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단상

생활고를 아는 사람은 자유롭기 위해서 돈을 벌고자 한다. 이 경우에 돈을 버는 행위는 미래의 해방을 위해 잠시 자유를 유보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활고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이미 돈으로부터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돈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돈에 구속 되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유롭고 싶어 열심히 돈을 벌다 보면 돈 버는 것 말고는 알지 못하게 되어 돈에 구속 되게 되는 것일까? 복잡하다. 그보다는 ‘돈 맛’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 같다.

부자가 되지도 가난하게 되지도 말라고 하셨다는 전 대통령님 말씀이 이런 뜻인가 짐작해 본다.

돈 맛 말고 사는 맛을 알고 싶은데, 아직 생활고에서 해방되지도 못했다. 가능하기는 한 걸까?

정치와 도덕

두 개의 기사와 그 기사를 접하는 주변 반응에 놀라움과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첫 번째로, 우병우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 됐다.

우병우 구속영장 기각

그에 대한 놀라운 반응 중 하나가,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구속을 피해갔다. 우병우 참 잘한다.’라는 말이었다. 그에 맞장구 쳐서 ‘정치인들 다 해 먹는데, 박근혜는 꼼꼼하지 못했다.’ 라는 말도 한다.

두 번째 기사는 어떤 대기업의 상사 부하 간의 폭행 사건이다.

대기업 술자리 폭행사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상사의 뺨을 때릴 수가 있나? 어린 부하 직원에게 뺨을 맞으면 돌아버릴 것이다. 부하직원을 때린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런 정도의 표현이 가스통 할배나 박사모 수준의 막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내 바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심한 꼴통이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보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사고 체계에는 ‘질서’가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보수의 가치’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실을 매우 왜곡하고 미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강자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일 뿐이다. 가졌고 누리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흔들리려는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마땅히 약자에게 감정 이입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나는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납득할 수가 없다. 내 입장에서는 보수라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두 번째로는 조금 깊이 있게 사유하는 사람은 보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본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기 때문에 보수가 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인간적인 면모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몇 단계의 사유를 통해서 본인의 입장이 강자에게 공감하고 있는 것이며 이기심의 발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자 왈,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나태하다고 했는데 (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우리는 생각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바빠 죽겠는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냐는 듯이 달리기만 하고 있으니, 여유롭게 사색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도 왜 태어났고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서는 몇십년 동안 에너지만 소비하고 엔트로피만 증가시키는 기계와 다른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시집 제페토

출근 길 버스에서 페북질을 하다가 이런 책 소개를 봤다.
시집 제페토
몇 구절 읽다 보니 서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왈칵 북받쳐 오르더라.
호흡은 가빠지고,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그러다 내릴 곳을 지나칠 뻔하여 서둘러 내렸는데, 우산을 놓고 내린 것을 발견했다.
북받친 마음 다 사라지고 대신 짜증이 밀려오는데, 나란 사람 참 가볍고 위선적이구나.

개돼지

교육부 고위 공무원의 발언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잡생각 몇 가지 스쳐 간다.

먼저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된다’라는 발언에 대해서, 그 집단 내에서 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1%일까 10%일까, 혹은 대다수이지만 대 놓고 말하지는 못하는 걸까? 궁금하다.

두 번째로, ‘개돼지’ 발언 듣고 나서 느끼는 감정이 분노가 다는 아니다. ‘먹여만 주면 말 잘 듣는 존재’라는 의미로 개돼지라고 했는데, 먹고사니즘을 아주 과격하게 표현한 것 아닌가? 나는 분노와 더불어 약간의 부끄러움도 느꼈다. 몇 년 전 대선에서, 더러운 줄 알면서도 부자 만들어줄 줄 알고 누군가에게 투표했던 사람들도 부끄러웠을까?

아복기포 불찰노기

아주 예전에 어떤 선배가 해준 말인데 전혀 생소한 말임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我腹旣飽 不察奴飢

내 배가 부르면 종놈 굶주림은 살피지 않는다.

신영복 선생을 만나다.

나의 친구 C모 양의 소개로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체구는 크지 않으셨으나 강인한 기(?) 같은 것인 느껴졌다. 눈빛은 청년처럼 맑았고 표정은 부드럽고 인자함이 느껴졌다. ‘외유내강’이 선생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다.

달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재치 있고 간간히 유머도 섞여 가면서 말씀하시는 스타일이셨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인생 경험 자체가 아주 극단적있고 드라마와 같았기 때문에 그 인생의 단 한 토막을 듣는 것도 사람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어제 강의부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발췌하여 읽기로 하셨나보다. 그 전에 ‘청구회추억’이라는 선생의 글을 동영상으로 편집한 영상부터 같이 보았다.

청구회 추억 동영상 보기

동영상을 보면, 한 청년과 어린이들 간의 따뜻한 우정에 웃음 짓게 되고, 그들을 갈라 놓는 한편으로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폭력적 국가 권력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의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애초에 선생께서는 왜 그 아이들과 친해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 중 누가 지나가는 어린이들을 보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걸까, 열정과 애정이 없는 걸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목이 말해주는대로, 선생님의 20여년의 수감 생활 동안 사색의 결과물이다. 그 시절 감옥에서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필기도구를 소지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오직 한 달에 한번 편지를 교도관의 입회 하에서 쓸 수 있었는데, 이 편지를 이용해서 당신의 생각들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색을 공중에 날려 버리기 싫어서, 한 달 동안 생각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다듬고 문장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편지 쓰는 날이 되면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옮기기만 하면 됐다고 한다. 마치 쏟아내듯이… 그래서 선생님의 편지에는 수정한 흔적이 전혀 없다고 자랑까지 하셨다.
나는 지금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적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어제 했던 생각들은 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처음에 무슨 마음 가짐이었는지 마지막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잡념일 뿐이지만, 그것들 날아가 버리기 전에 붙잡아 두는 것에서부터 내공은 시작되는 것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고 한 줄이라도 남기자는 각오는 계속 정당성을 갖는다.

이번 강의의 주된 텍스트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일부인 ‘한발 걸음’이었다. 간단한 줄거리를 먼저 말하자면, 아주 체력이 좋은 젊은이가 한 발로 뛰고, 늙고 병든 노인이 두 발로 뛰는 시합을 했을 때 다들 젊은이가 이길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노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이 실화를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한 발은 실천, 경험, 현실을 의미하고 다른 한 발은 이론, 사색, 독서 등을 의미한다. 아무리 잘 나고 많이 배우고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반쪽 짜리 절름발이라는 것이다. 실천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는 목발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때 목발이 나의 생발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며 이는 목발 없는 한쪽 발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완전 독립적일 수 없는 존재라고 선생은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천지)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증법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 공부라고 한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말씀은 싸움에서 이길 때 6:4로 이겨야지 8:2로 이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싸움이 끝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야 된다는 말씀이고, 인간 세상에 갈등은 불가피하나 그를 다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걸 가져야 된다는 뜻이겠다.

넥타이 맨 아저씨 주제에 학교 같이 신선한 곳에 간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고, 온 보람을 느꼈다. 게다가 열정, 희망 등의 단어와 거리가 먼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굴레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있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며 합리화하는 일상이다.

이상 좋은 말씀 잊지 않기 위해 두서 없이 적음.

좋은 경험으로 인도해 준 C양에게 감사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