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열 살 짜리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한 번도 뵌 적 없는 어머니 모습이다.
어머니는 1949년 전라도 함평 어느 시골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니었다. 첩이었는지 모르겠다. ‘애첩’이라고 하기에는 어머니에게 씨가 다른 언니가 있다는 점이 의아하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어릴 적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늦둥이니까 외할아버지가 요절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씨 다른 언니만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어머니와는 소식을 끊고 살았다.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틈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르지 않으신 외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정도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었다.
어머니의 큰 오빠는 어머니와 20살 가량 나이 차이가 났었다. 어머니가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시기가 되자, 그 오빠의 자식들, 그러니까 조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큰외삼촌은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술이 과했고 도박을 했다. 외할아버지 사후에 집안은 날로 기울었다. 나의 어머니는 기울어져 가는 집의 군식구였던 것이다. 학교 갈 나이가 지났어도 학교에 하루도 가본 적이 없으셨다. 매를 맞는 날이 많았다. 일을 잘 못했거나 아니면 별 이유 없이 억울하게 오빠와 올케에게 매 맞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10세 전후에 가출을 하셨다. 집안일에 실수를 했는데, 매 맞을 일이 두려워 집을 나왔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을 목적지도 없이 먹고 마실 것도 없이 걸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으셨다. 얼마나 처참한 모습이셨을지 보지 않았지만 눈에 그려진다.
피로와 허기에 지쳐 길가에 앉아 울고 계시던 어머니를 우연히 지나던 청년이 발견했다. 청년은 광주에 있는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그 청년을 따라 광주로 오게 됐다. 그 청년이 하숙하던 집에 식모 자리를 구하고 있었고 그 청년은 내 어머니를 그 곳에 맡겼다. 지금으로 치면 범죄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1960년 즈음에는 선의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는 하숙집 식모로 일했으나 억울하게 매 맞거나 굶을 일은 없었다. 하숙생 중에는 어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주신 분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신데, 읽고 쓰실 줄 아셨다. 아마도 그 대학생 덕분일 것이다. 광주에서 식모 생활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매 맞으며 사는 것보다는 나았던 셈이다.

어른이 되고 결혼 전까지 어머니는 광주의 대형 제과점에서 일했다. ‘프린스 제과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제과점의 안주인은 내 어머니를 어여삐 보시고 잘 챙겨 주셨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프린스 언니’라는 분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찾아뵌 적도 있었다. 그 때까지는 프린스 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나셨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통점이 있다.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심에도 버림 받고 고아처럼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의지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내 아버지는 여린 분이시다. 내 어머니와 달리 내 아버지는 모성을 그리워하셨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친할머니를 찾아 다니셨다. 장성하고 나서도 술에 취하시면 ‘울 엄니. 울 엄니’하셨다. 여린 분이셨다.
아버지는 졸업은 못했지만 중학교를 다녀본 적은 있으셔서 어머니보다 잘 읽고 잘 쓰셨다. 어머니는 읽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글 쓸 일이 있을 때 난감해 하셨다. 연필을 몇 번 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생 글씨와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아버지께 의지를 하셨던 것 같다.
내 아버지는 흥이 많은 분이다. 즐길 줄 알고 놀 줄 아는 분이셨다. 멋내는 것도 좋아하시고 친구도 좋아하신다. 천성이 선한 분이시고 기회만 주어졌다면 멋진 인생을 사셨을 것 같은 분이다.

나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많은 분이셨다. 아버지는 주방장 일을 하셨으나 자주 주인과 싸우고 일을 쉬셨다. 어머니는 항상 ‘쪼들린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두 분이 결혼하실 때 ‘프린스 언니’는 어머니께 큰 돈을 해주셨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월세로 시작하면 힘드니 전세방을 구해라’라며 주셨다고 하니 큰 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 돈이 사라지는 데는 얼마 안 걸렸으리라 짐작한다.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리어카 포장마차 일도 하셨고 노점에서 고둥, 번데기 등을 파는 일도 하셨었다.
하루는 하교길에 어머니 고둥 장사하시는 자리를 찾아 갔었다. 어머니는 당시 취학 전인 내 동생을 데리고 노점에서 고둥을 팔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가서려는데 어머니는 고둥 다라이를 급하게 챙기시고 동생 손을 잡고 근처 풀숲으로 몸을 숨기시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고 나는 어머니를 찾아 불렀다. 그 때 갑자기 억센 팔뚝이 나타나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계시던 다라이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당시에도 노점 단속을 했던 모양인데, 눈치 없는 내가 어머니 계신 곳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무슨 일인지 이미 아는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억센 남자에 맞서서 알겠다, 가면 될 거 아니냐고 싸우셨고, 나는 어머니 억센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내가 11살 때 수도권으로 이사를 오면서 친척의 도움을 약간 받아 식당을 시작하셨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장사할 줄을 모르셨다. 언제나 쪼들렸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도 아버지는 놀러 나가셔야 했다. 생계를 걱정하고 가게를 지키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영수증을 달라는 손님이었다. 글씨를 써야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게에 있을 때면 영수증 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거들지 않았다.
당시 살던 단칸방은 1층 단독 주택의 옥상에 불법으로 가건물을 올린 것이었다. 집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벽의 재질은 합판에 스티로폼을 댄 것이었다. 스티로폼이 방의 안쪽으로 대어져 있고 다른 특별한 처리를 하지 않아서 내가 주먹으로 툭 치면 안으로 푹 꺼지고는 했다. 그게 재밌어서 벽에 수 없이 구멍을 내었다. 방한이 되지 않았다. 겨울이면 방 안에서 얼음이 얼었다.
그래도 나는 컴퓨터 학원을 다녔었다. 변변한 부엌도 없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을 썼었으나, 단칸방 한 구석에는 자랑스럽게 8비트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그 즈음에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찾아 왔었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내가 외할머니를 뵌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고, 어머니도 그렇게 쌀쌀맞게 대할 수가 없었다. 왜 찾아 오셨는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엄마한테도 엄마가 있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외할머니는 사변 때나 있을 법한 판자집에 살고 있는 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 날 어머니는 슬퍼하시는 것 같았다. 울지는 않으셨다.
식당이 잘 안 되자 아버지는 보험설계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식당 일은 어머니 혼자서 하셨다. 그러다가 무허가 건물이었던 식당 건물이 헐리게 되면서 결국에는 식당도 문을 닫았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다른 식당에 품을 팔러 나가기 시작하셨다. 중간 중간 다른 장사를 시도했으나 모두 잘 되지 않았다. 장사 수완이 있는 편은 아니셨다. 자본이라고는 없었고 남의 돈 쓰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결국에 다시 어머니가 식당에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새벽에 일어나 나와 동생의 아침을 챙기고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챙기셨고 밤 늦게까지 일하셨다. 항상 잠이 부족하셨고 뼈마디가 아프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험하게 일하시는데 아버지는 양복 입고 설계사라고 돌아다니시는 게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아버지 설계사 수입은 당신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아버지 닮아서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다. 그렇지만 염치는 있는 편인가 보다. 어머니 일하시는 것만큼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공부했다.

