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좌절이 내게는 배부른 고민이듯이, 나의 좌절이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고민이겠지.
좌절도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Category: 단상
사람은 왜 무너지는가
스트레스 상황에 몰려 극단적인 생각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때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본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몇몇과 나눈 대화를 보아서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것을 생각해 본 사람의 수는 훨씬 많지 않을까?짐작만 해볼 뿐이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등장인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던 인물이 있었다. 나는 그 인물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인물은 나름의 논리로 자살하는 것인 ‘논리적’으로 맞다고 주장했지만, 꼭 논리적으로 그게 맞다는 것은 아니다.
소멸로 가는 길에 의미가 없다면, 소멸을 택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극단적인 곤경이 자살의 필요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멸로 가는 길에 쌓아 온 것들, 붙들고 있던 ‘의미’가 사라지게 되면 극단적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이 쌓아온 부가 하루 아침에 사라질 때, 남은 재산이 충분히 먹고 살만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소멸을 택할 수도 있다. 부가 그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명성을 쌓은 사람은 어떠한가? 명예에 흠집을 참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경우도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훌륭한 인품을 지녔고, 명예에 난 흠집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타인들이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무엇을 잃었을 때 무너지게 될 것인가? 아마도 5년 전 내 북이 망가질 때, 회사에서 쌓아온 평판이 내게 굉장히 의미 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너질 때 극단적 생각을 한 것이다.
다행히도, 회사라는 조직이 그렇게 큰 의미가 없고, 호구의 책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견딜 수 있었다. 다만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그렇다면 나는 소멸로 가는 길에 무엇을 쌓아 올려야 되는가, 무슨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하는가라는 공허함이었다.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무엇을 쌓아 올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답이었다. Carpe diem. 이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된 듯 하다.
다시 위기가 닥친 지금, 멘탈이 무너지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긍정적이다. 다만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이지만, 육체 노동이라도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몇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밀려낼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며 준비하면 될 것이다.
이제는 주변을 잘 토닥여, 흔들림 없게 하고, 불필요하게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겠다.
담백하게 살기
담백하게 살겠다고 해매다, 달마다 다짐을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담백하게 산다는 것이 득도의 경지임을 깨닫고, 그런 다짐을 한 내가 오만했구나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다시, 담백하게 살고 싶다.
되새김
업신여기지 않고,
업신여김 당할까 겁내지 않고,
담백하게 살자.
담백하게 살기
주기적으로 사단법인 더불어숲으로부터 메일을 받아 보고 있다.
신영복 선생을 기리는 재단인데, 메일 읽을 때마다 ‘샘터 찬물’에 세수하는 듯 정신이 들고는 한다.
巧詐不如拙誠이라는 메세지를 받았다. 그대로 옮기자면, 교묘한 속임수가 졸한 진실만 못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잔머리를 쓰고 똑똑한 척 해 봐야 요새 유행하는 말로 ‘진정성’을 당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하물며 머리도 안 좋은 사람이니 담백하게 살자고 다짐을 매번 하지만, 이리 저리 머리 쓰다가 혼자 괴로워하고는 한다.
다시 찬물에 세수 한 번 하고, 담백하게 살아 보자.
교육 문제
문제인 대통령이 어제(10/22) 국회 시정 연설에서 대입 정시 비중 확대를 언급해서 이슈가 되고 있다. 워딩으로 보면 아주 정말 간단히 한 줄, ‘정시 비중 상향’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그만큼 관심들이 많은 사안이다 보니 파장이 작지 않아 보인다. 분명 교육계에서 진행되어 오던 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조율이 제대로 안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진짜로 문재인 대통령이 정시 비중 상향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면, 교육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교육 문제를 이용하여 정치적 실익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교육의 선진 사례로 얼마 전까지 핀란드를 많이들 얘기했었다. 아마도 입시 경쟁에 어릴 적부터 치이지 않고 교육의 이상적인 목표, 즉 성인이 되어 충만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준비를 추구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뿐만 아니라, 어떤 기회에서든지 서구에 아이를 보낼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 곳에서는 아이들이 행복해했고 한국 학교에 다시 돌아오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 곳에서는 입시 준비가 아니라 교육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교육 문제의 해법을 논의할 때 제일 먼저 입시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뭔가 좀 이상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상적인 교육인가?
