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기억해 둘 것

  • 노벨 경제학상 2024년

    노벨 경제학상 2024년은 ‘Why nations Fail?’의 저자들에게 돌아갔다.

    ‘국가’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 제도, 사회 제도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깊이 공감하여 기록을 남겨 놓은 바 있다.
    Why nataions fail?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명한 이야기라 노벨상 받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벌써 5년 전에 적은 이야기이다. 중국에 대한 부분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워낙 덩치가 큰 나라이다. 함부로 예견할 일은 아니다.

    한강의 소설을 읽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기다리면서 이 책 한 번 읽어 보시라.

  • 안양 부산 무박 종주 후기

    2년 전 – 장거리는 안 타나?

    약 2년 전, 2021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싸 안양방에 열심히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중간 보급지에서 샤콘느 형님이 물으셨다.

    “압지는 장거리는 안 타나?”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장거리 타는 거 좋아합니다. 200km 정도는 가끔 타지요.”
    “아니, 장거리는 안 타냐고..”
    “??????”

    보통 사람이 탈 수 있는 한계가 200km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옆에 있던 소가 거들었다.
    “조만간 안부 한번 올릴게요.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안부가 뭔가요?”
    “안양 부산이요.”
    “아. 국토 종주하는 거군요? 보통 2박 3일 하죠?”
    “아뇨. 우리는 당일치기 해요.”

    뭐야. 이 사람들… 이상해.
    21년 10월에 소의 안부 벙이 올라 왔으나, 아직 코로나 시국이고 해서 참가자가 부족으로 성사 되지 못했었다. 어차피 나는 참가할 엄두를 못 냈었던 때였다.

    2개월 전 – 훈련의 시작과 추노

    23년 7월 중순. 이번에는 쇼님(소님 아니고)의 안부 계획이 공지 되었다. 진짜 ‘장거리’에 굶주렸던 사람들이 모여 훈련이 시작 되었다. 나는 참석 못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부러워하고만 있는 와중에, 다들 체계적으로 거리를 늘려 가며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2차 훈련이 끝나고 3차 훈련 즈음에 상황이 바뀌어서 슬쩍 중간 합류 가능을 물었더니 고맙게도 받아 주셨다. 막상 참가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훈련량 부족인 것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러나 이 정도 뭐 금세 따라잡을 줄 알았다. 올해 마일리지가 되는 편이니까 잘 될 거다 생각했다.
    3차 훈련, 서울 300 코스. 진심으로 라이딩 중 토할 뻔 했다. 이거 큰일이다. 훈련 상태가 다들 장난 아니다. 훈련량도 부족한 주제에, 살살 끌어 보고자 교만했었다. 살아 남는 것을 목표로 수정. 훈련량을 추노하기로 한다.

    D-7

    다급한 마음으로 몸 관리에 들어간다. 하필 비가 와서 실전 훈련이 안 된다.
    주말 동안 즈위프트 100km 1회, 160km 1회로 훈련했다. 이것으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까…
    술도 안 마시고, 일도 잘 안 하고, 긴장 타면서 몸관리를 했다. D-5일부터 기상 시간을 1시간씩 앞당겨 22일은 새벽 3시 기상했다. 멍때리다 아침 회의 안 들어간 건 비밀.
    D-3일부터는 탄수화물을 달고 살았다. 살아야 되니까, 최선을 다해 먹었다. 결과는 D-1일 평소 몸무게보다 3kg 증가. 원래 고무줄 몸무게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로딩 됐겠지.

    D-Day 새벽 01:30 – 와이프 찬스를 쓰다

    라이딩의 성패는 모닝 경량화에 있는 법. 처절하게 실패했다. 0%.
    비우지는 못했지만 다시 피자와 스파게티를 입에 처 넣는다. 살아야 되니까…
    모임 장소인 인덕원까지는 집에서 자전거로 22km 정도이다. 평소 주말 라이딩 같으면 그냥 자전거 몰고 오겠지만, 생존이 목표이므로 와이프 찬스를 썼다. 01:50 와이프를 깨우고 차에 자전거를 싣고 인덕원을 출발. (마눌님께 충성! 충성! 충성!)
    02:30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의 서포터 꾸숑 형님과 도채가 와 있다. 2등.