어머니가 식당 일을 그만하실 수 있었던 것은 환갑이 지나셨을 때이다. 아들들도 가정을 꾸리고 그제서야 남편은 쓰는 것보다 버는 것이 많게 되었다. 어찌어찌 1톤 트럭 한 대를 마련하셔서 화물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적성이 맞았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자유로운 성격의 내 아버지는 제대로 된 가정, 학교에서 길러지지 못했고,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셨던 것 같다. 젊고 흥이 많아 조그만 가게에 머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트럭 몰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을 하신 이후로 어머니는 생계의 부담을 덜게 되셨다. 언젠가 내가 갓 취업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트럭 하나만 해 달라고 하셨었다. 지금까지 어머니 고생만 시키더니 아들 취직하자마자 손을 벌리는 모습에 화를 내고 무시해 버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 있었더라면 그리고 생각이 있었더라면 빚 내서라도 트럭 한 대 해 드렸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는 그만한 빚을 낼 용기도 없었다. 생활고는 손톱만큼 남아 있는 용기도 빼앗아 버린다.
어머니는 평화를 찾으신 것 같다. 그래도 아들들은 무심했고, 어머니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가 화려한 걸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결혼 후에 아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집이 가난해 네게 날개를 달아 주지 못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자꾸 그런 말씀 마시라며 오히려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일하셔야 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와 애틋한 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연민에 가깝다.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급하게 늙어가셨다. 이제 일 하시지 않아도 되니 늙어도 된다는 듯이 급하게 늙어가셨다. 겉모습도 늙으셨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못 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지만, 저런 분들이 오래 사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여느 주말과 다름 없이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 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말 이른 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좋은 소식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다시 전화 드리기로 마음 먹고 받지 않았으나 여러 번 다시 전화가 울렸다.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다. 어머니 관련한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 아버지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의식이 없으시고 119로 응급실로 가고 계시다고 했다. 택시가 잡힐만한 곳까지 가는 데 1시간 가량 걸렸다. 택시를 탄 곳은 양주 시청 근처였다.
택시 안에서 어머니는 뇌출혈이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주에서 고대안산병원까지 꽤 긴 거리였다. 그러나 택시 안에서 보낸 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여러 가지 상상들을 하면서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 병상이 수술실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의식이 없으시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모습은 충격이었다. 정말로 의식이 없으셨다. 눈은 반쯤 뜨고 계셔서 초점이 없다는 것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이미 돌아가신 것처럼 보였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삭발해 놓은 모습에 놀란 것도 같다. 그래도 아직 무슨 일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수술은 두 시간 안 걸렸던 것 같다. 그 사이에 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드셨다고 한다. 나도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으셔도 나는 배가 고프고 잠이 온다. 설렁탕 한 그릇 뚝딱 먹었다. 평소처럼 깍두기 국물도 넣어 먹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설렁탕 한 그릇 같이 먹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도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따로 듬뿍 넣어 드신다. 여태 서로 같이 마주하고 먹은 적 없는데도, 먹는 방법은 똑같다 생각했다. 갑자기 내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초적 욕구가 지배하는 것을 보니 나도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술 후에 담당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조차도 암울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30일 생존률이 30%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슬프다기보다는 분한 감정이었다. 억울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는 것인가 화가 치밀었다. 한 친구는 내가 어떻게 어머니 인생을 평가하느냐고 말했다. 훌륭하게 사셨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며칠이 지난 지금, 나는 어머니 깨어나실 거라고 믿는다. 어설프게 찾아 본 숫자들을 조합해 본 결과 지금 시기까지 더 나빠지지 않으셨으면 깨어나실 가능성이 높은 듯 하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어머니 삶이, 이런 삶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 늦기 전에 글을 쓴다.

여기까지 쓴 후 며칠이 지나 의사를 다시 만났다. 수술 당일에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던 모양이다. 보수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깨시는 건 어렵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동생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큰아들만 어리석게 희망을 품고 있었구나.

