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일기

제주잔혹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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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07, 일요일.
제주로 출발합니다. 불행히도 여행 기간 중 3일 비 소식이 예정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미리 우산을 잘 챙겨 가니, 나는 참 준비가 철저한 인간입니다.
  • 2018/01/08 ~ 09.
제주시에서 1박 후 서귀포 중산간 언저리에 있는 숙소로 어슬렁어슬렁 구경하며 이동합니다.
따뜻한 날씨를 예상했는데, 바람도 불고 기온도 내려가고 있습니다. 사악한 날씨네요.
어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눈이네. 그래도 이 정도면 돌아다닐만 합니다.
내일은 한라산에 갈 예정이고, 모레는 마라도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만, 산간 지방은 대설주의보, 바다는 풍랑 주의보랍니다. 산행도 좌절 되고, 마라도도 좌절 됐지만, 괜찮습니다. 서귀포 시내 관광을 하기로 합니다.
  • 2018/01/10.
눈이 많이 옵니다. 호텔 직원들이 눈 때문에 출근을 못한다고 합니다. 산간지방은 대설 경보, 해안은 대설 주의보입니다. 공항이 마비 됐다고 하네요.
그러나 역시 제주도는 따뜻하네요. 12시쯤 되니 길이 녹기 시작합니다. 조심조심 내려가 보도록 합니다.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에 다녀왔습니다. 다녀오는 길에 장도 좀 보고 오기로 하고 마트에 들렀습니다.
짜증나게도 마트에서 접촉 사고가 났습니다. 주차 공간이 아닌 곳에 주차된 마티즈를 살짝 긁었습니다.
늦으면 길이 얼지도 몰라 걱정이 되기 시작하여 현금 바로 주고 뜨려고 하는데, 보험이 완전 면책이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보험사에 연락하고 기다려 봅니다. 30분 이상 소요된 것 같습니다. 곧 길이 얼것만 같아 걱정이 됩니다.
서둘러 중산간 호텔까지 올라가는데,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길은 이미 얼기 시작했고, 한번이라도 멈추면 못 올라갈 것 같습니다.
아뿔싸. 전방에 눈길에 미끄러진 차들이 엉켜 있습니다. 이미 접촉사고 나 있는 상태고, 차량 대여섯대가 앞뒤로 몰려 있습니다. 망했다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습니다. 차가 멈춰 버렸으니 이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바퀴는 헛돌고 엑셀을 밟으니 옆으로 돕니다.
다행이 바로 옆에 교회가 있고, 그 앞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차를 밀어서 기적적으로 평지에 차를 댔습니다. 주님의 은총이죠.
5시 30분. 이제 곧 해가 질테고, 숙소까지는 1.5km 오르막에 1.0km 평지가 남았습니다. 내려가서 다른 숙소를 잡으러면 2.0km 내려가서 택시 잡아서 중문이나 서귀포 시내로 가야 하는데, 택시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호텔에 전화를 걸었더니 도울 방법이 없다고 하고, 렌트카에서는 견인차를 불러야 되는데, 제주 전역에 품귀라 언제 구할지 알 수 없고 가격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합니다.
해가 질 거 같아 더 판단을 늦출 수가 없어 급히 걷자고 합니다. 걷기 시작합니다.
작은 아이는 업다가 걸리다가 하고 큰 아이는 계속 걸었습니다.
금세 해가 집니다. 눈은 더 거세지고 앞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간간히 내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위안이 되지만, 그 차들도 미끄러질가 위태위태합니다.
약 30분 정도 걸으니 호텔에서 연락이 옵니다. 내려갈 수 있는 차를 마련했으니 데리러 온답니다.
15분 후에 마티즈 흰색 한 대가 나타납니다. 심지어 체인도 없습니다. 차가 그것밖에 없다네요.
역시나. 못 갑니다. 이미 이때는 평지를 걷고 있었는데도 못 갑니다.
애들하고 아내는 태우고 저는 뒤에서 다시 차를 밀어서 겨우 출발시켰습니다.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7세, 9세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으나, 그냥 힘들었다고만 합니다.
피어슨이 남극 탐험에 실패하고 조난당해 죽은 위치가 스스로 남겨 놓은 보급 지점에서 불과 150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는 게 생각난 저만 패닉에 빠진 거죠.
지쳐 잠이 듭니다.
  • 2018/01/11
밤새 눈이 왔습니다. 오늘은 좀 눈이 잦아들 거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오전 내내 퍼부었습니다.
12시가 되자 겨우 조금 진정이 되어 차 상태를 보러 갔습니다. 잘 하면 올라오기는 어려워도 내려갈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우선 체인을 구해 보려고 합니다. 3km 이상 걸어서 찾아간 하나로마트에는 체인이 동난지 오래 됐습니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서귀포 시내에도 체인은 전부 동이 나고 체인 구하러 온 사람들만 넘쳐납니다.
겨우 먹거리만 좀 사와서 돌아옵니다.
눈발은 다시 세지지만, 내일은 기온이 올라간다는 예보를 믿고 차는 내일 빼 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눈은 밤새 내렸습니다. 퍼부었습니다.
  • 2018/01/12
오늘은 제주시까지 나가야 됩니다.
눈은 계속 내렸습니다. 도로 상황은 어제보다 훨씬 안 좋습니다.
결국 가족들은 호텔 지원 차를 빌려서 해안가로 내려 보내고 저는 중산간에 서서 주차돼 있는 차를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빠졌습니다.
도전해 볼까. 해보기로 합니다. 이런…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앞뒤로 쌓인 50cm 눈밭에 바퀴가 푹 잠겼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유일하게 옳은 판단을 햇습니다. 견인차를 불러 해안가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차를 몰고 다시 제주시로 향합니다. 돌아오는 길은 해안가로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 2018/01/13
제주시에서 문명을 만끽했습니다.
  • 자! 여기서 저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첫 번째, 대전략의 실패입니다. 비록 산에 가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고 하나 굳이 중산간에 숙소를 잡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15년 전쯤 중산간에서 바라본 풍경이 인상적이었고, 여름에는 항상 바닷가에만 있었다는 게 이유였으나, 겨울에 중산간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두 번째, 리스크 관리의 실패입니다. 기온이 높아서 비 예보가 있었다고는 하나, 섬의 날씨는 마치 금융시장처럼 변화 무쌍한 것. 언제든지 비가 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체인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세 번째,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여 자치 따른는 자들을 더 불안하게 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네 번째, 밸류에이션의 실패입니다.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차와 미리 예약한 숙소를 포기하고 즐긴 후에 생각해 봐도 됐엇지만, 혹시나 날씨가 나아질 거라는 기대로 버텼습니다. 물론 일기 예보 상으로 10일보다 11일이, 11일보다 12일 날씨가 좋았지만, 사실은 반대로 실현되었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안전마진을 확보하지 못한 프라이싱의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실책은 순간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니다.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즐거웠습니다. 폭설에는 눈사람 만들고 눈장난을 하고 지겨워지면 수영장에서 즐겼습니다. (수영장은 매우 좋았습니다.) 휴가란 게 특별한 게 아니라 가족과 같이 시간 보내는 의미가 가장 클텐데, 5분 간격으로 날씨 확인하고 창 밖에 쌓인 눈을 보며 걱정하는 모습 좋지 못했습니다.
힘 빼고 살자고 다짐한지 오래 됐지만, 아직도 힘이 안 빠집니다. 하루하루 충실히 즐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