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 Jeremy Rif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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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흔한 미래학의 한 부류가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을 미래 경제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성공을 위한 지식을 주는 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제러미 리프킨이 ‘이제 좀 더 우리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됐다. 그 동안 애썼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제러미 리프킨이 말하는 한계비용 제로의 의미는 결국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말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혁신과 기술의 발전이 극에 달하여 한계 비용이 0에 가까워지면 기업들의 이윤 또한 0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므로 현재와 같은 방식의 경제 시스템은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대안으로서 공유 경제 – 맞는 용어인지 모르겠다 -를 제안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경제 기반은 통신과 에너지 그리고 물류의 기반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패러다임이 달라진다고 한다. 1,2차 산업 혁명은 석탄과 석유라는 에너지원과 철도와 고속도로라는 물류 기반 그리고 전화라는 통신 기반이 갖춰져서 가능했던 일이고, 이 세 가지 인프라는 상호 보완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발전해 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20 세기를 지나오면서 2차 산업혁명은 성숙기를 지났으며, 지금은 3차 산업 혁명기라고 보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에너지, 물류, 통신 모두가 인터넷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3차 산업 혁명의 특징이 바로 공유 경제라고 하고 20세기 자본주의적 패러다임과 대비시켜 보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와 공유 경제의 가장 극명한 특징은 집중과 분산이다. 화석 에너지와 원자력 대신 태양 에너지, 철도와 고속도로 대신 3D 프린팅 (이부분은 살짝 억지 같다), 그리고 통신은 당연히 인터넷. 이들의 특징은 모두 분산이라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 모델도 협동 조합, Prosumer 등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고, 오픈 소스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를 통한 혁신의 사례도 제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런 이런 일들도 가능하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많은 움직임이 있다고 얘기해 주고 있다.

결국에 내가 느끼기에 핵심은 이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부와 에너지를 집중해서 거대한 기업체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고, 그 안에서 혁신을 거듭해서 살아 왔다. 그 결과, 한계 비용이 제로가 될 기반이 갖춰진 지금에 도달했다. 이 시점에 와서는 좀 더 민주적으로 자치적으로 그리고 물질 이외의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더 민주적이고 자치적으로 살지 않고, 지금처럼 앞만 보고 달려서는 앞으로 잘 살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동안 착취해 왔던 지구가 못 버틸 것이다.
덧붙이면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한 것 같다. 소득 20000불 넘어서면 그 다음부터는 소득 대비 행복감이 음의 상관 관계를 보인다고 한다. 굳이 과학적 근거를 대지 않더라도 그러할 것 같다. 더 벌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리고 불행해한다. 자치적인 경제 활동,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감, 창조적인 활동에서 갖는 행복감 등이 내가 생각만 조금 달리 하면 가능한 일들처럼 보인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저자도 expectation이라기보다는 hope에 가깝다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보다 어린 세대들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고 하니 믿어 보고 싶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조금 더 암울해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이 바닥이 아닐까 한다. ‘헬조선’이라고 현실 인식을 냉철하게들 하고 있으니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취직이 안 되는 건 앞으로 당연해질 것인데, 리프킨이 제시하는 미래 이미지에 따르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 물질적으로는 이미 풍요의 시대이고, 굳이 갖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갖고 싶어한다.

미래학자의 책을 읽고, 사는 태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정말 두서 없이 썼는데, 시간 들여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한국사회적기업진흥회
Creative commons
ICA, 국제협동조합연맹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그간 전혀 안 읽은 건 아니지만 쓰지 않으니 남는 것이 없어, 한 글자라도 적어 보려고 한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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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얼마 전에 타계하신 신영복 선생께서 성공회대에서 강의한 동양 고전 수업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빠듯한 사람들에게 동양 고전을 얘기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터미네이터의 무대가 먼 미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점에, 수천년 전 세상을 들여다 보자니 한가해 보일 것이다. 방대한 내용을 책 한 권으로 다루려다 보니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 다룰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디 가서 고전 좀 아는 지성인이라고 뽐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왜 동양 고전을 읽고 가르치고자 했는지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관계’ 또는 ‘관계론’이 될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존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사고 방식의 근본은 존재론적 세계 인식이라고 보고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스스로에게 실체성을 부여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야 하고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증식을 위한 경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서양식 사고 방식의 기저라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자본주의는 승리하였고, 그 승리의 엔진은 자본의 자기 증식 욕구였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는 세계화를 통해 20세기의 패러다임 유지해 가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가 말했다. 나 잡아가지 말아 주세요.)
동양의 사고 방식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를 강화하여 지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모순과 갈등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가 동양의 ‘관계론’이며, 이 지점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장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군자는 화(和)하고자 하지만 同하려고 하지 않고, 소인은 同하려고 하고 和하지 못한다.)