어머니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 다 쓰고 보니 어렵게 사셨다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연들 모르고 그냥 아무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잊혀지기에는 억울하다. 비참한 환경에서 평범한 아들 둘 부족한 것 모르게 키워낸 것만으로도 훌륭한 삶이시다. 그리고 아들 둘 기른 것만이 어머니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많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해서 우리 어머니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태원 할로윈 사고

일요일 오전 늦잠 자는 중 걸려 온 엄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카톡방에 보니 동생이 ‘이태원 사고 때문에 전화하셨었어요?’ 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마 동생도 전화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이태원 무슨 사고?’라며 좀 뒤져 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응? 압사? 길거리에서??
할로윈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를 뿐더러 인파가 붐비는 곳을 싫어하니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을 상상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양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첫째로 든 생각은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젊든 늙든 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태원이라는 동네였어야 하는가, 그렇게 좁은 공간에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모르겠다. 짐작하기 어렵지만, 짐작해 보자면, 즐기려고 했다기 보다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순전히 사람이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일까? 여튼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젊은 목숨이 사라졌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런데 더 놀랍다고 느낀 것은 누구 하나 모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측이 따로 없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
여기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책임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은데, 사실 이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행사에 (실제로 어떻게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므로 그것이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것 같다. 그렇지만, 미리 통제를 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선택적인 공감에 대한 거부감이다. 분명히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이 사고는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고 뉴스로서 잘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근거 없이 장례비, 위로금 등을 준다고 하고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과도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므로 선정적인 이슈에 과하게 자원이 몰린다면 어디에선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150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는 매년 1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 중 상당 수가 노인 인구이다. 물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방 조치는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과한 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의 본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졸업 후에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상가집, 결혼식 등에서 스쳐간 적만 있었던 후배였지만, 재학 중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던 사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이태원 사고가 갑자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다니.
그가 개인적으로 느꼈을 고통과 회한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하기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한 아이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고통,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차갑게 원칙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효용과 올바른 정치적인 태도를 따지던 차원에서 한 개인의 못 다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두 차원의 간극은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다. 인간이므로 둘 다 필요한 차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차갑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 또한 큰 의미로 비인간적이다.
나는 분명 이것도 곧 잊고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윤미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고 살면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쌍욕을 들은 후의 심리 변화

평소에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자전거 출퇴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이 많다. 하루 약 90분 운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체력이 좋아지지만, 그보다는 정서적인 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사람에 치이거나 운전을 해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거나, 출퇴근이 유쾌한 경험이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자전거 출퇴근은 특히 퇴근길은 일에서의 스트레스를 땀흘리면서 풀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봄이 오면서 자전거 도로가 복잡해지면 다양한 스트레스 요소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자전거 도로는 인도와 엄연히 구분 돼 있지만, 어떤 이는 그게 자전거 도로라고 생각을 못해서 자전거 도로로 산책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갑자기 뛰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들이 가장 스트레스 요소이다. 점점 개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거 같은데, 목줄을 풀어 놓는 경우도 가끔 보고, 그렇지 않더라도 목줄을 길게 늘어 뜨리면 개들이 자전거 도로로 뛰어 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어제 퇴근 길에는 황당하게도, 자전거 도로 양방향을 떡하니 막고 개 주인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그냥 지나가야 되는데, 운동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솟을 때면 꼭 한 마디씩 학 게 된다.
‘길을 이렇게 막으면 어떡합니까? 아.. 씨.’ 라고 말했다. 뒤에 ‘아.. 씨..’는 안 했으면 좋았을텐데, 실수였다. 사실은 아무 말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러고 지나가는데, ‘X발넘이..’ 라는 말이 돌아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상황이지라고 생각하다가. 클릿을 빼고 돌아 보며,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라고 했더니,
‘너만 자전거 타냐?’ 라는 것이다.
왜 욕을 하느냐고 항의를 했어야 되는데,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왜 길을 막았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사실 내가 길을 멈춘 것은 쌍욕을 들었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대꾸 없이 가던 길 왔는데, 끝까지 기분이 좋지가 않다. 원래는 운동을 끝내고 기분 좋은 상태였어야 되는데, 분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제대로 대꾸를 못했나? 왜 같이 쌍욕을 해 주지 그랬나?
그렇지만 이내 거기서 같이 쌍욕을 하는 것은 내 입만 더러워지는 것이다라는 생각까지는 하게 되었다. 잘 참았다. 애초에 길막는 상황 자체에 대해 항의할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뀌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지금 드는 생각은 다른 종류의 좌절감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릇이 작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다.
정중하게 ‘왜 욕을 하십니까?’ 라고 대꾸했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 게 이기는 건데, 아드레날린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사람됨이 부족하다. 천성이 그릇이 작은 것이지만, 지향해야 될 바는 군자가 됨이어야 평균은 될 것 같다.

결론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한 정도 되는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에서는 도덕성이 가장 강력한 힘이다. 아직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나라도 그렇게 되자.

죽음

카톡 메세지로 J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새해 인사려니 했다. 미국에 갈 때 얼굴 한번 보고 간다더니 그냥 훌쩍 떠나서 미안했겠지. 이제라도 안부 물어봐 주니 고마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첫 마디가 너무 슬픈 소식이 있다길래 보통 일은 아니구나 각오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장난을 치더라도 이런 장난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난일 리가 없다.
J와 Y는 입사 동기로 내가 C사에서 막 대리를 달았을 즈음에 입사했었다. 내가 직접 같이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부서로서 꽤나 돈독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C사를 떠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고 만났고,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후로는 만나지는 않더라도 가깝게 지내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Y의 가족 사진을 모 소셜 미디어에서 보았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그녀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회사에서 근무 중 쓰러졌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단 한 마디 인사도 못한 이별이다.
살고 죽는 것이 이렇게 허망한 일이라니…
언제든 누구나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살아 있는 날들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작별 인사라도 준비할 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잔인한 일이다.
주변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셋 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여성이었고, 아이의 엄마였다. 남은 아이들이 안타깝다. 내가 신이라면 엄마들은 일찍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신이란 걸 믿지 않는다.
몇 년의 작별을 한 사람도 있고, 몇 달을 한 사람도 있었으나 인사를 못하고 떠난 건 처음이다. 부디 남은 아이들과 남편이 상처를 이겨내길 바란다.