    자전거는 못 타도 집합은 빨리

    “이 순서대로 부산 들어갈 거다!” 꾸숑형님 말씀해 주셨지만, ‘형님 저는 오늘 겸손한 라이더입니다.’라고 생각했다.
    다들 긴장하셨는지 집합 시간 한참 전에 도착하시고 (이 정도 거리는 껌이신 봄날 형님만 여유 있게 딱 맞춰 오심) 번짱 쇼사마님의 간단한 브리핑 후 03:00 정시 출발하였다.
    드디어 Grand Depart!! 2년 전에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무리에 내가 끼게 된 것이다.

    13명 모두 정시 도착, 정시 출발
    Grand Depart!

    안양에서 여주까지.
    75km.
    03:00 출발. 05:45 도착.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아직 도심이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소의힘, 쇼사마, 레이닝, 요나스 등 강력한 말들의 안정적인 리드로 편안하게 달릴 수 있었다. 이 정도 페이스면 딱 좋다. 완주할 수 있겠다. 자신감도 좀 생기지만 이러다가 오버하면 큰일이니 흥분하지 않도록 한다.

    꾸숑 형님의 서포트 덕분에 더욱 차량 위협은 크게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길이 어두울 때 상향등으로 앞을 비춰주는 센스까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꾸숑 형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린 모양인데, 그 이후로 팩을 놓치신 모양이다. 게다가 길까지 잘못 들어서 결국에 합류한 지점은 1차 보급지인 여주 휴게소였다.
    여주 휴게소까지는 수월하게 온 편이다. (당시에는 힘들었으면서 지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글로 쓰니까 75km가 순식간이구나. 그러니까 자전거 또 타러 나가지.)

    보급지에서 파랑나사는 똥참치 신화의 시작을 알리는 첫 경량화를 성공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급은 생략한다. 봐주는 거 없이 보급 못했다고 해도 그냥 출발한다. 그렇지만 조금 부럽다. 보급보다 경량화 성공이 이득인 것 같다.

    토막 상식: 참치는 멸치와 반대로 덩치 큰 라이더를 말한다. 참치는 의외로 빠르다.

    파랑나사는 어디에?

    여주에서 조령까지.
    82km, 누적 157km.
    06:00 출발. 08:50 도착.

    기온이 올라가 주유소에서 바막을 벗고 잠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와중에 누군가는 2차 경량화를 성공했다.

    여주 휴게소를 출발하고 조금 달리다 보니 해가 뜨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조금씩 로테를 돌았다. 다들 폼이 괜찮은 것 같다. 누구 하나 페이스 떨어뜨리는 사람이 없다. 간혹 페이스를 너무 올리는 말이 나타나면 곧바로 제어 들어간다. 3차에 걸친 연습 라이딩을 통해 말 관리 노하우가 생긴 듯 하다. 노련하다.

    다음 보급지인 조령휴게소가 가까워지자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근 최상의 폼을 자랑하고 계시는 요나스 형님은 지치지 않는 페이스로 치고 나가기 시작하시고 마침내 소조령 터널 안에서 팩이 갈라졌다. 꾸숑 형님께서 ‘후미 쳐졌어!’라고 소리 치셨지만, 다들 너무 힘들어지면서 말 관리할 여력이 없나 보다. 다행히 갈라진 팩은 레이닝형님이 수거하셔서 무사히 조령 휴게소까지 도착했다.

    끌어재끼시는 요나스형님.
    수거 담당 레이닝 형님과 수거 당하는 연비. 그러나 수거 당하는 연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조령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조령휴게소는 맛집휴게소이다. 자덕한테 맛집 추천 받지 말라던데…
    꾸숑 형님의 서포트는 여기까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형님과는 작별했다. 형님의 이 은혜를 어찌 갚나.

    아직 절반도 못 왔지만, 이제 로동당사 다녀오는 정도만 타면 도착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놓인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렇게 위안을 삼아 본다.

    조령휴게소에서 의성 봉평면.
    88km 누적 245km.
    09:50 출발. 13:05 도착.

    다음은 계획 상으로 가장 긴 구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령, 이화령을 넘어간 구긴이기 때문에 다행히 대부분 다운힐이다. 그러나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바람 방향도 살짝 역풍인 것 같다. 쉽지 않은 구간이 예상된다.