和한다고 하는 것이 조화롭고자 한다는 뜻이고 同한다는 것은 같고자 한다는 뜻인데, 같고자 한다는 것이 곧 지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많이 이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판단 없는 양비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도 역시 논어의 구절인데, 한번 새겨볼만 하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마을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좋은 사람 아니다.)
不如鄉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착한 마을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마을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만 못하다.)

조화라는 것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내 의견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애매하게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는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보신주의가 팽배한 세상에 다시 되새겨야할 말이다. 중립은 기회주의의 다른 말이다. 당파성 없이 모순을 피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되겠다. 그런데 사는 게 피곤해.
앞서도 말했듯이 바쁜 세상에 동양 고전을 읽는 것이 한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흔한 상투적인 구절이지만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을 반드시 진보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옛 것을 읽히자는 것이 옛 것을 유지하자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옛 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이고 옛 것의 위에 비판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야 말로 스승의 할 바라고 한다.
최근에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를 읽고 있는데, 놀랍게도 신영복 선생과 통하는 면이 많다. 근대를 지나오면서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을테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책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옛 것에서 일종의 힌트를 얻고자 하고 있다.
얼마 전에 알파고가 관심을 끌면서 앞으로 살아 남게 될 직업군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었다. 기계가 생산성을 극단으로 끌어 올리고 대부분의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게 될 시점에서, 인간의 경쟁력은 인간다움이 될 것이다. 그 중 가장 인간다움의 영역은 윤리와 철학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가치의 판단은 먼 미래까지도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뭐 먹고 사느냐에 관심 갖고 자기 개발서 읽는 것보다 인간다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에서도 나을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또 먹고 사는 문제로 연결 시키는 것도 우습긴 하다.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을 핑계로 앞만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앞이 바로 한 치도 안 되는 코앞이라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잠시 숨 돌려 옛 것을 익히고 먼 곳을 바라 보고, 인간 다움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트 러셀

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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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모음이라 관통하는 주제를 찾기 어려운 듯도 보이나, 한 마디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류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러셀의 고민이다.
러셀의 30년대 고민과 제안이 우리 세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듯 하다. 그의 통찰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적어도 한국 사회는 러셀 생존 시기보다 풍요로워진 것 같지 않아 안타깝고 세월호 참사와 맞물려 참담하기도 하다.

경제학의 향연

경제학의 향연 – 폴 크루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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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3

반성하고 연마하자.
제목으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라고 말한 것은 클린턴이 말한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거시 경제에 대해서 기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장을 본다며 했던 무의미한 행동들에 대한 반성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시 경제가 정치가들에게 어떻게 받아 들여지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성하는 것이 옳겠다.

좀 알고 얘기해라.
책의 핵심을 몇 줄로 줄일 수 있을 듯 하다. 레이건에서부터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사이비 경제학이 대중에게 잘 먹힐 단순한 논리를 들고 나와 정치에 활용 되고 정책을 좌지우지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사이비 경제학에 기반한 경제 정책이 미국 경제에 치명타를 주지는 않았지만, 올바른 경제 정책을 펼치는 데 장애가 됐던 것은 분명하니, 좀 경제 좀 제대로 알고 경제를 얘기하라는 것 쯤 되겠다.

경쟁력?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정부를 겪은 우리 입장에서는, 전략적 무역론자들에 대한 비판에 감정이입이 될 수 밖에 없다. 비유라는 것은 설득력 있지만 위험하다. 국가는 기업이 아니고, 무역은 에이매치가 아니다.
전략적 무역론자들이 보호 무역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은 자연스럽게 자유 무역 쪽으로 손을 들게 될 수 밖에 없으나, 그렇게 전개 되는 이야기에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 단순화된 사례에서 한 나라의 번영은 국가 간의 상대적인 경쟁력에 상관 없이 그 나라의 생산성에만 좌우된다고 했다. 이런 논리의 핵심은 비교 우위에 의한 무역을 통해 수입국의 복리는 증진될 것이다라는 것이데, 현실에서는 무역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산업 간의 마찰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개인적으로 보면 일자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현실은 조금 더 미묘하다.

쓰레기 경제학
오히려 공급중시론이라는 경제학은 쓰레기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에 간단하다.

QWERTY 경제학
인간은 모두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한다는 가정에서부터 경제학을 바라 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더구나 이러한 가정이 자유 방임 주의의 근거가 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QWERTY 경제학은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알아 보고 싶은 주제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연에 의해 형성된 조건이 이후 운명을 결정 짓는 경우가 있다는 정도일테다. 나비 효과를 연상하게도 하고, 행동 경제학을 연상하게도 하는 측면도 있고, 흥미를 갖고 읽어볼 만한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