도덕적 감수성

프X킷이라는 직구 사이트가 있다.
주로 자덕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인데, 가격은 합리적이지만 배송이 무지 느린 것으로 악명이 높다. 아마도 1개월 안에 배송 되리라고 기대하면서 주문하는 자덕은 없을 것이다.
한 번은 간단한 소품 몇 가지를 주문한 적이 있다. 단가는 다 합쳐서 10만원도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5만원은 넘었을 듯.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다 돼 가는데도 배송이 되지 않자 몇 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주문을 했었다. 몇 번 이메일이 오간 끝에, 이 상품은 배송 중 잃어버린 것 같다며 환불 처리를 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2개월 가까운 기다림이 쓸데 없는 일이 돼 버렸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살짝 화가 나기까지 했으나, 그래도 큰 회사라고 환불을 쿨하게 해 주는 것이 기특하다고나 할까 그런 묘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 후, 정말로 2개월이 넘어가려는 시점에 물건이 떡 하니 배송이 돼 온 것 아닌가.
물건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패키지는 다 뜯어지고 결정적으로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겉표지에는 아마도 우체국이 붙였을 것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물건 상태가 이렇게 된 건 자기네 책임이 아니네 어쩌네 하는 글귀였다.
일단 물건 값은 다 환불을 받았으니 상품의 상태가 엉망이건 말건 별 관심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작동을 시켜 보니 제대로 작동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배터리 들어가는 작은 전자제품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너네가 늦게 보내 주고 상태까지 이런 물건이니 그냥 써 주겠다라고 생각하고 꿀꺽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고서 거의 1년 가까이 흘렀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도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을 훑다가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질문을 올린 것을 보았다.
프x킷에서 배송이 지연 돼 컴플레인해서 환불을 받았는데, 상품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상품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답변들이 한결 같이 돈을 다시 입금해 줘야 된다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비양심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제품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모양으로 도착하긴 했으나, 판매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물에 젖었던 제품일지라도 작동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간혹 작은 이익에 움직였던 기억들이 몇 번 있다.
소탐대실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어떤 면에서는 약간의 성격 장애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도벽하고 비슷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도덕적인 감수성이 무뎌졌다고 설명해야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닳고 닳은 것인가 때 묻은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아무리 고민해 보면 뭐하나… 생활과 동떨어진 그런 고민들은 허영심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다.) 부끄럽다. 담백하고 단순하고 솔직하게 살자는 게 이리 어렵다.

동해안 종주기 2020년 6월

동해안 자전거 종주는 최종적으로 3명(나와 내 친구 B군, 그리고 그의 직장 동료 P선생)이 동행하게 되었다.
멤버가 확정된 이후로 이것 저것 미리 준비를 하기는 하였으나, 뭔가 빼놓고 온 것만 같고 괜히 쓸데 없는 짐을 갖고 온 것만도 같았다. (자전거 여행 특성 상 짐은 가능한 줄여야 했다. 부끄럽지만, 새들백에는 담요도 들어 있었다. 고속버스의 과도한 냉방으로 추울까봐 걱정하여…)

모임의 시작은 2020년 6월 11일 목요일 저녁 반포 고속 터미널. 퇴근 후 각자 직장에서 반포 터미널까지 자전거로 집결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국토종주 수첩의 스탬프를 찍기 위해서는 영덕에서 출발하여 고성까지 가는 길이면 충분했지만, 영덕까지 가는 교통편은 일찍 끊기므로 포항에서부터 시작한다.

터미널에서 든든히 저녁을 먹고 대기한다.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여행한다는 경험담은 많이 들었지만 기사님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조언들을 들었으므로, 미리 긴장한 상태에서 버스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버스가 들어오고 기사님에게 최대한 착한 모습으로 인사를 한 후에 자전거 세 대를 싣기 시작한다. 다행히 다른 손님들 짐이 많지 않아 세 대 다 싣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잘 되지 않는다. 버벅이다가 앞 바퀴를 떼고서야 세 대를 겨우 실었다. 결국에 빨리 출발해야 된다는 기사님의 재촉을 피할 수는 없었다.
포항에 도착해서는 가까운 모텔을 찾기 시작했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고 다음 날 해만 뜨면 출발할 생각이었기에 가능한 싼 모텔을 찾았다. 우리의 구세주는 신돈 모텔.

싸지만… 빨리 벗어나고 싶다. 더러운 침대에 누워 있자니 괜시리 서글프다. B군은 편의점이 가깝고 가격이 싸서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만 나는 그냥 야간 라이딩을 시작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12일 새벽 4시에 기상해서 편의점에서 든든히 아침을 먹는다. 며칠 전 동부 7고개에서 봉크 비슷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는 장거리 라이딩하면서 최선을 다해 먹게 되었다.

미리 준비한 같은 GPX 파일을 세 명이 같이 따라 가기로 했다. 포항에서 출발해서는 찻길을 좀 따라가고 시내 길이라 길이 헷갈리긴 했지만, B군이 잘 인도하여 자전거 도로를 찾아냈다. 이제 영덕까지 열심히 달리면 된다.
동해안 종주길 내내 자전거 도로보다는 차도를 많이 탔다. 자전거 도로들이 대부분 노면 상태가 좋지 않았고, 옆에 있는 차도는 오히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쾌적한 경우가 많았다.