    이번 라이딩의 유일한 아쉬움. 낙차.. 204km 지점

    예천에 접어 들어 다운힐을 하는데 다운힐 끝에 로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속도가 조금 빠른 듯 싶었고 로타리가 각이 급해 불안하게 빠져 나오는데 뒤에서 퍽 소리가 들린다. 보지 않고도 낙차인 걸 알고 선두를 불렀다. 우리의 에이스 1번말 요나스 형님께서 슬립으로 낙차하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전거가 거의 전손 되면서 모든 충격을 떠안고 형님은 크게 다치진 않으신 점이다.
    체력 떨어진 시점에 다들 각성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아쉽지만 요나스 형님은 콜택시를 불러 복귀하실 수 밖에 없었다. (복수전 가시죠 형님. 제가 능력은 안 되고 쇼나 소가 복수전 기획할 겁니다. 그렇죠?)

    편치 않은 마음이지만 목표한 바가 있으므로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하고 어찌어찌 다음 보급지에 도착한다. 가장 긴 구간이었으나 중간에 사건으로 인해 잠시 쉰 덕에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다.

    의성 봉평면에서 영천 화산면.
    49km. 누적 294 km.
    13:43출발. 15:38 도착.

    원래 계획은 70~80 km마다 보급이었으나 다들 체력적으로 힘들어진 관계로 50km 보급으로 변경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 동네는 평지라고는 없는 것 같다. 무한 낙타등의 반복. 안장통이 시작되려고 한다. 입문 후에 몇 년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다. 이 즈음에서는 꾸숑 형님도 안 계시고, 다들 힘들어서 사진 한장 찍을 겨를도 없다.
    죽으란 법은 없으니 지점의 보급은 우연히 발견한 중국집. 짜장면 후루룩 마시고 숨 돌릴 틈 없이 다시 출발한다. 역시 편의점 보급에 비해 든든함이 다르다. 힘이 좀 나는 것 같다.

    영천 화산면에서 언양시 모처.
    73km. 누적 367km.
    16:10 출발. 18:43 도착.

    이제 100km만 더 가면 된다. 출발 전에 가장 걱정했던 구간이 이 곳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차량이 많아질 것을 걱정했었다. 운 좋게도 차량도 그렇게 많지도 않다. 감사합니다. 바람도 순풍이다.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신나게 달린 것 같다. 심지어 신호마저 칼 같이 떨어져서 거의 멈춤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힘든 것은 힘든 것. 안장통이 심해진다. 50km 주행 후에 보급지를 애타게 찾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예상보다 늦게 보급지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그만큼 남은 거리가 줄었다.

    언양시 모처에서 부산 노포동까지.
    37km. 누적 404km.
    19:10 출발. 20:33 도착.

    남은 구간 역시 신나게 달린다.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게다가 마지막 업힐 하나만 제외하면 대부분 다운힐이라고 봄날 형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물론 용기를 북돋아 주시기 위한 말씀이셨다. 당연히 낙타등 자그마한 업힐들 넘어야만 했다. 몸은 고통스럽지만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다. 이제 다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벌써 밀려들어 살짝 흥분 상태가 유지된다.
    마지막 남은 힘 짜내 마지막 긴 업힐도 영차영차 올라간다. 그 와중에 우리의 연비는 아직 힘이 남았는지, ‘나는 참치들과 다르다’라고 말하는 듯 마지막 업힐을 날아 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역시 훈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노포동 업힐이 있어 오히려 극적인 라이딩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관문을 쉽게 내줄 수 없다는 듯 긴 업힐. 업힐이 끝나는 시점에 나타나는 ‘부산광역시’ 표지판이 극적인 효과를 더해 감격스럽다. 이게 별거라고 이정표 앞에서 너도 나도 사진 찍다가 번짱의 채찍질에 마지막 다운힐을 하고 라이딩은 끝이 난다.

    임무 완료!

    이후

    열심히 끌어주시기만 하시던 소님께서는 저녁도 못 드시고 익일 출근을 위해 올라가야만 했다. 아쉬움. 우리도 식당을 찾아 약 2km를 다시 자전거로 이동해서 삼겹살 집을 찾아 폭풍 흡입을 했다. 폭풍 흡입을 하긴 했지만, 자덕에게 맛없게 느껴지는 식당이라니… 다시 자전거로 터미널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몇 잔 마시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 뒷풀이를 기대해 본다. 숙박을 하시며 2차를 달리실 형님들을 뒤로 하고 복귀파들은 다시 터미널로 향하고 버스 시간까지 긴 기다림에 들어갔다. 편의점에서 편맥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은 23시가 넘으면 무인 점포로 전환 되면서 맥주 판매가 중단 된다. 내가 맥주를 집어 든 시간은 23:02였다. 술 그만 먹고 얌전하게 올라가라는 계시였던 거다.
    벅찬 마음으로 버스에 오르자 마자 골아 떨어지고 긴 여정은 끝났다.

