인 언행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책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하자는 구호 자체도 납득하기 어렵다. 불법촬영을 규탄하는 게 아니고, 불법촬영 수사를 ‘편파적으로’ 너무 잘한다는 걸 규탄하다니, 서로 공평하게 남성 피해자 사례도 대충 수사하라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가?)
페미니즘에 계보가 당연히 많을테고, 스펙트럼이 넓을 것인데, 어떤 맥락과 역사에서 저런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언행이 용납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남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에 처음 잡은 책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 책은 입문서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 페미니즘의 간략한 역사와 주요 이슈를 짚어 주는 정도의 소책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지 남성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히 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는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 또한 억압과 착취 당하고 있으며, 여성과 남성의 행복을 위해 페미니즘에 동참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워마드로 대표되는 혐오주의자들이 절대로 페미니즘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 시켜 주었다. 나의 혼돈은 해결 되었다. 이번 기회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더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워마드에 감사해야 될 것 같기도 하다.
여담으로, 이 책의 번역은 거의 직역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