영덕까지 가는 길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큰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타게 된다. 길도 다시 찾아볼 겸 편의점에 들렀는데, 자전거가 많이 다니는 해안도로가 아니라 찻길이다 보니 편의점 사장님이 살짝 관심을 보인다.
“어디서 오시는 거에요?”
“저희 포항에서 출발했습니다.”
“포항에서 여기까지요? 대단하십니다. 오늘 울진까지도 가실 수 있겠네요.”
살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첫 날 목표는 최소한 동해, 잘 풀리면 정동진이었다. 로드 자전거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로드 자전거는 훨씬 멀리 갈 수 있다.

영덕이다.
첫 번째 인증 센터는 영덕 해맞이 공원인데 첫 인증 센터라 경황이 없어 사진으로 담을 생각을 못했다. 해맞이 공원을 조금 지나면 이런 조형물이 나온다.

대게가 저렇게까지 신성한 것인가 살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신성하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너무 노골적이라는 점이 예술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있을 뿐이지. 이후로도 삼척까지는 계속 대게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영덕 고래불 해변에서 스탬프를 찍는다.

이제부터 붉은 색 박스만 보면 혹시 스탬프 찍는 포인트가 아닌가 반가워하는데, KT 공중전화 박스가 왜 이렇게 비슷하게 생겼는지…

이 즈음에서 그랜드 슬래머 A형을 만나게 된다. 내 전조등이 자전거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애초에 결합 상태가 어설프더라니…) 뒤따라 오던 라이더 A형이 전조등을 집어 주는 호의를 베풀면서 인연은 시작 됐다. 어차피 같은 길을 가다 보니 중간 중간에 자주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동행을 청하고 4명이 팩이 되었다. 알고 보니 이번 동해안 경북 코스가 국토 종주 그랜드 슬램의 마지막 코스라고 한다. 존경스럽다. 봉크에 처한 B군에게 소세지를 친히 선사하시고 (사실 B군은 소세지를 안 좋아한다고 한다.) 가끔 앞에서 팩을 이끌기도 하면서 초면이지만 라이더끼리의 유대감을 확인하면서 열심히 밟으며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A형과 라이딩 동반하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발생한다. 펑크.

약한 업힐을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뒤에서 뻥하는 소리가 들렸다. 멈추고 뒤돌아 보니 A형이 흠칫 놀란 상태로 멈춰 있길래 A형이 펑크난 줄 알았는데 펑크 주인공은 P선생이었다. 큼지막한 돌덩이를 밟고 펑크가 났고, A형은 돌덩이 파편이 튀어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프로급의 숙련도로 10분만에 펑크 수리 완료. 고난은 있었으나 여행은 순조로울 것이다.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다시 열심히 밟아 울진에서 스탬프 다시 한번. 울진 월송정까지 오면서 너무 페이스가 빨랐던가, B군이 살짝 봉크의 기운이 느껴진다.

소세지 얻어 먹고 기운 내서 다시 달려서 망양 휴게소 인증센터에 도착한다.


봉크의 기운이 느껴져던 B군은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한참 쉬기로 한다.
달리는 스템의 유튜브 채널에서 본 바로는 아주 경치가 좋은 곳이어야 하는데, 이 날 안개가 자욱해서 별로 보이는 것은 없다.
안개 때문에 동해안의 경치를 구경하기는 힘들었으나, 오히려 안개 덕분에 사전에 걱정했던 더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람 또한 뒷바람 불어 라이딩에 이보다 쾌적한 날씨는 없다.
다시 출발.
이 곳은 은어다리. 설마 이렇게 노골적인 은어 모양 다리일 줄은 몰랐다. 이 곳이 경북 코스의 마지막이고, 다음은 강원도로 넘어간다.

경북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자전거 길은 상태가 그리 양호하지는 않았다. 관리 주체가 모호해서 그런가, 과연 자전거길이 맞나 싶은 곳도 더러 보였으나 그렇다고 아주 못 갈 길은 아니고 조심조심 다니면 위험하지는 않겠다. 한 두번 길을 잘못 들어서긴 했지만, 세 명이 같은 지도를 보고 가니 곧바로 바로 잡을 수 있어 크게 시간 낭비하지는 않았다.

동해안 종주길 전반적으로 업힐이 꽤 있는 편이다. 사전에 평지만 있는 코스는 아니다라는 정보는 들었으나 흘려 들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는 잔잔한 업힐이 많다.
이 곳은 강원도로 넘어와 삼척 임원 인증센터 근처이다. 임원 인증센터는 약간의 업힐 구간을 올라선 후에 있다. B군은 이쯤에서 다시 봉크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한참 쉬고 다시 출발.

이제부터는 다들 힘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자주 쉬도록 한다.
한재공원, 추암, 망상해변까지 자주 쉬면서 가니까 갈만하고 날씨도 도와주어 정동진까지 충분히 갈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놓인다. 중간 중간 살짝 어이 없는 길들이 있다. 바닷가라 그런지 모래가 뒤덥혀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길도 있고, 자전거 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급하고 좁아서 끌바를 강요하는 곳도 보인다. 그런 곳을 도전하기보다는 큰 그림을 보고 끌바의 굴욕을 달게 받는다.

망상해병에서 정동진까지는 10여km 밖에 되지 않는다. 200km 넘는 거리를 새벽부터 출발한 자신들에 대한 뿌듯함과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름 진지한 성취감으로 가슴 뭉클해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 숙소와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달린다. 다만, 너무 순조로운 점이 불길히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정동진 다 와 가지는 지점에 예상치 못한 업힐이 나타나는데… 상승 고도 200m 정도로서 어마어마한 업힐은 아니었으나, 기습 공격을 당한 터라 다들 힘들어한다. 그래도 넘는다.
드디어 정동진 도착.