    나 자신이 부산을 무박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맺으며

    어려운 행사 준비해 준 쇼사마님께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모범이 돼 주시는 샤콘느, 마산아재, 코시스 5학년 3인방 형님들 덕분에 즐거운 라이딩이었습니다. 저도 빨리 5학년 돼서 자전거 잘 타고 싶습니다.
    랜도너스의 천상계에서 몸소 인간계에 내려와 주신 봄날 형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이 라이딩할 때마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꿀벅지 널브로 형님, 여전한 클라스! 순간적인 밀바까지 너무 감사합니다.ㅎㅎ 똥참치 파랑나사와 근육참치 도채아빠 덕분에 라이딩 내내 유쾌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라이딩은 레이닝 형님과 소님의 엔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미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비님 총무하느라 고생 많으셨고 날이 갈수록 성장하시니 무섭습니다. 역시 훈련의 힘. 요나스 형님. 힘들게 끌어만 주시고 끝까지 함께 못해서 너무 아쉽습니다. 건강하게 복귀하시길 빌겠습니다. 꾸숑 형님의 감동적인 서포트카 정말 감사 드립니다. 리커버리 잘들 하시고 인간적인 라이딩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 존엄한 죽음

    2023/06/09.
    결국에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3주만이다. ‘모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사는 것, 죽는 것, 죽어가는 것, 살아내는 것… 혼란스럽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신다. 살아 계셔서 고통 받고 있다. 이송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어머니 고통 받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고통은 실재하지만 느끼시지 못한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고통인 것인가.어머니를 보는 내 고통은 실재하고 느껴진다.

    눈 깜박 거리시고 고통스럽다고 눈물 흘리시는 거 같은데, 의식이 없으시다고 한다. 의사들 말이 맞겠지. 만에 하나 착오가 있으면 끔찍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있을까 무섭다. 그 고통을 짧게 해 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 그걸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의식이 없다시지만 어머니도 고통스럽다. 죽음 앞에는 어떤 식으로든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받는 것은 다행인 것인가.

    우리 나라에서는 임종과정에 있는 경우에만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된다고 한다. 임종과정이란 것은 회복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임박한 상태라고 정의되고 있던데, 모호하다. 얼마나 가까워야 임박한 것인가. 확실히 우리 어머니는 ‘임박’한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계속 고통 받으셔야 한다.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요양병원에 모신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어머니를 위한 일은 아니다. 가족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다. 가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과정은 인간답지 못한 일이 아닌가. 존엄한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존엄한 것인지 명확하게 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미 그 선을 한참 넘어섰다.

    이것은 폭력이다.

    다르게 보면 사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이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버려 두고 와서 나는 잘 살고 있다.

  •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열 살 짜리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한 번도 뵌 적 없는 어머니 모습이다.
    어머니는 1949년 전라도 함평 어느 시골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니었다. 첩이었는지 모르겠다. ‘애첩’이라고 하기에는 어머니에게 씨가 다른 언니가 있다는 점이 의아하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어릴 적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늦둥이니까 외할아버지가 요절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씨 다른 언니만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어머니와는 소식을 끊고 살았다. 어머니는 배 다른 형제들 틈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르지 않으신 외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정도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었다.
    어머니의 큰 오빠는 어머니와 20살 가량 나이 차이가 났었다. 어머니가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시기가 되자, 그 오빠의 자식들, 그러니까 조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큰외삼촌은 변변찮은 사람이었다. 술이 과했고 도박을 했다. 외할아버지 사후에 집안은 날로 기울었다. 나의 어머니는 기울어져 가는 집의 군식구였던 것이다. 학교 갈 나이가 지났어도 학교에 하루도 가본 적이 없으셨다. 매를 맞는 날이 많았다. 일을 잘 못했거나 아니면 별 이유 없이 억울하게 오빠와 올케에게 매 맞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10세 전후에 가출을 하셨다. 집안일에 실수를 했는데, 매 맞을 일이 두려워 집을 나왔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을 목적지도 없이 먹고 마실 것도 없이 걸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으셨다. 얼마나 처참한 모습이셨을지 보지 않았지만 눈에 그려진다.
    피로와 허기에 지쳐 길가에 앉아 울고 계시던 어머니를 우연히 지나던 청년이 발견했다. 청년은 광주에 있는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그 청년을 따라 광주로 오게 됐다. 그 청년이 하숙하던 집에 식모 자리를 구하고 있었고 그 청년은 내 어머니를 그 곳에 맡겼다. 지금으로 치면 범죄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1960년 즈음에는 선의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는 하숙집 식모로 일했으나 억울하게 매 맞거나 굶을 일은 없었다. 하숙생 중에는 어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주신 분도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신데, 읽고 쓰실 줄 아셨다. 아마도 그 대학생 덕분일 것이다. 광주에서 식모 생활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매 맞으며 사는 것보다는 나았던 셈이다.

