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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그간 전혀 안 읽은 건 아니지만 쓰지 않으니 남는 것이 없어, 한 글자라도 적어 보려고 한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lecture

‘강의’는 얼마 전에 타계하신 신영복 선생께서 성공회대에서 강의한 동양 고전 수업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빠듯한 사람들에게 동양 고전을 얘기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터미네이터의 무대가 먼 미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점에, 수천년 전 세상을 들여다 보자니 한가해 보일 것이다. 방대한 내용을 책 한 권으로 다루려다 보니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 다룰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고전 좀 아는 지성인이라고 뽐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왜 동양 고전을 읽고 가르치고자 했는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관계’ 또는 ‘관계론’이 될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존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사고 방식의 근본은 존재론적 세계 인식이라고 보고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스스로에게 실체성을 부여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야 하고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증식을 위한 경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서양식 사고 방식의 기저라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자본주의는 승리하였고, 그 승리의 엔진은 자본의 자기 증식 욕구였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는 세계화를 통해 20세기의 패러다임 유지해 가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가 말했다. 나 잡아가지 말아 주세요.)
동양의 사고 방식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를 강화하여 지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모순과 갈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가 동양의 ‘관계론’이며, 이 지점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장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군자는 화(和)하고자 하지만 同하려고 하지 않고, 소인은 同하려고 하고 和하지 못한다.)

和한다고 하는 것이 조화롭고자 한다는 뜻이고 同한다는 것은 같고자 한다는 뜻인데, 같고자 한다는 것이 곧 지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많이 이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판단 없는 양비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도 역시 논어의 구절인데, 한번 새겨볼만 하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不如鄉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착한 마을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마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만 못하다.)

조화라는 것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의견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애매하게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보신주의가 팽배한 세상에 다시 되새겨야할 말이다. 중립은 기회주의의 다른 말이다. 당파성 없이 모순을 피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되겠다. 그런데 사는 게 피곤해.
앞서도 말했듯이 바쁜 세상에 동양 고전을 읽는 것이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흔한 상투적인 구절이지만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을 반드시 진보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옛 것을 읽히자는 것이 옛 것을 유지하자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옛 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이고 옛 것의 위에 비판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야 말로 스승의 할 바라고 한다.
최근에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를 읽고 있는데, 놀랍게도 신영복 선생과 통하는 면이 많다. 근대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을테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책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옛 것에서 일종의 힌트를 얻고자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알파고가 관심을 끌면서 앞으로 살아 남게 될 직업군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었다. 기계가 생산성을 극단으로 끌어 올리고 대부분의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게 될 시점에서, 인간의 경쟁력은 인간다움이 될 것이다. 그 중 가장 인간다움의 영역은 윤리와 철학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가치의 판단은 먼 미래까지도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뭐 먹고 사느냐에 관심 갖고 자기 개발서 읽는 것보다 인간다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에서도 나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또 먹고 사는 문제로 연결 시키는 것도 우습긴 하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을 핑계로 앞만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앞이 바로 한 치도 안 되는 코앞이라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잠시 숨 돌려 옛 것을 익히고 먼 곳을 바라 보고, 인간 다움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