숙소는 ‘1박 3만원’이라는 전광판이 크게 돌아가는 모텔로 정하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자전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많으셨는지 탐탁치 않아 하셨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 주신다.
“그냥 3만원에 해 드릴게요.”
무슨 말이지? 우리는 3만원이라는 전광판을 보고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주말은 3만원이 아닌데, 평일 가격에 해 준다는 뜻이었다. 코로나 여파로 방이 없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먹고 사는 일이라 용서해줄 법도 하지만, 그렇게 커다랗게 3만원이라고 광고를 하고서는 쉴 곳을 찾아온 손님한테 ‘주말은 5만원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을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는 않다.
저녁은 역시 회로 정했다.

이 곳에서 B군께서 이 여행의 첫 번째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바로 회를 앞에 두고 소주를 사양하신 것이다. 오늘 봉크의 기억으로 내일 일정이 부담되는 모양이긴 하나, 과연 기적이라고 말할만한 일이다.
숙소 상태는 포항의 신돈모텔에 비해서는 훨씬 좋다. 이 또한 의견이 갈리는데, B군은 신돈모텔과 큰 차이 없다고 했다. 내게는 감당할 수 있는 경계선의 살짝 위와 아래에 있었던 것 같다. 꿀잠 자고 2일차를 시작하기로 한다.

2일차 아침. 어제와 날씨는 딴 판이다. 안개 따위는 전혀 없이 쾌청하다.

전일 많이 달려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정에는 여유가 있다. 어제처럼만 순조롭다면 충분히 4시 이전에 대진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겠다. 노닥노닥 라이딩을 시작한다.
역시 편의점에서 든든하게 먹고 라이딩을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포대에 도착하는데, 경포해변 인증센터를 찾을 수가 없다. 오르락 내리락 경포해변 주변을 헤매다가 결국 현수막을 하나 찾았다. “임시 인증센터 안내”라는데, 그걸 모르고 서너바퀴 해변을 돌아다녔으니 허탈하다. 우리는 붉은 색 박스만 찾아 다녔으니 찾을 수 있을 리가 있나. 관광 안내소에 설치된 임시 인증센터에서 스탬프를 찍고 이왕 쉰 김에 경포대에서 한참 노닥인다.

전일부터 B군은 안장 높이에 대해서 살짝 불만이 있었는데, 이 즈음에서 거의 2cm를 높이는 결정을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B군은 안장 높이가 너무 낮아서 전일 고전했던 것이었다. 출발 직전에 안장을 바꿨다고 하는데… 역시 중요한 이벤트 전에 장비에 손 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다시 다리를 움직여 북쪽으로 출발한다. 강원도에 들어섰지만, 전날에 비해서 업힐은 거의 없어서 속도는 빠르게 낼 수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양양을 지나는데, 얼마 전 가족들과 하루 묵었던 곳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스 커피 한잔 마시고 사진 찍어 둔다.

지경공원까지 가는 길은 공사로 인해 끊어져 있었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자전거로 가시는 길을 보고 따라 갔으나, 자전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길이라 끌바할 수 밖에 없었다. 지경공원 인증센터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붉은 박스만 있었다. 원래 공원이 있긴 했던 것인가.

동호해변까지 가는 길은 수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증센터는 약간은 쌩뚱 맞게도 동호해변을 지나서 한참을 언덕길을 올라가는 중간에 있었다. 스탬프 한번 또 쾅 박아 주고 다운힐을 내려간 다음 만난 편의점에서 잔뜩 보급을 한 후에 다시 속초까지 열심히 밟는다.
이 즈음부터 다들 컨디션도 괜챃고 길도 평탄한 편이라 꽤 빠르게 속초에 이르렀다. 여기서도 인증센터 찾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경로 파일을 누군가 직접 다녀온 경로를 받아온 게 아니고 스트라바에서 지도 보면서 슥슥 만들었더니 인증센터를 지나치기도 한다.
점심은 속초의 유명한 물회집으로 정했다. 이미 출발 전부터 거기로 정했다. 예전에 설악산 다녀오는 길에 들른 적이 있던 집이다. 당시에는 바닷가에 위치한 집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확장 이전해서 동해안 자전거 종주 코스 가운데에 있다.

사실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즈음이었다고 해 두자. B군이 이번 여행의 두 번째 기적을 보여주는데…

(사진 출처: 달리는 스템 유튜브)
이런 길을 끌바 없이 올라가셨다. 사진상으로는 그 위용을 느끼기 어려운데, 나와 P선생은 저 길을 보자마자 클릿을 풀었다.

봉포해변까지도 크게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첫째 날에 안개가 먼 길 가도록 도와줬다면, 오늘은 화창한 날씨 덕에 관광 모드로 라이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동해안에 수 많은 해수욕장이 있을텐데,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물도 좋아지고 사람도 적어 한산한 느낌이었다. 한 여름에도 이 정도 한산할지는 모르겠으나 가족들과 다시 방문해 보고 싶다.

몇 번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이 날도 순조로운 라이딩이라고 생각했으나 단조로운 여행이 될까 걱정 됐는지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해 주신다.
P 선생의 기재가 다시 말썽을 일으킨다. 어제 한 번 펑크를 경험했는데 또 다시 같은 위치에 펑크가 난 것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펑크가 나서 더 불길히다. 펑크와 함께 가벼운 낙차, 그리고 날렵한 낙법까지 보여주셨다. 펑크 수리한 경험이 이미 있으니 어렵지 않게 튜브 교체할 줄 알았으나, 이상하게도 두번째가 시간이 더 걸렸다. 이것도 역시 불길함.
아니나 다를까 몇 km 못 가서 다시 펑크가 발생한다.