    어른이 되고 결혼 전까지 어머니는 광주의 대형 제과점에서 일했다. ‘프린스 제과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제과점의 안주인은 내 어머니를 어여삐 보시고 잘 챙겨 주셨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프린스 언니’라는 분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 찾아뵌 적도 있었다. 그 때까지는 프린스 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내 아버지를 만나셨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통점이 있다.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심에도 버림 받고 고아처럼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 의지가 됐으리라 짐작한다.
    내 아버지는 여린 분이시다. 내 어머니와 달리 내 아버지는 모성을 그리워하셨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친할머니를 찾아 다니셨다. 장성하고 나서도 술에 취하시면 ‘울 엄니. 울 엄니’하셨다. 여린 분이셨다.
    아버지는 졸업은 못했지만 중학교를 다녀본 적은 있으셔서 어머니보다 잘 읽고 잘 쓰셨다. 어머니는 읽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글 쓸 일이 있을 때 난감해 하셨다. 연필을 몇 번 잡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생 글씨와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아버지께 의지를 하셨던 것 같다.
    내 아버지는 흥이 많은 분이다. 즐길 줄 알고 놀 줄 아는 분이셨다. 멋내는 것도 좋아하시고 친구도 좋아하신다. 천성이 선한 분이시고 기회만 주어졌다면 멋진 인생을 사셨을 것 같은 분이다.

    나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많은 분이셨다. 아버지는 주방장 일을 하셨으나 자주 주인과 싸우고 일을 쉬셨다. 어머니는 항상 ‘쪼들린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두 분이 결혼하실 때 ‘프린스 언니’는 어머니께 큰 돈을 해주셨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월세로 시작하면 힘드니 전세방을 구해라’라며 주셨다고 하니 큰 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 돈이 사라지는 데는 얼마 안 걸렸으리라 짐작한다.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리어카 포장마차 일도 하셨고 노점에서 고둥, 번데기 등을 파는 일도 하셨었다.
    하루는 하교길에 어머니 고둥 장사하시는 자리를 찾아 갔었다. 어머니는 당시 취학 전인 내 동생을 데리고 노점에서 고둥을 팔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가서려는데 어머니는 고둥 다라이를 급하게 챙기시고 동생 손을 잡고 근처 풀숲으로 몸을 숨기시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고 나는 어머니를 찾아 불렀다. 그 때 갑자기 억센 팔뚝이 나타나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계시던 다라이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당시에도 노점 단속을 했던 모양인데, 눈치 없는 내가 어머니 계신 곳을 알려준 꼴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무슨 일인지 이미 아는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억센 남자에 맞서서 알겠다, 가면 될 거 아니냐고 싸우셨고, 나는 어머니 억센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내가 11살 때 수도권으로 이사를 오면서 친척의 도움을 약간 받아 식당을 시작하셨다. 장사는 잘 되지 않았다. 장사할 줄을 모르셨다. 언제나 쪼들렸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도 아버지는 놀러 나가셔야 했다. 생계를 걱정하고 가게를 지키는 건 어머니 몫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영수증을 달라는 손님이었다. 글씨를 써야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게에 있을 때면 영수증 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거들지 않았다.
    당시 살던 단칸방은 1층 단독 주택의 옥상에 불법으로 가건물을 올린 것이었다. 집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벽의 재질은 합판에 스티로폼을 댄 것이었다. 스티로폼이 방의 안쪽으로 대어져 있고 다른 특별한 처리를 하지 않아서 내가 주먹으로 툭 치면 안으로 푹 꺼지고는 했다. 그게 재밌어서 벽에 수 없이 구멍을 내었다. 방한이 되지 않았다. 겨울이면 방 안에서 얼음이 얼었다.
    그래도 나는 컴퓨터 학원을 다녔었다. 변변한 부엌도 없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을 썼었으나, 단칸방 한 구석에는 자랑스럽게 8비트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그 즈음에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찾아 왔었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내가 외할머니를 뵌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고, 어머니도 그렇게 쌀쌀맞게 대할 수가 없었다. 왜 찾아 오셨는지,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엄마한테도 엄마가 있구나’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외할머니는 사변 때나 있을 법한 판자집에 살고 있는 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 날 어머니는 슬퍼하시는 것 같았다. 울지는 않으셨다.
    식당이 잘 안 되자 아버지는 보험설계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식당 일은 어머니 혼자서 하셨다. 그러다가 무허가 건물이었던 식당 건물이 헐리게 되면서 결국에는 식당도 문을 닫았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다른 식당에 품을 팔러 나가기 시작하셨다. 중간 중간 다른 장사를 시도했으나 모두 잘 되지 않았다. 장사 수완이 있는 편은 아니셨다. 자본이라고는 없었고 남의 돈 쓰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결국에 다시 어머니가 식당에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새벽에 일어나 나와 동생의 아침을 챙기고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챙기셨고 밤 늦게까지 일하셨다. 항상 잠이 부족하셨고 뼈마디가 아프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험하게 일하시는데 아버지는 양복 입고 설계사라고 돌아다니시는 게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아버지 설계사 수입은 당신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아버지 닮아서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다. 그렇지만 염치는 있는 편인가 보다. 어머니 일하시는 것만큼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공부했다.