나는 몇 가지 상이한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다 보니 혼란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는 청소년기의 지상 과제라는 전제가 있다. 한국에서 모든 교육은 그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공교육이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공교육은 교육을 하는 곳이고,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 기관은 목적 자체가 입시이기 때문이다. 목적 자체가 그러하다면, 입시에 대비하는 것은 공교육보다 사교육이 잘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이런 얘기를 하면, “역시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 “현실을 너무 모른다.” 등의 비아냥이 들리는 것 같다. 이해는 한다. 다들 한 발자국 앞에서 시작하는데 내 아이만 뒤쳐지는 것 같다는 생각. 공포의 힘은 강력하니까 이해는 한다. (나는 그 안에 탐욕, 선민의식 등 보다 저열한 동기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생부종합전형이라는 제도로 나는 상당 부분 개선이 되어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취지 자체가 학교생활을 충실히 한 자에게 대학을 잘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가장 관심 있는 입시와 연관시켜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그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종 전형의 비율을 유지하고 공정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것이 그 전까지의 기조였는데, 갑자기 정시 비중 확대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 바탕에는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이 포퓰리즘 아닌가? 여론이 정시 비중 확대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공정성에 대한 ‘공포’를 조장한 탓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조국 전 장관이었고, 그 이전에는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식 사랑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강력한 감정을 자극 받아 정시 확대 쪽으로 여론은 기울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어떻게 보면 정시 확대 되면 당장 우리 아이들은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순전히 아이들 성향으로 봐서인데, 시험에 잘 적응할 것처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입시 경쟁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다시 없는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팍팍한 것은 모든 국민들이 줄세우기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시나 두서 없지만, 결론적으로 정시 확대는 것은 공교육 정상화로부터 한 발작 멀어지는 길이다. 공정성은 쉽게 확보할 수 있겠지만, 희생하는 대가가 크다. 학원들만 만세 부르겠구나.
말할까 말까…
말할까 말까 고민 되면 하지 말라던데… 그러다 보니 말이 너무 없어지네.
가리봉 시장 – 언니네 이발관
가리봉 시장. 박노해 시에 언니네 이발관이 곡을 붙이고 노래했다.
박노해 시인의 유명한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앨범에 수록돼 있는 곡이다.
여러 음악가들이 참여한 이 앨범의 대부분의 곡은 명곡이라 부를만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해질녘의 가리봉시장의 분위기를 묘사한 가사와 베이스음이 매력적인 곡 분위기가 훌륭하게 어우러진다. 마치 가리봉시장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풍경 속의 등장 인물들이 느끼는 어떤 애환이랄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 것 같지만 낭만인 것도 같고, 함께 느끼게 만든다. 속해 있는 앨범의 다른 곡처럼 치열하지 않으며 잔잔하게 읊조림으로써 더 깊게 여운을 남긴다.
간만에 들은 개소리
‘내 직업은 아가씨가 아닙니다.’ 이게 말이 되냐? 그럼 의사한테 의사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내 직업은 선생님이 아닙니다.’라고 하겠네? 말이 안 되쟎아!
어떤 쓰레기
간만에 적어 두고 싶은 개소리가 있어서 기록해 둔다.
평소에도 주변의 성별이 여성인 직원을 지칭할 때 ‘아가씨’라고 함으로써 불쾌하게 만들고는 했던 인격의 발언이다. (다행히도 호칭할 때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못 봤다. 비겁한 인간이므로 돌아올 반응이 두려웠으리라.)
평소에 ‘모 부서의 아가씨가 이랬다.’라는 식의 발언을 많이 했으므로, ‘내 직업은 아가씨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를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를 위해 저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애초에 그 정도 인격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바이긴 하다. 그러나, 나이와 인간의 성숙도와는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으며, IQ와 인간성은 더욱 더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게다가 스스로 그렇게 논리적이고 똑똑하다는 걸 내세우던 사람이 본인의 방어를 위해 저렇게 허접한 초등학생 논리로 독해를 못하는 척한다는 게 놀랍다. (스스로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똑똑하다는 말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서슴치 않고 말하는 바람에 당혹한 경험이 많다.)
또 한 가지 이 사람의 특징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드는 것을 인류 최악의 악행인 양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아가씨라고 불리우고는 하던 직업의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에 공명하지 못했으리라.
이럴 때마다 소위 보수의 가치라는 것의 민낯이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하고는 한다. 다만 저 인간은 그것을 너무 솔직히 말하는 것일 뿐… (이 주장은 좀 과격하지만, 지금 심정이 그러하므로 기록해 두기로 한다.)
Quote from Band of Brothers
You all deserve long and happy lives in peace. – German gene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