결론적으로는, 1차 펑크 때 이미 타이어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타이어에서 실밥 같은 게 관찰이 됐었으나 간과했고 그게 점점 커져서 사진처럼 도저히 진행이 어려운 상황이 돼 버렸다.
통일 전망대까지는 20km 만 더 가면 될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P선생은 대진 터미널까지 택시로 가고 나와 B군만 라이딩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같이 출발한 일행 중 한 명을 두고 오려니 당연히 마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빨리 마무리하고 대진터미널에서 합류하기 위해 다소 서두르게 된다.
내가 앞에서 끌었고 속도는 상당히 올렸던 것 같다. 자동차 통행이 많은 길을 지나 딱 달리기 좋은 길에 들어섰다. 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길이었다. 갑자기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도로에 SUV 한대가 다가서는 게 보였다. 그러넫 SUV가 속도를 줄일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놀란 나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충분한 신호를 주지 못했다.
결국에 B군과 추돌하는 사고가 났다. (그 SUV는 합류 직전에 급정거를 했다.) B군은 ‘어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낙차를 하고, 나는 겨우 중심을 잡고 낙차를 면할 수 있었다. 속도가 상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브레이크를 같이 잡기 시작한 이후에 추돌하기는 했으나 충격이 상당한 것 같았다. 다행히 계속 라이딩을 할 수는 있었으나 20km/h 속도도 못 쫓아와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평소 가까운 거리 라이딩 같으면 그냥 복귀했을만한 상황인데, 종주 마무리를 해야 되는 상황이라 그러지도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라이딩을 계속했다.
설상가상 이 때 하필 업힐까지 나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넘을 수 있었겠으나, B군 상태로는 쉽지 않아 보였다. 보통은 업힐 나오면 오픈하고 먼저 올라가고는 했으나, 이 업힐은 B군이 앞에 서고 뒤에서 보조 맞춰서 가야만 했다. 더위마저 심해지는 듯 하고,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으나 꾸역꾸역 언덕을 넘어 쉴만한 편의점을 찾았다.
그런데, 편의점에 들어서기 위해 자전거에 내리는 순간 B군이 조금 전 낙차로 인해 뒷바퀴 림브레이크가 틀어져서 브레이크슈가 바퀴에 닿은 상태로 계속 오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20km/h 속도도 못 쫓아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20km/h 속도를 내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이 대목이 B군의 세 번째 기적이다. 낙차한 몸으로 뒷브레이크를 잡은 상태로 업힐을 오른 것이다.
브레이크 조정하고서는 통일전망대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남은 거리를 수월하게 다녀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동해안 종주를 끝냈으나 마무리가 찝찝했다. 부주의로 동료를 낙차 시키고, 모두 다 같이 완주하지도 못하다니…
이제 대진 터미널까지 가서 버스에 잘 싣기만 하면 끝난다.  통일전망대 인증센터에서 대진 터미널까지는 몇 km 되지 않는다. 4시 버스는 충분히 탈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게 도착해서 P선생과 합류할 수 있었다.

버스가 들어오자 급하게 또 싣기 시작하는데, 서울에서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우리 외에도 자전거를 싣고자 하는 일행이 두 명 더 있어서 총 5대를 실어야만 했다. 결국에 나와 B군의 자전거는 겹쳐서 싣고서 출발했다. 대진 터미널을 떠난 버스는 거진에서도 손님을 싣도록 돼 있었다. 당황스럽게도 거진 터미널에서도 자전거를 싣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어서 또 한번 기분 상한 일이 있었으나 어쨌든 서울로 출발한다.

마무리가 이러하니 이틀 간의 좋은 기억들이 다 도루묵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 특별히 큰 자극이 아니라면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 아니던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B군과 P선생의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에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동서울에 도착하여 맥주 한잔 하면서 이틀 간을 되짚어 보며 즐거운 기억을 되새기고 앞으로 있을 더 즐거운 라이딩을 이야기하면서 성공적으로 마지막 장면을 긍정적인 기억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여행을 기획하고 같이 참여하도록 내게 모티베이션을 지속적으로 했던 B군에게 감사드린다. 낙차 충격으로 아직도 고통 받고 있다니 너무 안타깝다. 자전거 빠른 속도로 타는 사람이 아니고, ‘잘’ 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기운 북돋아 주고, 라이딩 내내 분위기 밝게 해 주면서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신 P선생께도 감사드린다. 즐거운 라이딩 쭈욱 함께 이어가길 바란다.

사람은 왜 무너지는가

스트레스 상황에 몰려 극단적인 생각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때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본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몇몇과 나눈 대화를 보아서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것을 생각해 본 사람의 수는 훨씬 많지 않을까?짐작만 해볼 뿐이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등장인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던 인물이 있었다. 나는 그 인물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인물은 나름의 논리로 자살하는 것인 ‘논리적’으로 맞다고 주장했지만, 꼭 논리적으로 그게 맞다는 것은 아니다.
소멸로 가는 길에 의미가 없다면, 소멸을 택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극단적인 곤경이 자살의 필요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멸로 가는 길에 쌓아 온 것들, 붙들고 있던 ‘의미’가 사라지게 되면 극단적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란 말이다.
어떤 사람이 쌓아온 부가 하루 아침에 사라질 때, 남은 재산이 충분히 먹고 살만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소멸을 택할 수도 있다. 부가 그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명성을 쌓은 사람은 어떠한가? 명예에 흠집을 참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경우도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훌륭한 인품을 지녔고, 명예에 난 흠집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타인들이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무엇을 잃었을 때 무너지게 될 것인가? 아마도 5년 전 내 북이 망가질 때, 회사에서 쌓아온 평판이 내게 굉장히 의미 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무너질 때 극단적 생각을 한 것이다.
다행히도, 회사라는 조직이 그렇게 큰 의미가 없고, 호구의 책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견딜 수 있었다. 다만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그렇다면 나는 소멸로 가는 길에 무엇을 쌓아 올려야 되는가, 무슨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하는가라는 공허함이었다.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무엇을 쌓아 올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답이었다. Carpe diem. 이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된 듯 하다.
다시 위기가 닥친 지금, 멘탈이 무너지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긍정적이다. 다만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이지만, 육체 노동이라도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몇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밀려낼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며 준비하면 될 것이다.
이제는 주변을 잘 토닥여, 흔들림 없게 하고, 불필요하게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겠다.