    어머니가 식당 일을 그만하실 수 있었던 것은 환갑이 지나셨을 때이다. 아들들도 가정을 꾸리고 그제서야 남편은 쓰는 것보다 버는 것이 많게 되었다. 어찌어찌 1톤 트럭 한 대를 마련하셔서 화물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적성이 맞았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자유로운 성격의 내 아버지는 제대로 된 가정, 학교에서 길러지지 못했고,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셨던 것 같다. 젊고 흥이 많아 조그만 가게에 머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트럭 몰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을 하신 이후로 어머니는 생계의 부담을 덜게 되셨다. 언젠가 내가 갓 취업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트럭 하나만 해 달라고 하셨었다. 지금까지 어머니 고생만 시키더니 아들 취직하자마자 손을 벌리는 모습에 화를 내고 무시해 버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여유 있었더라면 그리고 생각이 있었더라면 빚 내서라도 트럭 한 대 해 드렸으면 어땠을까 후회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는 그만한 빚을 낼 용기도 없었다. 생활고는 손톱만큼 남아 있는 용기도 빼앗아 버린다.
    어머니는 평화를 찾으신 것 같다. 그래도 아들들은 무심했고, 어머니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가 화려한 걸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결혼 후에 아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집이 가난해 네게 날개를 달아 주지 못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자꾸 그런 말씀 마시라며 오히려 짜증을 냈다.
    어머니는 일하셔야 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와 애틋한 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연민에 가깝다.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급하게 늙어가셨다. 이제 일 하시지 않아도 되니 늙어도 된다는 듯이 급하게 늙어가셨다. 겉모습도 늙으셨을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못 사실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지만, 저런 분들이 오래 사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여느 주말과 다름 없이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 중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말 이른 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좋은 소식일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 받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다시 전화 드리기로 마음 먹고 받지 않았으나 여러 번 다시 전화가 울렸다.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다. 어머니 관련한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 아버지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의식이 없으시고 119로 응급실로 가고 계시다고 했다. 택시가 잡힐만한 곳까지 가는 데 1시간 가량 걸렸다. 택시를 탄 곳은 양주 시청 근처였다.
    택시 안에서 어머니는 뇌출혈이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주에서 고대안산병원까지 꽤 긴 거리였다. 그러나 택시 안에서 보낸 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여러 가지 상상들을 하면서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현실감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 병상이 수술실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의식이 없으시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모습은 충격이었다. 정말로 의식이 없으셨다. 눈은 반쯤 뜨고 계셔서 초점이 없다는 것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이미 돌아가신 것처럼 보였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삭발해 놓은 모습에 놀란 것도 같다. 그래도 아직 무슨 일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수술은 두 시간 안 걸렸던 것 같다. 그 사이에 아버지와 함께 점심을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드셨다고 한다. 나도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으셔도 나는 배가 고프고 잠이 온다. 설렁탕 한 그릇 뚝딱 먹었다. 평소처럼 깍두기 국물도 넣어 먹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설렁탕 한 그릇 같이 먹은 기억이 없다. 아버지도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따로 듬뿍 넣어 드신다. 여태 서로 같이 마주하고 먹은 적 없는데도, 먹는 방법은 똑같다 생각했다. 갑자기 내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초적 욕구가 지배하는 것을 보니 나도 아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술 후에 담당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조차도 암울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30일 생존률이 30%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슬프다기보다는 분한 감정이었다. 억울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는 것인가 화가 치밀었다. 한 친구는 내가 어떻게 어머니 인생을 평가하느냐고 말했다. 훌륭하게 사셨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며칠이 지난 지금, 나는 어머니 깨어나실 거라고 믿는다. 어설프게 찾아 본 숫자들을 조합해 본 결과 지금 시기까지 더 나빠지지 않으셨으면 깨어나실 가능성이 높은 듯 하다.
    그럼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어머니 삶이, 이런 삶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 늦기 전에 글을 쓴다.

    여기까지 쓴 후 며칠이 지나 의사를 다시 만났다. 수술 당일에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던 모양이다. 보수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깨시는 건 어렵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동생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큰아들만 어리석게 희망을 품고 있었구나.

    어머니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다. 다 쓰고 보니 어렵게 사셨다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연들 모르고 그냥 아무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잊혀지기에는 억울하다. 비참한 환경에서 평범한 아들 둘 부족한 것 모르게 키워낸 것만으로도 훌륭한 삶이시다. 그리고 아들 둘 기른 것만이 어머니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많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해서 우리 어머니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 이태원 할로윈 사고

    일요일 오전 늦잠 자는 중 걸려 온 엄니 전화를 받지 못했다. 카톡방에 보니 동생이 ‘이태원 사고 때문에 전화하셨었어요?’ 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마 동생도 전화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이태원 무슨 사고?’라며 좀 뒤져 보니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응? 압사? 길거리에서??
    할로윈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를 뿐더러 인파가 붐비는 곳을 싫어하니 할로윈이라는 날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다는 것을 상상 못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아이들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 할로윈 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양 문물에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느꼈었다.
    첫째로 든 생각은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젊든 늙든 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태원이라는 동네였어야 하는가, 그렇게 좁은 공간에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모르겠다. 짐작하기 어렵지만, 짐작해 보자면, 즐기려고 했다기 보다 집단에 소속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순전히 사람이 많은 것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일까? 여튼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구로 인해서 젊은 목숨이 사라졌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런데 더 놀랍다고 느낀 것은 누구 하나 모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측이 따로 없는데도 그 많은 인파가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
    여기서 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책임이 있네 없네를 가지고 말이 많은데, 사실 이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가 따로 없는 자발적인 행사에 (실제로 어떻게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므로 그것이 행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를 것 같다. 그렇지만, 미리 통제를 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선택적인 공감에 대한 거부감이다. 분명히 안타까운 죽음들이지만, 이 사고는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고 뉴스로서 잘 팔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근거 없이 장례비, 위로금 등을 준다고 하고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과도하게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자원은 언제나 한정적이므로 선정적인 이슈에 과하게 자원이 몰린다면 어디에선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 150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는 매년 1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그 중 상당 수가 노인 인구이다. 물론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방 조치는 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정적인 이슈에 대한 과한 반응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던 중 문득 같은 과 한 학번 후배의 본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졸업 후에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상가집, 결혼식 등에서 스쳐간 적만 있었던 후배였지만, 재학 중에는 더러 어울리기도 했던 사이였다.
    남의 이야기였던 이태원 사고가 갑자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허망하게 가다니.
    그가 개인적으로 느꼈을 고통과 회한이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상상하기는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더 많이 안아 주지 못한 아이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고통,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오를 것 같다.
    차갑게 원칙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효용과 올바른 정치적인 태도를 따지던 차원에서 한 개인의 못 다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두 차원의 간극은 큰 것도 같고, 작은 것도 같다. 인간이므로 둘 다 필요한 차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차갑지만, 선택적으로 공감한 것 또한 큰 의미로 비인간적이다.
    나는 분명 이것도 곧 잊고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윤미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언제나 죽음을 기억하고 살면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한 가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