훈련일지 – 하체리드를 못한다

현상:

아이언 드라이버 모두 정타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드라이버는 훅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언은 생크를 내고 있다.

예상 원인:

며칠 전부터 헤드업 하지 않기 위해 어깨 집어 넣는 것에 신경 많이 쓰고 있다. 다시 상체 리드하는 스윙이 나오는 것 같다. 상체 꼬임 유지하면서 내려오는 데 신경을 쓰도록 해야겠다.
전일 연습 때 코킹을 빨리하는 시도를 했다. 생크의 원인이 아닌가 한다. 백스윙 때 뒤로 빠지는 모습이 관찰 됐다.

해결 방안:

백스윙을 일체감 있고 몸통부터 시작하는 데 신경 쓰자. 코킹 위로 올리는 느낌으로 하고 뒤로 빠지지 않도록 하자.
하체 리드하자. Waggle Hit 드릴 해보자.
제대로 맞을 때까지 한번 샷 하고 자세 검토하는 거 반복하자.

하체리드 스윙

서울역 계단

오래 전 부끄러운 일을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불현듯 떠올라 혼자 얼굴 붉히고 마는 일들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으므로, 아마도 의식적으로 꾹꾹 눌러 놓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뇌 어느 한 부분에 상처를 낸 기억일 것이므로 지워지지 않고 내 뜻과 상관 없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그런 것들 하나씩 적어 보려고 한다.

너 같은 애들을 반달이라고 한다며…

1995년 근처라고 생각 된다. 당시는 내가 살았던 하루하루가 부끄러운 나날들이었다.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으나 학교는 잘 나가지 않았다. 운동권 흉내를 내고 싶어서 데모에도 쫓아 다녔으나 구체적인 문제 의식은 별로 없었다. 그저 누구에게라도 풀고 싶은 불만은 조금 있었겠지. 일정한 거처 없이 친구집을 전전해 다녔고,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에는 사나흘에 한번 들어가고는 했다.
무엇보다도 인생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당시 처한 가난에 대해서 과장하였고, 그것을 핑계로 사는 의지를 놓아 버렸다. 인생을 허비한 죄란 그 시절 내게 해당하는 죄목이다.
내 정체를 규정하자면 공부를 안 했으니 학생은 아니었고, 세상을 바꿔 보고 싶었지만 실천은 없었으므로 활동가도 아니었다. 운동권 흉내내는 반(半)동권 정도였겠다.

저것도 인간이라고…

막상 데모대를 따라 다니다 보면 그렇게 열의가 있지도 않았다.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빨리 해산하고 술이나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런다고 바로 세상이 바뀌지도 않을테고, 나는 데모에 나왔으니 의식 있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데모에 자주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별로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처럼 백골단에게 머리 깨질 염려는 거의 없었다. 가끔 지랄탄에 곤혹스럽긴 해도 그 뿐이다. 눈에 띄게 설치지 않는 이상 잡혀갈 염려도 없었다. 물론 잡혀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잡혀간다고 해서 고문을 당하거나 빨간 줄을 그을 염려는 없었다.
그 날도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데모대를 따라 다녔던 것 같다. 늦게 해산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려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기다리다가 계단에 앉아서 쪽잠을 잤다. 일정치 않은 잠자리와 불규칙한 식사 그리고 줄담배로 인해 체력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나 쪽잠을 자는데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나는 데모하고 온 사람이니까, 특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 지나다니는데 불편하니 일어나라는 얘기를 들었다.
한 쪽에서 자고 있긴 했지만, 서울역은 유동인구가 많으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나를 깨운 이의 모습이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나를 깨운 이는 점퍼 차림의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 남성이 입고 있는 점퍼의 한쪽 팔이 비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내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아 씨. 이 옆으로 지나 다니면 되잖아요.”
어떤 사고의 흐름을 거쳐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스스로 너무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잠결에 짜증이 섞여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는 분명히 순순히 자리를 피하려고 했었다. 상대방이 약한 것을 깨닫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
어이 없는 눈빛으로 그 남성은 나를 쳐다 보았다.
“저것도 인간이라고…”
그 남성이 한심한 듯 나를 쳐다 보면서 나즈막히 읖조린 말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라져 갔다.
나보다 훨씬 약한 상대라고 여겨졌던 사람에게서 들은 경멸의 말은 충격이었다.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항상 진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이 내 안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반동권이지 않았나.
그러나 그 때의 충격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가끔 아주 뜬금 없이 아무 맥락 없이 그 남성의 눈빛이 떠오른다. 머리 속 어딘가에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임에 분명하다. 그는 정곡을 찌른 것이다. ‘너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내게 말한 것이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주제에 약자에게만 강하구나. 게으른 줄만 알았더니 비겁하기까지 하구나.
너는 지금 사람으로 살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그 대답에 자신은 없다. 오히려 무뎌진 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은 여전하다. 다만 세상 그런 거 아니겠냐며 어른인 척 하고 그렇게 아파하지는 않는다.
인간으로 살기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